2박 3일동안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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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답사후기를 소개합니다. 이야기가 많아서 두 번에 걸쳐서 소개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광주 양림동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광주읍성이 자리하고 있는 성내면에 땅을 매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부지를 마련하는 데 실패하고 대토를 물색한다. 무등산을 마주하고 있는 양림동(陽林洞) 동쪽언덕에 자리를 잡는다. 광주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풍장(風葬)하던 무덤자리다.
풍장은 시신을 나무 위에 매달아두는 장례를 일컫는다. 시신이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뼈를 수습해서 묻는 방식이다. 시신을 나무에 걸어두는 풍장이라 해서, 수장(樹葬)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행했던 장례방식이다. 광주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죽으면 양림동 언덕 숲속 나무에 걸어서 풍장했다. 생활이 어려워서 풍장을 한 것이 아니라 으레 그렇게 했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풍장하던 자리에 광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건설한다. 양림교회 ·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ㆍ숭일학교 · 수피아여학교ㆍ오웬기념각 등을 차례로 만든다.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덕 맨 위에 묘역을 조성한다. 그 옛날 양림동 언덕 위에 풍장했던 광주 어린아이처럼 선교사들도 양림동 언덕 위에 있다.
양림동 사람들
광주 양림동 청아빌라 벽에 <최후의 만찬, 양림>이라는 작품이 있다.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열두 제자의 면면을 보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최후의 만찬, 양림>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서양 사람들과 다섯 명의 한국 사람들을 보면 양림동을 알 수 있다.
▲ <최후의 만찬, 양림>
맨 왼쪽에 있는 스와인하트(Swinehart)는 건축기사다. 목포, 광주, 순천 등지에 최초로 서양식 건물을 지은 사람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 다형 김현승은 양림교회 제5대 당회장 김창국 목사의 아들이다. 평양에서 태어났으나 양림동에서 자라면서 주옥같은 시어(詩語)로 양림동과 그 시대를 노래했다. 세 번째가 로버트 윌슨, 여섯 번째 쉐핑, 일곱 번째 클레멘트 오웬, 여덟 번째 포사이드, 열 번째 코딩튼 등은 의료선교사다. 오웬이 시작한 광주제중원을 광주기독병원으로 키운 사람들이다. 쉐핑은 한센병자 치료에 헌신한 간호사다. 우리나라에 간호사협회를 처음으로 조직하고,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성경학교를 세워서 여성교육에 앞장섰다.
네 번째 조아라 장로는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운동의 대모다. 열한 번째 정율성은 의열단원으로서 무장독립운동에 참가한 투사다. 중국 본토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제에 맞서 싸운다. 그 여세를 몰아 조국광복을 이루고자 했던 중국 3대 음악가 중 한 사람이다. 마지막 정추는 차이코프스키 직계 4대 제자 중 한 명이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졸업작품 <조국교향곡>으로 심사위원 전원 만점을 받는다. 유례가 없는 만점이다.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을 작곡하여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고발한다. 검은 머리의 차이코프스키라는 별명을 얻는다. 정추의 동생 정근은 KBS 어린이합창단 지휘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둥글게 둥글게〉,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등을 남긴다.
오웬, 포사이드, 쉐핑, 윌슨, 코딩튼 등은 근대서양의학을 양림동에 이식시킴으로써 오늘날 한국 근대의학의 초석을 다진다. 김현승의 시어(詩語)와 선교사들이 번역한 순한글 성서를 통해 한글을 재발견한다. 스와인하트의 근대건축은 지금도 양림동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가장 근대적이고 가장 양림동스러운 사람은 유진벨과 오방 최흥종이다.
조선 남도 개척자: 유진 벨
▲ 유진벨선교기념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서울에 들어온다. 그로부터 7년 뒤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는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열린 미국 해외선교 신학생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선교사 한국 파송을 요청한다. 189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선교사 7인을 한국에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파송한다.
7인의 선발대에 이어서 1895년 한국에 도착한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 부부는 1897년 나주로 내려간다. 첫 선교지인 나주에서는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혀 선교에 실패한다. 1897년 목포 개항에 때를 맞춰 유달산 북쪽 기슭 양동에서 목포선교부 개척에 착수한다. 유진벨 선교사는 양동교회, 의사 오웬 선교사는 프렌치기념병원, 스트래퍼 선교사는 정명여학교 등을 차례로 개설한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04년 성탄절을 기해 양림산 남동쪽 기슭에 광주선교부를 개척한다. 유진 벨은 오웬, 놀란, 그레이엄 등 선교사와 함께 북문안교회, 광주기독병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등을 시작한다. 유진 벨 선교사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루지 않았다. 그러나 유진 벨 없이 오늘날의 양림동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25년 57세를 일기로 양림동에서 소천한다.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한다.
