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제목 : 끝없는사랑
작가명 : 신기루
E-mail : lovestay20@hanmail.net
연재장소 : 꽃잎소설②
총편수 : 총 50편 완결 (+프롤로그,에필로그)
장르 : N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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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팬까페 : 기루나라 (http://cafe.daum.net/lovestay20)
(prologue.)
난 몰랐다. 나를 향한 수많은 비난들.
그리고 나를 칭하는 그 하나의 단어가 무얼 뜻 하는지….
난생 처음 그 단어를 접할 수 있던 내 나이는 고작 여섯 살.
너무나 어리고, 약하기만 했던 나이에 처음 접하고,
평생을 내 가슴에 한으로 묻어 버린, 내 가슴을 도려내는 그 단어는
사생아.
이름표처럼 늘 내 뒤에 꼬리를 달며 나를 따라 다니는 지긋지긋하고 경멸스러운 단어.
갓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그 단어를 알 수도 없었고,
내게 그 단어가 무얼 뜻 하는지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다.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그 밖에 어떤 곳에서도….
하지만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사생아라는 단어는 결코 좋은 뜻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은 어쩜, 어린나이에도 뼈저릴 만큼 단오하게!
그리고 결코 가볍게 벗겨 질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어
내 가슴에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진아. 우리 엄마아빠 놀이 하자.”
“응. 그래.”
“내가 엄마 할게, 넌 아빠 해, 알았지?”
“…….”
늘 소꿉놀이를 할 때면 내게 한결같이 아빠 역을 던져 주는 아이가 있었다.
소꿉놀이는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데,
그 아이가 내게 아빠 역을 던져 주면, 나는 괜스레 울적해 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진아. 왜 그래? 아빠 싫어?”
아무 말 없는 내게 그 아이가 물어온다.
“아니….”
“근대 왜?”
“나…. 아빠가 어떤 건지 몰라….”
친구들이나 길가에 아빠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늘 꿈꿔왔던 아빠지만,
너무나 간절히 바라면, 꿈속에서라도 얼굴 없는 아빠가 나타났지만…,
막상 소꿉놀이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이 아빠라는 역할이면,
난 늘 아무 말도,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다.
물론 확실한건 아니지만
아마 그때 나는, 모든 사고의 흐름이 정지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음~ 아빠는, 회사에 다니면서 엄마에게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이야.”
여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만한 대답을 내게 구사해 주던 아이.
나를 보며 활짝 웃던 아이 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붉게 물들어 버린 눈가를 한번 훔쳐내고 무어라 말 하려면,
“야!!”
어디선가 늘, 해방 꾼이 나타났었다.
“여진이 사생아라고 우리 엄마가 놀지 말랬어!”
작고 총망한 눈을 빛내며 들으란 듯이 내게,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아이에게 말하는 아이.
“사생아? 그게 뭔 대?”
나와 소꿉놀이를 하려던 아이가 되물으면 언제나 그 아이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몰라. 근데, 우리 엄마 말로는 사생아, 그거 나쁜 거랬어.”
“왜 나빠?”
“근본이 없는 거래.”
“근본?”
“응. 근데 근본이 뭐야?”
밉살맞은 그 아이의 한마디 말이, 점점 작은 동네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은 금세 유치원에도 퍼져나갔고,
아이들은 뜻 모를 사생아란 단어로 나를 점점 멀리 했다.
이유도 없이 다만, 어른들이 나쁘다 말하기 때문에 나를 멀리한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였다.
놀이터에서도, 유치원에서도, 하물며 교회라는 그 곳에서도 나는 늘 혼자였다.
하늘마저 나를 버렸다. 하늘마저 나를 외면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혼자라는 게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 그 것이 익숙해져 갔다.
힘들게 적응을 했는데, 그 성과라도 얻은 모양인지,
7살이 되던 해에 나는 이미 혼자라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치러야 할 고통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여섯 살 때 나를 버렸던 하늘이, 다시 한번 나를 버린다.
사생아라는 단어가 내게 가져다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
예측치 못한 비난을 받게 된 일은 초등학교를 들어갔던 8살 때의 일 이었고,
내 나이 8살에 나는 하늘에게서 다시 한번 버림을 받고 말았다.
믿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게 따뜻한 말을 전해줬던
교회 선생님으로 인해 하늘만은 믿고 싶었는데… 그런 하늘이 내게 등을 져 버렸다.
8살이라는 너무나 나약한 나를… 믿고 또 믿었던 하늘이… 나를 다시 한번 버린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6년은 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소문에 소문을 타고 모든 아이들이 나를 멸시하고 경멸했다.
6살 때 그 아이가 그랬듯이 모든 아이들에게서 분명한 대답은 늘, 없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 체, 아니 분명한 뜻도 모른 체
남들이 쏟아 붇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6년이란 긴 시간을 그 흔하디흔한 친구란 것도 없이 늘 혼자여야 했다.
하지만…….
유독 남들의 눈총을 받아왔고 손가락질을 받아왔던 나는
10살이라는 나이에 사생아가 무얼 말 하는 건지 알게 되었다.
우연히 접할 수 있었던 국어사전이 내게 말해줬다.
눈물을 머금고 엄마에게, 선생님에게 물어도,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던 것을 국어사전이 내게 말해줬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세상을 다 잃은 듯 암담했다.
아빠가 없는 아이. 씨가 없는 아이.
아빠의 근본조차 파악이 되지 않은 아이.
정상적인 부부가 아닌, 부적절한 관계에서 탄생한 아이….
그것이 사생아였다.
내 어린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라면, 나는 이 말 밖에 해 줄 말이 없다.
난 늘, 소외당해왔고 매일같이 눈물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고.
내 과거 속에는 남들과 같은 행복한 추억도, 얼굴 가득 피운 함박웃음도 찾을 수 없다고.
엄마는 한번도 말 해 주지 않았다. 내 아빠가 누군지….
다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씀만 반복 하실 뿐.
그 분의 성함도, 하셨던 일도,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 외에 어떤 것도 일체 언급하신 적이 없었다.
엄만,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이나 꺼려하셨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날, 엄마는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억지로 나를 재우고 그 옆에서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려보내셨다.
그 날은 밤이 길었다. 엄마의 눈물은 어린 내게도 고통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물을 수도 없었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처음부터 내겐 아빠라는 존재가 없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빠의 성이 아닌, 엄마와 같은 성을 쓰고 있다는 것 뿐 이었다.
엄마의 성함은 한 아름. 내 이름은 한 여진.
이것이 어린시절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아직까지도 난 내 아빠의 성함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하루하루가 고단했던 나는 중학교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전학을 왔다.
천안이라는 지방 도시가 아닌 서울이라는 크고 낯선 땅으로.
늘 혼자였고, 남들의 비난과 눈총을 한도 끝도 없이 받아왔던 나는 늘 의기소침해 있었다.
무언 갈 얻어 보고 싶었던 서울에서의 첫 발걸음도 탄탄치 만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내 모습에 친근하게 다가와 주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처음에는 둘 이라는 게, 함께 라는 게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져 가려고 무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실을 맺었다.
그 때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았다.
중학교 1학년. 14살 이라는 나이에 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늘 내 곁에는 친구라는 무리가 있었고, 악몽 같은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는 달리
영특하고 똑 부러질 만큼 잘난 아이들이 있었다. 행복했다.
여섯 살 이후 처음으로 내 얼굴에 미소도 자리 잡았다.
엄마는 하루하루 변해가는 내 모습에 기뻐 하셨다.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가끔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기까지 했으니….
늘 소외당하고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던 내게는 정말 엄청난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 번이나 나를 버렸던 하늘은, 다시 한번 나를 버렸다.
한번도, 두 번도….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진데,
아니, 오히려 반복 될수록 더욱 고통스러운 난데,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하늘은, 어김없이 나를 등진다.
2학년에 막 오른 어느 날. 한문 시간 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이름 석자와 가족의 이름 석자는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계신 한문 선생님.
하루에 두 명씩 무자비로 선발해 자신의 이름과 부모님의 성함을 칠판에 적게 하셨다.
간절히 바랬건만… 불행한 내 운명은 고스란히 내 번호를 불렀고,
칠판에 고작 엄마의 성함과 내 이름 밖에 쓸 수 없었던 나는,
자꾸만 재촉해 오는 선생님의 다그침에 말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그 후로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평소에는 관심 없던 우리집안사가 온 학교 곳곳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고통이 반복 될 것 같아 늘 조바심에 가슴을 움츠려야 했던 나는
내게 다가오는 아이들을 뿌리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정을 떼야 한다면, 이번엔 버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아이들을 버렸다.
버림받는 다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기에…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버리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는, 내가 그들을 버리기 전에 다시…
그들에게서 버림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하루하루가 눈물이었지만,
이 곳에서까지 눈물로 얼룩진 생활이 반복 되는 게 싫었던 나는,
독해지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
눈물이 차오르면 이를 악 물고 참아냈다.
온 몸에 상처가 나도록 꼬집고, 또 꼬집어 가면서도
눈 밖으로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이를 악 물었다.
그렇게 반전을 가질 것만 같았던 내 중학교 생활은, 다시 어둠속으로 침체되어갔다.
그리고… 어렵사리 들어간 고등학교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내 운명을 만났다.
사상도 관념도, 생활하는 방법도 모두가 달랐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녀석은 내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 되어 버렸다.
나를 버리는 일만 반복 했던 하늘이 처음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
☆01
“꺄호~ 어찌나 통쾌하던지. 쿡쿡”
“훗, 생색은~”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멋진 라스트로 모든 것을 장식 하려고,”
“라스트 같은 소리 한다. 뻥가~”
“제길! 마우스 좀 닫아주지?”
“내 마우스 가지고 내가 떠들겠다는데 무슨 상관?”
“암튼!! 정의에 불타는 이 오빠가 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거 아니겠냐?
마무리로 깔끔하게 한방 퍽-! 갈겨줄라고 했는데.”
“갈겨주긴? 어디 가서 맞지나 않음 다행이지.”
“아씨, 야!!”
“왜? 뻥가?”
“너 나하고 전생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냐?”
“글쎄다. 따져보지 않아 모르겠다. 거참, 안타깝구나.”
“빌어먹을! 한 마디를 안 지지.”
햇살 좋은 오후. 여진은 시끌시끌,
정신없이 주둥이를 달싹이는 녀석들 사이에 낑겨 옥상 벽을 타고 앉아있다.
한여진. 평범한 측에 끼이나 유난히 눈에 띠는, 사뭇 모든 시선을 끌어들이는 묘한 아이.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자랑하는…
새하얀 피부로 고만고만한 또래의 계집들과 달리 까무잡잡한 피부와
평범하면서도 딱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어떠한 면모가 눈길을 끄는 아이였다.
가냘 퍼 보이는 외모 속에 알 수 없는 신비로움.
날카로운 눈매 속에 아련히 깃들여진 슬픔.
강한 듯 강해 보이지만, 손끝만 닿아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움…
이 것이 여진의 첫 인상이었다.
“훗- 내가 굳이 뻥가 네 놈한테 져줘야 할 이유 있어?”
“말끝마다 뻥가, 뻥가!! 그러다 오빠한테 한대 맞지?”
“쳇. 그놈의 솜방망이, 맞아봤자지.”
“어쭈?”
“그러고 보면 어젯저녁 네 솜방망이에 맞아 떨어졌을 녀석들이 참 한심하다. 자식아!!”
“뭐어? 아우~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이게 또 혈압 오르게 만드네?”
“훗- 그렇게 불끈 한다고, 아닌 게, 긴 거가(맞는 게) 되?”
“아우! 뒷골 땡겨!! 계집애가 사근사근한 맛 좀 있어봐라! 제발!!”
“웃겨~ 천하의 이지나가 너한테 사근사근하라고?
그 말은 즉, 나의 이 오장육부가 다 뒤틀어지길 바란다는 스토리여써?
바랄 걸 바래.”
어제 저녁 또 한판 거하게 벌여놨는지,
그 이야기를 하며 쉴 세 없이 자기 과시를 하는 남자아이.
줄 곳 그 남자아이의 말을 잘라먹으며
그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죄다 무시하는 여자아이.
재미로 시작한 듯 보이는 말씨름이 점점 더 서로의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다.
여진은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은 모양인지
마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워크맨을 꺼내 재생버튼을 누른다.
그리곤 허리에 조금 못 미치는 긴 머리 사이에 이어폰을 넣어 살며시 귀에 꽂는다.
볼륨을 어느 정도 높여 그들의 다툼소리를 최소화 시켜보는 여진.
“아. 시꺼. 하나 줘봐라.”
“자던 잠이나 마저 자.”
“저 새끼들 땜에 오던 잠도 다 달아난다. 니미럴!”
허나, 곧 옆에서 잠을 자다 깬 윤민으로 인해 그나마 차단되었던
그들의 다툼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김윤민. 맑고 밝은 얼굴 위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비추는 아이.
진하면서도 탁하지 않은, 밤색의 머릿결이 햇빛에 비춰 유난히 부드러워 보인다.
딱 벌어진 어깨 위로 두어 개의 단추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모양세가
꾀나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반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두 가지의 느낌이 묘하게 뒤엉킨 아이랄까?
꽉 조여 있던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인상을 쓰는 모양새와 오른 손 주먹을 감싸고 있는 붕대는
영락없는 문제아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모범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넌 무슨 남자애가 계집애들 보다 잠이 더 많으냐?”
“글쎄다? 타고난 걸 낸들 별 수 있냐?”
여진의 허락도 없이 빼어간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 뭉게뭉게 피인 하늘의 구름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는 윤민.
한 쌍의 커플을 연상시키기라도 할 모양인지 여진의 어깨위로 머리를 기대는 녀석.
여진은 잠시 그 녀석의 머리를 살짝 쿵- 밀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옆에서 수다를 떨어대는 녀석들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잠을 청하려는 듯 간간히 인상을 찡그리는 녀석을 가만 보기로 했다.
“너 보면 신기해.”
“뭐가?”
“이렇게 난잡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잠을 청하려 하다니. 훗-”
“한여진. 이 오빠의 신조가 뭐냐?”
“같지도 않은 신조는 무슨~”
“어허!!”
“훗- 밥은 굶어도 잠은 굶지 말자잖아!”
“역쉬!! 잘 알고 있군. 길이 잘 들여진 고양이라니까?”
“뭐어!”
잠을 청하는 와중에도 꾸물꾸물 답을 하는 윤민.
과히 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신조.
그가, 주위의 난잡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곧 안 되겠다 싶은 얼굴로 여진의 어깨위에서 자신의 머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곤 여진의 긴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잡고 말한다.
