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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9(수). 7:40 AM
거리 : 28.3 km
소요 시간 : 10h 30m 43s
이동 시간 : 8h 28m 57s
휴식 시간 : 2h 1m 46s
평균 속도 : 3.3 km/h
총 획득고도 : 839 m
최고점 : 80 m
난이도 : 보통
2022년 10월 19일(수)
전남 구례군 구례읍 - 구례읍산책 -구성2길 문척교 -구성마을 -(861번수달생태로)-문척면 -금정리 금평마을 -
금정리 오봉정사 -감전면 간문리 대평마을 -섬진강 어류생태관 -(861번 남도대교로) -간전면 운천리 백운천마을
-운천리 남도대교 -경암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 -(19번 섬진강대로) -화개면 덕은리 상덕마을 -부춘리 신기마을 -부춘리 에덴모텔
07:40 구례읍 봉동길; 동경모텔에서 출발하여 읍내 산책을 시작하다.
구례읍(求禮邑); 4방8방이 모두 소백산맥의 줄기의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 싸인 분지다.
북동 지리산(1,915m), 동쪽 노고단(老姑壇, 1,507m)·반야봉(般若峰, 1,751m)·황장산(黃獐山, 942m) , 북쪽 만복대(萬福臺,1,433m)·견두산(犬頭山, 775m) 서쪽 천마(天馬山,656m)·깃대봉(691m), 남쪽에는 도솔봉(1,123)· 형제봉(兄弟峰, 861m) 등이 솟아 있어 대부분의 지역이 험준한 산지다.
구례읍은 이 산들의 골짜기를 흘러가는 서시천(西施川)이 섬진강에 합류하면서 만들어진 좁은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구례읍 동남쪽 봉성산(鳳城山)을 중심으로 봉동(鳳東)·봉서(鳳西)·봉남(鳳南)·봉북(鳳北)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마디로 구례읍은 대표적인 지리산과 섬진강 마을로서 과거에는 섬진강의 하항(河港)으로서 농산물·임산물 집산지로 발달하였다.
현재 인구는 약 26.000여명으로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듯하다.
07:40 중앙로; 북쪽 종합운동장 방향으로 출발
07:44 인도 가로수 아래에 조성한 작은 정원(?) 통행에 좀 지장이 될듯한데.
모두가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듯하여 보기 좋다
07:51 서시천로 삼거리; 구례제일교회
구레제일교회; 한일합방 전인 1908년 설립된 114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알고보면 구레중앙교회와 뿌리가 같은 교회다)
서시천(西施川);유로연장 28.15㎞, 유역면적 153.5㎢ 섬진강 1급 지류로서
구례군의 산동면·광의면·용방면·마산면·구례읍을 두루 거쳐 흘러서 구례분지의 젖줄이라 칭해진다.
춘추전국시대 오월동주로 알려진 월나라 저라산 출신 미인 서시(西施)가 빨래하던 그 시내와 같다는 의미일까
07:59 돌틈삼거리 회전교차로;공설운동장 입구; 지리산 화엄사와 노고단 방향. 좌편 봉우리가 노고단일까?
돌틈삼거리는 실제적으로는 오거리 회전교차로다. 운동장을 한바퀴 돌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다
08:02 반대편 용방로 방향
08:07 봉성로(861번도로) 봉북리 조선수군 재건 출정공원
08:11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바위와 구국정(救国亭)
백의종군 길은 왕명을 거역 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됐다가 풀려나사 평범한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우라는 일종의 형벌의 길이었다.
한양에서 충청, 전북, 전남을 거쳐 경남 합천(초계)에 있던 도원수 권율의 진영으로 찾아가는1597년 4월1일부터 8월2일까지의 노정을 말한다.
장군이 4월 26일 구례 땅을 밟았을 때. 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일군 구례주민과 현감 이원춘과 손인필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8월3일 삼군수군통제사에 재 임명된 후 다시 찾아와 묵으면서 이원춘, 손인필 등과 수군재건을 논의했다.
08;11 구국정에서 내려다 본 공원전경
08:17 봉성로 백연교에서 올려다 본 백연천 산책길; 멀리 좌편은 청담웰피아 아파트인듯하다
백연천(白蓮川) 섬진강의 제1지류인 서시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08:21 봉성로 북문1길; 구례중앙교회
수년동안 미국을 유람하면서 기독교를 믿게 된 고형표씨가 1894년 12월 귀국하여 봉동리 280번지에서 처소를 구하고 예배를 시작하다.
