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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입구에서 정전으로 가는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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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묘루 앞 연못의 방지에서 자라는 소나무와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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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동쪽 소나무와 단풍나무로 가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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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의 조용하고 경건한 종묘 숲길
도심에 있어 접근이 용이한 종묘는 1995년 12월에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1년 5월에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한 나라를 떠받치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란 어떤 뜻일까.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또는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올리는 왕가의 사당이다. 제향이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높여서 한 말이다. 민가에서는 사당을 가묘(家廟)라 하고 왕가의 사당을 종묘라고 한다. 사직에서 사(社)는 토신(土神)이고 직(稷)은 곡신(穀神)으로 서 자연신에 제사하는 곳이 사직단(社稷壇)이다. 나라에서는 종묘를 세워 선왕과 선후에 제향을 올리고 사직단을 세워 국토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다. 주례(周禮)에 “한 나라가 도읍을 정할 때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도 포함하여 조영되었다. 나라를 세우고 궁궐을 조영할 때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동쪽)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쪽(서쪽)에는 사직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종묘는 조선조 당시에 한성부 동부 연화방(漢城府 東部 蓮花坊)이었으며 면적은 약 19㏊이다. 종묘의 지세는 북쪽의 북악산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매봉 아래 나지막하게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양택인 궁궐은 그 앞이 넓고 훤하게 트이고 음택인 종묘는 지세가 꽉 짜여야 명당이라고 한다. 자연림은 그대로 보전하였고 화계나 정자 및 누각도 짓지 않았으며 제향에 필요한 시설만을 배치하였다.
도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므로 접근하기 좋은 종묘는 입구부터 인파로 넘쳐난다. 일제 때 변형시킨 종묘 주변은 과거에는 상당히 지저분하였으나 최근 들어 말끔히 정리하고 나무를 심어 공원을 만들었다. 작은 언덕을 만들어 나무를 심고 길가에는 통 속에 나무를 심어놓아 어색하지만 그늘과 공간에는 갈 곳 없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얼마 전만 해도 탑골공원이 노인들의 쉼터였는데 이곳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우리도 빠른 세월 탓에 곧 노인이 되겠지만 하릴없이 방황하는 모습에서 풍요보다는 빈곤을, 또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마땅히 쉴 만한 장소가 없어 경건해야 할 종묘 앞을 놀이터로 전락시킨 세태가 아쉬워 씁쓸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남쪽으로 난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폭 2.5m의 신로(神路)는 재궁-정전-영녕전으로 연결된다. 들어서자마자 왼쪽 작은 연못 속에는 관목류로 덮인 방지가 소리 없다. 종묘에는 세 개의 못이 있는데 음과 양이 서로 배합되어야 생기가 있고 길하다는 풍수설상 득수법에 따라 지당(池塘,연못)을 팠다. 또 제사에 쓰이는 정결한 물을 긷기 위해 제정(祭井)이라는 우물을 갖추고 있다.
숲은 소나무 몇 그루와 굵은 갈참나무들 그리고 은행나무, 벚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등이 제멋대로 심겨 있다. 청설모 한 마리가 잣나무에서 얻은 송이를 이리저리 돌리며 희롱한다. 오른쪽에도 연못이 있고 약간 더 큰 방지가 8m 높이의 소나무와 갈참나무에 둘러싸여 있고 방지에는 향나무와 주목을 심었다. 연못의 크기는 가로 세로 25m로 정방형인데 길 쪽의 모서리는 약간 곡선이다. 대부분의 방지에는 소나무가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곳에는 종묘의 특성상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는 종묘 제례에 쓰는 향목(香木)으로 쓰였다고 한다. 연못 앞 약간 너른 광장에는 갈참나무 밑에 의자를 배치하여 담소하는 이가 많다. 한 그루 잣나무가 소나무의 수피를 닮아 수종을 식별하는데 헛갈리게 하고 느티나무는 이끼를 입고 있어 오랜 연륜을 말한다.
연못 뒤 세종대왕이 휴식처로 삼기 위해 만든 망묘루는 집의 가장자리에서 튀어나와 작은 공간에서 풍류를 맛볼 수 있게 배려하였다. 망묘루(望廟樓)는 임금이 제향시 종묘에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망묘루 옆에는 커다란 감나무 두 그루가 너른 간격으로 섰으나 마음껏 가지를 뻗어 서로 맞닿아 잎이 무성한 속에 몸을 숨긴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 들린다. 곁의 살구나무도 직경이 50cm나 되는 거목으로 성장하여 집 앞 공간을 차분히 지킨다.
거대한 갈참나무숲 사이로 청설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치 날아다니는 듯 빠르게 움직인다. 갈참나무가 숲의 상층을 차지하고 중층은 마치 경건함을 더하려는 듯이 쪽동백, 때죽나무, 향나무 등이 공간을 분할하여 숲을 어둡게 한다. 숲속에는 밤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밤나무는 조선시대에 위패를 만드는 귀중한 목재였다.
