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여행] 청량정사 와 약차를 그냥 주는 산꾼의집...........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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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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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청량정사 와 약차를 그냥 주는 산꾼의집...........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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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 유랑자의 여행기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청량산(淸凉山·870m)은 한반도 중동부에 위치하며
영남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또한 청량산은 경북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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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조선시대 유학의 성지로 불리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산이 되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청량산은 1982년 8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지난 2007년 3월에는 학술적·경관
적·역사적 가치를 입증하여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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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꽃(닭의장풀)이 달개비는 한방에서 압척초(鴨跖草)라는 약재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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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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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청량산은 봉화군의 8경중 1경에 올려 놓을 만큼 제일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청량산은 12개의 빼어난 바위 봉우리가 절경을 이루어 일찍이 퇴계 이황은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면서 청량산
을 찾을 때엔 여보게 친구들 난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하면서 한 폭의 그림과 비교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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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에서 볼만한 경치로는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
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청량사를 비롯해 무려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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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68세)12월, 퇴계는 청량산을 유람한 꿈을 꾸고 詩 2首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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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석 연하 노는 일이 아직 식지 않았거늘
늙은 나이의 이 몸이 그릇 부귀의 꿈을 꾼단 말가
어찌 알았느냐 이 유선침을 베고서
가서 청량산의 복지산을 올라 갈 줄이야
(2)
이 몸이 저 시원한 열어구의 바람 타고
하룻밤 지난 사이 온 산천을 구경했네
늙은 중이 나에게 농가의 삿갓을 주면서
일찍이 돌아와서 들 늙은이 되길 권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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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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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세운 절로 법당에는 지방유형문화
재 47호인 청량사 유리보전이 보존되어 있다. 또 유랑자가 조금 후에 가볼 청량사의 암자인 응진전은 원효대사
가 머물렀던 곳으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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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봉우리를 뜻하는 육육봉과 여덟 개의 동굴, 네 개의 약수, 이퇴계 선생의 서당인 오산당(청량정사)까
지. 금강산의 경치와 버금가다 할 만한 명소들이 산 곳곳에 다소곳이 숨어 있으니 청량산을 오르는 것은 말 그
대로 김홍도의 진경산수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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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인류가 살아가면서 삶의 터전으로 삼는 자연은 태어나고 돌아가는 출발지 이자 종착지인 셈이다. 역사를
보면 조선 초기의 문인들이 유교적인 수양을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명승지 탐방했다면 17세기 이후에는 개인
적인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산수유람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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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하고 골치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 명산대천에서 탈속의 자유를 느껴보겠다는 ‘로망’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
하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청량산이 부상하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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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청량산이 비록 지경은 다른 고장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 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퇴계 이후 사람들이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 또는 '유가의 산(儒家의
山)' 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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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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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부에서 멀리 있으면서도 퇴계의 눈은 항상 청량산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산을 바라보며 -퇴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요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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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랑자가 청량사에서 응진전 찾아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청량정사는 지난번에 문이 잠겨있어 대충만 보았
기에 이번 2차 여행길에선 마음먹고 꼭 들러 보리라 다짐 하면서 다시 한 번 방문한 청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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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는 지난번 여행기에서 소개를 하였으니 생략하고 오늘은 청량정사 및 산꾼의 집이다. 유랑자는 눈에 익
은 청량사를 올라 진경산수를 본 다음 발길을 돌려 청량정사로 향한다, 이곳은 들머리인 도로의 입석에서 오르
면 입석-응진전-청량정사-청량사로 오르는 길이고 반대로 청량사에서 내려가면 올라온 역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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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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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당호를 지을만큼 이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다. 청량산은 옛 퇴계 가문의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군(松安君)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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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랑자는 다른 목적이 있어 청량사로 먼저 오른 다음 응진전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니까 청량사에서 동
