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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향기 스크랩 목회 칼럼 몇 편
박영화 추천 0 조회 69 09.09.06 06: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목회 칼럼 몇 편

 

 

 

   

주님이 쓰시기 위한 과정(2009. 7. 12)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 3학년 누님이 파상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잘 생겼고 공부도 잘했다. 중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고 다녔던 게 지금도 생각난다. 그런 누님의 죽음은 가정의 큰 충격이었고 꼴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시며 통곡하셨다. 1년 뒤에 또 한번의 어려움이 임했다.

 

방앗간을 운영하신 아버지가 사다리에 올라가 일하시다 그만 떨어 지셨다. 다리가 골절되어 순천 고산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셨다. 뼈를 뚫어 쇠로 무거운 추를 달아 고정 시켰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약간 절기는 하셨으나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 난 원장 선생님의 헌신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원장님처럼 약한 자를 돕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 역시 순천 여중 다니던 누님의 대를 이어라고 이모 집으로 위장 전입을 하여 6학년 2학기 때 순천 성동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하지만 시골에서 놀기만 하다 시내 중학교를 갔는데 실력이 못 미쳐 실업계 고교를 가야 했다. 목표는 한국전력 입사였다. 고 3때 6월에 시험인데 생년월일이 11월이라 원서도 내지 못했다. 그 충격에 신경성 위장염으로 고생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2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장 추천을 받아 보험협회에 입사하였다. 기획부 발령에 초봉이 15만원! 담임선생님 월급과 같은 수준이라 주변의 부러움을 샀지만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명문대학 출신들이 많아 열등감에 눌려 대학 입학의 꿈을 키웠다. 퇴근하면 바로 서대문 입시 학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독서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전남대 상대를 목표로 자신과 싸워 나갔다. 원서를 쓰려고 사촌 형님을 내가 졸업한 학교로 보냈는데 특차 전형을 낼 수 없었다. 2학년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기에 당연히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졸업 고사를 어떻게 치렀는지 3학년 석차가 5% 범위에 들지 못하였다. 또 한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만 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부모님도 좋은 직장 그만 두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했다.당시 믿음의 불이 붙어 새벽에 부모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데 우리 교회에서 부르짖을 수 없는 기도를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을 때였다. 성령 충만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민했다. 기도 중에 신학교를 택하고 고향 선배인 임병무 목사님을 찾아갔는데 성수교회 김재규 목사님에게 안내하여 추천서를 받아 주셨다.

 

고 김치선 목사님이 세운 대한신학교! 전통이 있었다. 무엇보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이만 팔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명령뿐이었다.4년간 공부하면서 개척자의 정신을 키워 나갔다. 회사의 특별한 배려로 공부하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졸업 후에 진급 시험 준비에 다시 독서실 생활을 하며 5개월간 사투를 벌였다.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기쁨을 누렸다.

 

그 뒤에 신대원 졸업, 신촌교회 전도사, 또 진급 시험 후에 광주 지점장 발령을 받았다. 편하고 대접받는 자리였다. 목회하기 부담스러워 꼬리를 빼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갑작스런 소천과 일본 여동생의 금전 문제로 또 한번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날 부르신 신호로 알고 직장을 정리했다. 교회 개척 장소로 계림동에 신축 건물을 얻는 것이 경양 방죽 지하였다. 비가 오면 습기 차고 물이 새는 바람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렸다.

 

밀폐되고 좁은 지하 공간에서 6년 동안 혹독하리 만큼 훈련을 받았다. 춥고 배고픈 때도 있었다.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고 걸인들만 자주 왔던 곳에서 견뎌낸 것이 주님의 은혜였고 다 주님이 쓰시기 위한 과정이었다. 아니 영혼을 진단하는 영적 의사를 만들기 위한 주님의 계획이었다.

