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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59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연중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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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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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PlBBpUy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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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케냐 방문 기간 동안 이루어진 성직자·수도자들과 만남 때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축성생활의 날을 맞이하는 저희 수도자들이 반드시 마음에 새길 말씀입니다.
“우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한 사제, 한 수사, 한 수녀에게서 눈물이 마를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충실 때문에 우십시오. 세상의 고통 때문에 우십시오. 내쳐지는 사람들 때문에 우십시오. 버려진 노인들, 살해된 아이들을 위해 우십시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우십시오.”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기도를 멈추면 여러분의 영혼은 메말라집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졸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무십시오. 그것도 기도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주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버리지 마십시오. 축성 생활을 하는 사람이 기도를 버리면, 영혼이 메말라집니다. 바싹 말라 시듭니다. 흉한 모습을 한 마른 나무 가지처럼, 기도하지 않는 사제나 수도자들은 흉한 영혼입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을 맞아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수도생활, 과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수도생활에 대해 나는/세상 사람들은/주님께서는 정녕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도자들의 현존에 대해 정녕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는가? 수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수도자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반대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야? 수도자가 저래도 되는거야?’라며 충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4~50년전, 한해 입회자가 4~50명씩 되던, 그래서 침실이 부족하던 수도 성소의 호황기 시절을 그리워며, ‘라떼는 말이야!’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오손도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면서, 수도원 담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잘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수도 규칙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가난한 이웃을 향한 개방과 환대, 나눔과 헌신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큰 도전 앞에 서 있는 축성생활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수도생활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회복시키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들 한분 한분의 내면에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각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적 현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입니다.
어쩌면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수도자 한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신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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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mMZbcxsn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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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느님의 자녀로 봉헌되지 못했을 때 받아야 할 고통>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은 특별히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봉헌 생활을 축성 생활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밀떡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성체와 성혈로 축성되는 신비를 인간도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밀떡과 포도주도 사제를 통하여 제단에 봉헌되지 않으면 주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가장 완전한 사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봉헌은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지 그 모범이 됩니다. 자녀를 자신의 아이로만 여긴다면 자녀는 축성될 수 없어서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알겠는데, 아직 온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니라고 느껴 혼란에 빠집니다.
온전히 자녀가 아니라고 느끼면 하게 되는 것은 ‘경쟁’입니다. 자녀들이 경쟁하는 이유는 진짜 자녀가 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경쟁은 고통스럽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녀들끼리도 경쟁하면 그렇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더 자녀답다고 그리스도와 경쟁하였습니다. 하지만 참다운 자녀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6살 여자아이 ‘프리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삼촌과 숙모가 사는 시골집에 맡겨집니다. 삼촌과 숙모는 불쌍한 프리다를 자신의 딸처럼 여기려 노력합니다. 둘 사이에는 ‘아나’라는 어린 딸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시골 삼촌 댁에 맡겨진 프리다에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삼촌과 숙모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프리다는 사촌 동생 아나에게 자신의 인형들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이 그만큼 많이 사랑받는 증거라고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나가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다는 서투른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흉내를 내며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엄마 담배를 성모 마리아께 바치며 엄마가 좋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아직 삼촌과 숙모를 참으로 아빠와 엄마로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프리다의 삼촌과 숙모는 프리다에게 잘 대해주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관심으로 채워보려 노력합니다. 신발끈을 묶을 줄 알면서도 일부러 숙모에게 묶어달라고 하고, 상추를 가져다 달라는데 아나보다 더 먼저 밭으로 뛰어가 양배추를 뜯어갑니다. 그러나 숙모는 프리다의 마음을 압니다. 목욕하며 삼촌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지만 삼촌은 아나의 머리를 먼저 말려줍니다. 냅킨을 식탁 밑으로 숨겨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삼촌과 춤을 추는 아나가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프리다는 아나와 경쟁의식을 느낍니다. 아나가 놀아달라고 하는데 잘 놀아주지 않습니다. 프리다는 그런 아나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나무 사이에 숨어있으라고 하고 집으로 혼자 돌아옵니다. 숙모가 아나를 찾지만 프리다는 숙모에게 미움을 살 거 같아서 아나를 못 보았다고 말하고 아나를 찾으로 숲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하지만 아나는 팔에 깁스하고 숙모의 팔에 안겨 돌아옵니다. 숙모는 모든 것을 다 알지만 프리다에게 혼을 내거나 소리를 치지 않습니다. 숙모에게 미안해서 화단에서 꽃을 꺾어 선물했지만 그 꽃은 숙모가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프리다는 몸이 좋지 않은 숙모 곁에서 숨을 쉬는지 코에 손을 대봅니다. 엄마처럼 숙모를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나는 프리다가 수영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뛰어듭니다. 간신히 삼촌이 건져내어 괜찮을 수 있었지만 졸지에 모든 게 프리다의 잘못이 되었습니다.
