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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대 역사신학 |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 신앙의 구심점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처음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을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옆에 서서 알려 준 대로 예루살렘 성전 위에 구름 타고 오실 ‘인자’로써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고대하고 있었다(비, 행 1:6-11). 이와 같은 종말론적인 신앙의 삶은 원시공동체들 안에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원후 1-2세기에 있었던 유대전쟁(66-73)과 민중봉기(132-135)는 유대교에게나 그리스도교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네로 황제는 동요하는 팔레스타인지역을 평정시키고자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유대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유력한 유대인들은 요단강 연안 펠라로 도주해야 했고, 예루살렘 공동체 역시 이들과 함께 도주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도들에게는 신앙의 구심점을 잃게 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처소’라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앙에 손상을 입게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성전을 신앙의 구심점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주축이 되었고, 예루살렘 인근,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였던 야브네(얌니아)에서 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90년대 중후반에 그 개혁의 결과로 구약성경이 경전화가 이루어졌고, 18항의 기도문이 결정되어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늘날 19항으로 발전. 1개항이 더 추간된 것 외에 기도문 내용의 큰 차이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32년에 일어나 유대인의 마지막 민중봉기는 “메시아”(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 부름). 시몬 바르코흐바가 이끌었다. 135년 민중봉기가 진압되면서 로마제국은 예루살렘을 없애고,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유대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결과적으로 213년 다시 유대인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 때까지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을 상실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원시공동체는 이제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고, 다시 오시는 ‘인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는 먼 훗날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재림신앙은 모든 원시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의식 안에서만 연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공동체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제일 중요한 변화는 자기 이해의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그리스도교는 재림에 대한 역사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재림의 날이 “아버지만 아시는” 미래의 어느 날에 있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마 24:36; 막 13:32).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무리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 ‘불러냄을 입은 자’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연속성이 구속자적인 이해를 갖게 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재림신앙 안에서 현실적인 삶에 충실해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직제들과 역사 안에서 지속하기 위하여 제도들을 만들어야 했다. 필요에 따라 교회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12사도 교훈,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디다스칼리아, 사도들의 교회법 등).
자기 이해의 변화와 함께 각종 이단들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야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혼합주의적이고,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의해 형성된 영지주의 이단들이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인식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일어난 복고적인 이단 몬타누스주의자들, 그리고 더욱 혁신적인 변화를 요구하였던 마르키온과 같은 이단들로 이들로 인하여 2세기 그리스도교는 존폐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1세기 말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리를 위한 시도들은 2세기에 이르러서 그리스도교 내에서 강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2세기 말 유대교의 의식을 고수했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대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로마제국 안에서 오래도록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써 보호를 받아왔었다.
정복에 나섰던 로마제국은 제국의 형성과정에서 유대인들에게 로마, 헬라에 이은 세 번째 종족으로 신분을 보장하였다. 2세기 중엽 유대교로부터의 분리를 경험한 그리스도교는 또 한 번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실제 안토니누스가 160년경에 만들어 180년경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선포했던 안토니누스 칙령은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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