 

 

쓰레기를 줄이자.(2009. 7. 19)

 

난 어려서 길가 집에서 살았다. 대문도 없는 방앗간 집이었다. 보리타작이나 쌀 방아를 찧고 나면 보리 떼나 왕겨가 길바닥에 나 딩굴었다. 그러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대빗자루를 들고 혼자서 쓸었다. 겨울에 눈 올 때도 그랬다. 결혼 전에 독서실과 고시원 생활을 조금 하였다. 그때도 화장실 청소는 내가 담당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도 생활 쓰레기 대부분을 치운다. 솔직히 쓰레기가 널려 있으면 마음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자주 버리는 편이다. 힘든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쓰레기를 정리하고 나면 마음 편하고 볼수록 기분이 좋다. 문제는 분리수거이다. 누구든 처음 버릴 때 분리하면 나중에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 없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봉투 값도 만만치 않기에 어찌하든지 쓰레기 량을 줄이고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 가장 먼저 분리할 것이 비닐이다. 우리는 지금 비닐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비닐이 편리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또한 폐해가 심각하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분리해서 버려야 한다. 비닐 종류만 분리해도 쓰레기 양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리고 쓰레기를 비닐에 넣어서 버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 부피도 많아지고 자연 환경 파괴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우린 마땅히 깨끗한 지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난 비닐과 플라스틱, 음료수병, 세재 용기, 화장품 팩 등은 양파 망에 모조리 담는다. 늘어나서 많이 담을 수 있고 또 청소부가 의심 없이 잘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페트병은 밟아서 부피를 줄인다. 깡통도 납작하게 밟아 따로 모은다. 그 양이 상당하다.

 

그리고 종이류, 파지도 함께 모아 두고 재활용 할 것은 복사지 한 장도 버리지 않는다. 신문, 박스, 종이컵, 과자 케이스, 홍보 전단지(음식점, 일수, 다방 명함)를 모아 박스 줍는 할머니에게 드리며 때론 고물상에 팔기도 한다. 나머지는 생활 쓰레기인데 그리 많지 않다. 화장실에서 나온 것은 물을 부어 버리면 확 줄어든다.

 

드링크 병이나 부엌에서 썼던 기름병은 깨지지 않게 조심히 모아 두면 잘 수거해 간다. 날마다 쓰레기차가 거두어 가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 없다. 기분 이고 마음의 쓰레기까지 사라진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골목을 다니다 보면 분리하지 않은 쓰레기가 태반이다. 쓰레기 담은 봉투를 방치해 두는 바람에 쥐나 고양이가 뜯는다.

 

그러므로 플라스틱 용기에 두었다가 수거할 시간에 내어 놓아야 한다. 음식 쓰레기도 비닐로 통에 넣어 두기 때문에 수거할 때 약간 흘리고 간다. 거기에 파리가 날아드는데 밀걸레질 한번에 냄새도 없애고 날 파리도 끓지 않게 한다.한달에 한번 남전도회에서 골목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수돗가에 모아둔다. 그것 분리하지 않고 버리려면 상당한 양의 쓰레기지만 분리하고 나면 20리터 봉투 하나로 충분하다.

 

이제는 분리수거하는 방법을 터득했기에 30분이면 족하다. 여름에는 역한 냄새가 나서 곤욕을 치를 때도 있지만 마지막 물청소를 하면 되고, 면장갑을 벗고 비누로 깨끗이 씻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골목을 그냥 돌아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교회 앞길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마구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하지만 볼 때마다 줍고 깨끗하게 관리하면 버리는 사람도 줄어든다. 그러나 방치하면 쓰레기장이 될 정도다. 관심만 있으면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뮤지컬 공연 - 아버지(2009. 8. 2)

 

지난 목요일 우리 교회에서 뮤지컬 아버지를 보았다. 아주 좋은 기회였고 많은 것을 얻고 깨달았다. 이 공연을 위해 한 달 전에 한사랑 교회 문화 사역팀 리더가 답사를 하고 갔다. 사전 준비가 치밀했고 섬기는 자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했다. 어떤 불편함도 감수하며 오직 주님만 드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소요되는 경비도 교회의 지원 없이 30명의 청년들이 회비를 모아서 썼다. 대절한 관광버스가 예정시간 보다 일찍 도착했다.