프리다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자신을 사랑해 줄 가족을 찾아 떠나겠다고 가출을 감행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아나는 “난 언니 사랑해.”라고 말합니다. 삼촌 부부는 프리다를 찾습니다. 프리다는 어두워서 멀리 못 가고 다음 날 다시 나가겠다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숙모는 이런 프리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언의 위로를 해 줍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프리다는 조금씩 삼촌 부부의 가족이 되어갑니다.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프리다는 엄마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숙모에게 묻습니다. 그런 것을 숙모에게 물으면 안 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숙모는 엄마가 프리다를 매우 사랑했다고 말해줍니다.
프리다는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삼촌 부부와 아나와 정신없이 재미있게 뛰어놉니다. 아나를 질투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미 한 가족이 되어버린 자신을 보고는 그동안의 심경과 행복이 겹쳐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이것이 프리다가 원했던 행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카를라 시몬 피포’ 감독이 어릴 적 자신의 경험을 옮긴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이라는 영화 줄거리입니다.
잔잔한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프리다의 눈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혼자만 뒤처졌다는 느낌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고 질투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해봐야 점점 주위 사랑을 잃고 더 외로워지게 됩니다. 주변인으로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으로 평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춘기 전까지입니다. 사춘기가 넘으면 새로운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 이전에 부모는 자녀를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의 가족이 이미 되었다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당에 다녀도 프리다처럼 주변인처럼 살아갑니다. 뒤처졌다고 느끼고 경쟁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 상태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경쟁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만 채운다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행복이 모든 행복의 기반을 이룹니다. 사춘기 전에는 인간의 부모가 주는 가족의 행복, 그 이후에는 하느님 부모가 주는 가족의 행복입니다.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그런 마음으로 살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라고 자녀들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녀의 인생은 프리다의 여름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드님을 하느님께 바로 봉헌하신 성모 마리아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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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2)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에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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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4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작은 것이나 큰 기쁨,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마저 잃게 될 것이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율법에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 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의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된다.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 역시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한나는 일찍이 사별하였지만,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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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는 참으로 놀라운 구세주 강생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신 것으로 모자라, 사람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갓난아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길을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되셨던 것입니다.
정결례가 끝난 뒤에 장면이 전환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 시메온은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면서 구세주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음에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이렇게 두 개의 손길과 마주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신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손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품에 안는 두 팔입니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도움과 손길을 요구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두 팔로 따뜻하게 안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우리의 손길과 도움을 청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두 손과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 드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아울러 오늘은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며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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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봉헌>
예수님의 봉헌은, 태어나신 뒤에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대로 봉헌했을 때에만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봉헌입니다.) 특히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로서 예수님의 봉헌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히브 9,26-28)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히브 10,19-20.22ㄱ)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일인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지금 ‘나의 봉헌’은 “내가 살기 위한 일”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과시하거나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한 일이니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여기서 ‘여러분의 몸을’이라는 말은, ‘여러분 자신을’이라는 뜻입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는 말은, 거룩하게 살아서 ‘삶 자체를’ 봉헌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 방법입니다. (만일에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제물이나 돈을 바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봉헌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게 하라는 말은, ‘거룩한 삶’을 설명하는 말인데, 세속에 물들지 말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선’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과 ‘완전한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분별하라는 말은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성전에서만(하느님을 향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가정에서도(가족을 향해서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 (이 말은 ‘남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가정에서 이웃으로, 즉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말과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내준다는(바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봉헌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가난한 과부’는 봉헌의 모범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돈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또 표현만 보면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그 과부가 ‘온 마음’을 다 바쳤기 때문에 칭찬하셨습니다. ‘온 마음’을 다 바친 것은 사실상 ‘온 삶’을 다 바친 것입니다. 