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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되.다. ┃ ㉦|.㉧L.되.다 스크랩 문정희 시 모음 2
장기중선생님 추천 0 조회 41 18.07.16 15: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 졸업.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외 다수.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 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나는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위에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출처: '나는 문이다' 뿔(2007)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새떼',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 꽃 머리에 꽂고', '아우내의 새', '나는 문이다'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함.

 

* "응"은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응?"하고 물으면 "응!"하고 대답하지요. 시인은 그것을 "눈부신 언어의 체위"라고 부르는군요. 하나의 손바닥에 또 하나의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말. 손바닥끼리 마주쳐 소리가 나듯 두 마음이 오롯하게 합쳐지는 말. 굳이 배우지 않아도 모태로 부터 익혀 나온 말.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도 심장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말. 가장 간결하면서도 한 없는 긍정과 사랑을 꽃피우는 말. 이대답 하나로 우리는 나란히 산책을 나갈 수도 있고,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해와 달이 될 수도 있지요. "응"이라는 문자 속에 마주 보고 있을 두 개의 이응처럼.

-감상: 나희덕-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감상>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이 어이할꼬!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은 삶이라는 인연을 통하여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존재하는 것. 그러나 이 시에서는 완성이라는 자체가 무의미하고 부질없구나. 그저 자연회귀 본능만이 꿈틀거릴 뿐이로고. 깊고 성스럽게 인연을 맺었던 인각사 부처도 다시 한송이 돌로 되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집을 버려라. 습관을 버려라. 어제를 버려라. 오늘을 버려라. 내일을 버려라. 나를 버려라. 다 버리고 나면 남는 게 뭐가 있나?  있지! - 그것은 공(空)! (강수진)

 

 

감옥문을 열며


그가 다녀온 감옥은 어떤 곳일까

내가 알기로는

감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인데

그는 그곳을 다녀온 죄인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면 재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젊잖게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를 보면 가끔 감옥은 그리운 곳이 될 때가 있다

그는 거기서 살아 있었고

밖에 있는 우리들이 그물에 갇혀

죽은 듯이 입 다물고 있었으니까


우리들이 잘 길든

고기떼들이 되어 있는 동안

그는 키가 훌쩍 커지고

눈빛 맑은 수말이 되어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감옥을 지니고 있다는데

오늘은 내 감옥 문부터 활짝 열어 버릴까 보다

위험한 나를 놓아 줄까 보다



 

가을밤에 시인들은


가을밤에 시인들은

깊은 잠을 자도 좋다


머리맡에 

하얀 원고지를

기도처럼 펼쳐 놓고

깊이 잠들면


밤새 

누군가 조용히 찾아와

낙엽 같은

시구 하나

떨구어 놓고 가리니



 

가시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갈대숲을 지나며


처녀 시절이여, 안녕


나에겐 증거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수염자리 의젓한 신랑의 팔을 끼고 서 있는

한 장의 결혼사진도 있지만


이상도 하지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네

유부녀는 더구나 아니였네


방목해서 키운 튼튼한 아이들

넉넉한 평수에 편리한 부엌의 안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처녀였다네


집안에서 잠시 아내이다가

현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다시 처녀가 되었지


사람들은 모르지

세상엔 결혼한 여자가 없다는 것을

모든 여자가 독신이라는 것을


세상이 가지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넓이와 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웨딩드레스 입고 사진 찍은 여자를

결혼한 여자라 묶어 버릴 뿐이지



 

갈대의 노래


바람밭이로다


죽은 여자의 흰 머리칼

흐느끼는 소리


은비늘 쏟아지는 거울을 들고

어디선가

한 무리의 추운 신발들이 가고 있는데


미친 바람을 끌어올리며

시리운 노래가 나를 흔드네


이렇게 눈물 나도록 간절한 것은

생각할 수 있다는

아픈 은혜로움에서가 아니라


햇빛이 화살로 꽂혀오는

등허리의 무력과

권태에서가 아니라


그대 이마에 다룽이는

주름살의 서러운

인기척에서가 아니라


비둘기 구구 우는 소리 같은

내 가슴의

공규(空閨)때문에서가 아니라


바람밭이로다

 

 

 


햇살 뽑아 올리는 산그늘에 앉아

여자들은 날개 달린

개 한 마리씩을 키운다


불의 끝을 헤매는

바람을 쓰고

아무데나 쉬어가는 저 하늘 아래


밤이면 수천이 개떼들이

물구나무 서서

달아나는 사랑을 짖어댄다


문알 잠가 버릴까 보다

가장 완전한 도둑으로

깨어진 식기를 핥는

철없는 유희


번뜩이는 눈에서

누우런 봄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


이슬 속으로 들어가다

햇살이 이마를 깨듯

드디어 산그늘의

칼 쓰러지는 소리


이 세상은

그러나 날지 못하는

네가 살다 가기 편한 곳이다



 

고독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 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길을 떠나며


