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가족 여러분 무더위에 고생이 많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사찰암자를 다녔습니다
혼자 다니는 멀고먼 순례 길 외롭고 쓸쓸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합니다
조계종 사찰암자 약1.200(전통사찰포함756곳)곳순례 하였고 남어지100곳을 다니면 전통사찰 답사는 끝입니다
조계종 사찰암자 약 3.200곳 3-1을 순례를 하였습니다
전북 진안군 천황사
전북 진안군 고림사
전북 진안군 금당사
전북 진안군 마이산 탑사
전북 임실군 신흥사
요즘 사찰은 무척 크다는 느낌이 강하다. 산세가 험하고 전각을 짓기에 비좁은 공간에도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이 웅장하게 서 있는 경향이 강하다. 대웅전이 산세와 어우러지지 않고 오히려 산을 압도하곤 한다. 이것은 어쩌면 부처님을 멀리하고 단지 산만을 찾아온 나그네를 꾸짖으며, 부처님의 불법을 용맹하게 드러내 보이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근래에 세워진 너무 큰 대웅전을 보면 기가 죽고 질리기 마련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점에 있어서 신흥사에 가면 안심해도 된다.
신흥사에 가면 야트막한 산과 어울리는 작고 나지막한 대웅전이 편안하게 맞이해준다. 지붕의 선도 자연스럽고, 처마 아래 다포집도 요란하게 자랑하지 않고, 단청도 번잡하지 않으며, 문살도 알맞춤하게 정갈하고, 자연석을 쌓은 기단이 정겹기까지 하다. 옛날 그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이름이 생소한 사찰에 갔다가 세월의 연륜이 묻어 있는 오래된 대웅전을 만나면 왠지 마음이 놓고이고 푸근하게 다가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렇게 대웅전이 마음에 쏘옥 든 다음, 주변을 둘러보면 대웅전 뒤로 알맞게 자리잡은 낮고 조그마한 산신각이나 정갈하게 쓸어놓은 마당조차 정겹다. 인지상정일 것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쁨. 아직 많은 이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았으나 조선후기 어느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대웅전을 보고 싶다면 신흥사에 한번쯤 가 보길 권한다. 우연히 멋진 사찰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1) 위치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상원리 360번지 사자산(獅子山) 북쪽의 40리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 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063 - 643 - 2178)
2) 교통편
신흥사는 전라북도 관촌 동쪽 방수리로 4㎞ 가량 가다가 신정초등학교에 이르러 상월리 쪽으로 2㎞ 정도 더가면 그곳에 있다.
호남고속도로 전주 톨게이트로 나와서 26번국도 진안 · 남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동산역, 송천역, 전주역을 지나 안덕원 지하차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17번국도 임실 ․ 남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5km정도 주행하면 전주천 삼거리에 도착하며 전주천 삼거리에서 임실 ․ 남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25km정도 주행하면 관촌면 사선대관광지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745번 지방도로 조원천길을 따라 방현 교차로에서 상월 ․ 방현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0㎞정도 주행하면 신흥사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500m 진입하면 신흥사에 도착하게 된다.
시내버스
임실 터미널 - 관촌 · 상월리행
14:00, 1회 운행. 상월리 회관 하차, 2㎞ 도보.
관촌 터미널 - 상월리행
상월리 종점 하차, 2㎞ 도보.
죽림암
역사
절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에 진감(眞鑑) 국사 혜소(慧昭, 774~850) 스님이 임실군 관촌면에 있는 신흥사와 더불어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흥사는 포교를 위한 도량으로, 죽림암은 수행을 위한 도량으로 청건한 것이라고 한다.
창건 후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504년(연산군 10)에 벽송 지엄(碧松智嚴, 1464~1534) 스님이 중창했다. 그런데 법당에 걸려 있는 '죽림암 연혁' 현판에 보면 절은 이 때 벽송 지엄 스님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건 년대가 다른 거승 1504년 지엄 스님의 중창을 실질적 창건으로 보아서 그렇게 기록했는지 모르겠다.