봉헌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음’은 보지 않고 ‘돈’만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봉헌의 ‘나쁜 예’가 나오는데,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입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대들이 땅을 이만큼 받고 팔았소?’ 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예, 그만큼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사도 5,8) 그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명예욕과 재물에 대한 소유욕을 모두 채우려다가 ‘하느님을 속이는’ 행동을 했습니다.(사도 5,4) 그런 위선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이 말씀의 ‘자선’을 모두 ‘봉헌’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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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에는 지역에 따라서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순창 고추장, 영덕 대게, 영광 굴비, 기장 미역, 흑산도 홍어, 가평 잣, 서산 어리굴젓, 제주 옥돔, 청도 반시, 영덕 사과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 많은 지역 연고 상품들은 천년을 이어온 진상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맛있고, 품질이 좋은 음식을 왕이 있는 궁궐에 드리는 것을 진상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각국의 정상들이 만나면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선물할 것입니다. 청와대에서는 각국의 정상들에게 받은 선물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선물은 우정과 친선을 도모하는 상징입니다. 선물은 가치와 품질이 중요하지만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성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예물도 좋지만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30년 사제생활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손수건에 돈을 넣어서 바늘로 꿰매서 주신 어르신도 있습니다. 어르신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러기와 갈대를 주제로 ‘노안도(蘆雁圖)’를 그려주신 분도 있습니다. 노안도는 노후에 편안한 삶을 기원하는 뜻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상 속 여인들의 지혜를 담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따르면 기러기는 네 가지 덕목을 갖춘 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추우면 북으로부터 남형 양에 그치고 더우면 남으로부터 북안 문에 돌아가니 신(信)이요, 날면 차례가 있어 앞에서 울면 뒤에서 화답하니 예(禮)요, 짝을 잃으면 다시 짝을 얻지 않으니 절(節)이요, 밤이 되면 무리를 지어 잠을 자되 한 마리는 경계를 하고, 낮이 되면 입에다 갈대를 머금어서 그물을 피해 가니 지혜(智惠)가 있다.” 사제로서 충실하게 살아 갈 것을 당부하며 주신 선물입니다.
30년 전 사제서품을 받을 때 특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저의 서품성구를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액자는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기에 족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을 옮길 때마다 아버님께서 붓으로 써주신 족자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뉴욕으로는 가지고 오지 못하고 집에 놓고 왔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시편 126장을 정성껏 써 주셨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는 저의 서품성구였습니다. 아버님이 써 주신 족자에서 아버님의 강직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3년 동안 저를 위해서 사제관에서 밥을 차려주고시고, 청소를 해 주셨습니다. 본당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주방에서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저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아픈 분들을 찾아서 방문해 주셨고, 함께 기도해 주셨습니다. 교리를 가르쳐 주시고, 대모를 서 주셨습니다. 제가 첫 본당신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겁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축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에 따라서 오늘 제단을 밝힐 초를 축성합니다. 초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는 빛을 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더 이상 고통과 좌절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는 스스로 타서 빛을 냅니다. 완전히 다 탈 때까지 초는 계속 불을 밝힙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느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희생을 말해 줍니다. 초는 열을 냅니다. 그 열기는 다른 것들에 전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넘치고 넘쳐서 제자들에게 전해 졌습니다. 그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의 봉헌 축일에 교회는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를 축성하면서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나눔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삶, 나누는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선행의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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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바치는 삶>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늘 바치는 삶>
하느님께서
내시니
조금씩
하느님께로
마침내
하느님 안에
하느님처럼
지으시니
조금씩
하느님처럼
마침내
하느님처럼
하느님께서
이끄시니
조금씩
하느님 따라
마침내
하느님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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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어찌 저 아이들을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찬미예수님
요즘 우리 성당에서 열심히 새벽미사를 드리고 있는 스무명의 신입 복사단 아이들을 바라보면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저의 성당은 집에서 약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특별히 겨울은 말할 수 없이 추웠습니다.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당시의 가건물 성당에 들어가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현재 우리 성당은 복사단을 중학교 1학년까지 하지만 제가 다녔던 성당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웠던 시간을 제대에서 봉사한 셈입니다.