 

음향 및 공연 장비가 만만치 않게 보였다. 아침은 오면서 대충 때우고 점심은 그들이 손수 김치 복음 밥 하겠다고 밥만 해 놓으라는 주문이었다. 그것을 어기고 우리 집사님들의 수고로 섬겼다. 하지만 설거지와 뒷정리는 그들이 담당했다. 그리고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한 낮에 노방 전도를 나갔다. 청소년 수련관에서 시작하여 전남 대까지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다녀왔다. 율동과 찬양으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관람 티켓 500장 나누고 공연 포스터를 추가로 붙이고 돌아왔다.

 

조명과 무대 설치 팀은 남아서 그 일을 감당했다. 그들은 눈은 반짝였고 가슴은 뜨거웠다. 다시 모여 통성으로 기도하고 공연 리허설을 시작했다. 오케스트라 팀은 음을 조율하고 연극 팀은 분장에 들어갔다. 저녁 식사 시간도 부족해 나누어서 먹었다. 오직 한 마음을 쏟기 위해 저녁 거르고 그 시간에 기도로 준비한 청년들도 있었다. 바쁘게 서로를 위해 분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공연은 밝고 재미있게 시작되었다.

 

좀 어두운 내용을 감안해서 배려한 부분이었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살렸기에 시간이 갈수록 진지해 졌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어 흐느끼는 분들도 계셨다. 강철민(본명 안재선)의 총에 손동인, 동신이 순교한 장면에 숨이 멈출 것 같았다. 딸 동희가 오빠들을 죽인 원수를 내 오빠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손목사님이 설득하여 총살 직전에 있는 안재선을 구출해 오는 장면은 너무 감동적이었다.

 

원수를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시기 위해 목사님께서 손재선으로 양 아들을 삼으신 것을 보고 진정한 사랑은 남을 배려하는 것임을 깨달았다.뮤지컬로 이어져 그 감동이 더했다. 찬영이가 동인 역을 맡아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 아들 아니냐고 중간에 확인하고 보았단다.난 아들도 아들이지만 손동희 역을 한 자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받았다. 뮤지컬을 마쳤을 때 출연진은 땀과 눈물로 젖어 있어 무슨 말을 잊지를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서재실을 대기실로 쓰면서 내가 평소에 아령 대신에 운동하려고 수돗물 받아 놓은 페트병들이 비어 있었다. 그들이 대기실에서 얼마나 목이 탔는지 그 물을 마셨던 것이다. 중2층에서 조명을 담당한 이들도 에어콘 시설이 안 된 상태에서 산소 결핍으로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조명 열기가 뜨거워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그들이 다 정리하고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권사님 내외분이 서울에서 직접 운전하고 오셔서 간식을 제공하셨다.

 

이번 행사를 위해 청년들이 두 달 동안 매일 밤 12시까지 연습한 결과라 하지만 모두가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그리고 주님 마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였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자는 것을 고집해서 숙소를 취소했다. 씻는 곳이 불편해서 몸이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날씨가 덥고 모기에 물릴 것 같아 지키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또 피곤하고 힘들 것인데 새벽 예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은혜를 받았다. 마지막까지 정리 정돈에 신경을 썼고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청년들이 새벽에 감사 예물을 드렸고 문화사역팀에서 30만원을 헌금하셨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 보다 많이 참석했고 기대 이상의 열매를 맛볼 수 있었다.

 

 

30년 만에 주님 이루신 일(2009. 8. 9)

 

정학래! 고등학교 친구다. 1학년 때 학교 미술실에서 만났다. 그는 포스터를 그렸고 난 붓글씨와 물감 글씨, 때로는 선생님들이 부탁한 챠트를 썼다. 2학년 때 까지 학교 복도 환경 정리는 미술 선생님과 함께 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래, 상래하면 모르는 선후배가 없었다. 그의 집은 소전머리에서 국밥을 팔았고 난 자취를 하였다.