그 뒤 절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으나 1604년(선조 37)에 진묵 일옥(1562~1633) 스님이 중창했고, 1868년(고종 5)에 허주 덕진 스님이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1908년 이후로 권법상(權法相) · 정법민(鄭法敏) · 오일탁(吳一鐸) · 박금규(朴金奎) · 신동호(申東浩) · 최흥춘(崔興春) · 성암 길남(惺庵吉男) 스님 등이 주지로 있었음이'죽림암 현판'에 나와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81년에 성암 길남 스님이 법당 칠성각 산신각 수각 등을 중수했고, 그 뒤 1984년부터 재정(在淨) 스님에 의해 칠성각 · 산신각 · 요사 등이 중건되었다.
절 이름이 죽림암인 것은 옛날 절 주위에 왕대가 많아서였는데, 왕대가 칡덩쿨로 인해 자라지 못하자 스님이 대를 보호하고 칡덩쿨을 없애기 위해 불을 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대나무만 남았을 뿐이라고 전한다.
1) 위치
전북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 525번지, 운수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
2) 교통편
호남고속도로 전주 톨게이트로 나와서 26번국도 진안 ․ 남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동산역, 송천역, 전주역을 지나 안덕원 지하차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17번국도 임실 ․ 남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5km정도 주행하면 전주천 삼거리에 도착하며 전주천 삼거리에서 임실 ․ 남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30km정도 주행하면 임실역을 지나 두곡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두곡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기림 초등학교를 지나 임실보건의료원 사거리에 도착하여 우회전하여 임실고등학교, 임실동중학교를 지나면 원불교임실교당사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1km정도 주행하면 좌측으로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마을방면으로 좌회전하여 800m정도 올라가면 죽림암에 도착하게 된다. 죽림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므로 임실읍에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 시내버스
임실 터미널에서 택시로 이동.
해월암
역사
창건은 고려시대인 1352년(공민왕 1)에 해경(海境)과 월산(月山) 두 스님이 창건하여 두 스님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해월암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조선시대 초 1396년(태조 5)에 무학 자초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인 1556년(명종 11)에 남원부사가 중건했고, 1747년(영조 23)에 양정봉이 중수했다. 이어서 1858년(철종 9)에도 한 차례 중건이 있었고, 1915년에는 봉인(奉仁) 스님이 불상을 봉안하며 절을 중건했다. 근래에는 1990년에 주지 정현 스님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1) 위치
해월암은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725번지이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말사이다. (063 - 642 - 6161)
2) 교통편
호남고속도로 전주 톨게이트로 나와서 26번국도 진안 · 남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동산역, 송천역, 전주역을 지나 안덕원 지하차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17번국도 임실 · 남원 방면으로 직진하여 5km정도 주행하면 전주천 삼거리에 도착하며, 전주천 삼거리에서 임실 ·남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42km정도 주행하면 임실군 오수면 국평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국평 삼거리에서 30번국도 오수방면으로 우회전하여 4㎞정도 주행하면 오수역을 지나 임실 축협 오수지점 삼거리에 도착하며, 삼거리에서 장수 정육점을 끼고 우회전하여 150m정도 가면 관월교를 지나 우측으로 해월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350m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해월암에 도착하게 된다. 초보운전자는 산길 커브가 심하므로 안전 운전에 주의해야 한다.
* 시내버스
임실 터미널 - 오수 터미널
6:30, 6:50, 7:40, 9:30, 10:00, 10:30, 11:40, 12:10, 13:00, 15:30, 16:10, 17:30, 18:00, 18:30, 19:30.
오수역에서 도보로 20분 , 택시 2.500원.
오수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 택시 기본요금.
전북 장수군 영월암
1910년 절은 창건 되었다. 거령산성 안에 자리하며, 절에는 오래된 토굴이 있다. 절에서 전하기로는 옛날 삼한시대부터 이름난 위인들이 이 토굴에서 수행정진 했으며, 신라시대의원효 스님도 역시 이곳에서 수행하며 한 겨울을 보낸 바 있다고 한다.