너희들 멀어져라

등 돌려라

고뇌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허허로운 불모의 땅으로

홀로 가리라


유리 조각 날카로운 모래의 나라

십 년 전인가 십오 년 전인가

단 한 번 비가 쏟아졌다는

그 꽝꽝한 땅에 가서

배가 고플 때마다 목이 탈 때마다

모래를 파먹으며

천 년 수심을 찾아가리라


눈뜰 수도 없을 만큼 캄캄한

절벽을 맨손으로 두드려

대지의 숨결소리를 들어 보리라


사막을 뚫고 나오는

푸른 별 하나를 만날 때까지

그 별이 내 가슴에 숨결로

살아오를 때까지


너희들 가까이 오지 마라

행여 내게 한 잔 물을 주지 마라


철저히 홀로가 아니면

이곳엔 쥐똥나무 한 그루 살지 못하리니



 

남한강을 바라보며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밤마다 부뚜막에 찬물 떠놓고 빌던

그 조왕신이 살고 있나 보다


사발마다 가득히

한 세월의 피와

한 세월의 기도를

그 빛나는 말들로 채워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그 물들이 모여


그대 안에

번쩍이는 비늘을 단

용과도 같은

거대한 것으로 살아 숨쉬고 있나 보다


그래서 그대 안에

우리의 조급한 욕심과

시커먼 거짓과

저 서구의 쇳물이 서릴 때는

어린 물고기들이 흰 배로

까무러치고

심청이의 옷자락과도 같은

수초들이 썩어내려

나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대를 바라보며

먹탕물 같이 진한 한숨을 뱉었나보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

가혹한 짐승의 숨소리를 들려줄 수가 없듯이

번드르한 비단 홑껍데기 이불을

씌워 줄 수가 없듯이


참으로 물 밑바닥이 말갛게 내비치는 하늘과

그 수심만을 남기고 싶었듯이

모든 아닌 것들을 아니라고

속시원히 말하고

너의 힘찬 물살에

자유로이 헹구어


번쩍이는 비늘을 단

용과도 같은

거대한 것으로 살아 숨쉬는

말간 천년의 내면을 보고 싶었다

남한강이여



 

눈물


네가 울고 있다


오랫동안 걸어 둔 빗장

스르르 열고

너는 조용히 하늘을 보고 있다


네 작은 몸 속 어디에 숨어 있던

이 많은 강물

끝도 없이 흐르는 도끼 소리에

산의 어깨도 무너지고 있다



보라색 여름 바지 - 문정희

  여름 다 지나고 선선한 초가을 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보라색 여름 바지 하나 사 들고 돌아오며
  벌써 바람처럼 숭숭 차가운 후회가
  뼛속으로 스미어 옴을 느낀다

  왜 나는 모든 것을 저지른 후에야 아는가
  만져 보고 난 후에야 뜨겁다고 깨닫는가
  늘 화상을 입는가
  사람들이 이미 겨울을 준비할 때
  여름의 잔해에 가슴을 태우고
  사랑을 떠나 보낸 후에야 사랑에 빠져
  한 생애를 가슴 치고 사는가

  내 키보다 턱없이 긴 바지단을 줄이며
  내 어리석음을 가위로 잘라내며
  애써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어 본다

  누구나 정해진 궤도를 가는 건 아니지
  돌발과 우연이 인생이기도 해
  그러나 어느 가을날 하루가
  더운 사랑으로 다시 뒤집힐 수 있을까
  이 보라색 바지를 위해

  무릎 아래까지 흰 별들이 총총 나 있는
  보라색 여름바지를 입고 서서
  홀로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다
  숭숭 기어드는 차가운 바람 소리를 듣는다 

 

 

순 간 -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 오래 그리워했다


 

 

먼 길 -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발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신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 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새우와의 만남 - 문정희



손에 쥔 칼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선뜻 그에게 칼을 댈 수가 없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 속에

그는 분홍 반달로 누워 있었다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그대가

하늘 한가운데 3만 5천 피트

짙푸른 은하수 안에서 만난 것은

오늘이 칠월 칠석이어서가 아니다

그대의 그리움과 나의 간절함이

사람의 눈에는 잘 안 보이는

구름 같은 인연의 실들을 풀고 풀어서

드디어 이렇게 만난 것이다

나는 끝내 칼과 삼지창을 대지 못하고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부드럽고 뜨거운

나의 입술을 그대의 알몸에 갖다 대었다

내 사랑 견우여

 

 

 

화살 노래 - 문정희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조금 울게 된다

너는 이제 물보다도 불보다도

기실은 돈보다도 더 많이

말(言)을 사용하여 살게 되리라

그러므로 말을 많이 모아야 한다

그리고 잘 쓰고 가야 한다


하지만 말은 칼에 비유하지 않고

화살에 비유한단다

한 번 쓰고 나면 어딘가에 박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무성한 화살 숲 속에

살아 있는 생명, 심장 한가운데 박혀

오소소 퍼져가는 독 혹은 불꽃

새 경전(經傳)의 첫 장처럼

새 말로 시작하는 사랑을 보면

목젖을 떨며 조금 울게 된다


너는 이제 물보다도 불보다도

돈보다도 더 많이

말을 사용하다 가리라

말이 제일 큰 재산이니까

이 말을 할 때면 정말

조금 울게 된다

 

 

 

가을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성공시대 -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몰고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알몸 노래  -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텐데.


