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거리는 철 계단 밟는 소리에 심장이 콩닥거린다. 발버둥 치는 사무실 미닫이문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비상용 전등을 더듬어 쥐고 청사진기의 스위치를 켜니 시퍼런 불빛이 눈을 부릅뜬 도깨비 모습으로 끄르륵끄르륵 소스라친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이었다. 한창 꽃피기 시작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
는 한일합작 회사였다. 군 복무를 대신 할 수 있는 근무 조건에 마음이 끌렸다. 앞선 일본의 기술을 쉽게 마주할 기회란 생각이 두 번째였다. 삼 년이 지날 무렵 합작회사에서 최신기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국내에는 처음인 첨단장치가 실린 설비였다.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다.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연수를 떠났다. 첫째는 기계를 운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음은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법을 익혀야 했다. 전자는 하드웨어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소프트웨어 개발이었다. 모두를 알아내야 돌아올 수 있다는 부담감에 머리가 무거웠다. 운용하는 방법은 설비를 판 쪽의 당연한 의무이니 별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앞선 기술인 소프트웨어를 빼내는 일이 만만치 않은 싸움이었다.
조그만 여유도 없이 빠듯하게 돌아가는 일본 직장인들의 살림살이를 파고들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밥과 술로 그들과 가까워지려고 나를 쏟아 부었다. 그때마다 도면 얘기를 슬쩍 끼워 넣었다. 씨알도 먹히지가 않았다. 고유한 기술이 갖는 오만함이 나를 더욱더 작게 만들었다. 자부심으로 채워진 자물쇠의 열쇠 찾기는 아득해졌다. 애초에 밥이나 술로 마음을 사겠다는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두 달이 훌쩍 지나가자 애가 타고 안달이 났다.
토요일 오후다. 동네 어린이 야구팀 감독인 기술연구소 과장이 집으로 초대를 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 날 야구 경기를 즐기자는 제안이다. 한국의 무슨 일이 제일 궁금한지 물었을 때, 막 출발한 프로야구라 대답한 말을 담아 둔 배려다. 매번 얻어먹은 밥도 한몫했을 터이다. 일본사람은 웬만해선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고, 더구나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드물다는 귀동냥은 미리 해두었다. 도면을 손에 넣기 위한 마지막 기회란 속셈이 컸다. 부인과 셋이서 얼큰하게 올랐을 때 얼핏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다. 스스로 도면을 건네는 손에는 세 식구의 삶이 쥐어져 있다고 중얼 거린다. 자기 손으로는 줄 수 없다는 눈빛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그러면 가져가라는 말이 아닌가. 은근한 부추김에 가슴이 벌렁거린다. ‘당신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가져간다.’
모르는 체 눈감아 주는 도둑질이지만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탈에 혼란스러웠다. 국가이익은 정의에 앞서는 것일까. 저들의 출발은 지금 내 고민만큼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을까. 그가 베푼 호의는 못사는 나라에서 온 무지렁이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더 나은 기술에 대한 오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부서졌다. 산업스파이란 고급스러운 말이면 얼굴이 좀 두꺼워질까. 완성차 업체의 일본인 기술고문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가장 빨리 따라잡는 제일 좋은 방법은 남이 만든 기술을 훔치는 것이다.’ 실망한 윗사람들 얼굴도 떠올랐다. 젊은 패기와 기술에 대한 목마름이 정의와 양심을 이겼다.
갈등 속에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보여주는 캐비닛 비밀번호도 알아내고, 손전등과 청사진기 위치도 눈여겨봐 두고, 경비원 순찰 시간까지 기억해 두었다. 청사진기가 내뿜는 시퍼런 불빛에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큰 도면을 복사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다. 끄르륵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종이를 말아 쥐고 악을 쓰는 철 계단을 달래가며 내려왔다. 망을 보던 동료에게 투덜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은 진짜다.” 들고나온 책은 시내 편의점에서 복사하고, 공장에 붙은 표준서는 운동회 날 몰래 사진 찍는 것으로 등짐을 벗었다. 그들도 사람임을 일깨워준 과장에게는 작은 선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절박하게 먹고 사는 문제라고 생각이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핑계로 앞선 기술을 베끼고 훔치는 것에 대한 너그러움도 있을 때다. 그렇다고 규칙과 양심에 어긋난 행동이 사회 흐름에 따라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나라발전에 조그만 보탬이 됐다고 해서 용서받을 일도 아니다.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란 구실로 위로받을 생각도 없다. 지금 누리는 풍요가 공짜로 얻어진 것처럼 말하는 이들에게 시대가 겪은 아픔을 애틋하게 변명해주고 싶다. 거기엔 사람이 있었고 인정도 있었다고. 땀 흘려 일해 본 적 없이 입으로만 먹고살아 온 매몰찬 사람들이 주장하는 공허한 정의와 맞서는 것이라 해도 좋다. 꼰대라는 비아냥은 되돌려주고, 합리적 불평등한 결과를 정의가 아니라고 우겨대는 이율배반에 치열한 삶이었다고 일갈하고 싶다. 오늘은 짜릿했던 그 날 밤을 추억하며 맥주나 실컷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