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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독사
堂井 김장수
불효자의 비애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이기주의자, 불효자 천국이다.
자기 부모가 죽었는데도 찾아오지 않는다. 명심보감에서 말하기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는데
그런 인간이 어떻게 효도를 바라겠는가?’라는 말도 있다. 부모의 이기주의, 자식의 불효, 이웃들의 무관심이 이런 참화를 불렀다.
부모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그렇게 귀찮고 하찮은 존재가 되었는지 통탄스럽다. 나도 부모가 된다면
자식에게 효도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사건이었다. 성경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쓰여 있는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하느님의 복을 받을 것이고,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죽이는 자식은 살 필요도 없으며, 일찍 죽는 것만 못하다. 차라리 그런 자식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뻔한,
완전히 난세이자 말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 효도하지 않는 자식은 마음의 장애인(障礙人)이다.
효도하는 자식은 부모님의 명예를 빛내는 아들딸로, 효도하지 않는 자식은 부모의 수치이다. 구약성경 잠언 10장 1절에도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나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라”는 말씀도 있다.
우리 모두 부모님께 효도하는 아들딸이 되자.
어머니와의 상봉
성동욱(42) 씨는 지금도 가끔 그날이 생각난다. 동욱 씨의 어머니가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다는 전화였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던 어머니였기에 그 때 코로나 19로 돌아가셨으면 얼마나 괴로워할까 생각하니 섬뜩해진다.
지금이야 마음대로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 있었지만, 어릴 때는 그렇지 못했다. 2021년 4월 11일, 동욱 씨에게 낯선 전화가 왔다.
“경기 군포경찰서입니다. 어머니이신 고현영(73) 선생님이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습니다.
119를 통해 병원으로 인계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동욱 씨는 ‘어머니’란 단어가 생소했다. 37년 전 집을 떠난 뒤 평생 연락 한번 나눈 적 없는 어머니.
남보다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던 어머니. 가족도 없이 홀로 다세대주택에서 지내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서 확진 상태에서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했다는 소식을 들은 동욱 씨.
그렇게 죽어가던 어머니를 살려주신 분들께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는 동시에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은 혼란스러웠어도 말이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마터면 어머니를 잃을 뻔했는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머니를 영원히 잃을 뻔했구나.’
동욱 씨, 큰 딸 현경(49) 씨, 작은 딸 현미(45) 씨는 어렵게 어머니와의 상봉을 허락했다. 군포시와 보건소와 상의한 뒤,
4월 14일에 집에서 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3남매와 어머니는 한참을 울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한참 후 어머니가,
“우리 새끼들 얼굴 좀 보자. 그래, 많이 늙었구나. 어떻게 지냈어?”
울먹이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 큰 딸이,
“엄마, 나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 나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라며 울먹이자, 3남매와 어머니는 그간 살면서 당했던 서러움에 눈물만 흘렸다. 지켜보는 이웃들도 코끝이 찡했는지 눈물을 훔쳤다.
코로나 19의 창궐 이후
2020년 1월 20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는데, 다음해 5월 말까지 498일째 이어진 길고 긴 코로나19 재난 상황.
그동안 14만 799명의 확진자가 나왔고 1,963명이 코로나19로 생명을 잃었다. 감염병 재난 국면에서
소중하고 귀한 생명이 덧없이 쓰러졌다. 모두 누군가의 소중하고 귀한 가족이자 이웃이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 8명(올 4월 말 기준)은 세상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죽음. 사랑하는 이의 배웅조차 받지 못한 고인.
오래 전 헤어진 3남매와 극적으로 상봉한 고현영 씨(73)도 하마터면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가 될 뻔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자식들을 만났으니.
코로나 때문에
고현영 씨가 살았던 경기 군포시 다세대주택. 고 씨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2년도 안 돼 홀로 방 안에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느 날 코로나 19에 걸렸는데, 아파서 하마터면 세상을 떠날 뻔했다. 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로 도와줄 가족 없이
홀로 앓아왔던 어머니.
“몸이 많이 아파…. 일도 못 나가고 꼼짝을 못 하겠어.”