복사를 서면서 느낀 것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그리고 신자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뛰어 놀고 사춘기 때에는 여러 가지 고민도 털어 놓았던 시간들은 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해주시던 기도와 격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복사단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특혜를 받게 됩니다. 당장 우리 성당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잠시 멈추어 있지만 신부님과 선생님들과 여름 캠프를 따로 가기도 하고 겨울 역시 그렇습니다. 졸업식 때에는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금으로 된 묵주반지를 수여하고 많은 선물도 받습니다.
오랜 시간 신부님들과 함께 하니 사제는 아이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리 없고 특별한 친구로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이렇게 복사단 어린이들이 특별한 혜택을 받고, 신자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가장 드러나는 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말 결정적인 이유는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봉헌하며 봉사를 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도 아이들을 소개하며 말씀드렸지만 이 봉헌에는 분명한 희생이 뒤따릅니다. 우리 스무 명의 신입 복사 친구들은 현재에도 졸린 눈을 비비고 나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기도 손을 한 채 미사에 참석합니다.
곧 제대 위에 올라와서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참아가며 하느님께 몸을 맡긴 채, 경건한 마음으로 신부님을 돕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온전한 의지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봉헌 생활의 세 가지 의미가 드러납니다.
첫 번째로 봉헌이란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바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마땅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의 몸, 나의 생각과 지식, 감정까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당연히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봉헌의 전제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봉헌이란 투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주님의 뜻에, 하느님 나라에 투신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나를 지으신 것도 보살피는 것도 주님이시니 주님을 기꺼이 따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의 미소함을 인식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의탁. 자신의 시간을 봉헌하여 주님께 내어드리고 그에 따르는 은총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의탁입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바치며 하느님께 투신하고 온전히 의탁하는 자세. 이러한 의지를 품고 새벽에 나오는 복사단 아이들을 감히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 대축일 이후 40일이 지난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즉 오늘은 복음 말씀에서 들은 바대로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 봉헌의 자세는 오늘 복음의 마리아에게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주님께 바치며 하느님의 뜻에 투신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마음이 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얼핏 보면 이 모든 봉헌 행위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온전히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기도를 하고 성당에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더불어 우리의 것을 봉헌하기 위한 태도가 반드시 동반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 그러므로 모든 것을 봉헌하고 의탁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하느님의 성실한 은총을 느끼게 되며 그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 모두가 저 작고 어린 복사단 아이들을 사랑하듯 주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이야기 하듯, 만군의 주님, 영광의 임금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말라키 예언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여라.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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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지목 안셀모 신부님]
<나>
신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 치른 논술 시험의 질문이었습니다. ‘복음삼덕’ 에 맞추어 자신의 사제 상을 서술하시오. 시험장은 도서관의 미디어실입니다.
칸막이 책상에 앉았고, 먼저 복음삼덕이 무엇인지를 떠올렸습니다. 다행히 그것이 성직자, 수도자들과 같이 봉헌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덕임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덕목입니다.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입니다.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세 가지 덕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 풀이를 했습니다. 가난한 삶과 순결함,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 떠올랐습니다. 불현듯,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떠나셨던 수녀님이 떠오릅니다.
새벽 미사를 마치고, 바퀴가 달린 가방 하나를 끌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나갔기에, 버스에 오르시는 수녀님을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홀연히 부름을 받고 떠나시는 수녀님의 단아한 미소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짐은 보잘것없이 적었고, 가벼웠습니다.
아쉽고 서운한 저의 마음과 달리 평온하고 나긋한 목소리에서 갈라지지 않은 초연한 마음을 엿보았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시는 곳이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길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불러주셨고 이끌어 주신다는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지금은 주문진에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뒤에는 소금강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처음의 시험 문제를 다시 읽고, 이제껏 잘 써 내려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깊은 한숨이 나왔습니다.