1912년 조지아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윌리엄 린톤(WilliamLinton, 1891~1960)은 군산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첫 둥지를 튼다. 1922년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과 결혼한다. 1937년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에 맞서 전주 신흥학교를 폐쇄한다. 1940년 결국 강제로 추방당한다. 광복과 함께 1946년 전주로 돌아온 윌리엄 린톤은 제일 먼저 신흥학교를 복교한다. 기전여학교 신사 터에 공중화장실을 짓는다. 신사 위에 똥통을 얹어서 보복한 것이다. 1956년에는 숙원이었던 기독대학 한남대학교를 대전에 설립한다. 1960년 소천한다.
출처: 『골목길 역사산책, 개항도시편』, 최석호, 2018
한센인과 결핵 환자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 오방 최흥종기념관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는 1880년 광주군 성내면 불로동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방황하기 시작한다. 무쇠주먹 최망치라는 별명을 얻는다. 패거리와 함께 장터를 전전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 술을 마신다.
오방이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04년 성탄절에 유진벨 목사의 사택에서 진행된 광주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다.
한센인에 대한 관심은 의료 선교를 하던 선교사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1873~1918)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유진벨이 세운 영광 염산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할 때다.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포사이트가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매던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을 치료하기 위해 오는 길이었다. 유진벨은 오방에게 포사이트의 안내를 부탁했다. 포사이트는 나주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부둣가에서 피고름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추위에 떨고 있는 여성 한센인을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털외투를 벗어 입히고는 말에 태워 광주로 들어왔다.
안타깝게 오웬도 한센인도 죽었지만 외국인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꺼리던 한센인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오방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1909년 제중병원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는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하고 나환자들을 위한 '봉선리교회'도 세웠다. 하지만 봉선리 주민들은 '채소밭에 나병균이 붙어 있다'는 소문에 거세게 항의했고, 결국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바닷가에 15만 평 땅을 구입해 나환자 요양원을 건설했다. '애양원'의 시작이었다.
오방은 80세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글(호남일보, 1960.3.18.)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면 언제나 포사이트가 존재했으며, 포사이트의 선행이 뇌리에 남아 삶의 좌표가 되었고, 평생 인류애를 실천했다'고 회고했다.
오방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목사 자격을 얻은 뒤 1920년 광주 YMCA를 창설했다. 1922~26년에는 시베리아로 선교활동을 다녀왔다. 이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게 세례를 베푼다.
1932년 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했고 1933년엔 500여 명의 나환자들을 이끌고 광주에서 경성의 조선총독부까지 '구라(救癩)행진'을 벌여 일본 총독으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아냈다.
하지만 1935년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절망한 오방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거세 수술을 받고 내려와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돌린 뒤 세상을 등지고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에 심취했다.
▲ 1935년 기독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절망한 최흥종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거세 수술을 받고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돌린 뒤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정했다. ⓒ 최흥종기념관
무등산 자락에 마련한 오방정(五放亭, 현 춘설헌)에서 의재 허백련과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해 삼애학원을 설립했다. 또 한국나병예방협회(1948), 한센인 자립을 위한 가축 사육시설 호혜원(1956), 결핵 환자 요양소인 송등원(1958) 등을 줄줄이 설립했다. 말년에는 결핵 환자를 돌보는 일에 매진했다.
최흥종의 호 오방(五放)은 '가사로부터, 사회로부터, 정치로부터, 경제로부터, 종교로부터' 등 다섯 가지 해방을 뜻한다고 한다. 그는 호에 담은 신조를 평생 지키며 살았고 죽음이 임박해오자 90여 일의 금식 끝에 1966년 5월 14일 86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묘비명은 '영원한 자유인'이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조아라, 광주의 어머니
▲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기념관
소심당(素心堂) 조아라(曺亞羅, 1912~2003)는 1912년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선친은 기독교 장로교회와 사설학교를 세울 정도로 의식이 깨어 있어 딸을 시집 보내는 대신 광주 최초의 여성 학교인 수피아여학교에 진학시켰다. 조아라는 그곳에서 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김필례 선생을 만났다.