한편 절은 부근의 여러 면이 다 내려다보일 정도로 성산의 높고 깊은 곳에 자리하는데, 달이 가장 먼저 뜨고 제일 늦게 지는 곳이라 그만큼 달을 오래 볼 수 있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영월암으로 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을 잘 알 수 없고, 근대에 와서는 1950년의 한국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1952년에 신도인 강미타심이 불교부인회를 조직하여 인근의 여신도를 중심으로 시주를 모아 석주(石柱) ・ 석정(石鼎)스님 등과 함께 중창 불사를 이루었다.
이때의 불사를 기록한 <불사기(佛事記)>를 보면 불교중앙총무원교정 만암 종헌(曼庵宗憲, 1876~1957), 불교중앙총무원장 이종욱(李鍾郁), 불교혁신회장 백성욱(白 郁,1897~1981), 불교전북교육원장 정봉모(鄭奉謨) 스님 등 널리 알려진 불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전쟁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때 이처럼 당시의 불교를 이끌던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최근에는 1987년에 예전의 인법당을 헐고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이듬해 현재의 대지(大智)주지스님이 주석한 뒤 1992년에 요사를 지었다.
1) 위치
전북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520-1, 성산(城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063 - 351 - 1148)
2) 교통편
대전· 통영간고속도로 장수 톨게이트로 나와서 장수IC 삼거리에서 19번국도 장수 ․ 남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장수읍을 지나서 13km정도 주행하면 개정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개정삼거리에서 13번국도 산서 ․ 임실방면으로 우회전하여 팔성사, 비행기재를 넘어 16km정도 주행하면 산서삼거리에 도착하여 721번 지방도로로 보절 ․ 남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1km정도 주행하면 이룡 삼거리에 도착한다.
삼거리에서 남원 방면으로 우회전 하여 2.6㎞주행하면 봉서마을 정류소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영월암 이정표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km정도 주행하면 좌측으로 영월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영월암 이정표 길을 따라 좌회전하여 1km정도 산길로 주행하면 영월암에 도착하게 된다.
팔성사
1903~1908년 사이에 편찬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가운데의 「여지고(輿地考)」에 의하면, ‘성적산(聖迹山)은 일명 성수산인데, 산중에 팔공암(八公巖)이 있어 팔고산 이라고도 부른다 장수현으로 부터 서남쪽으로 15리에 있다.’ 라는 기록이 있어 산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장수군지」에 의하면 절은 백제 무왕 때인 603년에 해감(解橄) 스님이 창건 했으며, 얼마 안 있어 해감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된 7명의 고승을 기리기 위해 팔성사라 하고 산 이름도 팔공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팔성사 외에 7명의 제자들이 각각 암자 하나씩을 지어 팔성사를 중심으로 7개의 산내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절을 창건한 해감 스님에 대해서는 혹은 ‘혜공(慧空)’ 스님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활동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스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혜공 스님은 원효 스님으로 생각할 수 있다.「삼국유사」에 스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잇다. 그에 따르면 혜공 스님은 원효 스님과 학문을 주고받았다고 알려져 있어 대략 7세기에 활약했던 스님으로 생각할 수 있다.「삼국유사」에서는 이른바 신라 십성(十聖)가운데 한 분으로 꼽히는 고승이다.
창건에 이어서는 원효 ·의상 스님이 이곳에 주서하면서 본사를 중수하고 말사를 중건했다고 전한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고, 조선시대 어느 때인가 팔성사는 폐허화 되었고 7개의 산내암자 가운데 하나가 본 절의 이름을 이어받아 지금의 팔성사가 되었다고 한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장수현조」에 보면 팔성사 이름은 없고 다만 ‘운점사(雲岾寺)’가 보이는데, 절에서는 이 운점사가 곧 본 절을 계승한 지금의 팔성사의 전신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은 ‘운점사는 성적산에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중수되어 원효가 주석했다. 남북에 만향점(滿香岾)이 있는데, 원효· 의상이 불법을 강의할 때 이곳에서 이상한 향기가 퍼져 나와 만형점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세종 때 성주(省珠)스님이 중수했다.’라고 되어 있다.