옆 창문으로 사목 센터를 내려다 봅니다. 선배 신부님을 떠올려봅니다. 공소에 계신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올해도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주교님 사진도 봅니다. 옆에 교황님도 봅니다. 죄송합니다. 떠오름 안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이 들립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바쳤으니, 더 가질 것도, 마음이 갈릴 필요도 없을 테지요. 더욱이 내 주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이니 기쁘게 받아들이셨을 터, 이 세 가지 덕은 결국 한 가지를 봉헌함으로써 주어지는 은총이겠습니다.
봉헌 축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여러 단체와 모임뿐 아니라 평일 미사 참례와 아침·저녁 기도를 바침과 같은 노력이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어 매우 값진 사랑으로 받아서 후하게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기를 봉헌하는 부모의 마음을 잘 간직하십시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덕행을 이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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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대우 모세 신부님]
<봉헌의 결정체인 성모 마리아님>
피렌체 성 마르코 성당에는 도미니코 수도원을 그대로 보존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복자 안젤리코의 유명한 작품 ‘수태고지’가 수도원 2층 입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ㄴ”자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정면에 보이는 벽면에 아름답게 그려진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수도원 정원으로 찾아온 듯한 가브리엘 천사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날개를 펼쳐 든 반면에 마리아는 소박하고 여린 모습으로 두 손을 겹쳐 가슴 위로 다소곳이 모았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순명하는 영혼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밝은 얼굴빛과 소박한 옷차림으로 그려졌습니다. 저는 이 그림에서 봉헌의 참된 아름다움을 만났습니다.
도미니코 수도원 안에는 꽤 넓은 벽면이 많은데, 하필 계단을 올라 모든 수사들이 매번 통과해야 하는 곳에 이 그림이 놓였을까요? 아마도 수도자 자신이 성모님처럼 주님의 말씀을 꼭 껴안고, 한평생 봉헌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을 매 순간 되새기려고 했던 의도일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수도자의 성대서원 미사가 거행되는 점도 이와 같습니다. 봉헌의 삶을 사는 수도자는 하느님의 뜻을 영적인 눈으로 알아보고 가슴으로 품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봉헌의 결정체인 성모 마리아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에 따라 첫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으로 먼 길을 떠납니다. 그들의 품에는 이제 말씀이신 그리스도, 아기 예수가 담겨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예언자 시메온은 상반된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루카 2,34-35)
봉헌,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봉헌이란 그 과정에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나, 그 결과는 기쁨과 영광입니다.
봉헌은 매 순간좋든 나쁘든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제안, 그분의 뜻을 가슴으로 껴안는 것입니다. 두 손을 겹쳐서 곱게 껴안는 것입니다. 또한 여리고 소박하게 품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처지와 상황들, 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한계들을 곱게, 또 곱게 껴안고 품는 것이 아닐까요?
봉헌은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시련의 극복이요, 그분의 소리를 향한 섬세한 귀 기울임이며, 종국에는 하느님의 몽당연필이 되기 위함 순명입니다. 그리하여 내 가슴속에 순명과 청빈, 정결로 갈고 닦아 빛나게 된 보석들을 하느님께 받들어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껴안을 때, 우리 가슴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머무십니다. 그 말씀은 영혼 안으로 스며들어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믿고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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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학민 안드레아 신부님]
평내 성당에서 하느님과 신자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학민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모든 교구 신자분들께 하느님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시간을 되뇌어 보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를 서품 성구로 삼아, 주님께 봉헌된 사제가 된지 일년하고 꼭 이틀이 지났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당신의 삶에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 번 주님께 제 영을 받아달라고 떼써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모님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기를 하느님께 봉헌한 사건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사건 이전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 곁으로 보내주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성모님이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는 마음과,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은 마음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사랑해서, 서로에게 내어준 사랑의 봉헌물 예수님, 그러한 예수님은 사랑 하나로 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인 사랑, 우리가 이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게 자신의 것을 서로에게 내어 줄 수 있을까요?