쪽방향 횡으로 내려가는 코스의 길목이다. 이 청량정사는 송재 이우(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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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숙부인 이우를 따라 이곳에 와서 학문을 익혔다. 또한 여기서 숙부 사후에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
성하였던 집이다. 암튼 이황(1501∼1570)은 '동방의 주자'라 불릴 만큼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평생을 검소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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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평생 동안 수차에 걸쳐 청량산을 방문하여 학문을 닦고 산천을 노래했는데 모두 55편의 시와 하나의 발문, 하나의 기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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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후손 이중봉(1871~1907)이 쓴 [오산당중건기(吾山堂重建記)]에는 “청량정사는 퇴계 선생이 남긴 뜻을
받들어 후학과 사림들이 힘을 모아 조선 순조 32년(1832)에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중에게 잘 알려
진 퇴계 선생의 국문시가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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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퇴계 선생에게 있어 청량산은 학교이자 도서관이며, 학문의 전당이었음을 느낀다. 퇴계 선생은 스스
로 호를 ‘청량산인(淸山人)’이라 지을 정도로 청량산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으며, 청량산을 소재로 한 한시를 51
편이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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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와 산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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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는 청량정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이(武夷)의 36동천(洞天)은 세상에 유명하니
회암(주자)선생은 정자를 짓고 노래해 말하기를, ‘나의 샘과 바위에서 살리라.’하였다. 청량의 12봉우리는 해동
에 이름이 높으니 퇴도(退陶) 이황 선생은 산놀이의 기록에서 ‘우리집 산’(吾家山)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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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우리의 두 선생이 나와 노닐고 감상하는 여가에 경치 좋은 곳을 차지해서 그 인자함과 지혜로움의 끝없는
즐거움을 의탁하였다.” 즉 청량정사는 주희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본따 지은 것이고, 그 안에는 정통 주자학
을 계승하는 이황의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 집의 규모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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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당은 외3(내5)칸으로 좀 특이한 구조의 건물인데, 이는 무이정사의 3칸 집을 본받아 도산서당의 3칸 집으
로 전해주는 연속과 계승이다. 오산당은 작지만, 제대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중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란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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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인즉슨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주기만 하고
바라지 않는 인자의 품성을 상징한 것이며 유하지만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지자의 품성을 상징한 것이다. “산
과 같이 믿음직하고 편안한 인자의 품성과 물과 같이 깨끗하고 영기로 충만한 지자의 성품을 겸비하는 것이 유
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경지”임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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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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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청량정사(오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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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의 현판으로는 척암 김도화의 중건기가 있다. 강당은 퇴계의 '청량산록발문'의 '오가산'을 취하여 '오산
당(吾山堂)이라 하였고. 왼편 지숙료(止宿寮) 오른편 운서헌(雲棲軒) 이고 출입문은 유정문(幽貞門)의 현판이 걸
려있으며 건물은 앞면 5칸·옆면 1칸 반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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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는 오늘도 여전히 입은 다물고 태연한척 그렇게 협문을 걸어 잠그 고 앉아있어 내부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냥 산 꾼의 집에서 건너다볼 뿐이다. 유랑자는 청량정사를 담장 너머로 본 후 산꾼의 집 실내로 들어
가 마루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며 약차 한잔에 지친 몸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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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淸凉精舍)는 퇴계선생이 공부하던곳으로 선생의 도학을 이어받고 후학들의 강도흥학(講道興學)을 위하여 1832년 영남
유림들의 발의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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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정사는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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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살기위해 땅속에서 7년을 보낸 참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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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의 집
*산 꾼의 본 1대 집주인은 젊은 날 출가를 꿈꿨던 이대실씨란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이곳 청량사를 찾아가
다짜고짜 스님 되겠다고 청했다. 그때 당시 살던 노(老)비구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마당에 나와 서서
청량산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쩔수 없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서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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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을 닮은 거대한 청량산 암봉들은 그때 가슴속 깊게 각인됐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결혼을 하고, 사업을 했
다. 예식장을 운영하고, 사진관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그는 결혼하던 날, 아내에게 말했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살테니, 내 (가족들에게) 남겨줄 거 60% 정도를 이루면 난 산으로 가겠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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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처자식을 남겨두고 1992년 6월 어느 날 서울에서 차비 2만5000원이랑 쌀 한 말, 된장 한 사발 들
고 청량산으로 들어와 움막을 짓고 ‘산꾼의집’이란 간판을 내 걸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주변에
서는 웬 사내 하나가 청량산에 들어왔다는 입소문이 산 꾼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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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외로웠다. ‘이대실’이 말했다. “첫 두 해는 구름만 봐도 춤이 나올 정도로 좋았다.
