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돈/송경동-
처 아버님은 빨치산이었다
3년을 산에서, 그리고 3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왔다
평생 보안관찰로 고향에서도 살 수 없었고
수박등 장사 우산살 장사
안해본 것 없다고 했다
결혼하겠다고 찾아뵌 첫날
노동자고 월세방에 살며
더더욱 생활을 돌이켜 반성할 마음이 없다 하자
노기 띤 음성으로
음, 돈이 있어야 하네 돈이, 하셨다
그때 정말 돈이 한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내게 돈 이야기 하시지 않았다
자신도 죽을 때까지 방 한칸 없어
셋째딸네 집에서 여섯 달 누웠다 가셨다
가끔 욕창이 난 등 긁어주고
손 다리 주물러드리면 마냥 행복해하셨다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에
봉분 없이 깨끗이 묻히셨다
십수년이 흘러 나는 아직도 생활을 반성하지 않고
전문 시위꾼으로 집회현장을 쫓아다니지만
가끔 그의 어조로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하곤 한다
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젠 장인어른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돈/김성규-
돈 벌러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를 거쳐 어느 소읍에 내리면
시골에서는 대략 잘 지어놓은 고서관이 보이고
똑똑하고 무료한 표정의 아이들이 기다린다
점심도 거르고 자판기 커피를 들고 들어간다
최대한 즐겁지 않은 것을 인내할 수 있는
시골에서 찾기 힘든 나름 우등생 아이들에게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늘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
- 실패하기 위해 이런 데 나와서 방황하지 말거라
수업을 하며 아이들에게 허황된 자들
자살했거나 이미 자살이 가까워진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며
한때 이 사람들도 너희들같이 좋은 머리를 가진 아이들이었고
그래서 쉽게 이 지옥으로 빠져들었단다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곳일수록 호기심은 번뜩이고
되도록 다음 수업 때까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오너라
그러나 표정을 보면 이미
자기를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아이가 있다
써온 글을 읽어보면 너는 이미 잘못 날아왔구나
나의 선배들이 어떻게 이 판에서 살다 죽어갔으며
나와 나의 후배들이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성공해도 실패해도 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야 하는
돈 때문에 인간이 인간의 밑바닥을 보게 되고
스스로 뼈다귀가 자기를 핥아먹으며 살아가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돈 때문에 그런 말을 삼가게 된다
서둘러 김밥과 라면을 먹고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
내 몸에서 실패한 자들이 풍기는 냄새
간신히 집으로 기어들어와 소주와 김치를 방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날은 돈을 쥐고 빼앗기고 빼앗는 끔을 꾸고
자면서도 온몸을 긁으며 소리 지르고 허우적거린다
-돈 5/한길수-
돈의 양면은 물론 다르다
페이스북 만든 저커버그는
딸 출산 기념으로 99% 유산을
생전에 기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통해
선행하는 이들의 앞면이 있다면
알몸의 여자를 지붕에서 아래
수영장으로 집어 던지는
백만장자 포커겜블러 댄 빌제리안
여자는 다리가 부러져
목숨이나 부지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악행은 멈춰지지 않는다
알몸의 배위에 골프공 놓고
티샷 자세로 선 토니 투터니
그는 자수성가한 인물이지만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기고
생체실험 도구의 소품으로 여기는
하늘 아래 사는 우리들 모습이다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세상
돈 돈 돈하다가 정신까지 잃고
미쳐버리는 세상이 되는 건 아닐지
법보다 더 위에서 군림하려는
돈의 뒷면도 있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돈의 앞면이
세상을 바꾸는 더 큰 힘이 된다
-꽃과 돈/정호승-
돈을 벌어야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돈이 있어야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시대를
나는 죽지 않고
너무나 오래 살아왔다
이제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꽃을 빨래하는 일이다
꽃에 묻은 돈의 때를
정성 들여 비누 칠해서 벗기고
무명옷처럼 빳빳하게 풀을 먹이고
꽃을 다림질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돈을 불태우는 일이다
돈의 잿가루를 밭에 뿌려서
꽃이 돈으로 피어나는 시대에
다시 연꽃 같은
맑은 꽃을 피우는 일이다
-돈/박용하-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았고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돈/우애자-
날개도 없이 발도 없이