본당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미사 강론 끝에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 말을 전합니다. 얘들아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서로 뻘쭘하고 당황하던 시간을 거쳐, 차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말투가 변해가며,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내어 놓은 최고의 봉헌물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에 감사하고, 우리 역시 사랑의 마음을 되돌려 드리는 은총 가득한 시긴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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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철학자 츠다 이츠오는 그의 책 ‘침묵의 대화’에서 일상 속 평범한 행동을 ‘신을 모시듯’ 하라고 권합니다. “비질하거나 목욕하는 것 혹은 요리하는 순간은 신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표현할 기회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손길이 묻어있는 곳이기에 어디에서든 하느님을 느낄 수 있고 또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헌신을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이지만, 어디에도 안 계신 하느님인 것처럼 생활합니다. 그래서 정성을 기울이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생활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바뀌지도 않고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구는 “하느님 믿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말합니다. 물론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또 망신을 주려고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말만 하고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는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약성경의 정결례 규정(레위 12,1-8)에 따르면 산모가 남자아이를 낳으면 40일간, 여자아이를 낳으면 80일간 정결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기간이 지나면 속죄 제물을 사제에게 바치고, 사제는 이 제물로 산모의 부정을 벗겨줍니다.
또 첫 번째 남자아이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탈출기 13장 2절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 바친 뒤에 되돌려 받아야 했습니다. 이 규정에 따라 성모님과 요셉 성인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고 제물로 속량 예식을 치른 것입니다.
아직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였던 예수님의 상태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평생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봉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주님의 봉헌 축일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봉헌 삶에 대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입으로만 봉헌된 삶이 아닌, 온몸으로 봉헌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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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개발되어야 합니다.>
몇 년 전, 영국 의학 전문지 “British Medical Journal”의 의학 종사자 대상 설문 조사에 따르면 1840년 이후 의학계의 성과 1위는 하수도와 깨끗한 물이었습니다. 항생제, 마취, 백신, DNA 구조 발견 등을 생각할 것 같았지만,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볼 때는 하수도와 깨끗한 물이 의학계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 보편화된 하수도 시설 덕분에 인간은 수인성 전염병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실제 수명이 35년가량 늘어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저소득 국가, 개발 도상국에서 물과 위생 문제로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하수도와 깨끗한 물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인간을 위해 더 깨끗한 자연을 위해 최소한의 개발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개발 금지를 외치는 것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환경을 위해 잘 개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더 큰 지혜와 바른 판단력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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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다림의 기쁨>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가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는“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은 “나의 소망은 주님의 삶 안에서 죽고 묻히는 것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신앙과 삶은 하나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 30,18)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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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맞이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말라 3,1)
말라키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에 앞서 보내시는 "계약의 사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인류가 고대하며 기다려온 메시아시지요.
"홀연히"
이 말씀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갑작스럽게"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는 인간의 편에서 볼 때 갑작스럽게 닥칠 미지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원자 주님께 대한 기다림의 끊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분의 도래는 마음을 다해 바라고 찾고 기다리는 사이 성큼 다가올 순간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봉헌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섰을 때에, 시메온도 마침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옵니다. 전 생애를 걸쳐 구원자를 고대해 온 시메온 안에 온 인류가 들어 있기에, 그와 구원자와의 만남은 말라키 예언자의 전언 그대로입니다. 부모와 함께 "홀연히" 성전에 들어선 예수님을 성령에 이끌린 시메온이 영접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것이지요.
"제 눈으로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그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성전을 다녀갔을 겁니다. 권력가나 학자, 예언자, 현자 등등... 그중에는 잠시지만 시메온의 가슴을 뛰게 한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가 구원을 만났다고 선포합니다. 한 가난하고 소박한 부부의 아기에게서 구원을 포착한 힘은 오랜 세월 쌓인 기다림이 진액이 되어 흐를 만큼 간절했던 바람과 성령 덕분입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루카 2,37-38)
그날 성전에서 예수님을 뵈온 또 다른 이는 한나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읜 후 평생을 하느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한나처럼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 영감을 받은 이들은 세상 재물이나 관계에 매임 없이 자유로이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지요. 오늘도 수많은 한나들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릅니다.
주님은 "홀연히" 찾아와 당신을 모조리 내주심으로 시메온, 한나 안에 깃든 인류의 사랑에 응답하십니다. 사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들보다 더 간절히 주님께서 이 만남과 일치를 기다리십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거룩한 순간이 시메온과 한나의 증언으로 인류 역사 안에 새겨졌습니다. 육화하신 성자께서 성부께 봉헌되는 순간, 인류는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의 현존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신랑을 맞이한 신부처럼 사랑으로 전율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교회는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축성된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성소를 위해 기도합니다. 수도자들이 시메온처럼, 한나처럼 주님을 섬기며 사랑의 삶을 살기를 함께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도 안에서나 제도 밖에서나,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을 섬기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숨은 기도자들의 봉헌 또한 주님께 참으로 값지고 귀하답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모시고 섬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봉헌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실 것이니, 여러분은 진정 복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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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일상의 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인 시간에 무엇을 담을까요?
