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화평(和平)케 하는 자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복(福) 있는 자여! 너희는 화평케 하는 자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직역(直譯)을 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이토록 분명하게, 화평케 하는 자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해요.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資格)이 있는 가에 관해서,
오늘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화평케 한다는 걸,
나의 존재가 타자의 그 평화로움에,
기여(寄與)를 하는 것! 정도로 이해를 하죠.
남들을 평화(平和)롭게 만들어주는 거!
그게 화평케 하는 자! 아닙니까?
그래서 산상수훈의 이 대목을 보고,
세상의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려고,
애를 쓰는 이들이 많아요. 대표적인 사람이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간디가 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보고,
‘비폭력(非暴力), 무저항(無抵抗)’의 평화전도사가 된 거예요.
간디는 죽는 날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읽는 게, 이 산상수훈이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진짜 화평케 하는 자입니까?
그렇잖아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 사람이 화평케 하는 자 맞죠? 간디!
주님이 지금 그런 종류의 행함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산상수훈을,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특별한 반응이고, 증상이라 그랬습니다.
간디는 힌두교인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케 한다는 게,
간디가 행한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라는 게 자명해지는 거죠?
성경을 보면 그 화평을 이루시는,
평강(平康)의 왕(王). 이게 화평의 왕이에요.
평강! 화평! 화목! 다 같은 단어예요.
‘에이레네.’ 같은 단어!
그 평강의 왕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이사야서 9장 6절을 보세요.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자, 평강, 평화가 이야기 되고 있는데,
무엇이 그걸 이룬다, 그래요?
‘여호와의 열심’이 그걸 이룬다, 그러죠?
그 평화를. 평강의 왕이라는 말 자체가, ‘평강, 화평의 주인(主人)’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화평, 평강’은, 거기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어디로 나갈 수도 없고 주어질 수도 없다.
그러니까 ‘평강의 왕’이에요.
미가서 5장 2절에도 똑같은 말이 나오는데,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3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4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
평강(平康)은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평강이라, 그러죠.
우리가 느낌이나 감정으로 사유(私有)하거나,
느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이 평강의 왕이고, 그분이 그 평강을 갖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와 연관(聯關)이 없으면,
성경이 말하는 평화와 평강, 그 화평은 절대로 감지(感知)가 되지 않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빠진 화평이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간디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 사람들이 평화에 기여(寄與)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성경이 말하는 그 화평(和平) 아녜요.
그건 평화(平和) 아녜요.
그런 평화, 그런 피스 메이커(peace maker) 되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거 아녜요.
그래야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 된다.
천만의 말씀 그런 소리 아닙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평강을 주러 오신
하늘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화평케 하시는 분이에요.
그렇다면 누구와 누구의 화평이겠어요?
어떤 사이의 화평을 만들기 위해 오신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화평이에요.
일차적으로. 그리고 이 수직적(垂直的)인 화평이 이루어졌을 때,
수평적(水平的) 화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너무 너무 평화로워 진다는 뜻이 아녜요.
마지막에 가시면 다 이해가 되시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화평케 하러 이 땅에 오신 분이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화평케 하는 자, ‘에이레로 포이오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성경이 딱 두 번 나와요.
물론 형용사와 동사로 품사는 다르지만.
딱 두번 요 단어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한 번 나오고,
골로새서에 나와요.
골로새서 1장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이게 똑같은 단어예요. 이게 동사예요.
화평을 이루사, 뭐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시기 위해,
예수를 보내어, 피를 짜낸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니까 화평! 화목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화평!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화평케 하는 자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케 되는 거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십자가 지고 죽는,
하나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의 삶 전체를.
그러니까 화평케 하는 건,
남들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고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화평케 하는 자로 오셨던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피 흘려서 죽으면서, 화평케 하신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 지고 죽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사이가 화평하게 되고,
또 그의 삶과 또 그 입에서 나오는 화평에 대한 메시지로 말미암아,
수평적 화평이 확장(擴張)되는 거예요.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는, 일차적으로,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그 불화를, 불식시켜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거고, 아울러,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공로만을 의지하게 되는,
자기의 자율성과 존재성을 차압당하는, 그게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는 거잖아요?
‘내가 거기 뭐 보탤 게 없구나!’
이게 존재성(存在性)과 주체성(主體性)과 자율성(自律性)을
하나님께 차압(差押)당하는 거죠? 이게 죽는 거예요. 요게 화평케 하는 거예요.
그건 성도들을 지칭하는 거요.
자기부인의 삶을 살게 되는 성도들! 이게 화평케 하는 자들이란 말예요.
그렇게 자신이 부인(否認)이 되어야,
하나님이 하나님 대접(待接)을 받으시는 거고,
그 상태가 화평인 거예요.
아니 인간이 요만큼이라도,
자기의 자율성이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걸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게 화평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 대척점(對蹠點)에 있는 존재가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죽은 자로 항복(降伏)이 되어져야, 그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그 십자가를 실제화 하여 살게 되는 거잖아요?
주님의 피만 의지하게 되는 자로, 지향성을 갖고 밀려 내려가는 거 아닙니까?
그게 죽는 거란 말예요. 그게 화평케 되는 거예요.
내가 점점점점 죽어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장악(掌握)하시는 거죠.
그렇게 나를 장악하시고 통치하실 때,
내가 ‘아이, 하나님 내가 죄인 중에 괴수(魁首) 맞습니다.
하나님이 통치(統治)해주세요.’라고 완전히 항복할 때, 화평이에요. 평화예요.
그러니까 이런 단어들을,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여러분이 이해하시게 되면,
성경은 간디가 본 것처럼 도덕책이 되는 거요.
‘야, 어디 가서 오늘은 평화를 전할까?
어떤 사람들을 중재(仲裁)하여, 평화롭게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단 한 줄도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아요.
원래 인간은 자율성을 발휘해서 선악의 분별을 하며,
스스로 주체가 되는 삶을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녜요.
인간이 선악과 입에 물고, 자신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선악을 판단하며, 자율성을 발휘하며 사는 걸, 타락(墮落)이라 그러죠?