1895년 의병을 진압하러 들어온 일본군이 교회를 해산하고 예배 처소를 점령하였다.
1904년 미국 선교사 배유지(Dr. Eugene Bell 1908년 광주 수피아여중교 설립자) 의 교섭으로 되찾은 후에 정식 설립예배를 드리다.
1908년 구례읍교회로 개명하다.
알고 보니 정규오장로(전도사), 6대 문재구. 8대 조동진.15대 고재덕 목사 등 내가 만나본 분들이 봉사했던 교회였다.
08:22 구례중앙교회 옛 예배당
08:26 다시 봉성로; 세월이 멈춘 듯한 거리 풍경이 신기하고 정겹다
08:29 구례경찰서 교차로에서 뒤돌아 본 봉성로. 역시 영화 셋트장 같은 풍경이다
08:32 구례경찰서 회전교차로
08:38 왕버들나무 옆에 2017년에 3억을 들여 복원한 명협정(蓂莢亭)
구례읍사무소에는 350살 팽나무와 600살 느릅 나무, 500살 왕버들나무가 있다.
1597년 4월26일 백의종군 시절 들렸을 당시 현감 이원춘과 군관 손인필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아 이곳 명협정에서 휴식하고
동문 밖 손인필과 장세호의 집에서 묵었고, 8월3일 삼군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고 처음 방문하여 하룻밤 묵으면서 조선 수군 재건 출정식도 가졌다
명협: 중국(中國) 요(堯) 임금 때에 났었다는 상서(祥瑞)로운 풀의 이름.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매일 한 잎 씩 났다가, 열 엿새부터 그믐날까지 매일 한 잎 씩 떨어졌으므로 이것에 의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보호수 왕버들나무(수령500)
08:39 구례읍사무소(求禮邑事務所) 옛날 구례의 동헌이 있던 자리. .
일제시대인 1936년 구례면사무소 용도로 지은 1층의 붉은색 벽돌 건물이다. 일제시대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이루며, 현관 부분을 돌출시켜 변화를 주었고, 건물 전체에 수직의 창이 여러 개 있다.
08:39 보호수 팽나무(수령350)
08:41 봉성산길 구례성당
1970년 12월 4일 곡성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설립, 초대 신부는 오톤 모레노 신부.
구례는 주민의 70%가 불교 신자인데, 6.25전쟁 후 구호 물자로 전쟁난민을 도우면서 천주교 전교가 시작되었다.
1956년 구례에 공소가 설립 곡성 본당의 캐롤신부가 아일랜드 신자들에게서 도움을 받아 성당 부지를 마련.
1971년 5월부터 개설되었던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가 철수하고, 1980년 12월 거룩한 말씀회 분원이 개설
현재의 성당과 수녀원, 교육관은 1992년 6월에 다시 신축된 것이다.
08:46 학교길 구례여자중학교
1966년 3월 : 구례여자중학교 개교
2022년 1월 : 제54회 58명 졸업 (누계 11,151명)
재학생 193명
08:48 전교생 2백여명인 구례 여중 캠퍼스가 크고 넓다. 과거에 학생이 얼마나 많았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08:51 학교길 구례 고등학교
1973년 3월 : 구례여자종합고등학교 개교
1974년 3월 : 구례여자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89년 3월 : 구례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21년 3월 2일: 신입생 80명 입학
2022년 2월 4일: 제 47회 77명 졸업(총9,811명)
현 재학생 12학급 남 118 여117 합계 235명 교직원 50명
09;00 구례군청 회전 교차로
구례군청은 일제시대인 1914년 3월 1일 설치되었다.
09:06 구례로 문척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양정4길
09:23 양정4길 양정자원(고물상);
장애가 있어 보이는 남편이 끌고 아내가 밀며 폐지를 주어 실으며 가는데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인사하고 격려의 말을 하고 싶었는 데. 갑자기 꺽어서 고물상으로 들어 가는 바람에 눈으로만 인사하다
09:35 구성2길 문척교에서 본 '수달생태로 문척교' 구례구역 방향
09:36 구성2길 문척교에서 본 섬진강 하류방향
09:38 수달생태로: 정자에서 강변 자전거길로 갈까 하다가
'구례 벚꽃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섬진강 벚꽃길이라는 표식을 보고 마을을 지나는 수달생태로로를 택하다
09:44 문척면(文尺面) 월전리(月田里); 구성(龜城里)
검색하면 구성(九城)으로 나오는 데 동네 표시석에는 엣날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인지?
