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서구의 예술가들에게도 '세계화'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구미의 예술가들에게 이 '세계화'는, 우리 같은 약자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면서도, 주로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주제로 묶어볼 수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 용어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1930년대 독일 사회를 성찰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요소가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것을 가리킨다. 크게는 사회 발전 단계가 달랐던 동양의 많은 사회들이 서양 자본주의 문화의 급속한 이입으로 인하여 숨가쁘게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작게는 질주하는 '세계화'에 의하여 지구의 각양각색이 거의 '동시 패션'이 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런 경향에 주목하여 서구의 예술가들은, 예컨대 광화문 흥국생명 앞에 설치된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이나 청계 광장 입구에 설치된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일명 소라탑) 혹은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형 거미 '마망' 같은 작품들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의 변주와 복제로 서울만이 아니라 전세계 주요 도시로 확장하여 '동시 패션'의 국면을 보여준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스페인 빌바오구겐하임)
그것은 스케치 하나로 여러 개 복제해서 팔아먹는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으나, 그렇게 사시로 보기보다는, 이 세계의 기이한 단일함에 대한 반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지금 그들은 그런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음악가(동시에 무대 연출가)인 '맥시멀리스트' 하이너 괴벨스는 연작 '대체된 도시들'(surrogate cities)를 여러 도시에서 공연을 한다. 그런데 단순히 '순회 공연'이 아니라 그 도시의 역사적 흐름이나 공간적 특징 속에서 이를 악착같이 변주한다. 보편과 특수가 맞부딪친 '동시성'의 현장에 직면하는 것이다. 아래 영상은,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서구인들이 현대 문명의 한계 상황에 따른 탈출구를 모색할 때마다 언급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테마로 작곡한 것으로 클랑 앙상블이 연주한다.
이 작품 <월든>에서 보여주는 하이너 괴벨스의 파탄난 음렬들은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틀, 그 위험천만한 저거노트가 올라탄 '세계화'라는 일방통행로, 이 외통수의 질주에서 발생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별적이며 따라서 고유하고 미묘한 기억들의 붕괴, 그런 보편과 특수의 무지막지한 혼성모방과 그에 따른 삶의 비의성의 상실 등 오늘날 서구 예술가들이 자책하는 심정으로 들여다보는 바와 겹쳐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진실한 작업을 소설로 꾸준히 해온 작가가 바로 르 클레지오이다.
르 클레지오는 바로 그러한 작업의 극점에 서있는 사람으로 서구 예술가가 취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현대의 문명과 오늘의 상황에 대해, 그가 꾸준히 지적인 관심과 감성의 연대를 표명해온, 그러나 그 자신이 내면화할 수는 없는 동시대 제3세계의 작가들의 격렬한 전투성보다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진실을 들려준다.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머물렀으며 1963년에 발표한 <조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될, 현대 문명의 공격성으로부터 이탈하여 인간 내면에 반드시 저장되어 있을 거룩한 자연 치유력을 환기시키는 데 몰두해왔다.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곳곳에서 오랜 세월 생활하면서 르 클레지오는 제국의 시대가 낳은 식민의 상처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자연 친화적이며 신화적인 상상력의 어떤 지평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아래 인용한 것은 소설 <매혹>의 일부인데,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 대립이 아니라 진실로 투명한 자연성의 회복을 갈망하는 르 클레지오의 사색의 한 면모를 볼 수가 있다. 이번에 르 클레지오를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이 그를 '인간성 탐구, 관능적 환희, 시적 모험'의 작가로 높이 평가한 것의 작은 증거가 되는 대목이다. 문맥 해석이나 작품 전체의 분석을 떠나서, 그저 문장의 표면만 스케이팅 해봐도, 우리가 이미 오래 전에 아래 인용문의 세계로부터 이탈해 버렸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문장과 그것이 가리키는 세계는, 좋은 뜻에서,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자연친화적인 옛 시절의 삶을 환기시킨다. 이 점에 대하여 소설가 윤대녕은, 몇 해 전에 가진 나와의 인터뷰에서 매우 호의적으로 높이 평가한 적 있다.
마치 북극의 오로라 속에 갇힌 듯 우리 주변을 감싼 붉은 빛의 거품 속에 앉아서, 나는 음악과 같은 바람 소리와 도시의 거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부르릉거리는 소리 속에서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해, 내 사랑." 언덕의 숲 속에서, 바람 소리와 소나무 향기와 모기들과 더불어, 그녀와 입을 맞추고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그녀와 자고 싶었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살을 만지고, 고통스러운 듯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밤을 보내게 되면 그런 일이 있게 되는 법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떨고 있었고,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2001년에 화순 운주사를 방문한 르 클레지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지난 2001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전남 화순 운주사에서 애틋한 시를 쓰기도 했고 지난 해에는 이화여대에서 강좌를 맡기도 하였고 근래에 개봉된 한국영화 대부분을 섭렵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지한파'라고 쓰는 기사도 보았는데, 그렇게 단정 짓기보다는, 기실 '프랑스인'이라는 자의식도 특별히 갖지 않는 르 클레지오가 온 세계의 단편과 조각을 모아서 전체로서의 세계상이라는 상상의 퍼즐을 맞추기 위한 오래된 지적 작업으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