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외교사신
초원의 봄꽃들이 제 역할을 마감하고 하나, 둘 사그라질 때쯤, 북 흉노의 호도 선우는 한나라로 사신을 보내었다.
후한에서는 ‘한 달 후에 사신을 보내 답을 하겠다’라고 하였다.
달포 후,
결과는 예상대로 ‘화친불가 和親不可’로 통지가 왔다.
선우가 후한의 사신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사신은 ‘그 이유까지는 모른다’라고 말한다.
선우의 막사에서 나와, 지난번에 후한의 조정 朝庭에 사신으로 갔던 탁발규가
사신에게 개인적인 사담 私談처럼 넌지시 재차 물어보았다.
그러자 안면이 있는 탁발규를 보고 사신은
“남 흉노도 사신을 보내왔는데, 설표 雪豹 가죽을 비롯하여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비취나
온갖 귀한 선물을 몇 수레나 가져왔는데, 당신들은 무얼 했냐?”고 오히려 따지듯이 되묻는다.
사실, 사신으로 간 탁발규와 후막진 천부장은 선물로 가져간 게 대월지에서 가져왔다는
한혈마 汗血馬 세필이 전부였다.
국가 간의 외교 절차인데, 너무 성의 誠意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표피 豹皮가 두텁고 무늬가 아름다운 설표는 북 흉노 지역의 높고 험한 산지 山地에 살지,
남 흉노 지역에서는 보기가 아주 귀한 맹수 猛獸였다.
그런데 구하기 쉬운 지역을 관할하는 북 흉노는 이를 외면하고, 오히려 구하기 어려운 지역인
남 흉노 측에서 공물 貢物로 바친 것이 결정적인 이유란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다. 내면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어느 쪽이 우리 한 漢 조정의 말을 잘 따를 것인가?’
물어보나 마나다. 불문가지 不問可知다.
지금까지 그래왔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탁발규는 고개 숙여 “그런 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고는
“우리는 지금까지 화친 和親이나 그런 외교적 관례가 없어 그렇다”라고 하면서, 사신에게 품질 좋은
설표 가죽 몇 장과 옥 玉 중의 옥이라 불리는 가장 값진 비취 翡翠 목걸이와 귀걸이를 사신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면서 “이 설표 가죽은 이 험한 곳까지 사신으로 수고스럽게 오신, 두 분에게 드리는 것이며,
황실에는 나중에 별도로 선물을 준비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 달 사신으로 갈 때는 설표 가죽을 몇 장 준비는 하였는데, 품질도 떨어지고 크기도 작다.
국가간 외교적인 예물 禮物로서는 격 格이 떨어진다.
너무나 성의가 없어 보인다.
후한의 황제는 별말이 없었지만, 탁발규가 오히려 큰소리친다.
“지난번 공물 貢物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귀한 설표를 몇 마리 잡아 왔는데,
여름철이라 가죽의 질이 조금 떨어집니다.”
그러자 북방을 담당하고 있던 대장군 大將軍 두헌 竇憲이 크게 꾸짖는다.
“공물이 문제가 아니라, 지난 늦가을에 두 차례나 장성을 넘어 유주와 태원을 침략하여 많은 재물을 약탈하고,
삼천 명이 넘는 부녀자를 납치해 간 노략질을 해명 解明해 보시오,그리고 납치해 간 부녀자들을 즉시 돌려 보내시오”
지난 해, 큰 고을 서너 곳을 흉노족이 침략하여, 초토화시킨 사건을 따지는 것이었다.
“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태어난 곳이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라 시정 市政의 정보가 어둡고 또, 제가 출사 出仕한 지 몇 달 되질 아니하여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점을 양해 諒解해 주십시오”
“사신 使臣이란 자가 나라 간의 불상사 不祥事도 제대로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면 사신으로서 자격이 의문스럽소. 그토록 큰 불의 不義의 사건을 다만, 몇 마디 세 치 혓바닥으로 얼버무리고 말 작정이오”
“실제 우리 흉노인들은 글을 아는 자가 몇 되지를 않으니, 제가 운이 좋아 사신 역을 맡았을 뿐입니다. 돌아가면 대장군께서 가르쳐주신 일을 조사하여 사실 확인 후에 통보 드리겠습니다”
한의 조정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모든 대신이 혀를 끌끌 찬다.
그리고 순혈 한혈보마 汗血寶馬 새끼라며 망아지 열두 마리를 두고 갔다.