문척면(文尺面);구례군 남쪽 오산(鰲山531m) 밑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섬진강을 경계로 토지면(土旨面)과 접하고 있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섬진강 벚꽃길이 있다고 해서 걷기로 하다
월전리(月田里); 북으로 섬진강이 흐르고 동으로 중산천이 흐르는 충적평야지역과 남쪽의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九城), 안지(安旨), 전천(田川), 월평(月坪)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09:55 안지(安旨)마을 안지교회
안지는 마을에 반석위에 샘이 있었는데 여름이면 얼음같이 차고 겨울 에는 따뜻하였다 한다.
처음에 입주한 가족 중 앉은뱅이가 이 샘물을 먹고사는 동안 다리에 힘을 얻어 걷게 되어 안지(安旨)마을이라 불렀 는데
지금도 반석위의 샘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0:02 문척 우체국에서 휴식:
직원에게 스마트폰 충전을 부탁하고 황성주 생식을 우유에 풀어 아침식사를 대신하다.
아내가 넣어준 생식이 줄어들지 않는다
10: 04 문척초등학교
1944년 5월 월전국민학교 개교
1950년 5월 문척국민학교
2022년 1월 제74회 졸업(총 3.440명)
2022년 신입생 남1명 여 3명 계 4명
재학생 6학급 35명 교직원 21명
10:42 다시 섬진강 자전거길. 강 건너편 멀리 토지면 용두리 방향
10;43 이제부터 계속 자전거길만 따라가면 된다
10;48 문척면 월전리 월평(月坪)마을에서 좌편 월금교를 건너서 금정리(金亭里) 금평마을
11:04 건너편 토지면 금내리 원내마을과 용정마을
11:09 오봉산 기슭 수달생태로. 너무 좋다. 할수만 있다면 만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11:18 벚꽃길
11:25 이제 44키로 남았다
11:26
11:29 건너편은 토지면 금내리 신기마을과 봉소마을일듯
봉소; 봉황새가 잠자는 마을
11:32 토지면(土旨面) 사무소 소재지와 파도리 토지교회
전라남도 구례군의 동쪽에 위치한 면이다. 동쪽은 하동군, 서쪽은 마산면, 북쪽은 산동면, 남쪽은 섬진강을 경계로 간전면과 문척면에 접하고 있다.
섬진강을 경계로 토지면은 북쪽에, 간전면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이 북동쪽에 있어 산지가 전체 면적의 90% 이상이다.
원래 토지면(吐旨面)이었으나 1899년(광무 3) 토지면(土旨面)으로 개칭하였다.
화엄사에 딸려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토지처(吐旨處)였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11:36 모두 1000미터 전후의 높은 봉우리들이다
11:36 토지초등학교 방향
1925년 10월 : 토지공립 보통학교 개교
2020년 2월 : 제93회 13명 졸업(계 5,683명 졸업)
2022년. 1월 제95회 8명 졸업(계 5,702명 졸업)
재학생 6학급 30명 교직원 24명
11:39 뒤돌아본 섬진강
11;39 건너편 토지면 구산리와 파도리(把道里 )방향;
파도리는 배들이-바드리-파도리로 변한 말이다. 배들이는 섬진강물이 마을 앞까지 넘쳐흘렀고 나룻배들이 이곳에 정박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행정구역개편을 하면서 한자로 바꾸면서 파도리가 된 것이다.
월령봉(820) - 노고단- 왕시리봉(1243m).방행
11;42 금정리 오봉정사(五鳳精舍)
임현주(1858-1934)선생이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후학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도장이다.
임현주는 1905년 을사조약 당시 최익현선생을 따라 남원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포로가 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극심한 고문을 당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다.
석방된 후 전 재산을 처분하여 1918년 3월 이 곳에 정사를 짓고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여생을 바쳤다.
.