“그래서 말인데, 이 머리나 묶는 건 어때?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네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혀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윤민이 여진을 향해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간간이 불어오는 4월의 봄바람은 여진의 앞 머리자락을 엉켜놓더니 금세 자리를 떠 버린다.
“이지나! 제발 넌 그 버릇부터 좀 고쳐먹어!”
“내가 뭘 어쨌기에?”
여진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윤민이의 머리를 가볍게 밀어 버리고는
그의 귀에 꽂혀진 이어폰을 뽑아다가 다시 자신의 귀에 가져간다.
그 사이 들려오는 형우와 지나의 다툼소리.
다시금 시각을 돌리니, 여전히 옥신각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계집애가 어디서 저런 삽질만 배워왔는지. 우라질!!”
“허이구~ 삽질은 나보다 네 놈이 한 수 위 아녔어?”
“시끄러 촉새야!”
“그러게 누가 되도 않는 허풍을 떨래디? 이 천하에 둘도 없을 허풍쟁이 뻥가야!!”
“아우~ 이걸 확!!”
지나가 뻥가라 부르는 이 아이의 이름은 민형우.
남자다운 터프함이나 과묵함 보다는 수다스러운 귀여운 면이 단연 돋보이는 아이다.
큰 키에 남자다운 체격에 적당히 벌어진 어깨.
그리고 밝은 브라운 톤의, 남자답지 않게 하늘하늘 거리는 머리는
친구 녀석들의 날카로움과는 달리 부드럽고 편안한 면모를 충분히 자아내기에
뭇 여성들의 이목을 충분히 주목시키고도 남았다.
하지만, 부드러움 속에 내제되어 있는 강함. 어떤 알 수 없는 힘.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차갑고 날카로움.
비록 지금은 지나와의 입씨름에서 형우가 조금은 딸리는 듯,
힘이 없는 조무래기쯤의 무엇으로 비춰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단순히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형우가 지나를 많이 봐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워낙 편안하고 친근해 보이는 녀석의 인상 때문인지 지나는
녀석의 또 다른 힘과 면모를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그래왔다.
오랜 시간 정을 나눠왔기도 했겠다, 말은 함부로 하되, 악의가 없었으니,
그리고 그 사실을 형우 또한 알고 웃으며 넘어가주니,
천연덕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건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반면 형우가 촉새라 부르는 아이, 이지나.
전형적인 여자의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는 아이다.
아! 그렇다고 옛말처럼 청순가련의 그런 면모로 받아들이시면 큰 오산이다!
다만, 옛 선조들의 말씀에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했던
그 면모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나 할까?
한시를 쉬지 않고 놀려대는 입. 동글동글 탁구공을 연상시키는 얼굴.
쌍커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큰 눈. 어깨선에서 조금 더 내려오는 긴 생머리.
귀염성 있는 얼굴. 웃을 때마다 쏙~ 들어가는 오른쪽의 보조개.
분필을 칠한 듯 새하얀 얼굴. 그 속에 어울릴 듯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차가움.
하지만 유난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차가움이 가미되어 있다고나 할까?
앉아 있어 잘 보이진 않지만, 꾀나 길쭉하니 잘 빠진 몸매와 다리.
그녀가 지금 서 있다면 물론, 형우나 윤민보다야 작겠지만 170은 거뜬히 웃돌 듯 보인다.
“야야, 시끄럽다. 둘 다 마우스에 지퍼 채워라.”
보다 못한 윤민이 나선다.
신경질 적이나 힘이 들어있지 않는 발길질을 형우를 향해 퍼 부었다.
그런 윤민의 행동에 질 세라, 자신만 가지고 투박한 다며 불만을 토해내지만,
“뭐하냐?”
삐걱- 하며 낡은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든 행동들이 멈췄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동시에 차오르는 두 명의 인형.
제법 선선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쳐 지나가는 시점, 들려오는 건,
차가운 문소리 보다 더 차가운, 무미건조한 음성.
냉소적인 느낌이 가득 깃들여진, 피곤한 기색 또한 역력한 다갈색의 머릿결과 눈동자.
하지만 그들은 이 시점에 등장한 인물 보며 반가이 맞아준다.
“어이~ 황태자 납셨구만?”
단정하고 깔끔하면서 세련된 맛을 자아내는 한 아이.
그렇게 검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자연적인 부드러운 느낌의 다갈색 머릿결.
180이 훌쩍 넘어 보이는 큰 키. 늘씬하면서도 떡 벌어진 어깨.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의 얼굴.
매끈한 턱 선에 걸맞게 한 쪽 귀에 자리 잡고 있는 차가워 보이는 은색의 피어싱.
황태자라는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꾀나 고급스러운 외형. 그 녀석의 이름은 현비오.
“뭐 하다 이제야 잘난 면상 비추냐?”
비오는 자연스레 여진의 옆자리를 차고앉는다.
비오의 등장으로 여태껏 간간히 여진의 어깨를 탐하던 윤민의 행동이 멈췄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불을 붙이며
자신의 옆 자리를 차지한 녀석을 향해 담배를 건넨다.
“무슨 얘기들 하고 있었냐?”
윤민에게서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트는 아이는 차선재.
윤민이 밝고 명랑한 이미지를, 형우는 귀여움의 천진난만함을,
비오는 자연적인 부드러운 느낌위에 이지적이고 차가운 느낌을 자랑한다면,
선재는 겉 외형부터가 이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를 소유하고 있다.
어쩐지 부드러움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비춰지지 않는 차가움.
검은 색으로 염색이라도 한양,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검은 머리. 비오와 흡사한 키.
떡 벌어진 어깨. 여진과 별반 차이가 없는 구릿빛의 피부.
매끄러워 보이면서도 상당히 도전적여 보이는 얼굴선.
서양의 남자들을 보는 듯한 오뚝한 콧날. 깊은, 하나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눈매.
마지막으로 등장 한 비오와 선재까지… 이로서 이들 무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한여진, 이지나. 현비오, 차선재, 민형우, 김윤민.
사내아이 넷에 계집아이 둘.
비균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이들 여섯은 마치 하나의 조를 형성하듯,
그룹을 형성하듯 한시도 빠지지 않고 모여 있는 풍원 고등학교의 주요 인물이었다.
☆02
“어라? 멀쩡하네?”
비오와 선재의 얼굴을 보면서 내뱉은 지나의 첫 마디였다.
“무슨 뜻으로 씨부리는 거냐?”
그 말을 선재가 되받았고.
“니놈의 코와 눈이 느끼고 있다시피 민형우는 보이는 타박상은 없다만
파스냄새가 이루 말 할 수 없이 진동하고.
김윤민은 손모가지가 분질러졌는지, 허여멀건 붕대나 칭칭 감고 있는데,”
“근데?”
“니들은 아무리 쑤셔보고 탈탈 털어 봐도,”
무슨 꿍꿍인지, 비오의 옆에 가서 몸을 쿡쿡 쑤시며 훑어보는 돌발행동을 보이더니,
이내 선재의 옆에서도 같은 행동을 하는 지나였다.
“하다못해 어디 긁힌 자국이라도 없단 말이지.”
그런 지나의 행동에 조금 엉뚱하게도 윤민의 입에서 ‘병신-’
이라는 말과 함께 짧고 힘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어? 김윤민!”
“어제 무슨 일 있었냐?”
뜬금없는 지나의 행동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비오가 형우와 윤민을 향해 물었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닌데 왜 손이 그 모양이야?”
“삐끗했어.”
“이지나는 왜 저래?”
“뻔하지. 뭐.”
“뻥가. 또, 너냐?”
시니컬한 윤민의 답변에 바로 화살을 맞은 형우.
맨 처음 지나가 그랬듯이 이름 보다는 조금 더 친숙한 단어 뻥가.
역시 그의 허풍은, 이들 사이에서 한 몫 단단히 한다는 말인가?
“하하. 조금 부풀렸을 뿐인데.”
“한판 또 떳구만?”
“그렇게 됐다.”
“에라, 새끼야!”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특유의 웃음을 띠는 우리의 뻥가!
그리고 마치, 그 미소가 ‘이 일의 화근이 바로 나였다.’라고 해석을 한 모양인지
한두 마디의 친근한 욕설을 퍼 붓는 비오였다.
“뭐야? 그럼 어제 너희 같이 있던 거 아녔어?”
그런 비오의 행동에 지나는 다시 한번 상기된 얼굴로 달려들었고,
“쓰펄. 어제 코뿔소한테 잡혀있었다.”
선재가 말했다.
코뿔소라 함은, 풍원고등학교의 알아주는 학주였다.
“코뿔소?”
“미친. 아주 사람 잡으려고 환장했더만.”
“왜?”
“몰라.”
“그건 그렇다 치고, 몇 시 까지 잡혀 있었기에 애들이 사고를 치고 다닌 것도 몰라?”
“아씨, 몰라.”
답을 회피하기라도 할 모양인지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이 옥상 바닥에 들어 눕는 선재.
무언가 조금 더 캐내려는 심사인지 말똥말똥 거리는 눈으로
선재와 비오를 번갈아 보는 지나.
그리고 그런 지나와 선재는 관심 밖이라는 다른 아이들.
“오늘이면 끝나지?”
아예 화재를 바꾸는 여진의 물음. 그에 간단하게 고개만 까닥이는 비오였다.
현비오. 차선재. 사실 이들은 얼마 전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켜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일년 이라는 시간 내에 정상적으로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보다,
사고를 쳐서 징계를 받는 시간이 더 많은 녀석들이라고나 할까?
평범한 측에서 약간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중에 으레 비오와 선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 물론 지금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 모두가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 중 유독 투철한 반항심을 품고 있는 인물임은 자명한 사실.
여진, 지나. 형우와 윤민이 평범한 측에서 조금 벗어난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이라면,
비오와 선재는 그들보다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된,
나름대로 고차원적인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이랄까?
술. 담배. 가출. 주먹다툼. 폭주… 이러한 일들이 빈번한 아이들.
하루세끼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듯이, 하루를 거르지 않는 그들의 일상. 방탄한 생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 보다 더 많은 피조물들.
그들은 이와 같은 부속품들을 이용하여 세상을 등지고 사는 아이들이다.
.
.
세시가 조금 넘은 시간. 육교시가 끝나는 종이 땡~ 하고 울리면
저마다 지루한 하루생활을 마치는 아이들이 조금 더 자유로운 일탈을 꿈꾼다.
탁탁탁-!
“자자. 조용, 조용.”
그런 아이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쥐고 있는 출석부로 교탁을 두들기는 선생님.
“쓸데없이 시내 배외 하지 말고,
술집이니 뭐니 들랑달랑 거리다가 괘난 시비 걸지도 말고,
딴 학교 놈들이랑 한판 붙어서 경찰서에서 전화 받는 일 좀 없게 해라.
이 웬수들아. 어?”
“에이~ 선생님~”
“제발 어디 가서 말썽들 일으키지 말고, 괜히 학생과에 걸리지도 말고!
그럼, 오늘은 이상!”
인심 좋은 웃음을 띠며 간단명료한 종례를 마친 선생님.
그에 맞춰 저마다 환희에 찬 환호성을 내지르며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양, 걸음아 나살려라, 발걸음을 밖으로 내 딛기에 바쁘다.
“가자. 한여진.”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여진에게로 다가와 살 궂은 웃음을 띠는 지나.
벌써 교실에는 반 이상의 아이들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애들은?”
“현관에 있을 거야.”
“그래?”
지나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여진을 부추겼고,
여진은 그런 지나의 성화에 못 이긴 척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비어있던 비오의 자리에서 가방을 찾는데…!!
“어?”
“아, 비오 가방 아마 비오 손에 있을 거야.”
“교실에 들어오지 않은 애가 무슨…”
“훗- 오늘은 코뿔소한테 발목 안 잡히려고 단단히 벼뤘는지,
아까 쉬는 시간에 형우가 가지고 날랐어.”
손 벽을 마주치며 마냥 싱글벙글인 지나의 말에, 가볍게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형우는, 지난 쉬는 시간. 여진이 잠시 화장실에 갔던 사이에 가방을 들고 날랐나보다.
(참고로 여진, 지나, 비오는 2학년 7반이며, 선재는 8반, 형우와 윤민은 5반 이었다.)
현비오의 짝꿍이라는 녀석이, 마누라라는 녀석이,
제 짝꿍의 가방이 없어진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쯧쯧.
“굼벵이들이 따로 없네. 쯧.”
“어이~ 뻥가? 왜 혼자 있어?”
“촉새라서 행동거지가 좀 빠를 줄 알았더니, 넌, 주둥아리만 촉새냐?”
“왜? 한심해 뵈냐? 그래도 사는 데는 지장 없다.”
“쯧쯧. 이것도 여자라고.”
“훗-”
“그러고 보면 니 주둥아리도 하루가 편할 날이 없겠다? 주인을 잘못 만나지라. 쯧쯧.”
“뭐어?! 아니, 이 뻥가가, 말이면 단 줄 알어?!”
금세 나온 곳에는 뜻 박에도 민형우 한 놈만 보였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들 해. 근데, 왜 너만 보여? 다들 어디 있어?”
“게임피아. 빨리 가자. 애들 기다리고 있어.”
“야, 뻥가. 니가 지금 내 말을 야금야금 씹어 먹는 거야? 앙!”
“에씨. 시끄러워 죽겠네. 몹쓸 노무 개새끼가 어디서 짖어대?”
“머, 머 먼 새끼?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토크어바웃이어써?”
앞장 선 형우를 따라 교문을 향하면서 여진이 녀석들의 행방을 물은 찰나,
형우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다정스레 여진의 목덜미에 팔을 휘어 감고
지나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한 없이 형우를 쏘아대는 지나.
점심시간에 이어진 그들의 쟁탈전 2부.
여진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어마어마한 말들이 쏟아졌고,
어느 누구 하나 한걸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마냥 잠자코 있던 여진이 그들 사이에 나섰다.
“내가 누누이 말 했지?”
“뭘?”
“니들 그러다 정든다고.”
“뭐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일년을 넘게 지켜본 그들의 행동거지에, 심드렁한 여진의 음성이 흘러나왔고,
양쪽에서 불끈하는 반응은 아주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가운데서서 한순간에 양사이드에서 질러대는
비명에 가까운 악에 바친 고함소리를 들은 여진은 불쾌하다는 듯이 양미간을 찡그렸다.
동시에, 한쪽에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화끈 달아오른 지나가 씩씩 거렸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멀미라도 난다는 양, 이마위에 손을 짚고
보기 좋은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린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주를 내려도 그런 어마어마한 저주를!”
