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찻집에서
바람의 찻집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지
긴 장대 끝에서 기도 깃발은 울고
구름이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가장 먼 데서 날아온 새에게
집의 안부를 물었지
나 멀리 떠나와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내며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날아간 날개들에게서
손등에서 녹는 눈발들과
주머니에 넣고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불꽃의 씨앗들도
모든 것이 더 진실했던 그때
어린 뱀의 눈을 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길 떠났으나
소금과 태양의 길 위에서 이내
질문들이 사라졌지
때로 주머니에서 꺼낸 돌들로 점을 치면서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지
탄생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어떤 계절의 중력도 거부하도록
다만 영혼을 가볍게 만들었지
찰나의 순간
별똥별의 빗금보다 밝게 빛나는 깨달음도 있었으나
빛과 환영의 오후를 지나
가끔은 황혼과 바람뿐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고독할 때면 별의 문자를 배웠지
누가 어둔 곳에 저리도 많은 상처를 새겼을까
그것들은 폐허에 핀 꽃들이었지
그리고는 입으로 불어 별들을 끄고
잠이 들었지
봉인된 가슴속에 옛사랑을 가두고
외딴 행성 바람의 찻집에서
소면
당신은 소면을 삶고
나는 상을 차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살구나무 아래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에 있어 온
오래된 나무 아래서
국수를 다 먹고 내 그릇과 자신의 그릇을
포개 놓은 뒤 당신은
나무의 주름진 팔꿈치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일 것이다
잠시 후면, 우리가 이곳에서 없는 날이 오리라
열흘 전 내린 삼월의 눈처럼
봄날의 번개처럼
물 위에 이는 꽃과 바람처럼
이곳에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부재하리라
그 많은 생 중 하나에서 소면을 좋아하고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던
우리는 여기에 없으리라
몇 번의 소란스러움이 지나면
나 혼자 혹은 당신 혼자
이 나무 아래 빈 의자 앞에 늦도록
앉아 있으리라
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전부인가
이제 막 꽃을 피운
늙은 살구나무 아래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단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
두 육체에 나뉘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휴식인가 아니면
잠깐의 순간이 지난 후의 재회인가
이 영원 속에서 죽음은 누락된 작은 기억일 뿐
나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경이로워하는 것이다
저녁의 환한 살구나무 아래서
낙타의 생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저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내가 아는 그는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재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첫사랑의 강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꼈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들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서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희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지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당나귀
ㅡ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1
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 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르둥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것을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의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
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것보다도
나는 나를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돌아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르질링에서 온 편지
지금 지구는 외롭고 바람 부네
사람이 그리워 사람의 마을로 간 것을 파계라 하던가
여기는 별이 너무 많아
더러는 인간의 집을 찾아들어
몇 점 흐린 불이 되기도 하네
히말라야의 돌은 수억 년 전의 조개를 품고 있다지
이 생의 일인데도 어떤 일들은 아득한
전생의 일처럼 여겨져
꽃 같은 기억, 돌 같은 기억이 너무 많아
세상이 나를 잊기 전에 내가 나를 잊었구나
농담을 하듯이 살았네
해발 2억 광년의 고산을 넘어와
밤마다 소문 없이 파계하는 별들 보며
전생의 내가 내생의 나에게 편지를 써서
거꾸로 읽어 보네
여인숙 옆 사원에서 들려오는 주문인 듯
네부람바고롭외......