1) 위치
팔성사는 전라북도 장수군 용계리 1267번지, 팔공산(八公山)에 자리한 대한 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063 - 352 - 5562)
2) 교통편
대전 · 통영간고속도로 장수 톨게이트로 나와서 장수IC 삼거리에서 19번국도 장수 · 남원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장수읍을 지나서 13km정도 주행하면 개정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개정삼거리에서 13번국도 산서· 임실방면으로 우회전하여 2km정도 주행하면 안양마을 팔성사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팔성사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1km 정도 올라가면 팔성사에 도착하게 된다.
* 시내버스
장수 터미널 - 산서행 무진장여객 군내(완행)버스 이용,
7:20, 9:30, 10:00, 10:40, 11:20, 13:30, 14:35, 15:50, 17:10, 18:10, 19:00
안양 정류장(팔성사 입구) 하차. 팔성사 이정표를 따라 1.2㎞정도 산행.
신광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가 이 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하며, ‘성수산’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절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인 830년(흥덕왕 5)에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무염국사는 충청남도 보령 성주사(聖住寺)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일으켜 후학들을 지도했는데, 신광사가 자리한 지역에는 그럴 만한 절이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여 절을 지었으며, 절 이름인 ‘신광사’는 곧 항상 새로운 인재가 자라나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고려시대에 절이 어떠했는가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597년의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서 없어졌다고 하며, 그 뒤 1649년(인조 27)에 천해선사(天海禪師)가 중창했다.
한편 18세기 후기에 지어진 '가람고'에 ‘신광사’라는 이름으로 보이며. '범우고'에도 그 이름이 있어 그 무렵에도 절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848년(헌종 14)에는 현감 조능하(趙能夏)와 운장(雲漳) 스님의 노력으로 중수되었다.
근래에는 1950년의 한국 전쟁 때 잠시 절이 비었다가 1969년에 보수 되었고, 최근 1985년에도 한 차례 보수된 바 있다. 절은 옛 부터 정성을 다하면 신비로운 서기가 내린다고 전해져 수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 위치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와룡리 38번지, 성수산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2) 교통편
대전 · 통영간고속도로 장수톨게이트로 나와서 장수IC삼거리에서 19번국도 장계 · 무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2km정도 주행하면 신동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신동삼거리에서 진안 ․ 무주방면으로 좌회전하여 2km정도 주행하면 원무농 삼거리에 도착하며 원무농 삼거리에서 26번국도 진안 ․ 전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6km정도 주행하면 천천면 천천 삼거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13번국도 장수방면으로 좌회전하여 3km정도 주행하면 남양 삼거리에 도착하여 726번 지방도로 와룡 자연휴양림 방면으로 3km정도 주행하면 와룡 저수지를 지나 우측으로 신광사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신광사 이정표 길을 따라 우회전하여 300m정도 올라가면 신광사에 도착하게 된다.
* 시내버스
장수 터미널 - 와룡 자연휴양림
10:50, 16:05 신광사 입구 하차
성관사
성관사는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창건하여 법등을 이어온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유물이나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향토사학자인 오치황씨(3년전 사망)의 할아버지 유품 중 미공개 고문서 중에 고려시대 문인이 이곳에 들러 유람하고 요양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오치황씨의 후손들이 오씨의 유물을 공개하기를 꺼려 정확한 사명은 확인할 수 없다.