무언가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듯. 멍한 얼굴 위로 같은 말은 반복하는 형우.
아무래도 여진의 말에 타격이 큰 듯.
“두고 보라니까? 내 이름 석자 걸고 장담하는데,
니들은 분명 고운정보다 미운정이 더 많이 들어서 살림 차릴 거라니까? 머지않았다고.”
“야. 뻥가? 지금 한여진이 무슨 소리 하는 거냐?”
“그야.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니 생각도 나랑 같구나? 천하의 이지나가, 하필이면 천하의 허풍쟁이랑 정이 든다고?
하- 어이없어.”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하필이면 촉새랑? 하- 한여진.
정말 한 순간에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선수라니까?”
눈에 보이는 외형이, 얇고 불그스름한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표현만 다를 뿐.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야말로 판박이인 그들의 행동은,
곁에 있는 여진으로 하여금 충분히 웃음을 자아내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 시점.
그들은 어느새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게임피아에 도착했고,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서 한참 비트메니아에 열중하고 있는 익숙한 한 무리를 보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넥타이.
답답한 모양인지 목덜미 위로 한두 개씩 풀어 느슨해진 난방.
게임기 위쪽으로 아무렇게나 벗어던져진 교복마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교복무리.
여진은 아직도 멍한 얼굴위로 넋이 나간 듯
안쓰러워 보이는 지나와 형우를 뒤로 한 체 그들과의 거리를 좁혔고,
두 남자 사이에서 낄 자리가 없어 한참 구경에 몰두하던 윤민과 눈이 마주쳤다.
윤민은 여진을 향해 가볍게 윙크를 날렸고,
얼핏 그런 윤민의 눈짓을 본 몇몇 여학생들은 거의 쓰러질 분위기였다.
그 윙크를 받은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다.
“재들 왜 저러냐?”
어느새 주위에 몰려들어 그들의 외모를,
그리고 한참 즐기는 게임에 열중인 녀석들에게 말 한번 건네 보려는 심산지,
틈틈이 기회를 엿보는 아이들을 비집고 당당히 윤민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진.
척! 하니 보기에도 ‘논다’기 보다는
그냥 평범한 측에 끼는 인상을 주는 여진의 외모 때문일까?
너무나 자연스레 윤민의 곁에 선 여진에 대한 질투어린 시선.
간간히 노려보는 앙칼진 시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민은 다정스레 여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체,
이제야 오락실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형우와 지나의 상태를 묻는다.
그에 여진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면서,
“그럴 일이 있었다.”
라는 짧은 대답 이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한참 진행 중인 게임화면위로 ‘S’ 라는 최고의 점수가 당당하게 새겨졌고,
주위에 환호성과 박수갈채 소리 속에서 그들의 게임이 화려한 막을 내렸다.
“왔냐? 가자.”
오후 봉사활동이 만만치 않았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비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방을, 마이를 집어 들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여진의 가방을 뺏어 들었다.
때문에 여진은 뭇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오락실을 빠져나간다.
☆03
장소를 옮긴 이 곳은 이층짜리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주택가의 한 옥상이었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옥상위에 작은 돗자리 하나 깔아 놓고 그 위에 앉아있는 아이들.
이곳은 선재의 집으로, 선재와, 연년생의 바로 위의 형. 단 둘이 묶고 있는 곳이다.
협소한 공간이라면 협소한 공간이지만,
그 위에서 꾀나 알뜰살뜰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아이들.
저마다 붉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하얀 담배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허나, 각자 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는 아이들.
늘 뭔가 통일이 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역시 그들 각자의 개성이 있듯 서로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
“넌 어째 맨날 보는 만화만 보냐?”
무릎을 세우고 바닥에 앉은 체, 만화책을 뒤적이는 선재.
그 옆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지 핸드폰으로 장난질을 치던 형우가
하던 게임에 실증을 느꼈는지, 하나하나 친구들의 일에 간섭을 시작한다.
“재밌자나.”
“질리지도 않냐? 벌써 백번은 더 봤겠다.”
“앞으로도 백번은 더 볼 수 있어.”
한 두 번 보긴 했지만, 선재처럼 늘 끼고 사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만화의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질린다는 듯
보기 좋은 양미간을 일 그리며 시선을 돌리는 형우.
입에 물린 담배를 거만하게 퉤-하고 뱉어 버리고는
가볍게 손을 들어 형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선재.
“캬~~ 한 폭의 그림이구나.”
살짝 방향을 틀어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형우의 입에서 짧은 감탄이 나왔다.
그에 만화책을 보던 선재의 행동이 멈췄고, 형우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러네. 담배만 없다면 말야.”
“아니지, 아니지. 한여진은 오히려 저 담배 때문에 더 분위기가 산다고.”
형우와 선재의 시선을 받는 사람은 여진이었다.
점심시간 학교옥상에서와 같이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체,
차가운 봄바람에 제멋대로 엉키는 머리를 무시한 채
필수 소지품 중 하나인 워크맨을 길게 뻗은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리고 곧게 감긴 두 눈. 붉은 입술과 바닥 사이를 간간이 오가는 오른손.
그 사이에 끼워진 담배 한 개비.
그 손이 한번 움직일 때 마다 얼굴 위를 뿌옇게 흐려놓는 하얀 담배연기.
“한여진 하면 아무래도 고독이잖냐? 한여진 앞에서는 저 담배연기 또한 고독이란 말이지.”
“하긴. 한여진 이미지랑 담배 연기라면… 충분히 한 폭의 그림이 형성되지.”
그들의 말대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여진의 모습은,
과히 많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뛰어나게 빼어난 외모가 아닌, 평범한 측에 끼이는 외모지만
그녀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다.
쓸쓸함과 고독함의 무언가가 절묘하게 뒤엉킨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분위기가 말이다.
“내 얼굴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그만들 좀 보지?”
이어폰을 꽂은 채로 음악을 듣고 있는지라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통했나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그 느낌, 말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어디선가 쏟아지는 시선을 지레짐작한 여진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다.
바람이 부는 탓에 금세 타들어간 담배를 맨 바닥에 비벼 끄고는
아직도 넋 놓은 채 여진의 자태를 감상하던 형우를 향해 작게 말했다.
“그리고 보면, 참 신기해.”
“뭐가?”
“한여진이랑 이지나랑 둘도 없는 친구라는 점이.”
“훗- 너랑 차선재. 현비오랑도 만만치 않아.”
여진은 듣고 있던 워크맨을 일순간 정지 시켰다.
“뻥가, 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여진의 바로 옆에 앉아 몇 가지의 매니큐어를 늘어트리고 손톱을 정리하기에 바쁘던 지나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된 사실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잔뜩 열어놓았던 매니큐어의 뚜껑을 닫는다.
그리곤 자세를 고쳐 앉아 형우를 향해 어떤 감정이 실린 눈길을 보낸다.
“여튼, 잠잠하다 했다.”
“나랑 한여진이 뭐가?”
“그런 게 있다. 임마!”
“어라? 회피할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
“하던 일이나 하셔.”
“다 했어. 그러니까 넌 하려던 말이나 계속 해 봐.”
“븅~ 뻔하지. 촉새랑, 자물쇠랑 매치가 안 되잖아.”
지나가 촉새, 형우가 뻥가로 통일된다면, 여진은 이들 사이에서 자물쇠로 통했다.
한여진 하면 제일 먼저 매치가 되곤 하는 고독함처럼
조금 심할 정도로 말을 아끼는 여진.
그다지 무뚝뚝한 성격은 아니지만, 적당히 무뚝뚝한 성격에 말이 없는 그녀를 일컬어
《열쇠 없이는 열리지 않는 상자》라는 뜻을 담아 자물쇠로 표현하는 것이다.
“하긴. 그건 나도 의문이야.”
“훗-”
늘 형우의 말 이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강하게 반박 해 오던 지나.
허나 이번 말은 자신도 인정하고, 그 사실이 신기한 모양인지,
너무 단순히 긍정을 하고 만다. 약간은 의외의 지나의 반응.
때문에 모두가 훗- 하는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여진아, 이뿌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 했는지,
한껏 멋을 부린 손등을 여진을 향해 들이미는 지나.
혼자 열 손가락 위로 네일 아트를 흉내 낸 모양인지 가지각색의 매니큐어가
절묘하게 멋을 내고 있다.
“여태껏 이거 한거야?”
“응. 근데 최근 들어 오늘이 제일 맘에 든다. 너두 해 주까?”
“됐어. 어차피 내일이면 지워질걸.”
“에씨, 하기 싫으면 말지 왜 우울한 소릴 하냐?”
같은 여자라면 여진도 지나처럼 이런 것 하나에도 상당히 예민할 나이이거늘,
귀찮다는 듯 별 표정 없는 얼굴 위로 하나의 담배를 더 문다.
“벌써 몇 개째냐?”
한동안 말없이 여진이 뻗은 다리 위에 머리를 베고 누워 잠을 청하던 비오가
이미 불이 붙은 담배를 뺏아 자신의 입술위로 가져간다.
“잠 안 잤어?”
“다 잔 것 같아.”
“얼마나 잤다고. 내가 움직여서 불편했구나?”
“아냐. 머리 좀 치워봐. 새꺄.”
눈가에 잠이 가득 차 있거늘, 다 잤다고 일어나는 비오.
앞에 말은 여진에게. 뒤에 말은 윤민에게 한 것이다.
배위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묵직한 윤민의 머리가 거슬렸는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윤민을 인정사정없이 밀어버린다.
그 바람에 윤민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씨. 뭐야? 현비오.”
“넌 어째 인간이 하루 24시간을 다 잠으로 때우려고 그러냐?”
“으흠~~ 내 낙이잖냐.”
“존나 한심한 새끼.”
한참 단잠을 자다 깨어나서 이유 없이 목덜미를 만지듯이
잔뜩 졸려오는 눈가를 비비며 목덜미를 만지는 윤민.
시간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아직 해는 떠 있지만
오후보다 제법 찬 바람이 불어댐에도 불구하고
답답한지 목덜미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헤친다.
“넌, 그렇게 자고도 잠이 오냐? 니가 무슨 숲속에 잠자는 왕자냐?”
“온다. 새꺄.”
바닥에 헤딩을 해 버린 한쪽 머리의 통증 때문인지 머리를 비벼대는 윤민.
비오가 일어난지라 마땅히 베개 삼을 무언가가 보이지 않자,
비오의 물음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엉금 슬쩍 비오의 앞으로 기어온다.
그리곤 제법 귀엽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야, 한여진.”
“왜?”
가지고 있던 담배는 다 태운 모양인지,
피우려던 담배를 비오에게 뺏긴지라 주위에 뒹굴러 다니는 담배 갑에서
새로 하나를 더 꺼내 물던 여진이 뭔가 석연치 않은 눈길을 보낸다.
“내가 말이다. 지금 무지무지 졸립거든?”
“어쩌라고?”
“바닥은 너무 낮잖냐? 인간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하. 알면서. 자식.”
윤민은 장난석인 손짓으로 여진의 어깨를 툭- 한번 치더니,
그대로 여진의 다리위에 머리를 올렸다.
긴 다리를 쭉~ 펴고는 꾀나 만족스럽다는 듯이 아기 같은 웃음을 짓는 윤민.
“쪼금만 더 높았으면 좋겠지만, 없는 것 보다 낳지. 만족이다. 하하.”
“너, 뭐하냐?”
“쪼끔만 자자.”
이런 윤민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별 터치를 하진 않지만 꾀나 어이없어 하는 음성.
“야. 김윤민. 내 다리는 네놈 베개나 해 주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걸랑?”
“에이~ 치사하게 왜 이래?”
“무겁다. 쫌 내려와라.”
“씨바. 진짜 이렇게 나올래?”
“뭘?”
“현비오는 군말 없이 베개 해주면서 진짜.”
“너랑 나랑 갔냐? 새꺄?”
여진은 별다른 행동으로 터치하지 않았지만,
도무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윤민의 행동으로 인해
옆에 있던 비오가 가옥한 발차기를 날렸다. =_=
뭐, 고작 앉아서 구부러져 있는 다리를 한번 쭉~ 폈을 뿐인지라
힘이 들어간 공격은 아니었으나, 옆구리를 제대로 맞은 운민이 받은 타격은 컸다.
벌떡 일어나서는 비오의 발길질을 당한 옆구리를 문질러댄다.
“고작 베개 한번 해 달라는데, 양쪽에서 쌍으로 비싸게 구네. 참.”
“다른 새끼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내 마누라냐?”
“쓰펄, 마누라라고 더럽게 챙기네.”
“더러운 거 알면서 이 지랄 하는 넌 뭔데?”
“치사하다 치사해.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도 안 벤다. 쳇.”
“바라는 바다.”
“아~ 쓰펄. 언뜻, 우리 우정에 금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나.”
“네놈이랑 금갈 우정이나 남아 있냐?”
점점 잦아지는 바람 때문에 상당히 빠른 속도로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끄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비오.
잠을 자다 일어난 몸이라 뻑적지근한 모양인지 한차례 기지개를 켜고는
벗어놓았던 운동화를 구겨 신는다.
“밥 먹자. 배고프다.”
☆04
오후 12시 50분경.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꾸준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봄비.
때문에 아이들은 늘 가던 옥상이 아닌 옥상 바로 앞 계단에 모여 앉았다.
5층 높이의 건물. 그 중 5층과 옥상 사이의 계단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휘리릭~!
그들 사이에, 언제 준비 된 건지 소형의 작지만
뿜어내는 소리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힌 카세트가 지나의 무릎 위를 독차지한다.
정해진 볼륨에 맞춰 작고 협소한 공간이지만 나름대로 만족하는 무대인지,
흘러나오는 음색에 맞춰 리듬을 타는 형우.
그리고 지나를 시작으로 몇 안 되는,
늘 같은 인원으로 뭉친 그들 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함성.
그들은 지금, 기대와 그들이 거는 그 기대만큼이나 흡족한 포만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쾌락을 즐기고 있다.
짝- 짝- 짝짝-
형우의 수고에 답례를 하듯 리듬에 맞춰 가볍게 손 벽을 포개며
그들이 느끼는 값어치보다 더 큰 값어치의 쾌락을 선사하는 다섯 아이들.
그러면 형우는 귀엽고 천진난만한 자신의 이미지에 맞춰
깜찍하고 앙증맞은 몸동작을 선사한다. 한층 더 고조된 쾌락.
간혹 부담스러울 정도로 깜빡이는 눈이나, 무척 오버스럽게 보이는 어깨의 흔들림은,
보통 사람이라면 썩 좋게 와 닿지 않을 법도 한데, 단지 민형우이기 때문이었을까?