한혈마의 순혈 純血 망아지가 맞는지 아닌지는 탁발규 자신도 모른다.
[* 한혈마]
한혈마는 한무제 시절에 장건이 대월지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말이다.
한혈마 汗血馬는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명마라 불리던 말의 한 종류이다.
한혈보마, 대완마 大宛馬 등으로 불렸다.
서역으로 파견되었다가 흉노에 포로로 잡혀 탈출해 돌아온 장건(張騫)의 보고에 의해,
당시 선선 鄯善이라 불리던 국가에서 하루에 천 리(약 400km)를 달리는 ‘한혈마’라는
명마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며, 한나라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선선국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한나라 사신의 오만한 태도에 선선국은 제의를 거절하고 귀향하는 사신을 습격해 참살하고
앞서 한혈마를 사기 위해 보냈던 보물도 빼앗아버렸다.
하지만 장건은 간쑤성으로 이동하여 우여곡절 迂餘曲折 끝에 한혈마를 가져온다.
한 군이 흉노족에게 연전연패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기병 騎兵에서 밀리기 때문이라고 분석되었다.
기병의 주요 물자가 전마 戰馬다.
한나라의 말들은 흉노와 비교하여 체력과 기동성 등 모든 면이 뒤처져 있었다.
그래서 장건은 말에 유독 집착하고 있었다.
‘한혈마 汗血馬’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대개는 피와 같은 붉은 땀을 흘리며 달리는 말
즉, 말의 털 색깔(혹은 말의 피부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기생충으로 인한 출혈 또는 피부 자극) 때문에
마치 피와 흡사한 땀을 흘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한혈마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통설 通說로 되어있다.
말의 피부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기생충의 경우 그것이 말의 능력을 저하 低下시키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으며, 오히려 기생충에게 피를 빨리는 말은 그 고통 때문에 보통 말이 주행하는 속도나 거리 이상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명마라고 생각하고 한혈마를 명마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탁발규가 예물이라며 가져온 한혈보마라는 망아지들도 알고 보면, 실은 작년에 장성 이남에서
노획 鹵獲한 말들이 낳은 망아지다.
그중에 괜찮아 보이는 망아지를 대충 골라 온 것이다.
한 황실에도 마방 馬房이 있고, 마방의 책임자들이 말을 보는 눈은 예리하다.
그러니 무슨 대화가 될까?
사신 접대 담당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탁발규를 보고 꾸짖는다.
“사신 신분으로 온 사람이 예의범절 禮儀凡節도 제대로 모르고 막된 언행을 하니,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거요?”
“우리는 험지 險地에 살다 보니 까탈스러운 형식적인 예의보다는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밝히고 말하기를 원하오. 그게 무슨 큰 죄라도 된다는 말이오?”
“알았소,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보시오”
“그럼, 좋은 결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며 이만 물러갑니다”
작별 인사만큼은 비단결처럼 부드럽다.
다른 외교적인 사정 事情이나 구질구질한 변명 하나 없이 싹싹하게 돌아간다.
일행인 부사 副使 역을 맡은 후막진 천부장은 어이가 없다.
사신 使臣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나 범절 凡節이 상식을 벗어나 보인다.
같은 임무를 띤 일행이지만 옆에 있자니 낯이 뜨거워진다.
돌아오는 길, 마상에서 후막진 천부장이 입을 뗀다.
“탁 군사, 우리가 좀 심한 거 아니오?”
“천 부장님, 지금 우리가 사신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화친 和親을 도모 圖謀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그럼, 왜?”
“지금 우리 북 흉노의 전 재산을 다 털어 공물로 갖다 바쳐도 한의 조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흙먼지 풀풀 날리는 이 험하고 먼 모래밭 길을 왜 고생을 무릅쓰고 다니지요?”
“한 군의 진영이나 정세를 염탐하는 게 첫째 목적이고, 한 조정이 우리를 주적 主敵으로 결정하는 걸 늦추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죠”
“흠, 적을 방심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군”
“그렇죠, 한의 조정 朝廷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남 흉노와 긴밀 緊密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잖습니까?”
“그럼, 우리가 아무리 화친을 청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북 흉노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가 싸울 의사가 없다는 식으로 형식만 차려도 일단 경계심을 완화 시키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죠. 또 회담이 결렬되면, 우리가 남벌할 때 좋은 꼬투리가 될 수도 있고요”
그 후 한 차례 더 사신들이 오갔지만, 회담은 결국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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