역대 문인들의 문집을 조사한 결과 장수군의 유물이나 유적에 대하여 시문을 남긴 사람은 모두 9명 정도였는데, 그 중 고려시대의 문인은 1명이며 나머지는 모두 조선초, 중기의 문인들이었다. 고려시대 문인 중 이 곳 사찰을 유람하고 시문을 남긴 사람은 12세기 경에 살았던 김극기(金克己)로, 그는 인근 영로산 석천사를 유람하고 시문을 남긴 바 있다. 김극기는 고려 명종 때의 문인이자 뛰어난 문장가로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가 인근 석천사에 들러 유람한 시문을 남겼다면 아마도 인근인 이곳 성관사의 엣터에도 들러 글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조선조에 이르러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때 왜군들의 방화로 인해 사찰이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주지스님께서 전란을 피하여 불상과 불구(유기)를 인근에 옮겨 땅에 묻어두고 훗날 중창불사를 기약하였다고 한다. 이에 근래에 이르러 침동 부락민들이 불상과 불구의 발굴 작업을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부역으로 인한 부락민간의 갈등으로 중간에 포기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절터의 곳곳에는 조선시대 기와들이 흩어져 있어 당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고 있다.
1) 위치
성관사는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산 32-2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063- 353 - 0396)
2) 교통편
장수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나와서 19번 국도와 마주치는 검문소 앞 삼거리에서 무주방향으로 우회전하여 4.8km를 진행하면 성관사 일주문이 나온다. 이 지점에서 우회전하여 900m 지점에 성관사가 있다.
* 현지교통 ; 전주 - 장수행 직행버스 이용, 30분 간격, 1시간 20분 소요
* 고속버스 ; 서울 - 전주 05:40 - 23:00 / 배차간격 5-15분 / 소요시간 3시간
전주에서 하차한 후 전주-장수행 직행버스 이용
대전 · 통영간고속도로 장수 톨게이트로 나와서 장수 IC 삼거리에서 19번국도 장계 · 무주방면으로 우회전하여 4.8km정도 주행하면 우측으로 성관사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 앞에서 우회전하여 900m정도 올라가면 성관사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 시내버스
장수 터미널 - 안성 · 무주행 군내버스 이용.
성관사 입구 하차 1㎞ 도보.
성관사 사찰버스 전국에서 수시 운행.
연수사
거창군에서는 고견사(古見寺)와 함께 손꼽히는 큰 사찰이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신라시대 애장왕 3년(802년)에 감악조사가 지금의 연수사 남쪽에 절을 세웠으나 빈대 때문에 절이 망하여 능선 북쪽인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이야기와 부처님의 현몽으로 감악산의 샘물로 중풍을 치료한 신라의 헌강왕(재위 875∼886)이 고마운 마음으로 연수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연수사는 고려 공민왕 때 벽암 선사가 심여사원을 지어 불도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며, 전각은 대웅전과 산신각, 종각, 세석산방 등이 있으며, 특별한 유물은 전하지 않고 절 앞에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심은 수령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위치
연수사는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감악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연수사를 가기 위해서는 거창읍에서 남쪽으로 약 8km 지점에 위치한 남상면 면소재지인 무촌리 인평(印坪)마을을 지나야 한다.
옛날의 인평 마을은 모두 강이었던 곳으로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고 하여 ‘배뜹’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어느날 이 강물에서 커다란 용 한 마리가 오색무지개를 헤치며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이후 강의 물이 마르고 그곳에는 하나의 넓은 들이 형성되면서 그 가운데로 큰길이 하나 생기게 되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이 마을의 모양이 도장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인평이라는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평마을에서 1km 정도 길천(吉川)을 끼고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아랫매산(下梅)과 윗매산(上梅)이 있다.
윗매산으로 향하다 보면 시원스런 하늘아래에 내려앉은 감악산의 바람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바람을 따라 가다 신록을 먹어 진녹색의 물빛을 담고 있는 감악산 저수지를 지나서 좀 더 오르면 다리평전이 있다. 옛날 이곳은 신원 사람들이 감악산을 넘어 거창에 갈 때 쉬어가던 곳으로 계곡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있다고 하여 불리워진 명칭이다. 다리평전을 지나서 조금 더 올라 왼쪽으로 난 샛길을 접어들면 특별한 물이 솟아나는 연수사를 만나게 된다.