조아라는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이 운영하는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 교사로 활동한다. 쉐핑은 간호사 출신 독일 선교사로 미국 남장로교를 통해 1912년 32세의 나이로 한국에 파송되어 1923년 조선간호협회(현 대한간호협회) 결성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에 선임되어 11년 동안 일했다. 1934년 54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전주, 군산, 광주 그리고 제주도와 추자도 등 오지에서의 선교와 미혼모, 공창에서 일하는 윤락여성, 전쟁고아, 한센인 등 조선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힘썼다. 쉐핑과의 만남은 조아라가 고아, 이혼녀, 윤락여성 등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일학교는 1941년 9월 신사참배단 사건으로 폐교당했다.
▲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은 간호사 출신 독일 선교사로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눈을 감기 전까지 전주, 군산, 광주 그리고 제주도와 추자도 등 오지에서의 선교와 미혼모, 공창에서 일하는 윤락여성, 전쟁고아, 한센인 등을 보살피는 데 힘썼다. 죽고 나서 남긴 유물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었다. ⓒ 최흥종기념관
조아라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비밀결사조직 '백청단(백의민족의 청년들) 주모자로 지목되면서 교사직을 잃었다. 조아라는 1937년 신사참배 반대와 관련하여 유치장에 갇히고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해 미국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이후 조아라가 여성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김필례의 영향이 컸다. 1947년 김필례가 수피아여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모교인 정신여고로 떠나면서 조아라가 2대 총무로 부임한다. 그녀는 수피아여학교의 재건에도 주력해 1945년 12월 다시 문 열게 했다. 1946년에는 수피아여학교 정식 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학교 운영이 어렵자 일신방직 공장에서 고무신과 수건 등을 가져와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아 재정 마련에 힘쓰기도 했다.
한국전쟁 후 고아 소녀들이 YWCA로 모여들자 1954년에는 성빈여사에서 80명을 돌보며 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호남여숙을 개설했다. 1962년에는 계명여사를 건립해 여성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윤락여성을 계도하여 일하는 여성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그녀에게는 '광주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1973년부터는YMCA 회장으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인생 후반기를 민주화운동에 쏟아부었다. 그 계기는 광주민중항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 시민수습위원으로 참여했다. 수습위원 업무로 인해 1980년 5월 29일 체포되어 6개월 옥살이를 한 후 형 집행정지로 나왔다. 이후 광주항쟁 유가족과 구속자를 돕는 일에 나섰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5.18 관련자를 돕는 일은 목숨을 거는 운동이었다. 양심수를 위한 행사에도 적극 나섰다. 2003년 91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고든 에비슨
▲ 에비슨기념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조선 쌀 수탈이다. 토지조사사업을 벌여서 소유가 불분명한 토지를 빼앗아서 일본인 지주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긴다. 1920년대에는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하면서 조선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몰락 소작농은 급기야 도시빈민자로 전전한다. YMCA 총무 신흥우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YMCA 국제부 총무 존 모트(John Mott)를 만난다. 농업기술 전문 간사를 한국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다. 일제의 농업수탈에 맞서기 위해서다.
드디어 농업기술 간사 일곱 명이 한국에 들어온다. 1924년 고든 에비슨(Gordon Wilberforce Avison, 1891~1967)도 가족과 함께 펜실베이니아 주 윌리암스 항구를 출발하여 한국에 도착한다.
1933년 자신의 사택이 있었던 양림동 수피아여학교 맞은편 일대에 농업실습학교를 설립한다. 1936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안식년 휴가 중 통조림 제조기술을 배워서 농산물을 통조림에 저장하고 판매하는 일도 추진한다. 에비슨 부인은 두유를 보급하여 영유아사망률을 크게 줄인다. 생산량이 적어서 우유를 먹일 수 없었다. 대신 생산량이 많았던 콩으로 두유를 만들어 보급한다. 1939년 일제는 고든 에비슨 일가를 강제 출국시킨다. 광복 이후 다시 한국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들어오지 못한다. 1967년 소천한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고든의 아버지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YMCA 파송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훗날 아버지 올리버 에비슨은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두 학교의 학장이 된다. 연세대학교로 통합할 수 있는 밑거름을 다지고 1935년 한국을 떠난다. 전도유망한 의대교수 에비슨은 33세 젊은이로 한국에 왔다가 76세 할아버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올리버 에비슨의 넷째 아들 더글라스 에비슨은 아버지를 이어서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서 세브란스 병원 부원장이 된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된다. 1952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별세한다. 유언에 따라 더글라스 에비슨을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한다. 1985년 부인 캐들린 로슨(Katheleen Isabel Rawson)이 별세한다. 유언에 따라 남편 곁에 합장한다.