워낙 겉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밝은 분위기의 그의 성격 탓인지,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환한 웃음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음악 속에서의 잔잔한 전율.
형우가 연출하는 분위기는 여전히 밝지만 그가 선사하는 율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단지 귀엽고 천진난만함을 보이던 작은 동작에서,
약하지만 큰 동작 속에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한 자태를 뽐내는 동작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이지만,
단지 음악 하나와 동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쾌감을 느끼게 한다.
“하아- 하아- 힘들다.”
“수고했어. 자. 물.”
“하아- 촉새야. 오빠 멋있었냐?”
“뭐, 내 입에서 이런 말 나온 다는 게 달갑지는 않지만,”
한참을 신나게 리듬을 타던 형우가 드디어 지쳤는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0.5ℓ의 물병을 손에 쥐어주는 지나.
“역쉬 최고의 분위기메이커답다! 짜샤.”
항상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두 사람이지만,
그래도 서로 인정 할 부분은 인정을 해 주는 건지, 아니면 일전에 여진이 했던 말처럼,
정말 미운정이라도 들은 건지…
서로의 행동이나 말에 토를 달며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기 보다는
여전히 흘러나오는 음악만을 귀에 담으며
작고 협소한 공간에서 아직까지 만족하지 못한 더 큰 쾌락을 찾아간다.
“하아-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땀나는 것 좀 봐.”
“비와서 그래.”
“씨바. 이래서 난 비가 싫어.”
“훗-”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거주춤 앉은 몸을 그대로 벽으로 끌고 가는 형우.
날씨 때문에 습한 기온도 짜증이 나는데,
온 몸에 퍼지는 끈적임과 송골송골 맺힌 땀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다.
꾀나 불만스러운 형우의 얼굴.
허나 그 표정 하나까지도 모두에겐 즐거움인 듯,
형우는 잘난 미간 위에 한껏 주름을 잡지만,
다른 아이들은 핏- 하는 여린 웃음을 흘려보낸다.
“야. 이지나야. 음악 좀 바꿔봐라.”
“올~ 현비오. 한판 뛰는 거야?”
그리고 그때, 그들 사이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현비오.
앉아 있는 자리에서 툭하니 내 뱉어진 후,
멈출 줄 모르는 음악에 묻혀 사라질 듯 가벼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면 비오는 입고 있던 마이를 가볍게 벗어 옆에 있는 여진의 어깨위에 걸쳐 놓고,
가볍게 몸을 일으킨다. 그러면 한쪽 벽에 등을 대고 물을 축내던 형우가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듯 보이지만,
기다렸다는 듯 때 아닌 다양한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꽤나 경쾌한 휘파람까지 동원하여 한층 더 경쾌한 흥을 돋운다.
“뭐로 바꾸까?”
“아무거나.”
“음. 알았어. 자자~ 그럼 맡겨만 주십시오. 하하.”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한 몫 단단히 하는 형우의 호응에 맞춰 금세 음악을 바꾸는 지나.
쿵- 쿵- 쿵쿵따- 쿵- 쿵- 쿵쿵따- 따- 쿵쿵따-
좀 전과는 전혀 다른 풍의 음악. 잔잔하지만 비트가 강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허나, 도입부분만 그랬을 뿐.
서서히 진행되면 될 수록 오로지 정열적인 비트만이 흥을 돋우며,
내제되어 있던 긴장감을 끌어 모은다.
까딱까딱. 작은 고갯짓으로 리듬을 먼저 읽은 비오.
서서히 웨이브를 타는 그의 몸.
오른쪽, 왼쪽. 짧은 시간 작고 간결한 동작이지만 일순간,
몸 전체를 틀어가며 시선과 방향을 바꾼다.
제한된 작은 공간이지만, 그 공간을 최대 활용하여
작지만 큰 몸동작으로 절제된 파워를 연출.
끊어질 듯 끊어짓 듯, 하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가지각색의 기교와
테크닉을 주저 없이 선보이는 비오의 실력은 과히 손색이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는 점점 더 최고조를 향해 쉴 세 없이 달렸고,
비오는 형우와는 또 다른 쾌락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날씨와 시간과 장소. 이런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구애 받지 않고 몸과 마음이 음악을, 그리고 짜릿한 전율을 원할 때면,
오로지 음악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즐긴다.
.
.
1시 30분이 훌쩍 지난 시간. 교내에는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졌고,
2학년 7반 교실에는 꽤나 점잖은 인상을 소유한 반면,
손위에 들린 굵은 몽둥이가 무척 인상적인 남자가
영어 교과서 한권을 들고 앞문을 지나 들어온다. 아마도, 영어 교과 담당 선생님 이신 듯.
“반장.”
점잖아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위엄 있으면서도 상당히 날카로운 음성에
사내 아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이반의 반장인 허성이었다.
“차렷. 격례.”
“안녕하세요.”
하늘이 흐리다 한들, 점심시간이란 이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즐겁고 달콤한 시간이었으니, 저마다의 여유를 즐기고 난 후라
조금은 시끌시끌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가 끝났다.
허나, 탁탁-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교탁을 내리치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 하시는 선생님.
“이 새끼들이, 하나같이 나사가 풀렸나?”
늘 문제가 많은 아이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직까지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거늘,
두서없이 막말과 함께 욕지거리를 퍼 붓는 교탁 앞의 선생님을 보고,
아이들은 금세 풀어졌던 긴장을 곤두세운다.
“다시.”
“차, 차렷. 격례.”
“안녕하세요?!”
“몇 페이지 진도 나갈 차례…”
교탁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무엇이나 되는 듯,
금세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잠잠해졌다.
꽤나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에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짓는 사람.
수업을 시작하려는지 한 손에 분필을 들고 교과서를 넘기려는데,
“반장아.”
“네? 네에….”
하려던 말을 끊어 버리고 반장을 호명함에,
허성은 다시 한번 자리를 일어나는 수고를 겪어야 했다.
“지금 내 눈에 비어있는 자리가 정확히 세 개나 되는구나.”
“아…!”
교탁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의 말씀에 그제야 교실을 둘러보는 허성.
그가 언급하기 전까지 전혀 비어있는 자리를 전혀 눈치 체지 못한 모양이다.
짧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워낙 조용한 교실의 허공을 가로질러 교탁 앞까지 당도했고,
그에 꽤나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선생이다.
“아아? 이 새끼 봐라?”
허성은 짧은 욕 한마디를 먹으며 그의 눈치를 봐가며, 조심조심 주위를 둘러본다.
허나, 비어있는 자리는 멀리 찾을 것도 없었다.
제일먼저 시선이 닿은 곳은 운동장을 향한 창가 쪽 뒤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포착된,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단 한번에 바라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란히 비어있는 자리.
홱- 하니 정 반대 반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그 자리에서 한 분단 건너뛰어 제일 맨 뒷자리를 바라봤다.
그 곳 역시,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비어 있었다.
‘아주 엿 먹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구나. 젠장.
근데 왜 하필 코뿔소 시간이냔 말이지. 사람 난간하게-’
수업 시간도 수업시간 이지만,
교과 담당이 코뿔소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바싹 긴장 한 시간에,
대 놓고 욕을 할 수도 없는 것이요,
그렇다고 모른다는 둥, 글쎄요. 라는 둥의 말 따위로 대충 넘어갈 일도 아닌지라,
꽤나 난감해 하는 허성 이었다.
말을 안 해도, 아마 지금쯤 허성의 속에선 이 놈들을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어떻게든 하고 싶은 심정 일 것이다.
“가만 보니, 이반의 문제아 한 녀석이 안 보이는 구나?
아니, 비어있는 세 자리가 모두 지정된 문제아들 같은데,”
“그, 그게….”
“근신은 어제로 끝이 났고, 보아하니 가방은 자리에 있는 듯, 싶은데.”
“야, 양호실에 간…”
“양호실이라? 반장아.”
“네?!”
“네가 볼 때. 현비오라는 새끼가 차라리 학교를 재꼈으면 재꼈지,
양호실 따위에 드러누워 있을 녀석으로 보이더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성난 파도에 배가 휩쓸러 감과 동시에,
때 아닌 거대한 바위를 만나 충돌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기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예리한 질문을 하는 코뿔소를 대항해
반박 할 말이 없는 허성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유지한다.
‘씨바. 자우지간 이 인간들을 확-!’
허나, 속으로는 비오와 그들을 향한 욕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풍원 고등학교에서 코뿔소라 하면, 알아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든 눈 밖에 나게 되면 그 사람은 물론이요,
이와 같이 자기 수업시간에 타당한 일이 없이 누군가가 자리를 비웠다면
반 전체가 꾀나 피곤한 노릇이었다.
일명, 악덕학주라고 할까? 어지간한 문제아들을 한손에 잡고 휘두르는 사람.
아니, 좀 골치 아픈, 난다, 긴다하는 속수무책의 문제아들 까지도
꼼짝 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물며, 갖은 악행과 빈번한 사고로 웬만한 교사들 사이에서
내 놓은 아이들이 이 선생님 앞에 한번 섰다 하면 그 거만하던 꼬리를 단박에 내려버리고
정신을 바싹 차리며 최소한 그에게만은 걸리지 않으려
조심조심 하려는 경향이 생기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니,
이미 풍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녀석들은 물론이요,
이 근방 일대의 학교에까지 ‘코뿔소’ 선생은 소문이 자자했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시간에 꽤를 부려?”
헌데 지금. 겁도 없이 코뿔소의 수업시간을 마다한 녀석들이 있는 이상,
허성뿐만이 아닌 40여명의 2학년 7반 급우들은
어떤 긴장감 보다는 초조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어떤 공포에 의해. 코뿔소라는, 눈앞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교사로 인해.
“반장아. 지금 당장 이 세 녀석들. 잡아 와라.”
“네에.”
“비가 오니 옥상에는 없을 테고, 아마, 그 앞에 있을게다. 오른쪽 계단 끝.”
.
.
허성은 코뿔소의 분부대로, 한산한 복도를 지나, 오른쪽 계단을 밟고 옥상으로 향한다.
3층의 교실에서 5층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허나, 4층에 도착을 하고 5층에 도착을 할수록 점점 가까워지는 음악소리.
그렇다고 음악실에서 풍겨나오는 것의 성질이 아님에 허성의 미간은 자연적으로 구겨진다.
‘천하의 현비오도 코뿔소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부처님 손바닥 신세로군.’
5층을 지나 그 위의 계단을 밟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근방 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대대적으로 문제아로 낙인찍힌
주요인물 여섯이 춤잔치를 벌이고 있다.
“야, 야야!”
허성은 어쩐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차갑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들이 하나같이 좁은 공간에서 어우러져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는 격이라니.
마치 이 곳이 무슨 나이트의 무도회장으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씨바. 야!!”
허나, 교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코뿔소를 생각하자니,
도무지 다가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새 지나의 무릎을 벗어나 바닥을 뒹구는 라디오를 제일먼저 멈췄고,
갑자기 끊긴 음악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하아- 뭐야? 하아- 반장아냐?”
제일먼저 그의 존재를 인식 하는 건 무척 숨이 가빠 보이는 지나였고,
“하아- 이 새끼가 겁 대가리 없이 산통 깨네?”
“뭐야? 새꺄.”
아직까지 수업이 시작됨을 모르고 있는지,
허성의 등장을 무척이나 불쾌해 하는 음성이 간간히 들려온다.
“니들 지금, 시간이나 보면서 이 지랄 하는 거냐?”
“훗- 주허성. 니가 언제부터 우리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냐?”
“존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야야, 몇 대 맞기전에 꺼져라. 엉?”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꼬나무는 윤민과 선재.
가만히 그를 꼬나보기만 하는 비오. 피식 웃으며 남아 있지도 않는 물병을 한번 흔들더니,
그대로 허성에게 던져 버리는 형우.
“아씨. 풍요 속에 빈곤이네. 산통 깨는 누.구.땜.에.”
교복위로 땀이 흥건히 배었고, 머릿결 사이사이로
젖은 땀방울이 제법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충만하고 풍족한 쾌락을 즐기지 못한 게 영 아쉬운지
허성을 향해 대 놓고 비아냥거리는 지나였다.
그런 지나의 행동은 허성으로 하여금 충분히 울컥 하게 만들었지만,
애당초 그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해 봤자 득 될게 없다는 걸 아는지,
“지금 코뿔소가 너희를 애타게 찾고 있는데. 이제 그 같잖은 여유는 그만 부리는 게 어때?”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
“코뿔소가 우릴 왜 찾아?”
“후- 그야 5교시 수업이 영어니까.”
☆05
탁- 탁- 탁-
“비 맞은 쥐새끼들 마냥 아주 난리가 났네.”
교탁 앞에 나란히 선 비오, 여진, 그리고 지나의 꼴을 보며 어이없어하는 코뿔소.
교탁위에 놓여있는,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묵직한 출석부로 그들의 머리 위를 내리친다.
“물 만났어. 물. 아주.”
탁- 탁- 퍽-
조용한 교실에 멈추지 않고 울려 퍼지는 탁한 마찰음.
손 위에 들린 출석부로 연신 그들의 머리를 내리치는 코뿔소 선생님.
조금 예민하게 따지고 보자면, 머리를 맞는 다는 것부터가 몹시 불쾌할 일인데,
비오와 여진은 오히려 이런 공격쯤은 예상했다는 듯,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표정과 침묵만을 묵과할 뿐이다.
“그렇게 주위를 줘도 변하는 게 없는 네 놈들은, 사람새끼 아니고 짐승새끼라도 되냐?”
“…….”
“나 같으면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정신 차리겠다. 이 놈들아!”
5분에서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구구절절이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체 어떤 대꾸도, 반응도 보이지 않는 세 녀석.
코뿔소는 질리다 못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허나, 생각 하면 생각 할수록 녀석들의 행동이 괘씸해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뭘 잘 했다고 꿀 먹은 벙어리야?!”
하다하다 안 되겠는지, 별걸 다 갖고 트집을 잡아 들어오는 코뿔소.
허나 여전히 침묵을 묵과하고 있는 세 사람. 될 대로 되라. 라는 식이었다.
‘이 녀석들. 당최 내 말이 씨가 먹히질 않으니 어찌 하면 좋으려나?’
그런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나지만, 도무지 어떤 좋은 꽤가 생각나지 않았다.
호되게 야단을 쳐 보기도 하고, 주구장창 잔소리도 해 보고,
손에 들린 몽둥이가 두 동강이 날 때까지 때려도 보았다.