일상의 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인 시간에 무엇을 담을까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적어(目的語)는?
“오늘날 인생의 시간은 늘어났지만 그 시간 안에 <의미>를 담는 법을 상실했다.”
인간은 유일하게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는 동물인데도 삶 안에 의미와 시간을 담는 법을 잃어버리고 산다. 신앙인은 일상의 시간 안에 무엇을 담을까요? 신앙의 단어 하나만 고른다면, 당신의 인생의 단어는 무엇일까요? 왜 삽니까? 인생을 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놓아서는 안 되는 질문이겠지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무엇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이며, 한 단어로 말하라면 무엇일까요? 인생을 건 목적어는?
-정철의 「인생의 목적어」에서는 설문에 답한 총 2,820명의 인생 목적어 3,063개 중 50개가 이 책에 실렸습니다. 1위, 가족: 488명/ 2위, 사랑: 425명/ 3위, 나: 378명/ 4위, 엄마: 331명/ 5위, 꿈: 328명/ 6위, 행복: 322명/ 7위, 친구: 302명/ 8위, 사람: 299명/ 9위, 믿음: 256명/ 10위, 우리: 220명…16위, 돈: 110명/ 17위, 건강: 105명…
그럼 ‘아버지’는 몇위일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23위 : 고작 71명이었습니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깊이 성찰해야겠군요. ‘자식’은 몇 순위일까요? 모든 부모의 목적어가 바로 자식이라는 것을,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자식이 1위 가족에 포함되기는 하였으나, 50위 순위 밖으로 밀려났을까요? 물론 젊은이들이 설문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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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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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라삐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메온이 찬미합니다. 이 찬미를 흔히 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릅니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주며,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풀어주셨다’, ‘쉬게 하다’, ‘죽게 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주며,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다른 민족들”에게도 “계시의 빛”이 비추심을 말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일어나고” 곧 구원되고, 그렇지 않는 이들은 “쓰러지고” 곧 멸망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축복이 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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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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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2,22)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복음삼덕인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서원함으로써,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이 땅에서 예언자의 삶인 증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도자들과 오늘 서원을 발하는 수도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더 수도자들과 수도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봉헌되십니다. 주님께 봉헌되실 이유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한 '봉헌의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봉헌하신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 달려 죽기까지 끝까지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따라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서약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주님봉헌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는 봉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인지 한번 깊이 성찰해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미사 때 사용할 제대초와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초는 자신을 태움으로써 빛을 냅니다. 초가 태워지지 않으면 결코 빛을 낼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봉헌되는 모습을 목격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2)
너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는 봉헌의 삶으로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계시의 빛'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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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봉헌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봉헌의 삶이
있다.
봉헌의
역사는
은총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으로
은총의 삶이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봉헌이다.
봉헌은
하느님의
기쁨이며
하느님의
선물이다.
남는 것은
봉헌의
삶뿐이다.
봉헌은
성장이며
봉헌은
믿음이며
봉헌은
실천이다.
봉헌 생활로
우리의 삶은
빛과 소금으로
변화된다.
봉헌은
우리의
내면까지
변화시킨다.
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봉헌이 있다.
봉헌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의 현실을
봉헌하는 것이다.
믿음의 삶은
봉헌의 삶이다.
수도공동체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봉헌의 삶이다.
촛불을 켜듯
봉헌은
빛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봉헌의 삶이
소중한 것은
서로를 살리기
때문이다.
봉헌으로
우리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봉헌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삶을 바라보는
중심이다.
생명의 길은
봉헌의 길임을
믿는다.
하느님의
사람은
봉헌의 삶을
살아간다.
이 땅에서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소박한 많은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들의 삶이
이 사회를 밝히는
촛불이고
행복한 소금의
삶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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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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