 

 

러브 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추석달을 보며 - 문정희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달은
백동전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제비를 기다리며 / 문정희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밤 (栗) 이야기 / 문정희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방에 대고 자랑하셨다

 

 

 

석남꽃 / 문정희

 

 

새벽 두 시인데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나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요
저녁 때 사거리에서
청담사거리를 묻는 노인에게
그만 봉은사거리를 가리키고 말았어요
그 노인은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요

 

청담사거리를 찾다 지쳐
수천 마리 귀뚜라미들을 데리고 쓰러져 있을까요
외줄에서 떨어진 줄광대처럼
산발한 어둠 속에 떨고 있을까요
정육점의 불빛처럼 충혈된 밤
사방에서 컹컹 내지르는 짐승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람 날리는 자동차들 속에
털썩 무릎을 끓고 앉아
성직자처럼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요

 

죽어서도 석남꽃 머리에 꽂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온 신라의 남자처럼
벌써 죽어 아름다운 관에 누워 있을까요

 

내 불면의 가지 끝에 검은 눈썹달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고 있어요

 

세상에는 왜 이리 길을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여보, 나침반과 지도는 모두 어디에 있지요

 

        『현대시』, 8월호

 

 

  

 

 

물 만드는 여자 /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몸이 큰 여자 / 문정희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 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P. 에스테스가 한 말.

 

 

 

오빠 / 문정희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조등이 있는 풍경 / 문정희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탯줄 / 문정희

 

 

대학병원 분만실 의자는 Y자였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새끼 밴 짐승으로
두 다리 벌리고 하늘 향해 누웠다

 

성스러운 순간이라 말하지 말라
하늘이 뒤집히는
날카로운 공포
이빨 사이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인두로 생살 찢기웠다

 

드디어
내 속에서 내가 분리되었다
생명과 생명이 되었다

두 생명 사이에는
지상의 가위로는 자를 수 없는
긴 탯줄이 이어져 있었다

 

가장 처음이자
가장 오래인 땅 위의 끈
이보다 확실하고 질긴 이름을
사람의 일로는 더 만들지 못하리라

 

얼마 후
환속한 성자처럼
피 냄새 나는 분만실을
한 어미와 새끼가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문학사상 (2006년 3월호)

 

 

 

나의 아내 / 문정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미당의 시

**매릴린 옐름, <아내>

 

-2006년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

 

 

 

손의 고백 /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시계와 시계 사이 / 문정희(文貞姬)

 

 

이 아침 고장 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고장 난 시계가 이를 닦고
고장 난 시계가 밥을 먹고
고장 난 시계가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어딘가 맞는 시계가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계를 하나 갖고 싶다
나는 CNN을 본다. CNN은 당황하여
고장 난 시계가 있는 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꼬리를 잘 흔들고 손을 싹싹 비비고 눈치를 살핀다
고장 난 시계에다 총구를 갖다 댄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대화라든가 외교라는 말로 보도한다
결국 모두가 제 힘으로 살다 가는 것
세상의 모든 시계를 똑같게 고칠 수는 없나 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어차피 시차가 있다
고장 난 시계로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서서 시계탑을 본다
나의 시계가 맞는지 교차로의 시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시계는 나이가 없다
제각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파 뿌리 / 문정희

 

 

크고 뭉툭한 부엌칼로 파 뿌리를 잘라낸다
마지막까지 흙을 움켜쥐고 있는
파 뿌리를 잘라내며 속으로 소리지른다
 

결혼은 왜 시를 닮으면 안되는가
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가
뿌리 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깃털이란
그토록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정주(定住)만을 예찬해야 하는가
가축처럼 번식과 무리를 필요로 하고
영원히 동반이어야 하는가
검은 머리는 언제 파뿌리가 되는가
 

나 오늘 파 뿌리를 잘라낸다
부엌칼 중 제일 크고 뭉툭한 칼로
남은 파를 술술 썰어
펄펄 끓는 찌개에 쓸어 넣는다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2004년 민음사

 

 

 

아침 이슬 / 문정희

 


지난밤 무슨 생각을 굴리고 굴려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영롱한 한 방울의 은유로 태어났을까
고뇌였을까, 별빛 같은
슬픔의 살이며 뼈인 생명 한 알
누가 이리도 둥근 것을 낳았을까
고통은 원래 부드럽고 차가운 것은 아닐까
사랑은
짧은 절정, 숨소리 하나 스미지 못하는
순간의 보석
밤새 홀로 걸어와
무슨 말을 전하려고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맑고 위태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가

 

―《서시》200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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