하다못해 3시면 하교할 그들을 붙들어 놓고 자신의 퇴근시간도 무시한 체,
7시 8시. 늦은 밤 까지 잡아놓고 훈계를 하고,
완전 억지로 말도 안 되는 반성문을 써 보게도 했지만,
그 어느 수단과 방법을 써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기에,
조금 더 고차원적인 성질을 지닌 방법을 모색해 본다지만,
제 아무리 코뿔소라도 상대가 현비오와 그 녀석들 이라면,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후- 너희 같은 놈들 데리고 말을 하는 내가 잘못이지. 쯧쯧.”
워낙 타고난 문제아들 이었기에 한없이 어렵게도 생각 해 보고 쉽게도 생각 해 봤지만,
그 어떤 쪽이든 매번 허사였다.
아예 관심을 꺼 보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들처럼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그 방법도 통하지 않았고, 정말 무섭고 혹독하게 벌을 줘 보기도 했지만
그 방법 역시 아무런 효력을 얻지 못했다.
“나가. 이 자식들아! 꼴도 보기 싫다. 이 놈들!”
투욱- 들고 있던 출석부를 교탁위로 내 던진다. 차라리 속 편하게 포기를 택한 모양이다.
“에?!”
‘어라? 내 귀가 맛이 갔나?’
조용한 교실에, 오직 코뿔소의 화난 듯 어이없는 음성 이외의 것이 들리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믿을 수 없다는, 이게 웬일이냐는 표정이 너무나 분명한 지나였다.
“나가!”
출석부로 머리를 맞았을 때만 해도 하다못해
아- 하는 짧은 비명 소리 하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던 지나가 꽤나 당황한 듯 했다.
허나, 그것은 옆에 있는 여진과 비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물며 반 전체가 ‘이게 웬일이래?’ 라는 표정으로 코뿔소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
.
“훗- 천하의 코뿔소의 손에서 아무런 탈이 없었다니.”
“신기해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군.”
그리 넓지 않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
18평 남짓한 공간으로 혼자살기엔 무척 안성맞춤인 이 곳은 비오의 오피스텔이었다.
현관을 열고 신발을 벗기가 무섭게 아무렇게나 구석으로 가방을 내 던지면,
늘 그래왔듯이 쉴 세 없이 주절거리는 지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가 시작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들의 주위를 따라다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 중
당당히 이슈가 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모두가 궁금해 하는 코뿔소의 교과시간.
자칫하여 운이 좋지 못하다면 분명 자기들까지 걸고넘어질 거라며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귀찮아질 일을 예상했던 그들이다.
딴 선생님들이라면 애당초 그들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기에 상관없지만
한사코 그들이 좋은 것을 보지 못하는 코뿔소.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현비오가 있는 곳에 당연히 존재할 그들이기에,
늘 그랬듯이 형우와 선재. 그리고 윤민이 당연히 함께 있음을 알고 있을 코뿔소였다.
때문에 그와 한번 일이 섞이면 짜증이 남은 물론이요,
귀찮은 일들이 줄에 줄을 이을 것 이란 건,
이미 코뿔소라는 선생과 인연을 맺었던 입학 시기부터 인식하고 있는
하나의 중대한 사실 이었다.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헌데, 아무런 일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5교시가 끝나고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내려왔더니,
(그때까지 그들은 옥상 앞 계단에서 자욱한 담배연기와 함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멀쩡히 그들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던가?
그 자리에서 당장 어찌 된 영문인지 묻고 싶었지만,
무척이나 귀찮아하는 녀석들 행동에 참고, 또 참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비오의 오피스텔 입구에서부터 캐내었다.
“아씨. 토해. 토해. -ㅠ-:”
별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지라 그리 개운치 못할 일도 아니거늘,
무슨 영문인지, 둥글둥글 귀여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는 지나였다.
“야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좋게 생각 해.”
“아무리 그래도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고. 이건!”
“이런 기회 다시 안 온다?”
“씨이- 야. 뻥가? 너 지금. 니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 하는 거지?”
지나는 뭐가 그리도 심술이 나는지, 애매한 형우를 가지고 괘난 꼬투리를 만든다.
“촉새야. 넌 어째 지방도 많은 녀석이 그렇게 추위를 잘 타냐?”
“뭐어?!”
“한여진은 너보다 말랐는데도 아무 소리 안 하는데,
몸무게 50㎏씩이나 나가는 너는 어째 그리 추위를 잘 타냐고?”
허나, 절대적으로 꼬투리를 잡혀 당할 형우가 아니었느니,
아무리 지나가 말랐다고 해도,
여자에게선 예리한 부분 중 하나인 몸무게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다.
“원래 지방이 없는 사람들이 추위를 잘 타는 거 아니냐?”
“뻥가야. 너. 몸무게 50㎏라는 말에 상당히 악센트를 넣는다?”
“느꼈냐? 그럼 너도, 다른 계집애들처럼 다이어트라는 것 좀 해 보는 게 어때?”
고로, 두 사람 사이에 오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뻥가야. 냉정하게 말해서, 여자 키 170에 몸무게 50㎏라는 건
정상적인 것에도 못 미치는 거거든? 달리 말해서, 상당히 말랐다고 할 수도 있단 말이지.”
“촉새야. 그럼 여자 키 172에 몸무게 47㎏인 한여진은 뭐냐?”
남자가 여자의 몸무게를 가지고 왈가불가 한다는 사실이 참 겸연쩍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여진과 지나의 키, 몸무게를 꿰뚫고 있는 형우.
아니 그들.
분명 여자 키 170에 50㎏는 기준에도 못 미치는 것임이 분명하거늘,
작정을 하고 약을 올리려는 심사인지 지나의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형우였다.
아니나 다를까,
“뻥가야. 제발 나와 한여진과 비교를 하지 말아주지 않으련?”
“이 재미난 장난을 마다하면, 그건 천하의 민형우가 아니지.”
“야!! 냉정히 말해서 내 몸 어디 하나 군살 있는 거 봤냐?”
“글쎄다. 아직까지 이지나의 벗은 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게,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노골적인 말까지 해 대는 형우에 비해
울그락 발그락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지나가 보였고,
그들 곁에서 재밌다며 연신 웃어대는 그들이 보였다.
“씨이- 말이 상당히 도전적이다?”
“도전적이기 보다는 직설적인 거겠지.”
“씨…바.”
“촉새야. 아직도 모르냐? 넌 절대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지랄.”
“이 쯤에서, 그만 패배를 인정 하는 게 어때?”
심정 같아서야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지나의 붉은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그를 본 형우는 자신의 승이라는 듯, 밉살맞은 조소를 띠운다.
‘아쭈? 누구 가슴에 열불 나게 해 놓고, 웃어? 감히? 확- 한대 후려 줄까보다.’
반면,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에
말없이 이를 가는 지나였다.
“내 누누이 말 하는 바지만, 한여진이랑 나랑 비교 좀 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왜? 기분 나빠? 촉새야. 솔직히 말 해봐.”
“뭘?”
“너도 한여진 앞에서는 꿀리지? 진짜, 진짜 솔직히.”
“누, 누가 그렇대?”
“훗-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씨이. 무슨 남자새끼가 이리도 말이 많대?!’
“암튼!! 한여진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거라고!
오히려 정상에 가까운 게 나라고! 알아들어?”
지나는 꽤나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헌데,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전히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화는 나되, 더 앉아있다간 본전도 못 찾을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깔끔하고 보기 좋게 잘 놓여진 비오의 침대로 걸어가,
이미 그 침대를 독차지하고 있는 윤민을 구석으로 밀어 붙인다.
“아무리 그래도. 추운 건 딱! 질색이야.”
“훗-”
“이가 갈리다 못해 혐오스러울 지경이라고.”
라는 말도 잊지 않으면서.
“야. 이지나. 좁다. 쫌 내려가라.”
“김윤민. 넌 어째 볼 때 마다 자냐?”
“븅~ 성질난다고 그세, 누누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말을 잊었냐?”
“아참. 밥은 굶어도 잠은 굶지 않는 다는 괴상망측한 그 신조?”
“엉.”
“잘났어. 정말.”
허나, 이미 그 침대 위에서 단잠을 청하던 윤민으로 인새 말없이 물러나줘야 했다.
“니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왜?”
“그래서? 죽치고 있을라고?”
“훗- 뭐 언제는 니 허락 맞고 들어오고 나가고 했냐? 뻔한 걸 왜 자꾸 묻는데?”
언제 꺼내 왔는지, 캔 맥주 하나를 따서 시원하게 넘기는 비오가 돌연 찬물을 끼얹는다.
“나가봐야 될 것 같아서.”
“어딜?”
“전화 왔어. 사장한테.”
“이 시간에?”
“그래.”
벌컥벌컥. 목 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맥주를 금세 비우고는,
옷장을 뒤적거리는 비오는 검정색의 깔끔하고 심플해 보이는 정장을 하나 꺼낸다.
“늦어?”
어느새 옷을 고르는 비오의 옆에 다가와서 넥타이를 골라주는 여진이 묻는다.
“가봐야 알 것 같아.”
“누군데 이렇게 일찍 나가?”
“청담동 사는 물건 하나 있어. 뭐가 그리 잘났는지, 사장이 빌빌 기는 물건이야.”
“그래?”
“어제부터 제발 나오라고 사정 하는데, 안 나갔거든. 그래서 오늘은 이 시간부터 찾나봐.”
아무렇지 않게 입고 있던 교복을 휙휙 벗어 던지고는 고른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여진이 골라준 넥타이를 매며 성의 없는 대답을 한다.
“비오야.”
“말해.”
“너. 이 일. 안 하면… 안 돼지?”
익숙하게 비오의 넥타이를 골라주면서, 어색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여진이었다.
그런 여진의 물음이 무얼 말 하는 건지 알고 있는 비오.
왜 그러는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까지 알고 있지만,
무언가 여진이 원하는 부분을, 속 시원하게 답해주지 않는다. 다만,
“… 왜?”
라는 말이, 물끄러미 여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꺼낸 말의 전부였다.
“언제까지 있다 갈 거냐?”
그것도 모자란 모양인지, 아니면 이런 여진의 질문이 썩 내키지 않았는지,
그 것 또한 아니라면, 워낙 비오의 성격인지. 도망치듯 서둘러 나가려고만 할 뿐이다.
“걱정 마라. 너 들어오기 전에는 없을 거다.”
정장에 제법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두를 꺼내 신으면서
거실을 향해 묻는 비오. 그리고 그런 비오의 물음에 무심히 답해주는 선재.
“그럼 있다 가라.”
그리고 냉정히 등을 돌리는 비오였다.
“무심한 새끼.”
쓸쓸히 비오가 지나쳐간 뒷자리를 바라보면서 자연스레 손을 뻗게 되는 건
언젠가 형우와 선재가 말 했던 바 있는
한여진과 고독의 조화를 완벽하게 매치시키는 담배였다.
말없이 그것을 입에 물고 걱정스러운 듯,
그리고 꽤나 못마땅한 듯한 표정위에 어두운 그늘까지 겹치는 여진을 보면서.
알만하다는 듯, 허나 역시 못마땅하다는 듯, 비오를 질책하는 선재였다.
☆06
무언가 알 수 없는 눈빛 속에 조심스러움을 담고서
가지 말라는 말을 대신하는 여진을 두고 나온 거리. 비오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건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여진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다.
아무렇지 않은 듯 냉정하게 나와 버렸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된다.
“씨바. 왜 자꾸 한숨이 나오는 건데?”
앞만 보고 달리는 일은 즐겨도, 절대 뒤를 돌아볼 줄 모르던 비오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다.
여진의 앞에선 새삼스레 왜 그러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행동을 하고 말았지만,
사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한다면 자신은 절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비오가 하고 있는 일은.
“와, 왔어?!”
익숙한 계단을 밟아 내려간 곳에는 애타게 그를 기다린 듯 보이는
중년의 한 남자 어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긴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쪼르르 문 앞까지 달려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비오의 비유를 맞춰주고 있다.
그는, 조금 음침해 보이면서도 꽤나 그럴 듯한 이 곳의 사장이었고,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없지만 여자가 아닌 몇몇 남자들이 오가는 이 곳은
소위 말하는【호스트 빠】라는 곳이었다.
“뭔데 이 시간부터 불러요? 아직 출근시간은 멀었구만.”
“하하. 저번 날, 그러니까 삼일 전. 접대했던 아가씨 말야.”
“청담동 산다는 그 여자?”
“자네가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어제부터 불러달라고 난리잖아.”
냉장고에 있던 시원한 음료수를 하나 건네는 거로도 모자라
편하게 마시라고 마개를 따 주며 아부하니,
아무래도 그 여자가 보통 손님은 아닌 모양이다.
더불어 사장을 대하는 비오의 행동을 보니, 비오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왜 귀찮게 사람을 이른 시간부터 오라가라야?!”
“귀찮아도 부탁 좀 하자고. 워낙 우리 집에선 귀한 손님이잖아?”
“씨바. 어느 방인데요?”
“늘 가던. 2번 방.”
“오늘은 일찍 출근 해 줬으니까 이걸로 끝 이예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 분이 섭섭하지만 않게 해줘.”
꽤나 붙어대는 사장을 귀찮다는 듯 떼어낸 비오는 그가 말해준 2번방으로 들어갔다.
메케한 냄새가 절로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그 곳에는
거만해 보이면서도 눈빛이 꽤나 당돌해 보이는 여자가 뻐끔뻐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언제부터 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 지쳐 보이는 여자가
비오의 얼굴을 보며 미소로 반긴다.
“손님을 다루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허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거치었다.
반반하고 평범한 듯 보이는 얼굴 위로 진한 화장부터가 무척 불쾌스러움을 주는 사람.
꽤나 고급스러워 보임과 동시에 대학생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부담스러운 의상.
어리지 않은 당돌함과 자기 과시적인 성격.
몸을 두르고 있는 값 비싼 명품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싸구려틱한 느낌.
‘난 네 년의 그 면상부터가 불쾌한데 이걸 어쩌지?’
비오는, 3일전 그녀를 처음 접대 한 이후로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장의 부탁으로 인해 다시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때문에 오늘. 자신을 잡는 여진의 눈빛이 더욱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어쩜 여진은 자신이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상대하러 나감을 알고
그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별 달리 관심 없다는 듯 비오가 다가가 앉자,
자연스럽게 비오의 앞에 놓이는 술잔 하나와 술병 하나.
따르라는 말을 행동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화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지 않는다고?”
여자는 빠르게 채워지는 술잔을 한번 보고,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으면서 비아냥거리듯 묻는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거만한 태도와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이 못마땅한 비오.