출처: 『골목길 역사산책, 개항도시편』, 최석호, 2018
한국 YWCA 설립자, 김필례
"여학도 유학, 연동교회당 여학도 졸업생 김필례씨가 학문을 일층 수업할 차로 작일 삼오 팔시경에 경부철도 제1번 열차를 탑승하고 일본으로 도거하였다더라."
황성신문(1908.9.5.)에 실린 기사다. 19세기 말 부산ㆍ원산ㆍ인천항 개항과 개화의 바람으로 우리나라에도 신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이 단신으로 동경 유학을 감행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 주인공은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YWCA 설립에 참여했고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장을 지낸 광주 최초의 신여성 김필례다.
김필례는 1891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장연군에는 서상륜ㆍ서경조 형제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1884년 설립)가 있었다. 1893년 12월 제물포에 도착한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는 초가집이었던 소래교회를 기와집으로 신축하고 4년제 보통학교인 해서제일학교를 설립했다. 김필례는 이곳에서 김명선 · 노천명ㆍ양주동 등과 같이 교육을 받았다.
당시의 여성이 신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녀 곁에는 응원군인 오빠 김필순이 있었다. 김필순은 우리나라 최초로 면허를 받은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 사이였다. 또 큰언니 김구례의 남편 서병호(신한청년당 조직, 대한적십자회 창설), 작은언니 김순애(신한청년당 이사,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이사장)의 남편 김규식(파리강화회의 민족대표,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과 함께 조카 김함라와 김마리아(대한애국부인회장)는 수피아여학교 교사였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여성들이다. 오빠, 언니, 형부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한 명문가였다.
김필례는 정신여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 1908년 현해탄을 건너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했다. 1915년 4월 3일 김정화 · 나혜석 · 김정애 등 10명과 함께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조국이 망국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그녀는 1916년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해 정신여학교 교단에 섰다. 1918년에는 최흥종 목사의 동생이자 의사인 최영욱과 결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같이 유학했던 조카 김마리아가 찾아왔다. 김필례가 교단에 서기 위해 귀국하자 뒤를 이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장을 맡았던 김마리아가 몰래 품에 안고 온 것은 2·8 독립선언서였다. 김필례는 남편이 운영하던 서석의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격문을 만들었다.
광주로 내려온 김필례는 낮에는 수피아여학교 교사, 밤에는 흥학관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광주 지역 여성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0년 오웬기념관에서 광주 최초의 피아노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그 무렵 광주에서 활동한 여성단체는 광주기독교부인전도회, 광주부인회, 광주청년회 서북여자야학 정도였다. 그녀는 조선의 독립은 여성의 계몽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1922년에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YWCA 창립에 참여하였다. 김필례는 YWCA 창립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조직 결성의 필요성을 강의했다. 임자혜ㆍ김함라(남궁혁 목사 부인, 김마리아 언니) · 양웅도와 함께 광주 YWCA 조직에도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은 그녀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거부를 선동한다며 3년 동안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했다. 1924년에는 남편이 유학 중인 미국으로 건너가 여성 교육의 명문인 아그네스 스콧 대학,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27년 귀국해 신간회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했다.
1927년부터 수피아여학교가 문을 닫은 1937년까지는 학교 교감으로 재직했다. 1930년대 일제는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는 강제 신사참배 정책을 추진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 무렵 조선총독부의 참배 압력 강도가 강해졌고 이듬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하지만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교 문을 닫은 뒤 자진 폐교했다. 이 일로 김필례는 옥고를 치러야 했다. 수피아여학교는 해방 후 1945년 12월 5일 다시 문을 열었고 그녀는 6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남편 최영욱은 초대 전남도지사로 선임되었고 그녀는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참여했다. 건국부녀동맹 고문도 역임했다.
1947년 광주 생활을 정리하고 모교인 정신여교 교장으로 취임한 그녀는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과 정신학원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1983년 93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정율성: 대륙을 지켜 조국에 광복을
남광주역 2번 출구를 빠져나와서 광주천 건너 고가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동상이 하나 있다. 중국 3대 음악가 정율성 흉상이다. 왜 양림동에 중국 음악가 흉상이 있을까?
▲ 2009년 7월 15일 양림동에 정율성 흉상을 설치했다.