그걸 타락이라 그래요.
하나님이 고걸 부수는 거란 말입니다. 거기에는 평화가 없어요.
하나님은 반드시 그걸 돌격(突擊)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입(加入)하지 않았을 때에,
자신들은, ‘없음’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올바로 인식하고 수긍해야 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단 말예요.
조금? 50% 의존적 존재 아녜요. 90% 의존적 존재가 아니라,
‘절대’ 의존적 존재!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
그런데 그런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주체성을 챙기려 하고, 자율성을 발휘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자존적 존재! 자율적 존재의 흉내를 낼 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冒瀆)당하는 거예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거기에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부어지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시므로 말미암아, 화평을 이루신 거예요.
그 아들 안에, 당신의 백성들을 모두 다 집어 넣으셔서,
죽여 버리신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버린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죽은 거예요. 이젠 난 없어요. 나는 없어요.
이것만 우리가 확실하게 붙들고 있으면, 자존심 상할 것도 없고,
남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도, 그냥 괜찮아요. 나는 원래 없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나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게 내 존재가 삭제(削除)당하는,
바로 그 복음(福音)의 현실(現實)인 거예요.
이게 화평(和平)이에요. 이게 평화(平和)예요.
하나님에 의해 내가 죽임을 당하는 거!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거!
내가 못 죽으니까, 하나님이 예수 안에 넣어서 날 죽여 버린 거예요.
안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나에게 쏟아 부으시게 되기 때문에.
이걸 복음(福音)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육적 자아를 죽여야 돼요.
그런데 우리를 죽여 버리면, 우리가 부활(復活)할 능력(能力)이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 안에 넣어서 죽이고, 예수 안에서 부활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의 핵심(核心)은 전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예요. 다 예수 안에서!
그러면 예수 안에서 모든 게 완료되면, 나는 뭐냐? 없는 거예요!
내가 행한 게 요만큼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의 죽음과, 예수 안에서의 부활은,
단순히 죄 값의 지불에 관한 이야기만을 메시지로 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성이 죽어야, 하늘의 백성으로 산 자가 될 수 있는,
하늘 존재들의 존재양식에 관한 설명이기도 한 거예요.
그냥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품어 안고 죽었다.
그래서 우리의 죄 값이 다 지불되었다. 요런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서, 다 죽은 존재!
그러한 존재들에게만, 하나님의 것이, 풍성하게 충만하게 다 부어져서,
하늘의 것이 될 수 있다는, 하나님나라의 존재양식!
존재 탄생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단순이 그냥 죄를 지어서, 죄 값을 지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다.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예요.
그렇게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 때,
인간은, 가장 안전한 거고,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하나님께 차압당한 자로서,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거요.
더 이상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우리는 불안함에서 풀려나는 거예요. 그걸 평화라 그래요, 성경은.
이렇게 이미 내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육적 자아를 차압당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이 되었다는,
그 은혜의 현실을 발견해 가고, 알아가는 성도의 자기부인의 삶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화평케 하는 삶인 거예요.
‘아,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거저, 입적시켜 주신 거군요!’
이걸 앞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는 거예요.
왜? 내가 그 하나님 앞에서
‘없음’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점점점점 알아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이고, 내 새끼!’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자녀들이, 품 안에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을 때, 그 때만큼 예쁠 때가 없어요.
자식들이 자라서,
‘이제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는 엄마 일이나 보세요.’
그러고, 문 잠그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엄마는 가슴 찢어지는 거예요.
얼마 전에, 소아암 병동에, 어떤 기자들, 피디들이 들어가서,
다큐멘터리를 찍어놓은, 그런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소아암 환자들은, 그 어린애들이 나면서부터,
20개월, 19개월, 10개월 요런 애기들,
그리고 3살, 4살 된 애들이 나면서부터 암에 걸려서,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들은 전부 무균실에 들어가 있어요. 병원 안에서도 또 갇혀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20대, 30대 엄마 아빠들이, 직장도 그만두고 거기에 매달려서,
그 아이들을 돌보는 거예요. 내가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에서,
이들이 행복을 느끼더라니까요. 행복하대요.
이 아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이 아이에게 뭔가 베풀 수 있는 이 위치가, 자기는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아기들은 그냥 대자(大字)로 자는데.
엄마 아빠는 조그만 침대에서, 칼잠을 자는데도,
그 아이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아이들이 ‘인제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가면, 그 때부터 품안의 자식 운운하면서,
이게 ‘내가 지금 뭐 때문에 사나?’ 이렇게 되는 거요.
이게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마치 소아암 걸린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뭔가를 자식에게 쏟아부어주고 싶어 하는데,
우리들이 자꾸 문 걸어 잠그고, ‘내가 뭐 할 수 있다니까.
자꾸 아버지가 내 삶 속에 이렇게 참견하고 그래?’
하고 들어가는 그걸, ‘타락(墮落)’이라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마치 기특한 성숙(成熟)이며, 발전(發展)이라고 착각(錯覺)들 하는 거예요.
아니 우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해야 돼요.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래야지,
‘내가 아버지 위해서, 뭔가 한 번 해 볼게요.’ 이렇게 먼저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내 삶 속에서 나오는 기특한 삶! 변화!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아버지가 내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지, 내가 변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성숙되는 게 아녜요. 아버지는 그거 원치 않으세요.
아버지가 다 해주고 싶어 해요. 닦아주고, 씻겨주고, 먹여주고, 그게 사랑이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내가 손해(損害)를 볼 때, 여러분 오히려 우리가 행복을 느낀다는 거 아세요?
보세요. 그 부모들! 자기 거 다 손해(損害)보고 있잖아요?
안 그래도 돼요. 다른 부모와 비교해서 자기는 엄청 손해를 보고 있어요.
직장도 못 가, 잠도 제대로 못 자, 밥도 못 먹아,
무균실 안에서 행동 제약도 있어, 다 손해 보는 거 아녜요?