최소한 이곳이 학교라면, 본래의 성격 그대로 차갑고 쌀쌀맞게 상대를 제압했겠지만,
차마 이 곳은 성격대로 할 수 없는 있는 곳이 아니기에 찌푸려진 인상위로 애써
태연한 미소를 그려본다.
“하루에 한 사람만 대접 하는 것도 모자라 참, 건방지다?”
이제 고작 두 번째 만남이거늘,
첫 만남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주구장창 현비오라는 인물에 대해 늘어놓는 여자.
지나치게 붉어 도발적이기 보다는 싸 보이는 여자의 말에
비오의 미간위로 점점 어두운 그늘이 깔린다.
허나, 이 여자. 비오의 반응 하나하나를 즐기는 듯 준비 해 둔 말을 멈추지 않는다.
“여자 친구 있어?”
“어떤 대답을 원하죠?”
“없다면 다행이지만, 있다면 지금 이 시간 이후론 정리해.”
“왜 그래야 하죠?”
“오늘 이 시간부로 내가 널 살 거니까.”
“내가 거절을 한 다면요?”
“훗- ”
“…….”
“집? 아님 돈을 원해? 뭐든 말 만 해. 원하는 대로 줄게.”
돈이면, 재산이면 뭐든 다 된다는 식의 이 여자.
비오는 겉에서 풍기는 어떤 외형보다도 이 여자의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나, 지나친 자기 과시.
자기중심적인 무분별한 태도.
이 여자의 이러한 면모는 현비오라는 한 남자의 성격과 절대 매치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말야,”
“또 뭐가 남았습니까?”
“앞으론 바꿔.”
“뭘, 말입니까?”
“하루에 한 사람을 상대하는 일 말고, 나 아닌 어떤 사람도 상대 하지 마.”
“명령입니까?”
“그리고.”
쉬지 않고 비워지는 여자의 잔. 쉬지 않고 그 잔을 채우는 비오.
여자는 비오가 따라놓은 그 잔을 마저 비우더니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말로 인해 무척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오의 옆자리를 차고앉는다.
그리고는 이렇다 할 순간도 없이 비오의 입술을 탐한다.
“내가 널 찾는 날은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앞에 네 몸을 대령해.”
무언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올라오는 순간,
여자는 벌어지지 않는 비오의 입을 제법 능숙하게 벌렸고, 그 안을 훑는다.
‘훗- 과연 세상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돌아갈까? 싸구려 계집 같으니라고.’
.
.
그 시간. 하루 종일 그칠 줄 모르던 비는 그쳤고, 여진은 오랜만에 집을 지키고 있다.
비오의 집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이 곳은 조금은 오래된 듯 낡은 빌라의 한 집이었고,
여진과 엄마. 단 두 사람이 머무는 곳이었다.
좁은 평수에 두 사람이 사는 것 치고는 꽤나 갖춰진 게 없는 실내.
흔하디흔한 컴퓨터나 오디오, 책장 하나 없이 썰렁한 집.
방 한 칸에 거실과 주방이 한데 합쳐진 좁은 곳에 단연 돋보이는 건
집 건물만큼이나 오래되 보이는 낡은 TV.
어쩐지 선재나 비오의 집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게,
그들과는 동떨어진 세상을 사는 듯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너무 낡아 본 방송을 틀어놨음에도 불구하고 쉴 세 없이 지지직거리는
바보상자를 멍하게 바라보면서 말없이 소주병 하나만 축내고 있다.
마땅한 안주조차 하나 없이 그저 투명한 알콜 한 모금 들이키고,
뿌연 담배 연기 한번 내 뱉고를 반복한다.
“여진아!!”
그 때. 마치 제집 드나들 듯이 문을 활짝 열며 여진을 부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지나였고, 지나는 교복이 아닌 편안한 추리닝차림이었다.
“뭐야? 또 혼자 청승 떨고 있었구나?”
지나는 여진 앞에 놓여진 술병과 잔을 보면서
마치 그럴 줄 알고 왔다는 듯 익숙하게 주방으로 가,
적당한 크기의 접시 하나와 잔 하나를 가져온다.
그리고 언제 들고 왔는지 까만 봉지 안에서 몇 개의 소주병과 조미된 안주를 꺼낸다.
“날도 구진데 뭐 하러 와?”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있음 뭐하냐? 싶어서 우울한 친구 구제 해 주러 왔지.”
“피식. 누가 우울한데?”
“훗. 사실, 오늘은 아줌마도 없는 날이잖아.
워낙 인심 후한 이 언니가 너 외로울까봐서 기나긴 밤을 같이 지세 줄까 한다. 불만 없지?”
밉지 않게 같은 말을 돌려 하면서까지 여진의 앞에 자리를 잡는 지나는,
제일먼저 뭐라 뭐라, 들리지도 않는 말을 쉴 세 없이 제잘 거리는 바보상자를 끈다.
그리고는 제법 짭짜름하고 안주거리로는 전혀 손색이 없는 오징어를 쭉쭉 찢어놓는다.
어쩐지 세상 근심이란 걸 모르는 듯한 여전히, 그리고 늘 밝은 지나의 표정.
여진은 사뭇 그런지나가 부러워졌다.
“자. 이거 입에 넣고 현비오다! 생각하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
“훗. 이게 왜 현비오야?”
“분풀이하기엔 젤 만만하자나.”
“분풀이?”
“짜식. 부끄러워 하기는? 우리 사이에 새삼스레.”
부끄럽기 보다는 예리한 한 마디에 조금은 난처하다는 비유가 더 맞을 법도 한데,
자신의 얼굴까지 붉혀가며 능청을 떨어대는 지나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쿡- 역시 귀신은 속여도 이지나는 속일 수 없는 건가?”
“두 말 하면 잔소리고, 세 말 하면 입 아프지.”
쭈욱~ 얇고 먹기 좋게 찢던 오징어를 돌연,
굵고 묵직하게 찢은 지나가 일체 망설임 없이 그 것을 여진의 입에 물려준다.
그러면서 으레 당연하다는 말로 은근슬쩍 여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만든다.
지나의 말과 행동이 100% 당연하다고 수긍하는 그런 의미의 미소가 아닌,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연적으로 웃게 만드는 묘한 웃음이랄까?
“피식. 지나야. 나 술 고파.”
여진은 지나 특유의 묘한 웃음을 보며, 다시금 투명한 알콜을 목구멍으로 넘긴 후,
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지나는 묵묵히 여진을 바라보며,
“그래? 쿡. 듣던 중 참 반가운 소리다.”
“혼자 취하면 심심한데 같이 취해 줄 거지?”
“그래서 이 언니가 요 놈을 데리고 왔잖냐?”
두 사람은 작지만 자연스러운 웃음을 띠웠고,
아무런 생각 하지 말고 취해보자며 빈 잔을 연거푸 체우고 비워내기를 반복한다.
허나, 뜻대로 무념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부터 한동안 여진은 말없이 잔을 비워내며 간간이 담배를 태움으로써
무언가 허기진 마음을 달랬고,
지나는 담배 대신 씁쓰름한 이 녀석으로 여진과는 다른 무엇 이지만,
역시나 허기진 마음을 달랜다.
그렇게, 비워내려 하던 머릿속은 점점 더 엉망이 되 가면서 잔뜩 취기에 오른 두 사람.
별 달리 특별할 법한 대화나 잔잔한 일상의 대화가 오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은 분명했다.
벌써 창 밖으론 달이 보이고, 많지도 선명하지도 않지만 별 마저 하나, 둘,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까맣지만 오늘따라 무척 예뻐 보이는 밤하늘을 보면서 여진은 낮은 한숨을 몰아쉰다.
☆07
비 개인 후, 무지개라도 뜰 것 같은 화창한 토요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비오와 여진은
찢어진 청바지와 가벼운 남방의 편안한 캐주얼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복잡했던 어제 일이 마치 한 결의 꿈과 같은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늘 그들의 모습은 늘 같은 일상 중 하루였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미안하다. 괜찮다.’의 말 따위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떤 계기도 없이… 오랜 시간 몸을 부딪기며 정을 나눈 엄마 아빠가 그렇듯,
태어날 적부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가며 정을 나눈
오랜 친구이자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형제들이 그렇듯.
어제일은 자연스레 무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치여 죽겠네. 씨바.”
토요일이라 그런지, 꽤나 붐비는 지하철 안. 2호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그들.
비오는 겨우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붐비는 인파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보인다.
더군다나 옆에 있는 여진의 곁에 있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
매 정거장마다 빠져 하차하는 인파가 많은 만큼 승차하는 인파 또한 무시 할 수 없으니,
사람과 사람사이의 여유적인 공간이 부족했다.
때문에 몸과 몸이 닿는 일은 자연스러웠고,
자꾸만 여진의 곁에 얼쩡거릴 수밖에 없는 그들이 짜증스러웠다.
“왜?”
“가만있어 봐.”
아직도 종착역은 멀었고,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지 끝내는
여진을 자신의 옆이 아닌 앞에 세운다.
앞 쪽으론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고,
비오를 기준으로 여진이 서 있는 반대쪽엔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이크 끌고 오는 거였는데.”
비오는 짜증스러운 듯 툴툴거렸고, 여진의 미간엔 잔 미소가 번진다.
“씨바. 거기서도 (사람에) 쳐 죽는 거 아냐?”
꽤나 께름칙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전동차 천정을 잡고 있던 한 손을
내려 여진의 허리를 감싸오는 비오. 동시에 자신의 몸과 여진의 몸을 밀착시킨다.
그로써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들 틈에서 여진과의 거리에 공백을 두려는 듯.
.
.
약 15분의 시간이 흐르고, 목적지에 도착한 비오와 여진.
전동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왔지만,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일반 도로나 외부가 아니었다.
전동차 안에서와 별 다를 바 없이 분비는 인파.
그러나 어떤 여유가 느껴지는 이 곳은 꽤나 널찍한 광장. 한쪽으로는 백화점 입구가.
그리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놀이공원의 입구가 보이는
이 곳은 잠실의 한 놀이공원 앞 이었다.
“간단하게 점심부터 때울까?”
매표소에서 자유이용권 두개를 끊어온 비오는 근처에 보이는
롯데리아를 가리키며 물었고, 여진은 ‘응’ 이라는 긍정의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놀러 온 거 참 오랜만이다. 그치?”
“그랬던가? 뭐. 하긴. 그런 것도 같네.”
서빙 대에서 주문을 하고 받아온 쟁반을 탁자위에 올려놓기 무섭게 여진이 꺼낸 말.
늘 그들의 곁에 있는 친구들 때문이었을까? 항상 무리를 지어 다니던 버릇 때문이었을까?
둘 보다는 여섯이라는 숫자가 더 익숙하고 편안했던지라,
오늘같이 둘 만의 시간을 갖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고,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앞으론 많이 하자.”
“응?”
“둘이서 놀러 다니는 거.”
동그란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물고는 우걱우걱 씹어대는 비오.
어제의 그 미안했던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일까?
보통의 날이라면 ‘애들도 아니고 새삼스레.’라는 둥의 말로
대충 얼버무렸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빈말이라도 이렇듯 해 주니,
여진은 고맙기 보다는 어쩐지 미안했다.
아무래도 비오가, 어제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이유를 뻔히 알기에…
비록 다른 사람들이라면 손가락질을 할 지언 정,
여진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알량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욕심을 체우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자꾸만 후회된다.
“지나간 거 생각 하지 마라.”
“어?”
“내 앞에서 딴 생각 하지도 말고. 놀러온 기분 안 나게.”
잠깐이었지만, 여진의 침울한 표정을 읽었는지,
어느새 햄버거 하나를 다 꿀꺽한 비오가 콜라를 마시며 말한다.
“한여진. 그거 먹으면서 들어.”
“응? 응.”
“마라토너가 마라톤을 하면서 뒤를 돌아본다면 어떻게 되게?”
“…….”
“한명, 두 명, 뒤로 처지거나 넘어지게 될 거야. 그럼,”
“…….”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금 매달이 아닌 은 매달,
동 매달을 따는 결과를 초래하겠지?”
윤민의 신조가 ‘밥은 굶어도 잠은 굶지 않는다.’ 라면
비오의 신조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다.’라는 말이 적절할 만큼
그에 해당하는 비유를 들고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
“앞만 보고 달리기도 벅찬데, 뒤까지 돌아봐야 한다면 존나 피곤하지 않겠냐?”
.
.
같은 시간.
지나와 형우를 시작으로 윤민와 선재는 옥상이 아닌, 선재의 집 안에 모여 있었다.
토요일이라 특별활동을 목적으로 3교시의 짧은 오전 수업이 끝난 그들.
제각기 편안한 차림으로 익숙하게 선재의 집으로 모인 것이다.
“이씨! 어쩜 이럴 수가 있어?!”
“그러게 말이야.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있어서도 안 되고.”
“맞아. 이건, 그마나 반 토막 남은 우정까지 금 가는 거라고!”
“내 말이!”
허나, 무언가에 잔뜩 뿔이 난 지나와 형우. 좁은 거실을 배외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늘 티격태격 이던 두 사람이 죽이 잘 맞으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
“그나저나, 김윤민. 넌 이 상황에서도 잠이 오냐?”
돌연 불똥이 애꿎은 윤민에게 튀어간다.
“왜 나를 걸고 넘어 가냐? 촉새야?”
“넌 약 오르지도 않냐? 우리만 쏙 빼놓고 지 둘끼리,”
“약 오를 거 없으니까 오빠 잠 좀 자자.”
소파 따위는 보이지 않는 좁은 거실이지만,
그 거실 한 가운데서 대자로 뻗어 잠을 청하는 윤민.
시끌시끌, 왈가불과해대는 지나와 형우를 깡그리 무시한 체,
별 재미도 없는 TV 채널만 돌리고 있는 선재. 이 시간 그들은 같은 장소에 모였지만,
저마다 다른 행동을 보인다. 늘 그렇듯이.
“아씨, 차선재는 차선재대로 딴 짓해, 김윤민은 김윤민대로 딴 짓해.
정말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알면 바라지 말고, 떠들라면 제발 나가서 떠들어라.”
때문에 어디론가 불똥이 튀기 마련이고, 그 불똥을 맞는 건 응당,
선재보다 만만한 윤민의 몫이었다.
“이 자식들. 도대체 우리만 쏙 빼 놓고 어딜 간 걸까?”
“내가 그걸 알면 지금 여기 있겠니? 뻥가야?”
“하긴. 나 같아도 당장 쫓아가서,”
“산통을 내야지!!”
한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비오와 통화를 했던 형우.
