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2.28, 마산3.15 그리고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상념(想念)
이승만의 참회, 문재인의 뻔뻔함!
문무대왕(회원)
4.19혁명 63주년을 맞았다. 4.19세대로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의 개인적 소회(所懷)를 밝힌다. 그리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구 2.28학생민주화운동"과 부통령 선거부정 규탄 3.15마산의거(민주화운동)에 얽힌 이야기 몇 토막도 소개한다.
보도에 따르면 '4.19혁명동지회'회원들이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화해(和解)의 뜻을 밝혔다고도 했다. 이들과는 달리 4.19혁명 관련단체 명의로 '이승만대통령과의 화해'는 시기상조라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화해든 시기상조든 '4.19혁명'은 격동기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었다. "역사는 화해"라는 격언도 있다. 천년 이상 중국 역대 국가로 부터 짓밟히고 무시당하며 속국(屬國) 취급을 당하고도 화해하고 국교를 맺었다. 일제치하 36년간의 민족적 수모와 쓰라린 고통을 받고도 국교를 정상화했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 괴뢰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군과 국민 수백만명이 살상되는 참상(慘狀)을 당하고 천만 이산가족이 고향을 등지고 살게 만든 원수의 무리인 북한하고도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4.19혁명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하지 못할 이유와 명분도 없다고 본다. 가해자는 반성과 사과를 실천하고 피해자는 용서하는 것이 돌아가는 인간세상의 윤회(輪廻)가 아니겠는가? 먼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공과(功過)부터 생각해 보자. 공(功)으로는 독립운동에다 건국대통령, 6.25남침으로 인한 위기의 대한민국 구출, 한미동맹 체결 등이 있다. 과(過)로는 장기집권을 위한 부정선거시도와 독재자라는 비난이 있다.
부정선거의경우 자유당의 이승만후보는, 당시 야당의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는 호남선열차에서 그리고 조병옥은 미국육군병원에서 선거캠페인도중 서거했기 때문에 경쟁상대가 사라진 상태였다 .굳이 대통령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를 획책할 명분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자유당 부통령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려고 부정선거를 시도하다 국민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런 사태가 바로 "대구 2.28학생민주화운동"이요, 마산3.15의거였고 4.19혁명이었다.
이같은 국민저항에 대한 이승만과 이기붕의 사과와 반성은 분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하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설 줄 아는 윤리와 도덕을 갖춘 훌륭한 국가수반이요, 정치 지도자였다.
수많은 학생과 국민들이 피흘리며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외치자 즉각 하야하고 노구(老軀)를 이끌고 쓸쓸하게 하와이로 갔다. 눈을 감고서야 고국의 품에 안겨 안장(安葬)됐다. 이기붕 일가의 경우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일가족이 모두 극단적선택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謝罪)했다.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부모형제를 사살하고 권력에 대한 더러웠던 탐욕을 청산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가족이 보여준 참회(懺悔)의 정도가 이 이상 더 어떻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요즘 5년동안 "삶은 소대가리"라는 수모를 김정은로부터 받으며 '남쪽 대통령'으로 전락했던 전직 대통령이 누구였던가? 나라를 망치고 민생을 도탄(塗炭)에 밀어넣고도 "5년동안의 성취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과거로 돌아갔다"며 헛소리나 하고 있는 뻔뻔스런 대통령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해 보라.
5년간의 성취라니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가?
이승만의 솔직담백하고 깨끗한 처신과는 너무 대조적이지 않는가? 전과 4범에다 얽히고 섥힌 사법리스크로 코너에 몰려 대통령병에 걸렸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어느 증증 환자보다는 이기붕 일가의 극단적 선택이 훨씬 동정의 여지가 있지 않는가?
1960년 2월28일 대구 시내 8개 고등학교(경북고.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대구고.대구농림고.대구공고.대구여고.대구상고) 학생들이 일요일 등교지시에 저항하며 거리로 나섰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의 선거유세에 학생들의 참가를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데 대한 항거였다. 학생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일요일 등교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학생민주화운동'이었다. 이같은 항거의 중심에 경북고등학교 학도호국단 부위원장 이대우군이 있었다. 이대우는 경북 상주출신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윤리학과 교수가 되었다가 정년퇴직했다. 이대우는 1988년 제13대 국회원선거에서 부산대학교소재지인 부산금정구에서 YS가 이끄는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민주정의당 후보 김진재에게 패했다.
부산시내 16개 선거구 가운데 민주통일당 후보 이대우만이 낙선했다. 후일 이대우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부산지역 민주통일당후보 지원유세에 나선 YS가 유독 이대우의 선거구만 빼놓고 지원유세를 했다고 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를 물었더니 참으로 묘한 답을 내놓았다. "이대우의 경쟁상대인 민정당 김진재가 재력가인데다 YS와 같은 00김씨 종친이었기 때문에 부담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정치판에서도 정치 인연보다 혈연(血緣)이 소중한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과연 YS에게 혈연이 더 소중했을까? 이같은 궁금증은 YS와 이대우 두분이 이젠 고인(故人)이 되었으니 영구미제로 남을수 밖에 없음이 아쉽다.
1960년 3월15일. 경남 마산 시가지에는 부통령 선거부정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외침과 분노가 메아리쳤다.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투표부정의 방법으로 3인조, 5인조 등의 투표 감시조와 대리투표등이 자행되자 마산시민들이 길거리로 몰려 나왔다.
분노한 시민들을 경찰이 저지하자 시위는 격렬해졌다. 전북 남원 출신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군의 머리에 최루탄이 박혀 바다에 던져진 시신이 부산일보의 특종보도로 뉴스가 터지자 시민들의 항거는 과열됐다. 부산문화방송은 부산에서 100여리 떨어진 마산까지 시위현장에 취재진과 이동방송중계차를 출동시켰다. 부산문화방송의 전파에 외신기자들이 모두 귀를 기울이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부산문화방송의 시위현장 생중계는 국영방송 KBS의 오락 교양 중심 전파에 익숙해 있던 청취자들에게 시위현장의 충격적인 뉴스로 국민들의 청각을 자극했다. 마산 시민들의 시위소식은 부산문화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파 매체 즉 방송이 언론기능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지평을 연 계기가 된 것이다.
이같은 쾌거를 연출지휘한 장본인은 당시 부산문화방송 보도과장이자 아나운서실장인 28세의 청년방송인 '전응덕'이었다. 전응덕은 KBS부산방송국 아나운서였으나 1959년 4월15일 한국 최초의 민간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 주식회사에 스카웃되었다. 카랑카랑한 서울 말씨의 전응덕이 젊은 기백과 패기로 중계방송을 총괄 지휘한 당시의 정의로운 심장의 맥박은 지금 들어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부산문화방송은 당시의 녹음테잎을 "마산3.15 의거재단"에 기념으로 기증했다. 전응덕은 그후 서울로 올라가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경영진이 됐고 KBS이사(4회) 등 한국방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응덕은 1964년 도쿄올림픽 출전 북한의 신금단 육상선수가 남한의 아버지 신문준과 상봉하는 장면, 서강일 선수의 해외 원정 중계방송 등 특종보도도 많이 했다. 전응덕은 방송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4.19혁명공로상' 수상도 했다. 전응덕은 방송현장을 떠나서는 '광고단체 총연합회회장' 등 방송관련 활동을 했다. 전응덕은 현재 92세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보이면서 건재(健在)하다.
장면 정권은 부산문화방송이 마산3.15의거 현장의 생중계 방송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다음과 같은 표창장을 수여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부산문화방송의 전파는 민주방송의 횃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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