오월 붓꽃
봄눈이 내리던 날
오월 붓꽃을 심었지요
병을 앓고 난 끝이었는데
당신은 말했지요
아직 눈이 몇 차례 더 내릴 것이라고
그 덕에 뿌리가 강해질 것이라고
늘어진 쥐똥나무 가지를 바람에 묶어 놓고
잠이 덜 깬 흙을 어루만져 주자
당부할 필요도 없이
봄은 말하는 듯했지요
잎을 내기 위해서는 상처를 견뎌야 한다고
해마다 오월 붓꽃은 내 생각 속에서보다 더
늦게 피었지요 공기들의 약속
햇빛의 안부에 속아
너무 일찍 얼굴 내민 적도 있지만
어느 해인가 오월 늦도록
비바람이 덧문을 흔들어
아침에 올라온 꽃대가 저녁에 꺾이곤 했었지요
겨울을 바깥에서 나고 빛을 좋아하는
오월 붓꽃
늦은 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날마다 변하는 날씨가 준비하는 것들 속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여럿 있었지만
몇 번의 계절보다 약간 긴 삶에서
이 꽃만큼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를
일러 준 것도 드물었지요
신비에 가까운 보라색 얼굴
겨우 겨울을 넘긴 가난과 화려
일시적인 소유에 기뻐하는 순간이 지나면
마지막 꽃잎을 떨구면서 오월 붓꽃은
속삭이는 듯했지요
나는 당신이에요, 나는 죽지 않아요
또 여러 번의 봄이 지나고
이곳에 나 혼자 남는다면
그래도 혼자 남는 게 아니라는 걸
오월 붓꽃이 말해 주겠지요
이 꽃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
내 눈만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이
이곳에 있다는 걸
다시 작별을 말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봄의 끝에서 당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기억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자겠지요
우리가 원한 것은 무한에서 무한으로가 아니라
봄에서 봄으로
순간에서 순간으로였으니까
이 오월 붓꽃처럼
화양연화
나는 너의 이마를 사랑했지
새들이 탐내는 이마
이제 막 태어난 돌 같은 이마
언젠가 한 번은 내 이마였던 것 같은 이마
가끔 고독에 잠기는 이마
불을 끄면 소멸하는 이마
스물두 살의 봄이었지
새들의 비밀 속에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은
책을 쌓아 놓으면 둘이 누울 공간도 없어
거의 포개서 자다시피 한 오월
내 심장은 자주 너의 피로 뛰었지
나비들과 함께 날들을 세며
다락방 딸린 방을 얻은 날
세상을 손에 넣은 줄 알았지
넓은 방을 두고 그 다락방에 누워
시를 쓰고 사랑을 나누었지
슬픔이 밀려온 밤이면
조용한 몸짓으로 껴안았지
어느 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찾아와
하루에도 여러 번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다락방 벽에 썼지
너는 눈물로 그것을 지우며
나를 일으켜 세웠지
난해한 시처럼 닫혀 버린 존재를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훗날 인생에서 우연히 명성을 얻고
자유로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였지
다락방 어둠 속에서 달처럼 희게 빛나던
그 이마만이 기억에 남아 있어도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 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 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과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잡고 해마다
두꺼비와 가시연꽃과 붉은가슴도요새가 나온다
무당벌레와 흰올빼미도 나온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릎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ㅡ 류시화『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숲, 2012
류시화 시인
류시화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그대가 곁네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냈으며,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엮었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펴냈으며, 하이쿠 모음집 『한 줄도 너무 길다』 『바쇼 하이쿠 선집』을 엮었다. 번역서로는『성자가 된 청소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티벳 사자의 서』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등이 있으며,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로 납치하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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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ely Shepherd - André Rieu & Gheorghe Zamfir
첫댓글 "여행자가 가구를 사는 경우는 없다.
삶은 여행과 같고, 나는 그 삶 속에 있는 여행자이다.
나뭇잎아
바람이 너를 데려가려 하거든
가만히 있거라"
- 안젤름 그륀 -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않고 삶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마치 티벳고원의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의 눈으로 자신의 내면을 꽤뚫어보는 시인. 이 시인의 눈을 통해 내 자신도 많이 들어다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감사합니다 하곤 차차 음미해봐도 되겠지요
외로운양치기 팬플룻 연주도 감사합니다 ^^
함께해주시어 제가 더 고맙지요... ~~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