사실 지나와 형우가 지금 이렇게 뿔이 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보통 날 같으면 옷을 갈아입고 오기 보다는 아무거나
선재의 옷을 꺼내 입고 여유를 즐겼을 법도 한데,
그런 비오가 자신보다 집이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았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다짜고짜,
“오늘은 니들끼리 있어라.”
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 형님은 마누라 데리고 데이트 간다.”
라는 딱 두 마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우가, 지나가 이렇듯 산만함을 보이는 이유는,
두 사람의 단독 데이트는 둘째 치고, 상당히 간단하고 막무가내로 끊어진 전화.
어떤 말을 할 틈이 없이 갑작스런 경황에 따른, 배신감이랄까?
다시 전화를 시도하지만 들려오는 건,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갑니다.】
라는 절대로 익숙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어떤 여자의 음성이었다.
어디로 가고 왜 자기들끼리만 가려는지 말해도 치사해서 안 따라갈 판국인데,
(사실은 어떻게든 쫓아가서 해방을 놓고 싶었는데.)
통화 연결도 되지 않을뿐더러 갑작스러운 말에
‘응?’이라는 한마디가 아닌 한글자만을 입 밖으로 내 뱉은 상황이라
더 열이 난지도 모를 일이다. 워낙 한 수다 하는 형우였기에,
“안 되겠어. 뻥가야!”
“촉새!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
“핸드폰 위치 추적 해 보자.”
.
.
짧은 시간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그들은, 어드벤처 내부로 들어왔다.
그 중 야외가 아닌 실내.
방학이나 시즌은 아니지만, 토요일이라 그런지 제법 붐비는 인파들.
그리 길지는 않지만 30분 남짓 기다려야 겨우겨우 하나의 놀이기구를 탈 수 있었다.
“아씨. 기다리는 거 재미없다.”
그리 길지 않은 후룸라이드 대열에 끼어서는 바지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하다가도 금세 싫증이 났는지, 담배를 꺼내 손장난을 하는 비오.
기다리는 일이 보통 지루한 게 아닌지, 담배라도 한대 태우고 싶은 눈치지만,
어쩐 일인지 태우지는 않는다.
“비오야. 우리 야외로 나가자.”
“왜?”
갑갑한 비오의 속내 때문인지,
그리 길지 않은 줄 이지만 5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기다렸고,
다른 기구들과는 달리 한두 번의 차례가 지나고 나면 탈법도 한데,
여진은 다짜고짜 비오를 끌고 어디론가 향한다. 아마도, 야외 어드벤처로 나가려는 듯.
“이거 안 타?”
“어? 어.”
“기다린 시간이 있는데 왜?”
“그, 그게. 실은. 나도 기다리는 거 재미없었거든.”
원체 후룸라이드를 좋아하는 여진.
다른 기구들 보다 오히려 짧은 줄인데도 끝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오자
비오는 그 이유를 묻는다.
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다가도 문득,
비오와 여진이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온 것이 처음도 아니거니와,
여진이 이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를 일이 없는 비오기에 어색하게 얼버무렸고,
“그, 그러니까. 그게…”
“…….”
“사실은 화장실이 좀…”
“너, 화장실 다녀 온지 고작 10분밖에 안 됐다?”
“아참-”
“훗- 한여진. 거짓말 존나 못해.”
거짓말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 비오라, 화를 내겠거니 싶었지만,
선의의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비오의 얼굴엔 한 시간 넘게 줄을 기다린 지루함이 지워지고
대신 보기 좋은 웃음이 자리 잡는다.
“그러니까, 나 거짓말 안 하게 그냥 나가자. 담배 하나씩 태우고, 호숫가 근처에서 놀자.”
“호숫가?”
“응. 기다리기 지루하잖아.”
“야, 그래도 놀이공원에 놀이기구 타러 오지, 무슨 청승맞게.”
“뭐, 어때?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거지.”
어느 정도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어느새 야외로 나온 그들.
가까운 곳 아무 벤치에 자리를 잡고는, 익숙하게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다.
비가 온 후라지만, 바람 한점 없는 오후라, 담배는 빠르지 않게 서서히 타들어간다.
“훗- 알아서 해라.”
귀공자, 아니 황태자라는 표현이 제법 어울리게
편안하고 간단한 캐주얼 차림에도 시선을 끄는 남자와, 묘한 신비로움이 묻어나는 여자.
미세하지만 그들에게서 묻어나는 부드러운 미소 때문일까?
다정한 연인으로 보이는 한 커플이 나란히 앉아 담배를 태우는 폼이 그럴 사 하지만,
반면, 아직까지는 보수적인 경향이 많은 우리 사회.
실내도 아닌 이런 야외에서 여자가 담배를 태운다는 사실이 절로 인상짓게 한다.
허나, 웃고 있는 얼굴위로 서서히 번지는 뿌연 연기가
아무런 표정이 없을 때와는 또 다른 한 폭의 그림을 형성하니,
여전히 묻어나는 묘한 신비감으로 많은 시선을 끌어당긴다.
“근데, 괜히 자유이용권 끊은 거 아냐?”
“왜? 아까워?”
“사실… 그렇잖아?”
‘차라리 그 돈으로 담배를 샀다면, 그게 얼만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여진. 간단명료한 대답을 했지만,
차마 겉으로 표현하기엔 무지 난감한 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담배였다.
여진이 원체 담배라는 놈을 각별히 하는 경향이 있는 터라,
담배를 태우는 건 별로 터지 하지 않는 비오.
허나, 말 하지 않아도 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를 체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여진.
그러니 이 상황에서 감히 끝말까지 할 수 없었다.
허나, 상대가 비오가 아닌 지나나 그 외의 다른 녀석들이라면
이미 그 말 까지도 가볍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탈건 탔잖아?”
“고작 두개라는 게 문제지만….”
☆08
어느새 다섯 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세대의 바이크가 휑하니 도로 위를 달려 롯데월드 앞에 멈춰 선다.
짙고 물이 잘 빠진 청바지와 청재킷이 꽤나 잘 어울리는 세 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
“히히. 한여진, 현비오. 딱 걸렸어!”
“내 말이.”
핸드폰 위치 추적에 성공을 한 모양인지,
하얀 청바지에 진한 청재킷이 멋스러운 지나가 사내 세 녀석을 끌고,
비장한 각오로 어드벤처 안에 들어선다.
“요 가증스러운 것들, 우리만 쏙 빼 놓고 이런 곳에서 즐기려 했다니.”
“미워하지 않으려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지나와 형우는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을 보고 황당해 한다거나,
짜증스럽다는 따위의 표정을 지을 두 녀석을 생각 하며 신이 난 얼굴이다.
이 순간 마냥 기대 되는 그들의 표정은 핸드폰 위치 추적까지 해 가며
이 목적지로 온 것에 대한 큰 성과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허나, 형우와 지나를 따라 온 두 녀석은 별 관심은 없는 듯….
아무래도 두 사람 중 어느 한명 혹은 두 녀석의 독촉과
끈질긴 오기 같은 어떠한 근성으로 인해 마지못해 온 듯 하다.
.
.
오랜만에 찾은 둘 만의 여유 속에서
침입자가 접근해 온다는 사실을 전혀 예측치 못하고 있는 비오와 여진.
호수 근처 파라솔 밑에 자리 잡고 마주앉아
각자 어떤 음료수를 앞에 놓고 은연중 오가는 한두 마디 말 속에서
마냥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뿐 이다.
“시간도 시간인데, 어째 사람들이 더 붐비는 것 같다?”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탁자위로 꼭 잡은 두 손이 보기 좋은 아이들.
그 위로 언제 또 준비를 한 건지,
아니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한여진의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것인지…
마주 잡은 손 옆으로 곱게 놓여있는 워크맨. 사이좋게, 나란히 한쪽 귀에 가져간 이어폰.
그 안에서 들려오는 Jazz적인 성향이 가미된 잔잔한 팝송.
“그만 갈까?”
음악처럼 흘러가듯 건너오는 잔잔한 비오의 말에 여진이 곧장 반응을 보인다.
그럼 비오는 돌연, ‘왜?’라는 표정으로 반문을 하고,
여진은 보기 좋은 미간에 약간의 미소를 담고는,
“너,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때를 맞춰 가자는 말을 꺼내는 여진.
혹시라도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넓디넓은 어드벤처 안을 휘젓고 있을 지나와
그들의 등장을 예측이라도 한 모양인지, 슬슬 일어 설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도 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많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싫은 건 아니고?”
“뭐가?”
“사람 붐비는 거 싫어하는 거, 한여진 따라갈 사람이 어딨다고.”
“훗. 그런가?”
“놀이공원이니 이정도 사람이야 뭐, 당연하잖아.
내가, 겨우 이 정도에도 신경 쓸 거였다면 처음부터 오지도 않았지.”
놀이공원이라기 보다는,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호숫가 근처이기 때문일까?
아직 하늘은 밝지만, 점점 주위로 몰려드는 인파를 보며,
잠시잠깐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라보는 비오였다.
“한여진.”
그런 그가 돌연, 자신이 한 말 때문인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한 여진을 부른다. 그럼 여진은 묵묵히 비오를 응시했고,
“이거, 오랜만에 갖은 기횐데,”
“…….”
“내친김에, 바닷가나 갈까?”
한 가지 뜻밖의 제안을 해온다. 허나, 갑작스러운 말이기 때문이었을까?
이 제안은 분명 감계가 무량할 정도로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는데,
선뜻 ‘응.’이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여진. 그저 한동안 멍 할 뿐이다.
별 다른 말없이 묵묵히 비오를 응시 할 뿐이다. 분위기가 조금 묘하게 흐른다.
“싫…어?”
여진의 반응 때문인지, 조금은 머뭇거리는 비오의 물음.
“아, 아니! 그런 거 아냐.”
“근데 왜 그래?”
“응? 뭐가?”
“네 표정.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아 보여.”
“바보-”
좀 딱딱한 어감이 느껴지는 비오의 음성.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금세 풀리는 여진의 웃는 얼굴.
이어서 습관처럼 보기 좋은 미간을 잔뜩 일그리는 비오.
두 사람의 표정은 짧은 순간 아주 다양하게 변하고 있었다.
“천하의 현비오가… 먼저 이런 곳에 데려와 준 것도 황송한데,
바닷가까지라…. 훗- 정말 영광인걸?”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왜, 내 귀엔 비아냥거림으로 들리냐?”
분명. 여진의 의도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은 뜻을 담아 한 말이겠지만,
‘현비오표 무관심’을 질책하는 듯한 어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를 대강은 파악한 듯한 비오. 버릇처럼, 습관처럼…
금세 보기 좋은 미간을 묘하게 일그러트린다.
엉킬 데로 엉킨 듯 보이는 비오의 일그러진 얼굴.
반면, 비오의 미간을 자리 잡는 주름이 늘면 늘수록 더욱 환하게 웃으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여진.
성큼성큼, 짧은 세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비오의 옆자리로 다가선다.
그리곤 반 억지처럼 그의 몸이 일으켜지면 보기 좋게 그의 팔짱을 꿰찬다.
“어디로 갈 거야?”
“…….”
“근데, 지금 출발하면,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을까?”
“시간이 왜?”
“벌써 다섯 시가 넘었는데, 바닷가 도착해봐. 적어도 여섯시 반. 일곱 시잖아.”
“원래 바다는 밤바다가 더 좋아.”
“그래도 어두컴컴하면…”
무어라,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칭얼대듯 칭얼거리던 여진.
그럼 옆에서 자꾸만 따가운 눈총을 주는 비오.
때문에 여진은 하려던 말을 적당히 얼버무리며 유들 있게 넘긴다.
“… 낭만적이겠지?”
일그러졌던 비오의 미간엔 잔잔한 웃음이 깃들여지고,
“한여진.”
“응?”
“우리가 언제부터 시간이니, 관념이니. 그 따위 것을 따졌냐?”
“하긴.”
그렇게 오가는 짧은 대화 속에서 점점 아까의 파라솔을 벗어나는 그들이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어드벤처의 정문.
끊어질 듯하지만 끊어지지 않고 오가는 짧은 대화. 그 속에 가벼운 함께하는 잔잔한 미소.
워낙 평소에 표정 변화라는 것이 그리 큰 아이들이 아니었기에,
잔잔한 웃음만이 간혹 그들의 보기 좋은 미간을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어떤 여운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갈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아씨, 이것들 도대체 어딨는거지?”
바삐 발을 움직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살피며 여진과 비오를 찾는 지나와 형우.
그들의 일당. 아직까진 한걸음만 움직여도 송골송골 땀이 맺어질 때는 아닌지라,
얼굴위로 적당한 땀이 맺혔을 때, 그들은 호숫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씨. 벌써 여기만 해도 두 바퀸데, 이것들 어딜 그리 꽁꽁 숨은 거야?”
“그러게. 분명 사람 많은 거 싫어하고,
줄줄이 늘어서서 뭔가 기다릴 성격이랑 안 맞는 녀석들. 여기 어디 있어야 정상인데.”
“아씨. 안되겠다. 우리 뭣 좀 마시고 한숨부터 좀 돌리자. 좀 걸었더니 목 타.”
삼십분도 체 걷지 않았거늘, 벌써부터 귀차니즘 증세를 보이고 있는 형우와 지나였다.
형우는, 어느 정도 핑계성이 들어간 맨트를 한마디 던져 놓고는
꽤나 목이 탔는지 금세 음료를 사러 사라진다.
가지각색의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지나가 근처 벤치에 무거운 몸을 내려앉는다.
여러 개의 파라솔이 즐비한 자리. 점점 시간이 자남에 따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일까?
일어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 자리를 노리는 눈들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넘쳐 나는데…
“야야, 촉새야. 이게다 오빠 말을 무시한 결과란다.”
“웬, 자가다 봉창?”
한 없이 짜증스러움을 느끼는 지나를 향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러니까 내 말은, 자는 오빠 억지로 끌고 나오더니, 거 참 쌤통이라고.”
“에이씨, 천하의 허풍쟁이 뻥가도 암 소리 안 하는데 왜 네가 난리냐?!”
“뻥가야 너랑 같이 이 일을 주도한 공범이고.”
“공범?! 어째 어감이 껄떡 지근하다?”
“암튼! 이 넓은데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찾을래?!”
“이씨! 두고 보라니까, 어떻게든 찾아 낼 테니!!”
“미친. 이건 그야말로, 잔솔밭에서 바늘 찾기라고.”
잠을 자고 싶은데, 자지 못하고,
그렇다고 넓디넓은 놀이공원에서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니,
꽤나 불만스러워 보이는 윤민. 한시를 쉬지 않고 투정을 부린다.
그런 윤민을 귀찮아하는 지나.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며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슬며시 고개를 틀은 선재.