찾아가기
승용차 이용 - 연수사를 가기 위해서는 88올림픽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거창 I.C에서 24번 국도를 이용해 거창읍내로 들어가서 1084 지방도로를 타고 남상면으로 간다. 남상면 삼거리에서 신원 방향으로 들어가면 연수사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를 따라 20여분 가면 연수사가 있다.
대중교통 이용 - 거창읍에서 신흥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연수사 입구인 청연에 내려 30여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부속암자 원당암
원당암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산내 암자입니다.
원당암은 「해인사 1번지」같은 상징적인 암자입니다. 해인사와 형제처럼 역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당앞에 보물 518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는 석탑과 석등에도 암자의 나이테는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은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부처의 가호 (加護)로 여기고 해인사의 창건을 발원한 순응(順應)대사 를 몸소 크게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政事)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당암이라는 것입니다.
암자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혜암(慧菴)스님이 머무 른 이후부터였다고 합니다. 혜암스님은 현재 해인사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수 있는 해인총림방장('93년~'96년)스님을 지내시고 1999년 4월에 조계종 제10대 종정스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또한 원당암에서는 스님들과 똑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에 한철씩 안거(安居)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재일의 재자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연호사
연호사는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황우산 대야성에 백제군 일만 대군이 642년 공격을 했다.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에게 패전을 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항복할 것을 거절하고 싸우게 된다.
여기서 김품석은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 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운 데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 하리오”라며 장병 2,000여 명과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이때 죽은 김품석과 처자, 그리고 신라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643년 와우 선사가 절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연호사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극락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의 전각이 있다.
위치
합천 연호사는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동에 있다. 대야성 아래에 있는 연호사 뒤로는 황우산이 솟아 있으며,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다. 합천읍에 있는 군청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에 중건하여 여려 차례 중수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이황, 조식, 송시열의 글이 있는 함벽루가 있다.
합천 팔경 중 제5경으로 절벽을 등지고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앞으로는 푸른 황강이 흐르고 있다. 산을 뒤로하고 누각에 앉으면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으며, 비 오는 날에는 누각 처마에서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빗물을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찾아가기
승용차 이용 - 합천 연호사는 합천읍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정표는 없지만 함벽루를 찾으며 연호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합천군청 앞을 조금 지나면 합천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합천 고등학교를 지나 황강변으로 들어서면 합천 궁도협회가 있는데, 바로 그곳에 함벽루가 있고 그 옆에 연화사가 있다.
대중교통 이용 - 합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다. 군청 앞을 지나면 합천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가면 연호사가 나온다. 택시를 타면 5분 정도면 갈 수 있다.
경북 고령군 반룡사
창건은 802년(신라 애장왕 3)에 해인사(海印寺)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중기에는 보조국사 지눌(智訥, 1158~1210)이 중창했고, 고려말 공민왕(1351~1374) 때 나옹 혜근(懶翁, 1320~1376)이 다시 중건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중국 원나라 세조가 이 절에 내린 방문(榜文)의 전문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이 절이 매우 큰 규모였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 방문에서는 ‘일본 정벌을 위해 경상도 땅에 온 원나라 군사들 중 절을 짓밟거나 소란을 피우는 자는 법에 의해서 처벌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 『고령읍지』에도 ‘현의 서쪽 30리 되는 미숭산 아래에 원나라 세조가 보낸 방문이 전한다(在縣西三十里 美崇山下 有元世祖榜文)’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절에 이 세조의 방문은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 유물로는 다만 소형 다층탑만 있을 뿐이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한 사찰이었는데, 1592년의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타버린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뒤 다시 화재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당(六堂)과 요사가 타버렸다. 그러다가 1764년(영조 40)에야 이 지역 현감인 윤심협(尹心協)에 의해 대웅전과 동서 요사, 만세루 등이 중건되었다. 근대에는 1930년 무렵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동리 산187번지 미숭산(美崇山) 기슭에 자리한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054-954-1498)
1) 대중교통편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를 이용해 고령까지 간 후 고령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여 반룡사가 있는 용리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소요시간 30분 정도)
2) 승용차편
고령으로 가려면 88올림픽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88올림픽고속도로 고령나들목을 나가서 바로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고속도로 밑을 지나 바로 반룡사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해 들어가면 반룡사에 닿는다.