1945년 9월 3일 중화민국은 일본 항복문서를 접수한다. 중국은 이날을 전승절로 삼고 있다. 2015년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어서 9월 3일 전승절 행사를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른다. 하이라이트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열병식이다. 시진핑 주석이 탄 무개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첫 음악 <중국 인민해방군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정율성이 작곡한 곡이다. 정율성은 중국 사람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다. 양림동 사람이다.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은 양림동에서 나고 자란다. 화순 능주초등학교와 양림동 숭일학교 그리고 전주신흥학교 등에서 공부한다.
독립운동과 기독교신앙, 정율성이 태어난 친가와 외가 두 집안 공통점이다. 어머니 최영온은 최흥종 목사 누나다. 최흥종 목사는 아버지 정해업의 처남이고 정율성은 최흥종 목사 조카다. 최흥종 목사 동생 최영욱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광주기독병원 원장과 전라남도 초대지사를 역임한다. 작은 외삼촌 최영욱과 맏형 정효룡은 광주학생 YMCA를 만든다.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정해업(鄭海業, 1873~1931)은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임시정부를 찾는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부 갈등을 목도하고 귀국한다.
첫째 형 정효룡(鄭孝龍,1894~1934)은 최흥종 목사의 동생 최영욱과 같이 유진벨 선교사가 설립한 숭일학교를 다닌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전국 노동자 조직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된다. 출옥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한다. 1927년 일경에게 또 다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지 1년 만인 1934년 유명을 달리한다. 심한 고문을 당한 듯하다.
둘째 형 정충룡(鄭忠龍, 1901~1927)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다. 일제가 내린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간다.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 제24군 중좌로 북벌전쟁에 참가한다. 1927년 북벌 중 뇌막염으로 사망한다.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 1912~1980)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졸업생이다. 의열단에서 중국 남경에 세운 독립군양성 학교다. 졸업과 동시에 특명을 받는다. 같이 졸업한 민족시인 이육사는 경상도로, 정은은 전라도로 독립군을 모집하기 위해 잠입한다.
1933년 정율성은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간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934년 졸업한 정율성은 남경 고루(鼓樓)전화국에 침투한다. 상해와 남경을 오가는 일본인 전화를 도청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크라노아(Krenowa) 교수에게 성악 레슨을 받는다. 크라노아 교수에게 음악을 배우면서 이름을 정부은(鄭富恩)에서 정율성(鄭律成)으로 바꾼다. '아름다운 선율(律)로 인민의 목소리를 대변(成)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정율성은 조선의 독립과 중국의 항일전 승리는 하나라고 생각했던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 혁명가들과 닮았다.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우선 일제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마지막 보루 중국 대륙을 지키려 했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노구교사건(蘆溝橋사건: 일본군의 공작으로 벌어짐)을 일으키자 정율성은 중국공산당 중심지 연안(延安)으로 향한다. 중국공산당은 연안에 섬북공학ㆍ항일군정대학ㆍ노신예술학원 · 중국여자대학 등을 설립한다. 1938년 섬북공학을 졸업한 정율성은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한다. 어느 날 해 질 녘 언덕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항일군정대학생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고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한다. 중국의 아리랑이라 불린다. 〈연안송〉으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정율성은 1938년 8월 15일 노신예술학원 졸업과 동시에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항일군정대학 합창단을 지휘한다. 1939년 5월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2차 국공합작을 감행하면서 국민혁명군을 창설한다. 공산당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재편된다. 정율성은 훗날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지정된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다. 1939년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 성악 선생으로 부임한다.
1942년 2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학교 개학식에서 마오쩌뚱은 삼풍정화운동(三風淨化運動)을 선언한다. 그 일환으로 연안문예좌담회를 1942년 5월 한 달 동안 양가령(楊家領)에서 개최한다. 마오쩌뚱이 개최한 좌담회에 참석한 100여명 중 정율성은 유일한 조선인이다. 11월에는 팔로군 총사령부 태항산에서 개교한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을 맡는다. 1945년 연안으로 옮겨서 조선군정학교로 개편하고 교무과장으로 일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평양을 택한다. 1945년 9월 3일 연안을 출발한 조선의용군은 무장해제 당한 채 3개월 만인 11월 말 압록강을 건넌다. 북에서는 김일성의 지원을 받는 소련파가 요직을 독차지하고 국내파와 연안파의 독립투쟁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1947년과 1948년 두 해 동안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정율성은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조선 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다.
▲ 2023년 10월 1일 보수단체에 의해 정율성 흉상이 강제 철거되었다
출처: 『골목길 역사산책, 개항도시편』, 최석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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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광주를 두루 둘러보셨너요!
답사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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