2021년 4월 8일 목요일 경기 군포시의 다세대주택 103호. 고현영 씨는 몸을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지독한 허리 통증과 고열로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기를 벌써 며칠 째. 고 씨는 식사는커녕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지도 못했다. 홀로 사는 그 할머니를 도와줄 가족은 없었던 줄 알았다.
간신히 옆집 102호 아주머니와 104호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102호 아주머니와 104호 아주머니는
목소리만 들어도 고 씨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느낌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주말이 지나고 9일 금요일.
고 씨의 이웃들은 고 씨를 데리고 군포보건소에 가서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다음날 아침에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다행히도 음성이었다. 자가 격리를 할 상황까지는 아니어서 근처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무연고 코로나 19 사망자가 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한편 이웃들은 고 씨의 3남매와 다행히 연락이 닿아,
고 씨 몰래 상봉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남매를 두고 떠나온 집, 그리고 그리움
1986년 3월 22일, 고 씨는 밤에 몰래 집을 나왔다. 잠들어있는 삼남매를 내버려둔 채. 당시 아홉 살이었던 큰딸만
잠결에 어렴풋이 기억하는 장면이었기에, 몇 살 터울의 동생들은 어머니가 떠나는 뒷모습도 보지 못했다.
집을 떠나면서도 끝까지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고 씨는 더 이상 버틸 자신도 없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손찌검이나 해대는 남편. 그런데 임신 중인데도 남편의 폭력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 그게 최악의 불효이다. -
게다가 걸핏하면 돈 달라고 악을 쓰면서 집에 남은 몇 푼 안 되는 생활비마저 몰래 가져갔다.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고 씨는 살고 싶었다. 언젠가 돈을 모아 아이들을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떠나온 고 씨는 악착같이 살았다.
식당과 슈퍼마켓 등에서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 어느덧 1990년 11월 2일,
시누이인 아이들의 고모가 삼남매를 키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계에 지친 고 씨가 삼남매를 만나고 싶어 전화했더니
시누이는 단칼에 자르고는 전화를 끊었다.
“애들이 엄마 안 만나고 싶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아이들을 떠나온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던 고 씨는 아이들을 만날 때까지 시누이의 말이 사실인 줄 알았다.
3남매 모두 고아원에 맡겨진 것도 몰랐다. 2001년 군포시.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아끼며 모으고 살았던 고 씨는
작은 칼국수 식당을 열었다. 가족을 떠나온 지 15년 만이었다. 테이블 몇 개뿐인 작은 칼국수 집이었지만 고 씨는 큰 보람을 느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매일 새벽에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었다.
손맛이 좋고 정성껏 대접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단골도 늘었다. 자정 넘어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고 씨는 씩씩하게 국수집을 꾸려갔다. 아이들과 상봉한 순간까지도 20년 가까이 국수집을 운영했던 고 씨.
주변에서 여러 가게가 생기고 사라진 중에도 고 씨의 국수집은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켰다. 동네 상인과 주민들은
고 씨를 ‘터줏대감’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 씨는 가끔씩 얼굴에 걱정이 더해졌다. 헤어져 있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였다.
“삼남매가 멀리 경상남도에서 시누이와 살고 있다고만 들었어요. 돈이라도 좀 부쳐주고 싶은데, 그걸 전달할 방법도 없네요.”
고 씨는 아이들 생각이 날 때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을 억지로 삼켰다.
2019년 4월부터, 고현영 씨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 발이 붓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다.
심부전증에 고혈압 증세까지 온 고 씨는 그 후에는 약을 달고 살았다. 이듬해엔 더 큰 난관이 닥쳤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고 씨는 몇 달 간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모아둔 돈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월세는 쌓이고
병원비 부담도 커져만 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국수집에 나갔지만 몸도 마음도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온 김 씨. 그때는 아이들과 다시 만날 것이라곤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집 앞 화단에서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키운 식물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상봉한 뒤로는 아이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여생을 편안히 보냈다.
어머니와 아이들
2021년 4월 4일. 빗줄기는 강한 바람을 타고 조금씩 굵어졌고, 차량 와이퍼는 바쁘게 돌아갔다.
성동욱 씨와 부인은 경남 창원시에서 5시간 반을 달려 군포시에 도착했다.