그런데 집에서, 자식이 문 닫고, 문 안에서 컴퓨터 하고 있는 부모보다,
그 부모가 훨씬 행복하다니까요. 내 자식에게 뭔가 해줄 수 있어서 그래요.
우리 선교(宣敎) 같은 데 가면,
거기서 우리 얼마나 손해를 봐요?
괜히 직장도 못가고, 돈은 돈대로 자기가 들여서 가야 되고,
그리고 거기서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내 모든 걸 쏟아부어주고 와야 되는데,
그게 행복해서 오기 싫어서 다 울잖아요?
거기 갔다 오면. 하나님이 그런 걸 왜 조금씩이라도 보여주시느냐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나라의 삶이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에 진짜 행복이 있다는 걸,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 프로그램에 어떤 아줌마가 나왔는데,
거기에 ㅅㅎ 라는 아이가 하나 있더라고요.
이 아이는 말도 못하고 눈도 멀었고.
그런데 이 아줌마가, 이 아이를 어떻게 보고,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그냥 자기 혼자 결정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이 아이에게 붙어서 봉사하고 희생을 해요.
이 아줌마 가족들도 다같이. 집이 꽤 잘 사는 사람들 같았어요.
자기는 이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에 대한 투자밖에 몰랐다는 거예요.
명품 보러 다니고, 애들 학원 알아보러 다니고, 이런 평범한 아줌마였는데,
이 아이를 만나서는, 자기를 위해 양말 한 짝 사는 것도 아깝대요.
얘를 돌봐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이 아줌마는 그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이,
자기는 비교할 수도 없이 가치 있고 행복하다는 거요.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조금씩 보여주는 건,
우리가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지금 판단(判斷)하고,
추론(推論)하고 추측(推測)하고 있는 게, 굉장히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조금씩, 눈치 채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손해를 보고 다 털려서,
결국에는 죽기까지 순종(順從)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 예수님이었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죽기까지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그냥 죽은 자가 된 거죠? ‘너 죽어!’ 했더니, 죽었잖아요?
죽은 자가 되었어요. 그랬더니 화평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지게 하는 거요.
그래서 나를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내가 너 죽여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절대 네 뜻대로 못 살게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지 않아도 될 법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결국 지나고 나면, 전부 우리에게 유익(有益)이 돼요.
지금은 ‘이 터널이 언제 끝날까? 이 어둠이 언제 걷힐까?’ 하시겠지만,
그건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거요.
이렇게 이미 내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 의해 육적 자아를 차압당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되었다는, 은혜(恩惠)의 현실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성도의 현실을 자기부인의 삶! 그것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화평케 하는 삶이요,
십자가를 지고 이 역사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의 과정을 실제화 하여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삶이,
바로 ‘화평케 하는 삶’이라는 거요.
하나님과 나를 화평케 하고, 왜? 내가 죽어야 되니까. 나를 화평케 하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으니까,
상대방과 이웃들과 수평적으로 화평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게 화평케 하는 자예요.
그러한 화목의 현실! 화목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그 화목의 현실을, 몸으로, 입으로 전하는 거!
그러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과 또 화평하게 되는 이걸! 화평케 한다고 하는 거예요.
간디는 이거 못했습니다.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와 복음이 전제(前提)되지 않는 화평은 없어요.
그런 평화는 없다 말입니다,
여러분. 그걸 바울은 ‘화목케 하는 직책(職責)’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성도에게 주어진 화목케 하는 직책!
고린도후서 5장 17절.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가 누구요? 하나님!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 말은, ‘너희들은 이 땅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그대로
액츄얼라이즈(actualize)하여 살아야 된다는 뜻이죠. 그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죠.)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무슨 말이에요?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죽어라!’ 라는 뜻이에요.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죽어라!’
그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셨어요.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성취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화평에 관한 복음의 말씀인 거예요.
그런 복음의 말씀은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들의 그 존재성 자체를, 삭제해 버리는 거니까,
그게 바로 화평케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화목 하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평화의 상태, 화평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고, 그 피만을 믿으라는 말인 거예요.
그래야 화평이 가능하니까.
이사야서로 가면, 평화를 공포(公布)하는 삶,
그 화평케 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가 보다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이사야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나오죠? 이게 화평이에요.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평화를 공포(公布)하는 게,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거고,
복음을 가져오는 거고, 그것이 구원을 공포하는 거라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평화를 공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풀어주는데,
뭐라고 풀어주느냐 하면, ‘네 하나님이 통치(統治)하신다!’라는
그 ‘하나님의 통치!’를 공포하는 거래요.
이게 평화를 공포하는 거래요. 평화를 선언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평화라는 건,
‘하나님의 통치가 너희를 완전히 장악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너희들을 끌고 갈 거야!’
이게 복음(福音)이잖아요?
그래야 우리가, 이 죄된, 타락된 우리가,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가다가 사망으로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고 장악해야! 그게 하나님나라잖아요?
그게 천국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바실레이야’는 ‘통치권’이란 뜻이란 말예요,
원래가. 통치! ‘나라’라는 뜻보다. ‘왕국’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고,
‘나라’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래는 통치란 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 백성을 완전히 장악한 그 곳!
하나님나라라 그래요. 그걸 천국이라 그래요.
그게 성취된 곳! 그게 바로 여러분이란 말예요.
그래서 여러분을 ‘하나님나라!’ 라고,
‘거룩한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자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우리의 자율성(自律性)이 박탈(剝奪)당하는 거예요. 그걸 평화(平和)라 그래요, 성경이.
그러니까 평화로운 상태란,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하나님께 완전히 장악(掌握)을 당하는 상태를 말하는 거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상태라는 걸, 전하는 게 화평케 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죠? 예수님이 하나님께 완전히 장악되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을 화평케 했으니까.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얻으리라,’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한 분밖에 없어요.
그 안에 들어가서, 우리가 양자로 입적(入籍)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서,
창세전에 신령한 복을 복 받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건, 이 세상에서 예수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장악되어 끌려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산상수훈, 역사 속 천국 백성들의 삶의 모습들!
그 나열 속에, 이 화평케 하는 자가 들어있는 거예요.