방방곡곡 누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사람 다시 불러들이고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 저승으로 데려가는
심줄보다 질긴 올가미 같은 돈이 나를 노려본다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목숨을 유지하는 소중한 돈
억센 줄기의 힘이 오늘도 나를 시험한다
시뻘겋게 눈을 뜨고 귀를 세운 돈
맑은 영혼인양 탈을 쓰고 뽐내는 돈
불쌍한 척 고개 떨군 채 독버섯처럼 자라는 돈
피곤한 하루가 끝날 때면
나를 비우고
눈 달린 돈, 귀 달린 돈
한 푼 두 푼 세어본다
돈이 나를 세고 있다
-돈을 보다/조인선-
지폐 속에는 얼굴이 숨어 있다
빛을 통과한 자만이 볼 수 있는 그림자의 힘이다
기계가 인식하는 홀로그램의 양에 따라 액수도 다르지만
쾌락을 맛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손끝의 감각도 다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똑같은 돈 없듯
어둠에서 설핏 본 얼굴만 얼굴인 줄 알았다
지폐 속에 그려진 무릉도원과 매화마저
돈이 추구하는 이상향인 줄 몰랐다
티끌 같은 한 점이 모여 눈동자가 되고 입술이 되니
그것이 모여 역사를 이루는 사막 그 자체인 줄 몰랐다
태초에도 언어가 있었을까
시간의 힘은 어디서 오기에 여기까지 왔을까
모든 혁명은 실패하고
꿈은 어디로 가시려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여백을 가득 채운 희미한 사랑을 끝내 나는 읽지 못한다
천지를 가득 메운 언어의 피를 듣지 못한다
손끝에 묻어나는 신음 한 조각만이
온전히 보이고 들릴 뿐
두 손 감싸 쥔
새벽이 보여주는 무표정한 윤곽에
형체를 확인하느라 애쓸 뿐이었다
-돈/유종호-
신사임당은 사람 볼 줄 모른다
율곡도 사람 볼 줄 모른다
대왕 세종도 마찬가지다
사람 볼 줄 안다면
왜 나와 착한 내 친구 천수 호주머니에
돈이 없는가
한국은행은 앞으로 돈 만들 때
대왕님께 안경을 쐬워 드리시오
그리고 대왕 세종께서도
큰길로만 다니시지 마시고
골목길도 다니시오
-헌 돈이 부푸는 이유/채향옥-
수금해 온 낡음낡음한 돈을 세다 만난 '이상순 침목계 돈' 하나, 둘, 셋, 넷, 다섯 합이 오만원 어쩌면 흩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을까 저희끼리 어깨동무를 했나 그 결속이 놀랍다 중얼중얼 헤아리던 숫잘랑은 팔랑 날아가 버린 지 오래 기왕에 잊어버린 셈은 잠깐 뒤로 미루고 이상순과 그의 친목계에 경의를 표한 후 아무쪼록 그들의 침목이 돈독해지기를 바래보는 것인데 뻐꾸기는 마감 시간이 다 됐다고 성화를 부린다 처음부터 다시 하나, 둘, 셋 새 돈의 빳빳한 풀기가 사라지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벙글벙글 넘어가는 낡디 낡은 헌 돈
-돈/고두현-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다/전기철-
아내는 나를 조금씩 바꾼다. 쇼핑몰을 다녀올 때마다
처음에는 장갑이나 양말을 사오더니
양복을 사오고 가발을 사오고
이제는 내 팔과 다리까지도 사온다. 그때마다
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다.
당신, 이렇게 케케묵게 살 거예요, 하면
젊은 아내에게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만다.
얼마 전에는 술을 많이 마셔 눈이 흐릿하다고 했더니
쇼핑몰에 다녀온 아내가 눈을 바꿔 끼라고 한다.
까무러칠 듯 놀라며 어떻게 눈까지 바꾸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들이 구식이라 그래요, 한다.
내 심장이나 성기까지도 바꾸고 싶어 하는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서 쩔쩔맨다.
열심히 운동을 하여 아직 젊다고 해도
아내는 나를 비웃으며 나무란다.
옆집 남자는 새 신랑이 되었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것도 못 참아요, 한다.
시무룩해진 아내가 안쓰러워 그냥 넘어가곤 하는데
아침 일찍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
거울 속에서 내 자신이었을 흔적을 찾느라
얼굴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내 모습이 없으니
밖에 나가면 검문에 걸릴까 두려워 일찍 귀가하곤 한다.
-돈/김명인-
한때 나는 대학 입학금을 마련 못해 사흘 밤낮을
꼬박 울며 지샌 적이 있다
비웃지 마라, 그땐 그게 절박했었다
그렇다. 두 형들이 포기한 대학을
끝까지 마쳤던 것은 돈에 대한
맹목의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선탄부로 가정교사로 마침내 내 대학이 끝이 났을 때
배운 것이야 무엇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이 되었다
이 나라에서 돈 버는 길이란 투기거나 사기라고
일깨워준 저 7,80년대의 경제를 지나와
내가 집칸이나 장만한 것은 그 길에
밝아서가 아니라 아내의 맞벌이 덕이었다
그러나 돈이 돈을 거둬들인다고 뒤늦게 한탄한 아내여
남편은 백면의
여전히 주변머리 없는 서생일 뿐
무슨 주제로 헐거운 돈을 만났겠는가
그대의 눈썰미가 마련한 방 한 칸 차지하고 난 뒤로는
자주 목이 말랐고 자꾸만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번도 널 풍족히 누릴 수 없었다 해도
돈이여, 어느새 너는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나는 제게서 철저히 배반당하는 꿈을 요즈음도 꾼다
너를 돈이라 말하면 네가 돈이겠느냐
그게 인생의 목표쯤은 아니라 해도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