다세대주택 101호 앞 화단에는 비를 머금은 초록 잎사귀들이 있었다. 주민 할아버지는,
“고 씨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식물들이다.”
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욱 씨는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지만 한번 만나 뵙는 게 괜찮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부인과 상의 끝에 어머니가 사는 집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는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매형들과 함께 어머니를 만나러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후 삼남매는 어머니와 상봉했다.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얼마 후 부녀회장이 삼남매와 어머니가 극적으로 상봉한 것을 기념하여 작은 잔치라도 열자고 제안하자,
전 이웃이 만장일치 찬성했다. 그 동네에서는 큰 잔치가 벌여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고아원에 간 3남매
한편, 고 씨가 집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욱 씨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알코올중독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후 숨을 거두었다. 시누이가 고 씨에게 전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 고 씨는 그 사실을 아이들을 만나서야 알았다. - 누나들과 동욱 씨는 친척들 손에 자라거나 도움을 받은 적이 일절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뒤에 고아원에 버려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고, 친척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어머니가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다. 어떻게 같은 핏줄끼리 이럴 수 있는지,
가족들이란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참 잔인하다. 그런데도 3남매는 사이좋게 지내면서 3남매 모두 공부를 잘 했다.
동욱 씨는 과학 논문을 써서 낸 후 최고 학점을 받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역시 머리 좋은 어머니를 닮아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웃들의 동정
“현영 씨는 남편이 죽은 건 아예 몰랐어. 언제나 삼남매 보고 싶다고 했지. 애들이 안 보고 싶어 해서 찾아갈 수 없다고 했어.
고모랑 친척들이 애들 거둬서 잘 키워주고 있다고만 믿었어. 고 씨는 상봉 전까지 그렇게 알았었어.”
이웃주민의 말이었다. 3남매와 어머니가 만났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동네잔치를 열었다.
그와 동시에 3남매는 어머니가 자신들을 그리워했다는 진심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왜 좀 더 빨리 알아드리지 못했는가 하고 말이다.
어머니의 행복한 임종
하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울 노릇이다. 어머니가 남긴 유언.
“얘들아, 이제 사이좋게 지내라.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다 주님 덕분이다.
죽어서도 어른께 효도하고 아이들에게도 효도를 가르쳐 주어라.”
이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행복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2022년 1월 24일의 일이었다.
무리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삼남매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토록 간절했던 소원을 이루고 천국으로 떠난 것이다. 참으로, 동욱 어머니는 참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행복하게 자식들 품에서 돌아가신 것 아니겠는가. 2022년 2월 2일. 동욱 씨 부부, 큰누나 부부, 작은누나 부부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국수집을 운영할 사람을 모집하고 깨끗이 정리했다. 이를 지켜보던 맞은 편 슈퍼마켓 주인이
동욱 씨 부부에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서 건넸다. 이런저런 사연을 물어봐도 동욱 씨는
불편해하거나 피곤한 티도 내지 않고 이야길 꺼냈다. - 참, 어머니가 운영했던 국수집은 다른 사람이 맡은 후로는
옛날보다 더 번창했으며, 통일 이후 평양, 청진, 신의주, 함흥, 경산, 대구, 광주, 전주, 해주 등에 체인점을 낸
굴지의 식당으로 우뚝 섰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성동욱 씨 부부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경기 군포시를 찾은 2월 6일에는 눈이 내렸다.
성 씨 부부는 다음 달인 2월 3일까지 군포에서 머물며 어머니의 흔적을 정리하고 떠났다.
“잠깐밖에 얘기를 못 나눴지만, 아들 부부가 참하고 착합디다. 딸들과 사위들도 참 착해요. 평생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고….
어머니를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어요.”
근처 슈퍼마켓 주인의 말이다. 아들 동욱 씨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언론과 직접 접촉하길 꺼렸다.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부인이 대신 이야기를 전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전화를 받고 남편이 한동안 힘들어했어요. 아무래도 저희는 다른 가족과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어머니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도 어머니와 어렵게 상봉했으니 다행이죠.
유품을 정리한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예요.”
말을 마치고 잠시 망설이던 동욱 씨의 부인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에 남편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요. 어머니도 자신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을요.
어머니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떠난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는데….