다른 곳에 가서 평화의 전도자로 일하는 거, 이런 거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계속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며, 부인당하는 그 삶! 그게 화평케 하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和平)케 된 자들은,
그 화평을 이제 누리게 되는데, 그 화평이,
육적 자아(自我)의 죽음으로 조금씩 체감(體感)이 되어가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의 화평! 평화는, ‘육적 자아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평화(平和)와 완전히 다른 거죠?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걸, 평화라고 하잖아요?
안 그러면 불화(不和)죠?
그런데 성경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어야, 평화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밀고 내려가는 걸, 평화라고 한단 말예요.
로마서 5장 1절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어떻게 누려요?
‘이제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을게요.’
그래야 하나님과 내가 화목해지죠?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무 것도 못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화평을 누리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께서 완료(完了)하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
화평케 하는 삶인 거고, 그 화평케 하는 삶은,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이며,
십자가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義)를 몽땅 부정당하는 거고,
자신의 의를 부정 당한다는 건, 곧 육적 자아의 삭제를 의미하는 거예요.
그게 평화고, 화평이에요. 그러한 하늘의 평화가,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체감이 된다?
‘고난(苦難)’으로 체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예수 믿었는데,
왜 내 삶에 이렇게 평화가 없어?’ 그런 말하지 마세요. 고게 평화예요.
여러분, 혹시 성경을, 일부러 다른 사람들이 설교해 놓은 것을,
뒤집는 쪽으로, 연구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성경이 너무 표피적으로 읽혀져서, 그렇게 도덕책, 윤리 책이 된 거지,
절대 성경은, 그런 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강의 왕! 화평케 하는 왕!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구약이 그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은 역사 속에서 뭐라고 얘기하셨느냐 하면,
‘내가 평화를 주러 왔는 줄 아느냐?’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건 구약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는 이야기잖아요?
성경은 그분을 평강의 왕! ‘샬롬, 솔로몬, 술람미,’ 다 똑같은 뜻이에요.
예루살렘! 다 평강이에요. 예수님을 성경은, 평강! 평화라고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은 ‘나 평화의 왕으로 온 거 아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역사 속에서. 그러면 역사 속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49절 보세요.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게 뭐예요? 나 화평(和平) 주러 온 거 아니래요. 분쟁을 일으키러 왔대요.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화평하게 만들려고 한 일이 뭐가 있어요?
아무거나 하나만 이야기해주세요. 없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 평화는 그거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으로 가세요. 10장 34절.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왜 갑자기 가족(家族) 이야기하시고, 평화 이야기하시다가, 목숨, 이야기를 하실까요?
여러분? 사람이 자기 존재의 확장으로, 가장 확실하게 붙들고 있는 게, 가족이에요.
그게 자기 목숨이에요. 목숨! 그런데 하나님이 와서 그걸 찢어버리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너 죽이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마지막에, ‘목숨을 잃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왜 가족을 와서 찢어버려요?
우리는 가족까지도, 내 화평, 평화의 도구로 쓰고 있잖아요?
내 자식, 내 부모, 내 아내, 내 남편,
다 내가 평화롭기 위해 지금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는 거 아녜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부셔버리고 찢어버린다는 건,
‘너 죽이겠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화평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게 역사 속에서 체감(體感)될 때는 목숨을 잃는 것처럼, 아프단 말예요.
그래서 ‘내가 너에게 화평을 주러온 줄 알아?’ 하신 거예요.
인간 세상이, 역사가 기대하는 그 화평 아니라는 거예요.
그 화평과 반대의 일을 행하므로, 하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뜻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걸 바탕으로 해서,
평화라는 느낌과 감정을 갖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보호막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超越的)인 영역과, 그 초월적인 존재를 모르니까,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든든한 거예요. 평화로운 거예요. 불안(不安)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먼 길 가는 아이에게 부모가 노자 돈 넉넉하게 주면서,
‘그래도 주머니에 돈이 좀 있어야 불안하지 않는 거야,’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이는 게 있어야 안전해요, 사람들은.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화의 근거(根據)를 삼으려고 해요.
그런데 그 어떤 걸 소유(所有)한다고 해도, 인간들의 불안(不安)은 사라지지 않아요.
다른 말로, 그 어떤 소유나 행위(行爲)로도, 인간들은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단 뜻이에요.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체(主體)가 되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안전을 책임져야하는,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은, 절대로 평화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박탈해버리시고,
대신,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주시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내가 스트롱 파워(strong power)다!’
그러는 거예요. ‘바벨성, 바벨탑 이런 거 자꾸 쌓아서,
너희들 스스로 너희들의 안위를 책임지려 하지 마!
내가 스트롱 파워야! 내가 성(城)이야!’ 노래도 하잖아요?
우리 주님이 산성이라면? 반석이라면서요? 나의 피난처라면서요?
그분에게 숨어야 안전하다는 거요. 그게 평화요.
그런데 내가 나의 안위(安危)를 책임지려고 하면,
그 때부터 평화가 깨지는 거예요. 불안한 거예요. 나는 그거 할 수 없는 존재거든요.
그래서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가,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평화 주러 온 줄 아니?
그거는 한시적 감정(感情)일 뿐이지, 진짜 평화 아니야.
그 평화가 얼마나 지속되더니? 너희들이 갖고 있는 평화가 얼마나 지속 돼?
자식들, 사춘기만 되면 없어지는 거야, 그거!’ 아주 그냥 실감이 나네요.
‘내가 진짜 평화를 줄게. 너희들이 너희들의 힘으로, 존재의 확장으로 붙들고 있는,
그 가족이라는 관계부터 내가 끊어내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집안을 가보면, 그리 화목(和睦)하지 않아요. 화목한 척 하는 거지. 그렇죠?
우리는 가족마저도 내 화평의 도구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건 안 된다고, 모형으로, 그림자로 한 번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조차도 끊어낼 거라고. 그래서 주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화평 획득(獲得)의 도구들을,
분쟁(紛爭)이라는 것을 통해, 끊어내시고야 마세요.