* 88올림픽 고속도로 → 고령IC에서 나와 좌회전 → 안림삼거리에서 직진 → 쌍림주유소 앞 반룡사표지판을 보며 좌회전 → 월막리경로당에서 월막교를 건너 좌회전 → 용리방향 → 반룡사
관음사
관음사의 경내에는 관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는 관음전을 중심으로 칠성각과 산신각, 천불전 겸 유치원, 종각 그리고 요사 2동이 있다.
관음사는 1911년에 합천 해인사의 포교당으로 창건되었으며, 당시에는 봉두동에 있었다. 그 뒤 1956년에 동화사 말사로 등록하였고, 1990년대 초에 종운스님이 천불전 등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당우로는 관음전을 중심으로 칠성각과 산신각, 천불전, 범종각 그리고 요사 2동이 있다.
관음전 안에는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 그리고 칠성각에는 칠성탱이 있다. 이들 불화들은 모두 해인사 산내암자인 백련암과 국일암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 외에 역사를 알만한 기록은 따로 없으며 현재 주지는 지선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2리 206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고령지역 포교당이다. (☎054-954-2400)
1) 대중교통편
고령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여 고령초등학교 뒤편의 아파트 단지로 올라가면 선재유치원과 관음사가 있다.
2) 승용차편
고령 읍내의 버스터미널에서 북쪽으로 500m 가면 합천 쪽으로 사거리가 나온다. 이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조금만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고령초등학교 건물이 있고, 여기에서 왼쪽으로 가면 아파트 지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아파트 뒤쪽에 작고 아담한 포교당 건물과 선재유치원이 자리잡고 있다.
․ 88올림픽 고속국도 → 고령 나들목 → 월막교 방향 지방도 → 용리 반룡동 → 반룡사
․ 고령IC로 나와 좌회전 → 안림삼거리에서 직진 → 반룡사 방향의 이정표에서 좌회전
경북 성주군 심원사
절의 창건과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고려시대에 이숭인(李崇印, 1349~1392)이 이 절에 대하여 쓴 시가 조선 성종 12년(1481)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28 성주목 병자에 전하는데,「심원사재가야산남이숭인시심원고사재야산송백음중불암관의파정의상능금득비신관(深源寺在伽倻山南李崇仁詩深源古寺在倻山松柏陰中不庵關擬把精義尙能今得比身關)」이라는 기록이 있고,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미 폐사되었다고 나와 있다. 일제시기에는 인근의 법수사를 중심으로 도은암(道恩庵), 보현암(普賢庵), 백운암(白雲庵) 등 100여 개의 암자가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법수사지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탑과 돌기둥, 주춧돌, 암자터 등만 흩어져 남기고 있을 뿐 건물하나 없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1978년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용지사가 폐사된 후 주변의 암자는 거의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심원골로 알려진 이 곳엔 옛 절터에 폐탑 1기가 남아 있었는데, 지난 2003년 중앙승가대의 최태선 교수팀에 의하여 심원사지 지표조사와 함께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폐탑을 복원하고 금당터를 발굴하였다. 현재의 문수전과 관음전은 2003년부터 불사를 이루어 정비한 것이다. 경내에는 곳곳에 불상과 광배 그리고 주춧돌 등 석재들이 산재해 있어 고찰이 들어섰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 자가용 이용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성주 J.C) 마산방향 -> 성주 I.C ->합천 고령방향 우회전(33번 지방도) -> 수륜면 소재지에서 가야산 해인사 방향으로 우회전 ->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지구 -> 심원사 (총 소요시간 3시간 30분)
*가야산 식물원 방향과 일치
대구 -> 서대구(성서, 화원) I.C -> 88고속도로(광주방면) -> 해인사 I.C ->가야산, 해인사 방향 우회전(1084지방도) -> 야천리 삼거리에서 김천, 성주방향 우회전(59번국도) ->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지구 -> 심원사 (총 소요시간 1시간 10분)
부산 -> 경부고속도로 -> 서대구(성서, 화원) I.C -> 88고속도로(광주방면) -> 해인사 I.C -> 가야산, 해인사 방향 우회전(1084지방도) -> 야천리 삼거리에서 김천, 성주방향 우회전(59번국도) ->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지구 -> 심원사 (총 소요시간 2시간 10분)
- 대중교통
* 버스운행시간 6:40부터 20:00까지 (매 30~40분 간격으로 운행).