3년째? 되니 너무나 외롭더라. 그래서 반년을 ‘깡소주’ 마시며 울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울려고 산에 왔나?” 이 대실은 그 어떤 날 이후 부터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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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이라기에는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다. 실내의 구석구석마다 그가 만든 여러가지 소품들로 잘 꾸며져 있다. 고목나무에 세겨진
서각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움 이고 싶다" 가 인상 깊게 다가 온다. 직접 만든 부채에도 아름다운 글귀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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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산꾼의 뜨거운 약차 한잔에 삼복더위 무더위가 눈 녹듯 사르르 살아진다. 시원한 얼음 냉차보다 더 시원한 약차 한잔의 여유
로움이 피로를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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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로 들어서니 마침 김성기작가가 자신이 썼던 시들을 모아 코팅을 하고 있었다. 무심코 차 한잔 하세요 쎌프입니다. 친절하게
약차 한잔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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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경북 봉화 청량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 대실이 대접하는 차를 마신다. 혹자는 그더러 자유인이
라고 했고, 혹자는 광인(狂人)이라고도 했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대신 달마를 그렸다. 나뭇조각으로 목
걸이를 만들고.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고, 바람 불면 퉁소를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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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은 가실날이 없었다. 그는 작품이 팔리면 그 돈으로 약차를 끓여 등산객들에게 무료
로 나눠줬다. 그러느라 세월은 자꾸만 흘렀다. 어느덧 산악인들은 오직 이 대실을 만나러 청량산에 간다는 이른
바 찐 팬들까지 생길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청량산은 곧 이 대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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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에 가거들랑 "꼭" 산꾼? 시인 김성기의 집을 들러 아름다운 글귀와 약차 한잔에 취해 보길 권해본다. "오고 가는 아픈다리
약차 한잔 그냥 들고 쉬었다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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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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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량산 바위가 한없이 좋아 이렇게 무던함 속에서 20년 세월을 홀로 산에서 살았다. 바람 불면 퉁소를 불
고 외로 우면 달마를 그렸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이제는 다시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면서 더 교만해지기 전
에 그는, 마음을 비우고 10년전 쯤 그렇게 바람처럼 청량산 산꾼의 집을 훌쩍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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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떠난 산꾼의 집엔 그의 말대로 10여년 전서부터 2세대 주인인 나그네 시인 김성기씨가 자릴잡고
산꾼의 집을 지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산꾼의 집에는 산꾼은 없고, 글꾼이 있을 뿐이다. 청량산 산꾼의
집에는 솟대와 시인 김성기 작가가 지은 시집이며 각종 소품들을 팔며 그렇게 머무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여
전히 차는 공짜다, 김성기 작가는 봉화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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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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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길 199-136
(지번)명호면 북곡리 245
소개 :송재 이우(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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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올려주시는 여행읽기 잘봅니다
유랑자님에 봉화여행기 보니 가고싶어져 봉화 고택 예약했네요
고택 숙박이 좋더라고요
좋은하루 되세요
오~~아주 멋진 꽃비나님no1
고택 숙박이 좀 비싸긴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즈넉한 운치는 덤이지요.
가시는 길에 저의 여행기를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곳만 골라서
네비만 찍으면 시간 절약 하면서 보다 더 많은곳을 둘러 볼수 있습니다.
멋진여행 기대 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추향님 감사 합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간까지
내 주시어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그저 감사 합니다.
주말 멋지게 보내시구요. 행운 가득한 하루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