‘이게 이제 내 힘이 됐구나! 야, 나는 이제 안전해!’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거 끊어내세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내 명예(名譽)일 수도 있고, 이런 거! 끊어내시는 거예요. 흩어버리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화평케 하심인 거예요.
당연히 인간들은 그런 하늘의 화평을 싫어하죠.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는 땅의 화평을 추구하는데,
하늘의 화평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삭제(削除)되는 화평이란 말예요.
그런 화평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예레미야 6장 16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하나님은 끊임없이 평강의 길을 제시하는데,
인간들이, 그 길로 하나도 안 가더라는 거예요.
왜 내가 삭제되는 쪽으로 가야 돼?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지, 이왕이면.
그리로 하나도 안 거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샬롬, 평강’이라는 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누가복음 19장 41절.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루살렘! 평화! 평강의 도성! 화평의 도성!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들이 주인공이 된 화평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런데 내가 평강의 왕으로 와서, 지금 평화가 뭔지,
내가 너희들을 품에 안고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하는데,
왜 나를 품어 안고 죽겠다고 하느냐고, 오히려, 너희들이 나를 죽이지 않느냐?
내가 평화의 왕인데. 너희들은 이 평화를 못 알아보잖아?’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세상이 추구하는 평안과 평강을,
하나님 백성들의 대적들을 수식하는 말로, 간혹 쓰기도 해요.
시편 123편 4절 보세요.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를, ‘평안한 자’라고 정의를 해요.
시편 73편에 보면, 진짜 세상적인 관점으로 평안한 자는, 하나님 안 믿는 자였죠?
아삽은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 세상에서 전혀 평화롭게 못 살았어요.
마찬가지예요 여기도. 평안한 자들이, 세상적으로 볼 때,
평안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나를 조소(嘲笑)하더라는 거예요.
그들이 세상적인 평안을, 평화를 갖고 있더라는 거예요.
예레미야 6장 14절 보세요.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가짜 선지자라는 자들도 평강을, 평화를, 화평을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평강은, 이 세상의 가짜 평강이에요.
그건 평강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평강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예수님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세상의 평화, 가정의 평화, 화평, 교회의 평화,
이런 건 죽을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진통제를 잠깐 놔줘서,
그 잠깐 동안의 그 진통을 잊게 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건 평화 아녜요. 그건 낫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오히려 병을 더 키우는 거란 말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진짜, 세상에 무슨 평화(平和)가 있어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걸, 평화라고 생각하는데, 아무 일 없죠?
그 사람 곧 그 삶을 싫증냅니다.
인간들이 왜 이렇게 테러니, 전쟁이니, 이런 거 많이 일으키는지 아세요?
심심해서 그래요. 그 평화가 싫어서.
왜? 그 평화가 진짜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진정으로 기쁘게 못 해줘요.
그러니 인간들은 세계 평화를 위한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게,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구실은 전부 평화래요.
미국도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유엔도 평화를 위해서 테러집단에게 폭격을 하고,
테러집단은 자기들의 평화를 위해서, 테러를 감행하고.
인간들 세상에 무슨 평화가 있어요?
그거 평화가 아니라서, 그들이 그렇게 그 평화를 싫증내는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들은 평화를 깬다니까요.
그런데 그 이유를, 평화를 위해서라고 이야기를 해요.
속는 거예요. 본인들이 속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진짜 평화는, 나의 존재성이 하나님 앞에서 삭제되었을 때, 오는 건데,
이 세상의 평화는 전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에요.
미국도 세계 평화 운운하지만, 미국이 중심이 된 평화를 원하죠?
그렇잖아요? 그건 평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평강이, 어떠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지를,
그림을 잘 설명해주는 게, 구약의 화목제(和睦祭)라는 제사예요.
그 단어 자체가 ‘평화의 제사’예요. 화목제!
신약에도 화목이란 단어 많이 나오죠?
‘에이레네, 평화’예요. ‘평강.’
그 화목제는 베풀어주신 축복과 구원에 대한 감사로,
언제든지 그 감사를 표하는 감사제와 화목제와 서원제와 낙헌제로 나누어지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것을, 감사하는 게, 화목제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해주신 그것을 찬양하고 찬송하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게 화목제란 말예요.
그러한 구약의 화목제가 의미하고 있던 게 무엇인지,
바울이 잘 설명해주는데, 로마서 3장 25절로 가보세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보시다시피,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화목,
즉 화평을 위해 드려진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 화목 제사에 관한 규례(規例)가,
레위기 여러 곳에 나오는데,
먼저 레위기 3장으로 한번 가 볼게요. 1절.
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
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원래 이 화목제라는 말 자체가, ‘제바흐 쉘라미미’예요.
‘평화의 희생물’ ‘쉘라미미’라는 그 단어가 ‘샬롬, 샬람, 평화’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러니까 ‘평화의 제사, 평화의 제물.’
그러니까 화목제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간의,
그 평화를 위해 드려지는 제물에 관한 이야기란 말예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화목제의 제물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데,
화목 제물의 기름과, 콩팥과, 간을 덮고 있는 껍질을, 하나님께 태워 드리라 그래요.
하나님이 기름을 꽤 좋아하시죠? 기름은 절대 버리면 안 돼요. 하나님께 드려야 돼요.
그러니 옆구리에 붙은 기름들을 너무 홀대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왜 비계를 좋아하실까요?
이 ‘기름’이라는 단어가,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메시야밖에 없다!’를 보여주는 거요.
그런데 콩팥과 간은 뭐냐 하면, 해독 작용하는 거예요.
메시야이신,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므로,
우리의 죄가 해독(解毒)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콩팥과 간과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다 태워드리는 거죠.
그런데 유독 화목제(和睦祭)만 암컷, 수컷의 구별(區別)이 없어요.
아무 거나 드려도 돼요. 남녀노소.
그게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은 수평적(水平的)으로도,
어떤 차별(差別)도 없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에서 나오는 ‘한 몸’ 사상이에요.