 

5일 장날 잠깐 들려서 그의 어머니가 공짜로 퍼주신 국밥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식구가 많은데도 조카를 데려다 키워 장가보내는 마음씨 좋은 집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 가끔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갔지만 불심이 강한 집안이라 믿음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성경책을 사주고 그 가정에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묘한 인연으로 직행 버스 안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었다. 세 명의 자녀들도 열심이었다. 그런데 그는 노래방 사업 때문에 주일 성수는 했지만 온전한 신앙생활을 못했다. 그래도 가끔 찾아가서 권면하고 자녀들의 이야기와 가정 사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감사한 것은 친구도 내처럼 아버지의 술에 대한 나쁜 추억 때문에 술과 담배를 배우지 않았다. 그래 세상으로 빠지지 않았다. 아니 원래 심성이 착하여 남을 생각할 줄도 알았다.

 

좀 오래 되었지만 우리 성도 가운데 한 분이 어렵다 했을 때 그 친구가 다달이 도와주기도 했다. 내가 어려웠을 때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지만 갚지 못하고 있다. 사업용 차량을 두 번 구입했을 때 그래도 친구 목사님이 예배 드려야 한다고 초청을 받기도 했다. 작년에는 아내를 백화점으로 불러내서 정장 한 벌을 사 주기도 했다. 지금은 그가 섬기는 교회에서 제자 훈련도 받고 주일날 예배에 대한 감격도 누리며 전도하려고 애쓰는 일꾼으로 변했다.

 

내가 목회자 인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이 참 기특할 정도이다. 얼마 전에는 동생들 문제로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막내 여동생이 일산에서 카센타를 하면서 남동생 태권도 체육관 보증금을 빼내 동업을 하였다. 그런데 매월 갚아야 할 돈을 남동생에게 못 갚자 문제가 된 것이다. 또 다른 여동생까지 경리로 끌어 들여 문제가 복잡해 져 버렸다. 부모님이 그곳에 계시다가 그 꼴 보기 싫어 고향으로 내려오시면서 몸도 마음도 지치셨다.

 

친구가 큰아들이라 형제간의 다툼을 조정하느라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일산까지 다니면서 마무리 시켰다. 그런데 형제간의 앙금은 남아 있어 서로가 하나 되지 못했다.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권면했는데 동생들이 권면을 듣고 지난주부터 교회를 나갔다. 그리고 첫날부터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가 되었다. 친구가 기뻐서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일들을 동생들이 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평생을 교회와 담을 쌓은 분들이다. 친구는 부모님이 연로하시기에 언제 어떻게 될 줄 모른다고 늘 걱정이었다. 특별히 어머님이 각막 수술까지 받으시고 자식 일로 마음이 상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교회에 등록시켜 예수 믿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심방 요청을 해 왔다. 그래서 지난 주중에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번거롭다 해서 이번 주일에 아들 내외가 내려오면 함께 교회에 나가기로 확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참 반가운 일이었다.

 

난 하나님께 감사했다. 한 영혼 포기하지 않고 구원했더니 주님은 그로 인해서 그의 동생들 세 가정을 구원시키셨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 되게 할 것이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세상에서 이보다 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값지고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주님이 그 마음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너무 신나는 일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 가족을 구원시키는데 30년이 걸렸다. 그 오묘한 뜻을 이루시려고 일찍이 친구를 미술실에서 만나 지금까지 묶어 두셨다.