길을 따라가면 전사청 앞 모서리와 제정이란 우물 사이에 감나무 한 그루가 포인트를 준다. 조상의 신위를 모신 공간과 담을 사이에 두고 살아 있는 사람이 활동하던 공간 전사청 앞 한구석에 감나무를 심어 가꾼 조상의 안목과 여유를 높이 평가한다. 작은 소나무들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담 밖을 치장하고 있으나 옮겨 심었는지 아니면 제자리에서 난 것인지 근본 족보를 몰라 답답하다. 원래 소나무는 옮겨심기가 어려운 나무였는데 국민들이 참 좋아하여 큰나무를 옮기는 기술이 발달하여 전국 방방곡곡 아무 곳에나 심을 수 있으니 조경업자의 역할이 크다. 반대편 숲 안은 너무 깊고 넓어 감히 들어갈 생각을 못한다. 오히려 그것이 숲을 보전하는 길이런지도 모른다.
정전(正殿) 뒤로 솟은 나무들은 대부분 갈참나무 등 활엽수다. 왼쪽으로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이고 정문 앞에는 굴참나무, 갈참나무 그리고 엉뚱한 잣나무가 보인다. 잣나무는 최근에 심은 것이 많다. 잣나무야말로 우리 고유 수종이지만 소나무보다 인공적인 냄새가 많이 나고 나무의 유연성이나 곡선미가 없어서 산에서 잣을 따는 나무로만 인식되어 있다. 진록색 잎이 주는 어두움은 갈참나무가 겨울에 잎을 다 떨어뜨릴 때 또 다른 무거움을 줄 수 있는 수종이라 과연 이곳에 적당한 나무인지 선택의 호불호가 어렵다. 정전 안에는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 대신 밖에는 반송 형태의 작은 노송과 은행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정전을 가리지 않으려고 낮은 키를 유지시킨 나무들은 오히려 불쌍한 느낌을 준다. 늘어진 가지들이 녹색을 띄고 튼튼한 것은 토양과 나무를 잘 관리해서 그럴 것이다. 청설모가 잘 다듬어 놓은 잣나무 구과를 작은 입으로 물고 가는 광경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청설모에겐 생존의 문제일 터이다. 중간에 놓고 가버린 잣송이를 자세히 보니 아직 잣이 많이 들어 있어 같이 깨물어 먹는다.
세상과 분리하기 위해 만든 가산(假山)을 지나서 영녕전으로 간다. 가산은 종묘 공간을 안온하게 해주고 외부와의 차폐를 목적으로 한다. 가산을 조성하는 기법은 현대 조경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활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는 전통적인 조경 기법의 하나이다.
영녕전에서 창경궁 가는 길로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담가에 선 직경 1m가 다 되는 신갈나무 거대목 한 그루가 위용을 자랑한다. 숲속에는 직경 50cm 정도의 참나무류가 가득하고 길 한가운데 선 느티나무를 보호하려고 울타리를 쳤다. 곧 창경궁을 건너는 육교가 나타난다. 종묘와 창덕궁 사이에는 원래 구릉이 있었으나 일제 때 구릉을 절개하여 돈화문에서 창경궁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었다. 이른바 종묘와 창덕궁과의 맥을 끊기 위한 처사였는데 일제가 끊어놓은 정기를 상징적으로 이어놓은 다리로 역사성이 깊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창경궁으로 건너가 잔디밭 모퉁이를 점유하며 사방으로 가지와 잎을 늘어뜨린 사시나무 한 그루와 잘 정비된 궁내를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리로 다시 나와 도시의 대표적인 소음을 들으며 숲으로 덮인 길을 내려가면 직경 30cm, 수고 10m 정도의 잣나무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수십 년 전에 심은 나무지만 참나무 그늘에 막힌 하늘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한 나무들도 눈에 띈다. 영월 청령포의 관음송을 연상하게 하는 소나무도 숲을 차지하고 있으며 길 쪽으로만 멀리 가지를 뻗은 잣나무 가지와 잎이 만든 어두운 공간은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한다. 군데군데 공간 속에서 거대하게 자란 신갈나무도 경외감을 준다. 한여름이면 중층에 사는 때죽나무가 하얀 꽃을 무수히 피워 잠시나마 밝은 빛이 된다.
한바퀴 돌아서 다시 우물이 있는 제정으로 내려온다. 우물 뒤 엄청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직선길로 나오는 곳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마치 녹슨 철색을 하고 있고 또한 흔치 않은 직경 60cm의 귀룽나무가 구룡목(九龍木)이라는 이름하에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거목으로 자란 것은 흔하지 않으며 오월에 새로 난 가지 끝에 피는 흰색 꽃이 아름답다.
종묘의 숲은 전해 오는 문헌 기록이 없기는 하지만 천이가 진행되면서 갈참나무가 대부분인 참나무숲으로 발달되었다. 참나무류는 일부러 심었다기보다는 다른 숲과는 달리 종묘 공간과의 조화를 모색하면서 자연적으로 난 것을 인위적으로 가꾼 것이며 약 60%를 차지한다. 잣나무숲은 전체 면적의 30% 정도인데 약 40여년 전부터 소나무 대신 식재하였다. 잣나무는 너무 많아 생장상태와 공간 점유율을 따져서 솎아베는 한편 남은 잣나무에게 과도한 그늘을 주는 활엽수도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나무, 갈참나무, 향나무를 비롯한 20여 종의 노거수를 제외하고 과도하게 상층을 형성하고 있는 아까시나무, 가중나무, 양버즘나무 그리고 깊은 산속에나 어울리는 자작나무와 거제수나무도 하루 빨리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 정비해야 한다. 종묘를 수목원이나 나무전시장으로 착각하고 아무 나무나 심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하다.
글·사진 / 이 천 용(국립산림과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