그 화목제물은 다른 제물과 달리, 제사장과 제사를 드린 헌제자(獻祭者)와,
헌제자의 이웃들이 나누어 먹는, 잔치 음식으로 쓰여요. 잔치예요. 화목제는.
그래서 이게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가면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그려져요.
이게 화목제예요. 레위기 7장 14절 보세요.
14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찌니라
(거제(擧祭)라는 건, 이렇게 들었다가 놓은 제사의 방법이죠?
화제(火祭)는 태우는 거고, 요제(搖祭)는 흔드는 거고,
관제(灌祭)는 붓는 거고, 그렇게 네 가지 제사 방법이 있죠?)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이걸 평화(平和)라 그래요. 예수라는 제물!
하나님과 헌제자(獻祭者), 제사를 드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누어 먹는 형국(形局)인 거예요.)
하나님은 예수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거예요. 그 말은, 예수의 피를 먹고,
예수의 살을 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작은 예수가 되어,
하나님께 모두 바쳐진다는 뜻이에요.
이게 화목제(和睦祭)란 말예요. 그래서 거기서 잔치라 벌어지는 거예요.
이제 그 어떤 불화(不和)가 없는 거예요. 잔치!
그러니까 평화의 잔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나’라는 주체가 삭제되는 현장이며, 우리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존재가 된다는 건,
나는 없는 거예요. 예수의 살과 피로 산다는 건, 예수로 사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나라는 주체가 삭제된 현장이고, 그게 자율성이 완전히 차압되는 현장인 거예요.
그게 천국이며, 하나님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는, 묵시(默示)의 세계인 거예요.
그게 화평이에요. 그게 평화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遺言)을 남기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에발산에 단(檀)을 세우고,
거기에서 화목제를 드려라, 그러는 거예요.
하필 왜 에발산이에요? 저주의 산, 에발산?
그리심산도 바로 고 옆에 있는데. 보세요,
신명기 27장 1절.
1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찌니라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찌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에발산은 저주(詛呪)의 산이에요.
저주가 선포(宣布)되는 산!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심산에 단을 쌓으라고 하지 않고,
저주가 선포되는 저주의 산, 에발산에 단을 쌓아라,
그리고 단도, 철기를 대지 않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라, 그래요.
그건, 인간의 열심과, 인간의 노력이 가미되지 않은, 단이란 뜻이에요.
거기서 제사가 드려지는 거예요. 화목제가!
그 말은, 이스라엘의 구원(救援)!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평은,
그게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이니까,
화평은, 이스라엘이 뭘 잘해서 성취(成就)된 게 아니라,
그들은 그 저주의 선포 아래에서, 사망으로 들어가야 할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에발산에 서는 거예요,
‘우리는 저주 받아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래서 에발산에 다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린 양 예수를, 이 저주의 산에서 죽여 버리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떤 노력도, 어떤 열심도 가미되지 않은 그 단에서,
예수가 화목제로 드려지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았다고 기뻐 뛰라는 거예요.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화목제라는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화평케 하심’이라 말입니다.
그 말은 뭐예요? 이스라엘 자체를, 에발산에서 ‘없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 사망 아래서, 이렇게 죽어야할 자들이야.
그런데 너희들이 뭘 했다고? ‘없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육적 이스라엘의 사망!
그런데 거기에 화목제가 드려져서, 화평이 임하는 거예요. 평화가 임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왜 우리가 죽는 게, 평화이겠어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모두가 자기의 존재성을 향상시키고, 주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만 살죠?
그래서 그냥 어디에서든 ‘존재감’이라는 걸 챙기려고 해요.
존재감 상실! 존재감 없음! 목매달아 죽어야 돼요.
요즈음 같은 때는. 다들 자기의 존재감을 향상시키고,
그 존재감을 확립하기 위해 살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죄’라고 한다 말예요.
자기의 주체성을 발휘하려고 하는 거!
이걸. 그러한 삶 자체가 불안(不安)이고, 평화 없음이에요.
‘내가 한번 해 볼게.’ 이게 안 된다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 상태를 ‘사망(死亡)’이라 그래요.
왜냐하면 율법이 그를 기소(起訴)할 때, 걸리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율법은 항상,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야, 율법으로, 하나님 나라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하여,
그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다 지켜낼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 죽어야 돼요.
그런데 율법이 하는 게 뭐예요? 우리의 ‘죄인 임’을 드러내는 거라 그랬죠?
그 말은 우리의 죄를 율법이라는 작자가, 열심히 수사를 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참소(讒訴)를 하는 거요. 기소(起訴)를 시켜버리는 거죠.
‘얘, 이런 죄 지었고요, 얘, 요런 죄 지었으니까요. 얘 죽이세요.’
왜?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이니까. 죄는 분명히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은 시체를 기소해서 뭐 할 거요?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를 머리로 한, 새로운 지체로 완전 다른 존재가 되었어요.
교회라는 집단적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개별적으로 처벌을 받거나,
개별적으로 상을 받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 이제 예수를 머리로 한,
교회란 집단적 존재가 되어버려서,
율법이 여러분을 개별적으로 기소를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걸 평화(平和)라 그래요. 그게 화평(和平)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 속에서,
여러분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자율성을 빼앗기는 삶을 사는 거예요,
이렇게. 그냥 우리가 스스로 그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기 힘드니까,
예수님이 마치, 논개처럼 몸 바쳐서,
우리를 끌어안고, 같이 뛰어내려 죽어버린 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거! 그게 평화를 누리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나 그러한 화평케 하심을 입은 나는,
이미 존재감, 존재성을 박탈당하는 것 때문에,
세상 속에서 보기에는 인간의 자존심을 실추(失墜)시킨 자들이 되는 거예요.
그게 죽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거기로 끌려가게 된다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자예요.
더 이상 불안(不安)할 것이 없는 존재(存在)가 된 거란 말예요.
인간들은 자꾸, 자기의 느낌과 감정으로 평화를 감지(感知)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나는 평화롭지 않다’고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고 있는 거요.