 

 

목회자 가족 수련회를 다녀와서(2009. 8. 16)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백운산 휴양림에서 목회자 가족 수련회가 있었다. 첫날 오후 2시 소집이라 가는 길에 선친 묘소 벌초를 위해 일찍 나섰다. 낫질이 처음이라 풀 베는 것이 어설펐다. 그래도 뜨거운 날씨에 헉헉거리며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베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년 만인데 그동안 관리해 준 형님들이 고마웠다. 동네에 들려서 어른들에게 조그만 선물로 인사드리고 점심 대접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강퍅했던 산골에 복음이 들어가 예수 믿는 친척이 계셔 너무 흐뭇했다. 시간이 쫓겨 수련회 장소로 갔다. 먼저 온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올 해는 서울 동노회 목사님 가정과 연합으로 하는 수련회라 기대가 컸다. 지방에 있으면 대신(교단)이란 말만 들어도 설레이는데 동문들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서울에서 80여 명이 차량을 나누어 타고 먼 길을 달려 오셨다. 내리자마자 잘 가꾸어진 휴양림에 감탄했다. 함께 찬양하고 개회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넘쳤고 진정한 쉼과 안식은 주님께 있음을 깨달았다. 목회자라 할지라도 위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사려 깊은 분들이 아니었다. 목회 현장에서 크고 작은 일들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온 분들도 많았다. 그들과 함께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시간을 같이 했다.

 

아니 위로 받은 자가 위로 할 수 있고, 사랑받은 자가 사랑할 수 있고, 섬김을 잘 받는 자가 섬길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했다. 서울에서 오신 분들이 섬겼는데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셨다. 부족함이 없도록 공급하시고 또 불편한 것도 잘 이해하셨다. 예배를 마치고 오후 늦은 시간이지만 운동장으로 이동하여 노회 대항 축구 경기를 하였다.

 

서울 동노회 소속된 젊은 전도사님들이 주전으로 뛰는 바람에 체력과 실력에 밀려 보기 좋게 패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교제하는 일에는 운동 이상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다음날 배구와 족구로 만회하기로 하고 저녁 식사에 임했다. 식사는 끼니마다 출장 뷔페로 차렸다. 메뉴는 다양했고 야외에서 먹는 음식 맛이 좋았다. 가끔씩 내린 비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녁 시간은 뜨거운 찬양과 통성기도로 이어졌고 유명 강사님들의 말씀에 도전을 받았다. 교회 부흥보다 교회다움이 먼저다. 교회다움은 교인의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장하시는 교회요,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되는 교회인데 탁월한 직분을 받은 자가 탁월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했다. 사이비 목회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형식만 남은 예배가 아니라 예배의 역동성을 강조하시며 바울이 만난 주님을 경험하라 했다.

 

둘째 날 저녁 강의는 신약 성도들을 구약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라하셨다. 신구약의 계시 형태는 다르지만 그 언약들이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율법은 의식법에 속한 것인지 시민법에 속한 것인지 도덕법에 속한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법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 폐기된 것이고 시민법은 우리 사회가 신정사회가 아니고 섞여 사는 다 종교 사회이므로 그 정신은 받되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고 도덕법은 누구든 반드시 지켜야 함을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 오전은 산책을 하고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가 행복했고 감사와 감격했다. 무엇보다 이름도 없이 농어촌 교회를 섬기는 전남지역 젊은 목회자들과 사모님들의 섬김에 서울에서 오신 분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운동 경기하면서 걸었던 상금을 그분들에게 돌려드렸다. 또 얼마 전에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점심 식사비로 50만원을 내 놓고 가셔서 장소를 옮겨 식사를 하고 헤어질 수 있었다.

 

그날 강사님 말씀대로 주님 때문에 호강하고 있다라는 말씀이 자꾸 생각나는 수련회였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입니다.새벽에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매주 교회 주보에 싫은 시답잖은 글을 나누고 싶어 보냅니다.원래 글 쓰는 자가 아니라 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만에 하나 주님 전하는 일에 보탬이 된다면 가끔씩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오늘도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2009. 8. 17)

 

   

칼  럼  필  자

이상래 목사 광주신광교회
광주시 북구 오치동 1025-2
HP 010-8579-0191

sangrae-lee@hanmail.net

흐  르  는  곡

 주님 곁으로

 

칼럼보내주실곳

창골산 봉서방카페

b0356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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