11;43
11;52 참좋다. 고맙다. 이왕 만들어 놓은 길.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11:52 지리산 노고단 방향인데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11;52 건너편 파도리사무소 방향
12:01 다시 뚝방길과 마을길. 마을길을 택하다
12:01 생태탐방안내소; 섬진강 수달 생태로가 끝나다. 아쉽다
12:15 간문(艮田)교에서 바라본 섬진강. 간문천을 건너는 다리가 새로 만들어진 듯하다
12:21 간전면 간문리 대평마을 교차로.
버스정류장에서 쉬고 있는데 '누리식당'에서 나오던 분이 백반이 싸고 맛이 있다고 하다. 과연 맛있다. 반찬이 너무 많아 절반을 미리 반환하였다
간전면(艮田面) 구례군의 남동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하동군 화개면, 서쪽은 문척면, 남쪽은 광양시, 북쪽은 토지면과 접하고 있다.
광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백운산(1,228m) 계족산(729m)과 하천산(691m)을 비롯한 산지가 동남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13:17 간전중앙로(865번도로) 간전면 양천리(陽川里) 야동마을 방향
야동(冶洞) 풀무 야;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풀무간(대장간)이 있었거나 마을 형상이 풀무간과 비슷하여 붙인 이름일 듯하다.
13:22 간전면 섬진강어류생태관 ;
공용 화장실이 있을 경우 일단 들려가는 게 원칙이다. 일도 보고 충전도 하고 급할 때는 물도 보충한다
13:22 어류생태관과 수달생태관; 어린아이들은 야외에 만든 공룡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섬진강의 민물고기를 체계적으로 보전·전시하기 위하여 건립한 생태관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사업비 195억 원을 투여하여 2008년 3월 개관하였다. 대지면적 3만 5,645㎡, 건축 총면적 4,771㎡에 이른다.
천(天)·수(水)·지(地) 3개 관으로 이루어진 주 전시시설인 전시동, 자연환경 교육 및 행사를 여는 기획전시실(다목적실)과
야외행사장, 섬진강의 상·중·하류를 축소하여 재구성한 공간인 민물고기학습장, 지피정원·피크닉정원·하늘 정원, 생태연못 등이 있다.
치어를 생산하는 어류보존동과 총 14개의 수조를 갖추고 치어를 생산·전시·방류하는 시설인 사육수조, 주차장, 제방 산책로가 있다
잘되어여 할텐데
13;37 간전중앙로 간전교를 건너편 섬진강대로(19번도로)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눈 앞의 평안한 자전거길이 좋아서 건너는 것을 잊어 버렸다.
결국 피아골 구경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버스 혹은 택시를 이용해서라도 올라가 보려고 했는데. 허참
13:58 남도대교로; 간전면 양전리(陽川里). 벚꽃 계절 드라이브 코스다. 지난 3월 말에 아내와 드라이브 할 때만해도 벛꽃이 많았다
14;07 간전면 양천리 무시내마을 쉼터, '전망 좋은 곳' 표시가 있었는데.
무시내 마을: 무쇠가 나던 마을
14;16 야생동물 주의. 곰 표식이 이채롭다. 미국도 아닌데. 지리산 반달곰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리라
14:19 낚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너무나 부럽다. 무슨 매력과 즐거움이 있길래 저러고 있을리라
저 정도 수준이라면 수질을 오염시키는 일은 없으리라.
14;24 건너편 토지면 송정리(松亭里) 현수천 자연발생 유원지
14;47 간전면 운천리(雲川里) 백운천계곡. 옛날에 나루터가 있던 곳이라서 섬진강 레프팅도 하는 듯하다
15;21 운천리 백운천쉼터 전망 좋은 곳
운천(雲川); 구름이 비치어 보이는 강. 안개 구름이 강처럼 흘러가는 곳?
15:36 건너편이 유명한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이다.
피아골은 내동리 연곡사에서 지리산 반야봉(般若峰:1,751m)까지 약 20km의 연곡천 계곡이다.
1982년 7월 1종보통 면허를 받고 한달 후 여름 휴가에 12인승 봉고에 부모님과 가족을 태우고 자갈길로 내동리 평도 교회까지 다녀온 추억이 있다.
그래서 건너편 길로 가려고 했는데. 딴 생각하다가 깜박하고 건너가지 못한 것이다.