그런 평화! 여러분에게 안 주어줘요. 인간들의 화평(和平)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다르다는 게 확실하게 나타난 곳이,
모세가 율법을 받던 시내산 아래였어요. 가보죠.
출애굽기 32장 1절.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화목제를 드리고, 일어나서 막 뛰놀고 있어요.
기분으로, 감정으로. 지금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상태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이 평화를 지금 감지(感知)하고 있죠?
체감(體感)하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뭔 가를 만들어 놓으니까,
이들이 지금 자기들이 평화롭다고 지금 착각(錯覺)하고 있는 거예요.
6절을 보시면, 모세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뛰어놀고 있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 뭐가 있었느냐 하면, 자기들이 만들어낸,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혀줄, 그런 종류의 신(神)이,
우상(偶像)이 가운데에 턱하니 놓여 있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평화를 얻어내려고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보세요, 왜 불안(不安)하죠?
왜 불화(不和)가 있어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지금 어긋나고 있으니까, 불안한 거예요.
그리고 불화가 일어나는 거잖아요? 그게 세상 사람들의 ‘평화 만들기’예요.
자기가 원하는 거, 자기가 갖고 싶은 거, 소유하고, 또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어,
눈에 보이는 것, 그것으로 나를 주인공(主人公) 삼아,
거기에서 기분 좋은 감정(感情)을 느끼는 걸, 평화라고 착각(錯覺)들을 한다 말입니다.
1절을 보면요. 시내산에 십계명 돌판을 가지러 올라간 모세가 안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불안(不安)해하고 있죠?
‘그 사람 왜 안 내려와?’ 그러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모세를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이때에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아래에서 그걸 보고 있으면서도,
그 하나님을 못 알아먹더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요.
지금 모세하고 하나님은, 열심히 위에서 돌판에다 글 쓰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 이들이 그 하나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안 보이니까. 분명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세만 바라보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맹점(盲點)이에요.
여러분, 설교를 잘 하는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대언하는 설교자,
어느 틈에, 여러분은 그 사람을 우상(偶像)으로 섬기게 되어 있어요.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여러분, 그 사람이 사라지잖아요?
그러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게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어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건, 모세 뒤에서 일을 하신 하나님이었던 말입니다.
그걸 보셔야, 여러분이 그까짓 모세가 없어도, 목사가 한 달 동안 비워도,
안전(安全)하게,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信仰生活)하는 거예요.
아니, 그런데 이 모세가 안 보이니까, 이 사람들이 불안해서,
눈에 보이는 모세를 좇았던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대체물(代替物)로 만들어내야 돼요.
그래서 고작 만들어낸 게, 금송아지예요.
그런데 이건 모세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이가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낸 신(神)’이라고 부른 거예요.
조금 아까 모세를 불렀던 이름이에요. 그건요. 그러니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기를 원했고, 이런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통해서, 평화를 얻기를 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턱 하니, 그걸 만들어놓자마자, 화목제를 드리고서 평화! 평화! 그런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뭐요? 성탄절이죠?
그런데 그 때 다음 날,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평가해요? 어제 즐거웠어?
그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데? 자기가 즐기려고 하느냐고요? 기뻐 뛰며 노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디 가고. 그게 무슨 땅의 평화입니까? 오늘날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성탄절이면 꼭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되고.
구역별 장기자랑을 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되고, 그런 거예요. 우리가 즐거워야 되니까.
평화는 그렇게 얻어지는 거 아녜요.
하나님은 거기에 진노(震怒)하세요. 이 세상 어떤 것도,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평화를 못 갖다 줘요. 화평케 못한다 말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양의 피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자기들의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평화를, 생산해내려 하는 거,
그게 바로 죄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 죽여라!’ 그러는 거예요. ‘다 죽여라!’
모세에게. ‘모세, 너 하나 남기고 다 죽여 버리겠다!’
오늘날 기독교를 공격하는 세속적 지성은 두 가지로 요약(要約)해 보면,
그 하나가 과학적 세계관과, 실증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하나가 역사적 사고방식.
그것들은 둘 다 기독교를 향해, 보이는 것으로 나를 설득(說得)하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으로 나를 설득하라!’ 그러니까 기독교 안에 절대적(絶對的)인 진리들이,
이제 자꾸 상대적(相對的)으로 평가(評價)가 돼요.
이게 다원화 되는 오늘날의 세상의 특징이에요, 이게. 보이는 것으로 설득해 달라는 거예요.
과학적 합리성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어요.
눈에 보이는 거, 내가 체감할 수 있는 것으로 나를 설득해 달라는 거요.
‘왜? 나에게 평화가 없어? 왜 내가 기쁘지 않아? 기뻐하라고 했는데….’ 그거 아니라니까요.
역사적(歷史的) 사고(思考)! 마찬가지예요. 존재하는 모든 건,
예외 없이 역사적 기원(紀元)을 갖고 있어요. 역사적으로 형성(形成)이 되고,
변화(變化)되어 왔음을 전제로 하는 게, 역사적 사고예요.
제가 보기에는 교회 밖에서의 그런 사고들의 공격(攻擊)은 그리 걱정할 게 아녜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조차,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를 설득하라는 식의 그런 종교관이 있다는 건,
정말 심각한 거예요. 감각(感覺)으로 느끼고 싶어 해요.
무슨 감동(感動)을 자꾸 받으려고 하고, 체험을 하고 싶어 하고,
나를 역사 속에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종교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목사, ‘너도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고, 말씀도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고,
교회도 나를 기쁘게 해줘야 되고, 나를 감격시켜줘야 되고,
예배도, 훌륭한 용병들을 고용해서,
찬양도 멋지게 해서, 내가 은혜도 좀 받게 하고,’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패역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화목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세요.
다 죽이겠다고 하셨는데, 모세가 막고 서요. 보세요, ‘다 죽이겠다.’
이 말은, 애굽의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 때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다 죽이겠다죠, 그죠?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 그 집 장자만 살리겠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그 어린 양의 역할을 그 누군가 해야 돼요.
지금 애굽으로 돌아간 상태예요. ‘다 죽이겠다.’예요.
