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싣고 경북서부 지방을 누비다
지난 선교사열전에서 소개했듯 한국에서는 4번째로 선교기지인 대구선교지부가 설립되기까지 베어드 선교사가 첫 삽을 떴다면 제임스 아담슨 선교사가 기틀을 마련하고 브루엔 선교사가 부임하여 설립됐다. 그러나 핸리 부루엔 선교사에 대해 아는 이들은 사실 많지 않다. 의료사역으로 내한 한 브루엔 선교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섬기고 순회전도자로 대구 경북지역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다. 특별히 그는 자전거에 복을을 담아 활동범위를 넓혀 사역했다.
자전거와 사냥개에 복음을 담아
25세라는 나이에 미혼의 몸으로 대구에 도착한 브루엔은 동산병원 초창기 때에는 의료선교사 존슨의 수술을 도왔다. 당시에는 존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존슨을보조하며 의료사역을 도왔다. 하지만 브루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전도 사역이였다. 당시 대구 선교지부 선교사들은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위해 지역을 나누어 선교사들을 배치해 각각 자신이 맡은 구역을 순회하게 했다.
브루엔은 1901년부터 1923년 사이에 칠곡, 선산, 김천, 성주, 고령 등의 경북서부지방을 순회 선교하여 약 54개의 교회를 설립 또는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립시켰다. 순회를 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을 했다. 자전거를 처음 본 사람들은 신기한 듯 몰려들었고, 기회를 얻은 브루엔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말씀을 전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기술 있는 사람이 됩니다.”
브루엔 선교사는 자신의 사냥개 마이크를 이용해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선의 개들과는 다른 외양을 가지고 있던 마아크는 대구 사람들에게도 신기한 존재였다. 그는 먼저 마아크에게 샌드위치 조각을 던져주고 나서 모인 청중들에게 설교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마아크는 참고 기다렸다가 설교를 마친 선교사가 허락해야 샌드위치를 먹곤 했다.
이밖에도 브루엔은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한 사람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수첩에 메모해 두고, 일과를 마치면 그들을 위해 진실하게 기도하곤 했다.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잘 기억하여 한번 만난 사람들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였고, 또한 성품이 온화하여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고, 한국인을 대할 때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는 따뜻한 선교사였다고 주변 사람들은 회고했다.
선교사의 길, 하나님의 섭리
그는 1874년 미국 뉴저지 주에서 제임스 브루엔 목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에는 뉴욕의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처음 선교사의 꿈을 품고 쿠바로 가려고 했지만 선교부의 임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친구 아들이자 한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존슨 선교사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주소를 알지 못하던 브루엔은 존슨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근황을 살폈다.
때마침 아담스와 대구 선교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존슨 선교사 역시 대구에서 활동할 선교사를 구하던 중 브루엔을 떠올리고 본국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브루엔에게 전해달라며 편지를 보냈다. 선교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브루엔과 존슨의 편지를 동시에 받은 존슨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온 편지를 브루엔에게 전달하였다. 이 상황에 감동을 받은 브루엔은 확신을 갖고, 1899년 대구 선교지부 선교사로 임명되어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했다.
대구 선교지부에 세 번째 선교사로 부임한 브루엔은 이후 42년간 대구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순회하며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사역했다. 브루엔은 아담스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했고, 1904년에 대구성경학원을 맡았다.
그리고 1913년 12월에는 경상 노회장으로 활동했다. 1915년에는 대구제일교회에서 대구남산교회를 분립 개척하여 이곳에서 1920년까지 담임으로 섬겼다.
이상한 차림의 복음 전도자
브루엔의 사역은 선교와 교회설립에만 머물지 않고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졌다. 브루엔의 또 다른 사역은 야구와 관계가 있다. 1900년 3월 25일에 존슨부인의 기록을 보면, 브루엔이 처음 대구에 왔을 때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한국말이 서툴러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모여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대신에 야구를 가르쳤다.
한국에 본격적으로 야구가 자리하기 전이었던 만큼 브루엔이 가르쳐 주는 놀이는 대구에서 처음 보는 낯선 경기였다. 아이들에게 야구 경기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브루엔이 한번은 헐렁한 반바지와 셔츠만 입고,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은 운동복 차림으로 자신의 어학 선생 집을 방문했다. 이 모습을 본 어학 선생은 크게 놀라며 말을 했다.
“이 무슨 꼴이요. 다리는 벌겋게 내어놓고,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모자를 그렇게 눌러 쓰다니!” 그리고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옷을 다시 갖춰 입고 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에 브루엔은 빙그레 웃으며 그 차림으로 야구를 하러 나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브루엔의 그 이상한 옷차림은 사람들의 눈에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졌다. 그에게 야구를 배우던 한국 소년들은 처음에는 공을 잘 맞히지 못했지만, 브루엔은 실망하지 않고 공을 잘 맞힐 때까지 방망이 대신 테니스 라켓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야구를 가르쳤다.
이밖에도 브루엔은 한센 환자를 위한 선교위원을 역임하면서 1917-1918에는 동산병원 인근에 있는 나환자 요양소 부지를 확보하고, 병동과 진료실, 예배당 건물을 짓는 등 나환자 구제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나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하며 세례를 베푸는 등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치던 브루엔은 1941년 9월 19일 한국을 떠났고, 1957년 85세를 일기로 캘리포니아 산타 쿠르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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