피아골의 원 이름은 직전(피 직稷+밭 전田)골이다. 피는 지금은 잡초로 취급되지만 옛날에는 구황식물(救荒植物 굶주림에서 구해주는 식물)이었다
옛날에 먹을 것이 없어 '피죽을 먹고 살았다' 할 때 그 피(돌피)를 말한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15 전후 이 골짜기 주민의 구황식물이 피(직)였다.
(빌려온 사진) 벼 이삭 사이에 피면 골라서 없에기도 하였다.
(빌려온 사진) 알갱이. 도시에 살던 나는 먹어보지 못하였으나. 농촌 출신 친구 중에는 먹어본 사람이 많다. 지금은 건강식품으로도 선전되고 있는 듯.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직전골(피밭골)이 피아골로 바뀌었다.
이 골짜기 사람들이 피죽으로 기아(굶주림)를 면했다는 뜻인지 혹은 가을엔 피 빛 단풍으로 물드는 이 골짜기에서 6.25 전후 7년 동안 빨치산토벌 작전으로 피아(彼我) 2만여명이 피를 흘린 골짜기라고 해서 누군가 붙인 이름인지도 모른다.
평도교회: 일제시절 지리산 노고단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 휴양촌이 6.25 전란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서
휴 린턴(한국명 인휴)목사를 위시한 선교사들이 1960년대에 지리산 왕시루봉에 11동의 별장을 세웠다.
당시에 선교사들은 풍토병 때문에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여름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후 린턴 목사가 주축이 되어 지리산 피아골 입구인 평도 마을에 군용텐트 하나를 설치하면서 평도교회가 시작됐다.
1964년에 순천의 등대선교회가 약 15평의 건물을, 1970년대에는 25평, 1980년대에 현재의 건물인 10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게 됐다.
16;08 남도대교로; 건너편 좌편은 경남 하동 화개면 화개동 화개천(花開川) 화개교, 우측은 남도대교로에서 화개장터로 건너가는 남도대교
남도대교: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전남 구례군 간전면의 경계가 된다
16;09 카페 랑(RANG) 뒷길
16;12 남도대교 건너가기 전 전남구례군 간전면 운천리(雲川里) 삼거리
16;13 남도대교에서 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화개천 화개교
16;19 남도대교 가운데에서 본 상류방향; 좌편은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우편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16;35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塔里): 남도교차로 화개장터. 화엄사 가는 쌍계로 방향
하동군(河東郡); 섬진강 동쪽에 있어서 하동군
삼한시대에 변한의 낙노국(樂奴國), 삼국시대에는 가야 다사성(多沙城). 백제 한다사군(韓多沙郡)일 일본의 교통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63년(문무왕 3) 신라 영토, 통일신라시대(757년) 하동군. 828년(흥덕왕 3)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한 때부터 퍼지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불태워 페허가 되어 하동읍의 위치가 자주 변동되다가 1702년(숙종 28)에 읍민들의 진정으로 교통이 편리한 현재 읍내로 옮기다. 1759년 당시 3,832호 1만 7289인. 1919년 3·1운동 때에는 4월 3일부터 20일까지 하동장을 비롯한 여러지역에서 많은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고, 많은 인사가 살해 또는 투옥되었다. 1948년 10월에는 여수·순천사건으로 피해가 많았고 그 여파로 한국전쟁 때에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68년 경전선 개통,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군 남부를 관통함으로써 지역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마련되었다.
화개면(花開面) 꽃 피는 마을.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16;37 파장의 화개장터.
그래도 관광차 두대가 대기 중이라 한무리의 관광객과 어울려 둘러 볼 수 있었다
16;38 장터 입구 광장
화개장은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열리던 장으로, 섬진강의 가항종점(可航終點) 즉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이기 때문에 큰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1770년대에 1일·6일 형식의 오일장이 섰다. 해방 이후에 1일과 6일에 서는 정기시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6·25 전쟁 전후 빨치산 토벌 등으로 산촌이 황폐해지면서 쇠퇴했으나 1997년부터 복원한 현대식 화개장터가 옛날 전통시장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1993년 4월부터 화개면 청년회가 주관하는 화개장터 벚꽃 축제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화개10리 벚꽃길에서 3일 동안 열린다.
16;39 화개장터의 화개장터를 노래하는 조영남씨
몇 안되는 손님을 보고 문을 닫지 않고 있는 상인들이 안스러워 보였다.