너희들이 지금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를 잊어버리고,
그 진정한 화목제물로 드려진 어린 양의 피, 그거 잊어버리고,
또 다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너희의 평화와 화평을 기원하고 있는데,
그래 다시 가르쳐 줄게. 그러더니 ‘다 죽이겠다.’로 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어린 양의 역할로, 모세가 막아서는 거예요.
모세가 막아선 사람만 살아요. 출애굽기 32장 9절 보세요.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모두 다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모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막아서요. 이게 화목제의 실체(實體)인 거예요.
이스라엘이 뭔가 변해서가 아녜요. 그 진노를 막아선 어떤 자!
제물로 드려진 어떤 자! 모세는 여기서 죽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품어 안고! 그래서 성경이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인 모지즈(in Moses), 모세 안에서’ 할례 받았다, 세례 받았다. 그런 거예요. 모세를 죽였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요.
자기들이 우상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제사 지내고 하는 것으로,
일시적인 기쁨이나, 뛰어노는 것, 그런 건 있을 수 있어도, 진정한 평화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 너희들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 안 받아!’ 그런 거예요.
아모스 5장 22절에 나오죠.
‘너희들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 그거 안 받아!’
시편에선 뭐라 그러죠?
‘내가 무슨 짐승 타는 냄새가 구수해서 제물을 받겠니?
그건 다 내꺼 아냐?’ 그러시잖아요? ‘그거 다 내거야!’
그 안에 감추어진 진짜 화목제물인, 예수를 발견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 중간에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 예물 갖고 와서 제사 지내기 전에, 화목한 관계가 아닌 친구가 있을 때,
그 친구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예물 드려!’ 그런 거예요.
그 말은 ‘너희들 예물 드려서, 화목하게 되겠다.’는 그거 깨란 뜻이에요.
너희들이 화목하게 된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 그게 예수를 드리는 예배가 되는 거지,
그 어떤 인간의 행위로 화목을 성취해낼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걸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설명을 해요. 히브리서 3장 1절.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比較)하고 있어요.
모세의 중보사역이,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의 모형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의 중보 요청이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율법이 다시 내려오죠?
어차피 살려준 거! 모세의 중보사역으로 살려준 거!
이 율법이 내려가면, 또 죽을 거 아는데, 하나님이 왜 또 주세요?
또 죽이려고? 아니란 말입니다.
모세의 중보사역으로 살아난 그 현실을, 이 율법 앞에서 불가능한 너희의 모습들을,
폭로(暴露)당하면서, 모세의 생명에, 모세의 중보사역에 감사하라고, 율법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모세! 중보자인 어린 양!
예수만을 의지하고, 그의 공로만을 의지하며,
그분이 하신 일, 그분의 은혜만을 찬송하는 자!
나는 점점 삭제되어 가는 그 자! 이 자가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고,
그걸 몸으로 살아내면서, 입으로 전하는 거. ‘예수님이 화평케 하셨대요.
예수님이 화평케 하셨대요. 찬송합시다!’
하는 이게, 화평을 전하는 직책을 맡은 자의 삶인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는 화평, 없어요. 복음 없는 화평케 하는 자, 있을 수 없는 거란 말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 보세요.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게 화평이에요. 이게 평화예요.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하면서,
자신의 존재성을 박탈당하는 이 현장이 바로, 평화인 거란 말예요.
그때에 우리 아버지가, 진짜 우리를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우리의 처음 자리, 어머니의 생명선이 끊기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고깃덩이에 불과한, 우리의 그 아기! 태아의 처음 자리!
그 자리로 회귀(回歸)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야 우리 아버지가 칼잠을 자면서도, 보람을 느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챙기시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도움을 거절(拒絶)하는 그 순간이, 정말 기특하기만 하세요?
아니라고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자율성 발휘, 원하시는 거 아녜요.
아버지의 도움만 구하는, 진짜 어린아이 같은 당신의 자녀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은 어린 아기 같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기저귀도 못 갈아 끼는 자!
그러한 하나님의 화평케 하심이, 남녀노소 모든 자들을 평등하게 만들어버리는 거라니까요.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됨됨이나, 자기의 자격이나, 이런 걸 자랑할 수 없죠?
하나님의 화평케 하심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거니까.
그래서 화목제물만 수컷, 암컷이 같이 드려지는 거예요.
그 상태! 그렇게 하나님의 화평케 하심!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열심 앞에서,
그 어떤 자기의 공로도 자랑할 수 없게 되는, 평등하게 되는, 상태를 수평적 화평이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보고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는 그 상태! 그걸 화평이라고 하는 거요.
이건 결국 그런 화평케 하는 수평적 화평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주시는 거예요.
수직적 화평이, 온전히 이루어진 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는,
하나님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는, 그것이 화평이에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을 정죄(定罪)하거나,
판단(判斷)할 수 없게 되는 그런 상태! 이게 화평이에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2장 13절부터 읽어보죠.
에베소서 2:13-22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누가? 예수가! 예수가 우리의 화평이에요. 화평!)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제는 각각의 개별성이, 다 삭제되어서 없어져버린 거예요. 새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 평안이 평화요, 화평이에요)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게 바로 성도 간의 화평이에요.
누구도 자격(資格)이 있어서 성도 된 자, 없고, 누구도 노력하여 성도 된 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나 나나, 하나님의 화목제물의 공로만을 찬송하고,
자랑하는 그 상태, 이걸 평화라 그래요. 화평이라 그래요.
이제 정리합니다.
이렇게 화평케 하신 예수의 십자가 복음!
은혜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며,
입으로 전하는 자들이 화평케 하는 이들인데,
그들은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를 실제화 하여 살게 되는 거고. 자기부인 된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점점 삭제되는 삶을 산다는 뜻이에요.
그런 십자가의 실제화의 현장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현장이며,
왜? 점점 나의 육적 자아가 사그러들어가니까, 현장이며,
그 복음을 몸으로 살며 입으로 전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우리의 삶인 거예요.
세속적인 평화와 하늘의 화평, 구별(區別)이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