사실은 어머님도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찾질 못 했던 거였네요. 하지만 어렵게나마 어머님과 상봉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에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확진되어서 홀로 고독하게 숨질 뻔했었던 고현영 씨가 살았던 다세대주택 앞 골목길.
고현영 씨는 매일 이 길을 지나 자신이 운영하는 국수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아이들과 만날 날을 학수고대했던 것이다.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가 될 뻔했던 고현영 씨는 그렇게 3남매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슴의 한이었던 삼남매의 얼굴을 보고 나서 소원 성취를 한 뒤 기쁘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아이들이 그리웠을까 하니 정말로 어떤 면에서 보면 다행이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뻔한
3남매와 어머니. 다시 만나서 효도를 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고인이 된 고현영 씨의 유골은 가루가 되어
고향 창원시 마산 바다에 뿌려졌다. 어머니의 유품인 일기장은 소중히 간직해 두었다.
그 후 30년
세월은 흘러 30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3남매는 사이좋게 지냈다.
큰누나 성현경 씨는 경기도 연천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했는데, 손맛이 좋고 재료가 신선하다는 소문이 파다해 단골이 늘었다.
그 후 조카딸이 이 사업을 이어받아 이 식당은 유명한 식당을 뛰어넘어 평양, 청진, 함흥, 서울, 파주, 개성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미국에까지 진출하여 굴지의 식당이 되었다. 특히 라면을 잘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 체인점도 운영하게 되었다. 작은누나 성현미 씨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는데,
학교에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고, 나중에는 근정훈장까지 받았다.
조카는 훗날 신의주대학교의 대학총장이 되었다. 동욱 씨는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었는데, 하나같이 효성스럽고 착한 아이들이었다.
장남은 서울대학교 상과에 진학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장남은 미국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미국 영주권을 얻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장녀는 피아니스트가 되었고, 차녀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차남은 첼로를 잘 연주해 미국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했고, 장녀와 차녀, 차남은 함께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타고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나중에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막내아들은 철도차량에 관심이 많아 철도차량을 많이 생산해
해외에도 수출했다. 그 후 막내아들이 운영하는 기업은 세계적인 철도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에필로그
동욱 씨의 나이 어느덧 85세. 어느덧 두 누나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아내도 세상을 떠나 고독하게 보내고 있는 와중에도
조카들과 아이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동욱 씨는 자신의 친척들과 똑같이
자기 혈육을 잔인하게 저버릴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키우고
어머니가 못 다한 꿈을 반드시 이루고 만 것이다. 그렇게 동욱 할아버지는 89세의 생일을 맞았다. 조카들과 자식들도 찾아오고
손주들도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몇 달 후, 동욱 할아버지는 파킨슨씨병을 앓았었는데,
몇 주 후에는 그 증상이 악화되었다. 자신이 갈 때가 되었음을 간파한 동욱 할아버지. 자식들과 조카들, 손주들이 보는 데서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서로가 화목하고, 효도하는 너희가 되어라.”
그렇게 성동욱 할아버지는 향년 90세의 나이에 지병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시신은 화장되어 인천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지금도 그 납골당에 가면 성동욱 할아버지가 쓴 시가 이따금씩 이 납골당을 찾는 방문객들을 반길 뿐이다.
언젠간 가겠지, 서글픈 이 청춘
꽃잎이 지고 피는 동안
보름달 뜨는 날 흐르는 눈물은
어머니 그리는 내 눈물
그리운 어머니 재회의 통곡은
효성스러운 우리의 꿈
한 번에 만나고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소원은 이뤄졌네.
무서운 이 세상 떠나가는 그날
천국에 가는 이 순간에
어머니 누님들 계시는 그 곳에
천사들 나를 환영하네.
지나고 나면은 사라지는 과거
바람에 날리는 옛날이여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우리 누님들
저 하늘을 보면 떠오르는 얼굴
이제야 만나는 어머니
오랜 세월 지나 만나는 이 순간
너무도 기뻐서 환호하네.
서글픈 이 세상 떠나가는 순간
내 조국 이제는 어이하나
그러나 미련은 버리고 가야지
어머니 기다리는 천국으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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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ᆢ
저도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