저녁 식사를 하면 어두워질 것 같아서 대용 먹거리와 내일 비상용 먹거리를 사다
16:42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지붕들
16;45
16;45 쌍계로 ; 지리산 화엄사 가는 길
원래 계획은 여기서 하룻밤자기로 하고 버스나 택시로 다녀오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부춘리의 에덴모텔이 영업을 하고 있으며 저렴하다는 것을 확인했디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오늘 좀 더 걸어야 모레 여유롭게 귀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쌍계사는 피아골과 함께 아내와 함께하는 드라이브 할 코스로 남기기로 하다
16:57 뒤돌아 본 남도대교; 구름이 없어서 일몰의 황혼보기는 어렵겠다.
램블러가 사진이 100장 넘었다고 사진이 더 찍히지 않는다.
그냥 일반 카메라로 찍고 사진 정리할 때 추가하기로 하다
17:14 섬진강대로(19번도로); 화개면 덕은리 상덕마을 건너편 전남 광양시 다압면 금천리(錦川里) 매화랜드
17:15
17;28 뒤돌아 본 건너편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랜드 방향
17;30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중기마을 건너편 전남 광양시 다압면(多鴨面) 금천리 염창(鹽倉)마을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걸어서 왕래할 수 있을 것 같다
17;31
17;40 하동군 화개면 부춘리(富春里) 신기(新基)마을 회관
부춘리:부처가 나는 동네 또는 부처가 난 동네란 뜻의 불출동이 부춘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맞을 것 같다
17;42 부춘교차로; 한무리의 남여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무슨 구호를 외치며 다가온다.
깔깔대며 웃는 것으로 보아 즐거운 캠페인 중인 듯하다. 혹시 섬진강 보호 캠패인 걷기 중일 수도 있다
17;44
17;45 강 건너 편 광양시 다압면 금천리 매각(梅閣)마을
매각: 매화를 선비의 꽃으로 여기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겨울에도 매화를 감상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만든 온실이라는 설이 그럴듯하다.
마을 전체가 매각 같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이 마을에 매각이 있었다는 것인지 둘 중의 하나이리라.
24가구 32명의 주민 대부분이 70대 이상의 할머니다. 광양이지만 구례나 하동과 가까워 문화나 복지 혜택에서 소외된 지역이다.
6·25 전 여순반란사건 당시 빨치산이 숨어들어 많은 주민들이 희생과 곤욕을 치른 마을이다. 농촌소득사업으로 60억을 받아 마을에 ‘메아리 휴양소’를 만들고 숙박업과인성학교를 운영하여 흑자를 내고 있다고 한다.
18;00 부춘리 뚝방 자전거길; 멀리 에덴 모텔이 보이다
18:01 건너편 다압면 금천리의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습지와 모래톱이 잘 발달되었다
18;08 부춘리 에덴모텔; 낚시를 하고 있는 분이 멋있어 보이다
뒷처리만 잘 해 주면 좋겠다. 금수강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기를 바라다
18;11 경남 하동군 화개면 부춘리 에덴모텔
아내와 답사 드라이브를 할 때는 휴업이나 폐업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화개장터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화개장터에서 자면 내일 일정이 길어질 듯하였다. 그래서 전화를 하였더니 영업 중이고 경로 1인일 경우 할인해 주신 단다.
가족이 운영하여서 그런 듯하다. 우유에 생식을 풀고 화개장터에서 구입한 빵으로 저녁을 대신하다.
사진을 백장 넘게 찍어서 램블러에 더 기록할 수 없게 된 것을 보면 오늘 구경할 것이 많았던 듯하다.
샤워와 빨래를 한 후에 와이파이가 되어서 간단한 메모를 한 후에
아내에게 폐업을 한 것 같았던 그 에덴모텔에서 저렴하게 묵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함께 감사하다.
이제 섬진강 걷기도 거의 끝나간다. 원래는 하동과 광양시내 한바퀴돌기를 하고 월요일에 귀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끝날 때가 가까워지자 마음이 바뀌어서 내일 모레 점심 무렵에 끝내고 귀가하기로 하였다. 허참.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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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장거리 도보할 때 마칠 무렵이 되면 마음이 바빠지던제요~~
하룻길도 그렇고요....
동감입니다. 특히 강 따라 걷는 길에서는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숙소 문제가 해결될 때의 안도감으로 보상 받는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