선석사
창건
692년(효소왕 1) 의상대사가 신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는 지금보다 서쪽이었으나 고려 말 나옹 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옮기려 터를 닦다 큰 바위가 나와 선석사라 했다.
연혁
1592년(선조 25)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숙종 10) 혜묵, 나헌 스님 등이 중창하고 1725년(영조 1) 서쪽의 옛터로 옮겼다가 1804년(순조 4) 서윤 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산왕각, 어필각, 정법료를 지었으나 그 뒤 화재로 어필각은 소실되었고 최근 대웅전 뒤 대나무 숲 아래 야외 미륵부처님을 조성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217번지에 자리한 선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 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찾아오는 길-
대중교통 이용시 ; 서울-왜관, 왜관-인촌리(수시로), 성주-선석사(오후 5시)
자가용 이용시 ; 서울-김천-4번 왜관 방면-월명 삼거리-905번 성주 방면-여산 삼거리 우회전
감응사
처음에는 암자로서 감응암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독립된 사찰로 감응사라 하는데 802년(신라 애장왕 3)에 세워졌다.
전설에 나오는 샘이 절 뒤 절벽의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옥류정이라 하여 지금도 그 물맛이 달고 차가워서 약수로 이름이 높다. 이 절은 당초 신라의 보조국사 체징이 왕명에 의하여 세운 절로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중건을 거쳐 근세에 남은 기록으로 말하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1675년(숙종 2)에 중창하였다.
그 뒤 1740년(영조 16)에 중수, 1780년(정조 4)에 또 중수, 1921년에 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최근에는 1970년대에 들어서 평타 스님이 영선원을 세우고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산 이름도 전설에 나오는 것과 같이 영험스런 독수리의 산이라 하여 영취산이라 하였는데 후세에 영취산 아래 한개에 살던 학자 한주 이진상이 축기가 많다 하여 영축산이라 고쳤다. 절이 있는 영취산은 앞에 삼봉과 백내를 내려다보며 멀리 성주읍을 바라보는 경치가 좋은 산으로 봄·가을이면 절을 찾는 사람이 많이 있다.
-위치
감응사는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56번지 영축산에 자리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
-찾아가는 길
1)자가용
- 김천에서 성주 방면 4번 국도로 접어들어 약 17km 정도 가서 부상에서 우회전, 905번 지방도로를 타고 성주쪽으로 간다. 성주읍에 가기 전 초전에서 좌회전하여 월항면 소재지를 거쳐 선남면 방면 30번 국도로 1km 정도 가다보면 왼쪽에 있다.
- 경부고속도로 : 왜관 IC → 월항면 소재지 → 감응사
- 구마고속도로 : 성서 IC → 선남면 신부리 → 감응사
2)대중교통
- 철도 : 경부선 왜관역 하차 → 성주행 버스이용(30분 소요)
- 버스 : (서울) 남부터미널 → 성주행(1일 4회 운행, 3시간 20분 소요)
(대구) 북부정류장 → 성주행(20분 간격, 1시간 소요) 밤고개에서 0번, 250번 시내버스 이용
-현지교통 : 성주읍에서 택시(10분), 노선버스(20분) 이용
경남 합천군 해인사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여러사찰들을보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