불어오는 바람을 막으며 불을 붙이기 위해 고개를 틀었을 뿐인데,
문득 돌아간 시선 속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으니,
‘훗- 볼 장 다 봤나? 벌써 나가네…? 아니, 아니지. 역시 현비오, 한여진인건가? 훗-’
시계가 다섯 시 반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순간.
아직 즐기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더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정문에 가까워지는 실루엣을 보며 선재는
알만하다는 얼굴위로 희뿌연 담배연기를 퍼뜨린다.
“야, 시끄럽고.”
선재는 여전히 멀어져가는 비오와 여진을 보면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한다.
그로써 잠시도 쉬지 않고 티격태격 대는 지나와 윤민이 자연스레 정지되었고,
동시에 그들을 향해 뭐라 말 하려는 순간,
“자. 하나씩 마셔라.”
두 손 위로 네 개의 컵을 들고 나타난 형우가 선재의 다음 말을 먹어 버린다.
“차선재. 하려던 말, 계속해봐?”
하나의 넓은 울타리 안을 체 삼십분 밖에 뒤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맘먹은 것처럼 쉽사리 원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기 때문인지,
어떤 짜증이나 독촉을 부릴 법도 한데, 그저 심드렁히 물어오는 지나였다.
“아냐. 됐어.”
“뭐가 돼?”
“그냥. 찾으려면 너희나 찾아보라는 말하려고 그랬다.”
가볍게 고개를 좌, 우로 까딱이더니 심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충 넘어가려는 선재.
어느새 빠져나간 건지 보이지 않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살핀다.
그 모습은 선재가 여진과 비오의 뒤를 쫓기 보다는
막연히 딴청을 부리려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난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다고.”
선재는 가볍게 호숫가 주위를 둘러싼 난간에 몸을 기댄다.
“어헝~ 그러셔?”
“그래도 뭐, 기왕 온 김에 헛시간 보내긴 싫다.”
“아하, 그러니까 뭐, 결국 따로 노시겠다. 뭐 그런 건가?”
“훗- 좋을 대로 생각해라.”
지나의 비아냥거림에도 그저 심드렁히 대꾸하는 선재.
시간이 시간인 만큼 이제 곧 호수 중앙에 설치 된 장치로 인해
화려하고 보기 좋은 분수 쇼가 시작 되려는 모양인지
서서히 하늘 위로 물을 쏘아대며 하나의 곡선을 그리는 곳을 응시한다.
“애초부터 너란 인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건 알았지만,”
“…….”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친군데. 해도 해도 너무하네. 정말.”
일명 배신자라는 칭호까지 곁들이며 끝까지 선재를 귀찮게 만드는 지나의 음성.
만약 지금, 형우- 보다는 윤민이 선재의 입장이라면,
‘친구가 모처럼 데이트 좀 하겠다는데, 그걸 망치려는 너는 어떻고?’
라는 반박을 하기에 충분했다.
허나 선재는, 입가에 물린 담배 밑으로 가볍지만 쓴 웃음을 지어 보일뿐,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친구여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일에는 좀 심각할 정도로 무관심한 선재였다.
귀찮고, 누군가가 옆에서 칭얼대는 걸 딱히 즐기지 않는 선재이기에
마지못해 따라 나온 자리. 그리 찾아대던 두 녀석의 실루엣을 포착한 순간,
선재는 별 생각 없이 지나에게 그들의 행방을 고 하려 했었다. 허나, 가만 생각 해 보니…
어제의 그들의 일도 일이거니와,
아무리 친구라도 자신이 아닌 타인이기에 무관심한 선재지만,
그들이 함께 지내온 시간과 역사가 있으니, 그 것은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비오, 한여진하면 그들의 표정만 봐도,
하다못해 담배 한 개비 태우는 모습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심정이라는 것을 훤히 읽을 수 있는 지경이었다.
때문에, 어차피 어제 일로 인해, 서로에게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을 예감한다.
어차피 자신과 이들이 개입된다며, (절대 개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에)
그렇지 않아도 늘 방해 받아야 했던 시간도 많았는데,
오늘까지 방해를 받는다면 어쩐지 ‘안쓰럽다.’ 라는 마음이 먼저 동요된다.
해서 굳이… 오늘까지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 바이크 키, 가지고 있냐? 그럼, 주차장에 바이크 있다. 써라.】
【애들이 니들 잡아서 방해한단다. 장소 바꿔 가는 거라면, 핸폰 끄고 움직여라.
좋은 시간 보내라.】
선재는 이렇게 두 번의 문자를 찍어 전송했다. 그리고….
【고맙다.】
라는 짧은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09
선재의 바이크를 몰아 어디론가 향하는 비오와 여진.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서 찬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한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이십여 분가량이 흘렀을까?
“어? 여기.”
끼이익… 브레이크 잡는 소리가 요란법석하게 들려오더니,
거칠면서도 반면에 매끄러운 정차를 한다.
워낙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달려온지라 주위의 풍경 따위를 볼 여유가 없었던 여진은
추위 때문에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꽤나 익숙한 풍경. 작은 구멍가게를 시작으로 낡은 건물 한 채,
이 곳은 바로 여진의 집 앞이었다.
“훗- 왜? 바닷가가 아니라 실망했냐?”
별다른 감정이 읽혀지지 않는 여진의 얼굴을 보면서도 비오는 재밌다는 듯 웃는다.
“뭐야? 바닷가는 그냥 꺼낸 말 이었어?”
“왜? 아쉽냐?”
“뭐….”
“정말 실망이라도 했나보네? 근데, 이걸 어떡하냐?”
실망스러움이 한껏 묻어나는 여진의 얼굴.
약이라도 올릴 심사인지, 평소엔 잘 짓지도 않던 밉살맞은 표정까지 지어보이는 비오.
그 표정은 실로 가관이었다…기 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를 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그럭저럭, 얼렁뚱땅
넘어가기 또한 참으로 묘한 풍경이란 말이다. 이유 또한 어처구니가 없었다.
<비오가 이런 밉살맞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일은 일년에 두, 세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유였으니….
“훗-”
여진은 한차례 낮은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럼 그렇지.”
“…….”
“이게 뭐야? 김칫국만 잔뜩 마셨잖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는 여진.
그 달리 내색하려 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그럼 그렇지~’혹은,
‘애초부터 바란 내가 잘못이지.’등의 표정은 감추려야 감출 수는 없었다.
비교적 자연스러운 비유로 스리슬쩍 내 뱉는다.
“말 속에 뼈가 있다?”
“기분 나빠 할 것 없어.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이니까.”
“뭐라고?”
“바보처럼 혼자 좋아하고, 혼자 붕~ 떠서 쇼하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병신 짓 한거지.
그런 내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고.”
“굳이 한심스러워 할 것까지야.”
“한심스럽지. 당연히. 현비오를 뻔히 알면서도 그런 기대를 하고 말았으니.”
좀처럼 허탈감이 지워지지 않는 여진의 음성.
비오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변화 없이 물끄러미 여진을 바라본다.
“훗-”
어느 순간 비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면
여진은 그 미소를 체 보지도 못한 체 뒤돌아선다.
그렇게 뒤돌아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머리위로 손을 들어 한번 흔들어 주고 터덜터덜…
기운 빠진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면,
“야. 한여진. 어째 넌…!”
웃는 얼굴 위로 무언가 불끈하는 비오의 음성이 여진의 발걸음을 잡는다.
“어째 넌, 세상 여자들 죄다 갖고 있는 게 없냐?”
“세상 여자들?”
“애교 말야! 애교!!”
“애교?”
“젠장. 나야말로 너한테 뭘 바란 건지.”
이번엔 여진을 타박하는 비오의 말이 들려온다.
여진은 그 말이 썩 못마땅함을 넘어서, 팔위로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것만 같았다.
애교라는 말은, 여진에게 있어서 자신과 절대적으로 매치시키고 싶지 않은 하나에 속했다.
“뭐야? 너 지금 나한테, 애교라는 그 말도 안 되는 걸 바란다는 거야?”
“말이 안 될 건 또 뭐냐?”
힘 빠진 걸음걸이를 걷던 여진이, 금세 비오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최소한 이지나였다고 해도, 이 상황에 너처럼 재미없진 않을 거다.”
적절치 못한 비유로 여진의 화를 돋군다.
지나라면,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특기를 가진 것 못지않게 애교가 많았다.
겉으로 보이는 차가움보다 솔직히 귀엽고 앙증맞은 애교가 더 잘 어울리는 지나였다.
그들 무리 여섯 중에 제일 성격이 무난하고 다가가기 쉬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라는 타이틀이, 그리고 밝아 보이는 성격 아래로
가리어진 어둠으로 인해 타인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뿐이었다.
“지나랑 나는 달라.”
“그래. 다르지. 심할 정도로 다르다는 게 문제가 될 만큼.”
“그래서?”
“후… 그러니까, 내 말은…!!”
“…….”
“됐다. 됐어. 그만하자. 씨바.”
“뭘 그만 해?”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을 것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비오는 다만, 아주 약간의 그것을 바랬을 뿐인데, 남자로써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꼬리를 내려버렸다.
괜히 기분 좋았던 오늘 일을 좋지 못한 마무리로 인해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왜 말은 돌리는 건데?”
무엇이 어긋난 걸까? 음… 아무래도 그냥 저냥 포기하고 나면 됐을 일을,
화를 돋궜기 때문일까?
역시, 사람과 사람을 비교한다는 건 좋지 못한 일임을 새삼 느끼며 다시 한번 말을 돌린다.
“들어가서 두툼한 잠바나 껴입고 나와.”
“잠바는 왜?”
“저녁이라 바닷바람 많이 차다. 내 마누라 감기 걸리는 거 싫다?”
.
.
선재의 검은색 혼다를 놔두고, 흑진주색의 엑시브를 몰고 달린다.
점점 어두워지는 밤하늘 아래서 흑진주의 야마가
오늘따라 유난히 빛을 발하며 제법 무서운 속력을 자랑한다.
롯데월드를 빠져나와 여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속도.
때문에 불어오는 바람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여진은 사나운 바람과의 마찰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점점 비오의 등을 파고들어간다.
피식…. 바이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워낙 컸던지라,
여진의 귓가에까지 미처 전달되지는 않지만, 정면에서 본 비오의 얼굴엔
한 가득 웃음꽃이 피었다. 아마도 이런 여진의 행동을 노린 것 같다.
쌩- 쌩- 부우웅- 넓디넓은 고속도로가 아닌,
좁고 외진 국도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 비오의 야마.
시원한 반면 워낙 거친 바람으로 인해 두 눈 밖의 시야가 선명하지 못함에도
여진의 눈에 비춰오는 것이 있었다. 달빛을 받아 유난히 검푸른 바닷가.
간혹 보이는 한적한 해변.
어느덧 바이크가 그들의 목적지인 바닷가에 도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을 더 달렸을까?
달빛을 받은 검푸른 바다보다 더 빛나 보이는 바이크가 점점 속도를 낮췄고,
이내 멈춰 선다. 좀더 깊숙한 해변의 모래사장.
얼핏 보이는 손목시계의 시침은 9라는 숫자를 조금 빗나가 있었다.
세 시간 남짓 달려온 바닷가.
차고 시린 맛에 더 낭만적이고 유난히 끌리는 겨울바다가 부럽지 않았다.
“어둠을 집어 삼키는 것 같아.”
잔잔하지만 온통 검푸른 빛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유난히 하얀 파도를 보며 여진이 꺼낸 말이다. 백사장을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하얀 파도.
얼핏 보기에도 그렇고, 조금 자세히 들여다본다 해도,
잔잔하게 요동을 치는 듯 하면서도 쏴아- 하는 큰 소리가 넓은 백사장을 가득 매우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삼켜버릴 양으로 달려드는 한 마리 맹수와도 흡사해 보였다.
“조용해서 좋다.”
주말일지라도, 지금은 바다를 찾는 때가 아니기 때문일까?
넓은 백사장 안에서 사람의 흔적이라곤 두 눈을 씻고 또 씻으며 찾아봐도
볼 수 없을 만큼 적막하다.
들려오는 소리도 오로지 몰아치는 파도 본연의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온통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인데,
오히려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안 벗어줘도 돼. 너 입어.”
바이크에 시동을 끄고, 한발 한발 바닷가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비오는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여진의 어깨에 걸쳐준다.
4월이라 낮 바람은 따스할지 몰라도 밤바람은 여전히 추웠고,
이 곳은 바닷가였기에 그 추위는 조금 더 했다.
더군다나 장시간 바이크를 타고 달렸으니,
체감온도는 찬 바람이 부는 바닷가의 온도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였다.
“더워.”
비오의 배려가 달갑기 보다는 걱정스러운 여진.
얇아 보이는 니트가 꽤나 마음에 걸려다.
반면에 여진의 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괜찮다는 말 대신
덥다는 핑계 같지 않은 핑계를 대본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사월도 훌쩍 지났는데 감기는 무슨.”
“그래도.”
“훗- 고작 이 정도에 감기가 걸린다면 그게 남자냐?”
“남자는 뭐, 사람도 아닌가?”
“훗- 몰랐냐? 남자는, 특히 이 현비오는 수호신이라는 사실.”
“수호신?”
“정의와 사랑의 힘에 불타는 수호신.”
“쿡-”
파도가 지나간 자리로 다가가며 자신의 대답에 만족한 듯, 자아도취에 빠져버린다.
두 팔을 엇갈려 괴고서 고개를 까닥이기까지….
그리고는 덮쳐올 듯 덮쳐올 듯… 무언가를 가져가기 위해 꾸준히 달려오지만,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파도를 보며 장난꾸러기 어린아이 마냥 쫓아가는 비오.
심술이라도 난 듯 결국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 바다.
지치지도 않는지 꾸준히 달려드는 파도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가도 금세,
한발자국 쫓아가는 일을 번벅한다.
아이마냥 해 맑은 미소까지 지어대며 그 속에 가리어진 짓궂은 표정.
마치 바다를 놀리는 듯….
가만 생각 해 보니,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얼마나 많은 표정의 변화를 가졌던가?
여진은 비오의 천진난만함을 보면서
‘참 보기 좋다.’ 라는 생각 보다는 어쩐지 ‘신기하다.’ 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아앗! 씨바.”
한참을 장난질을 치던 비오의 입가에서 짧은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어쩐 일인가 싶어 파도가 지나간 표면을 보니,
그 위로 비오의 바지 아랫단이 흠뻑 젖어 있었다. 쿡- 여진의 입가에 여린 미소가 어린다.
‘무뚝뚝한 것도 너니까 좋지만, 지금의 니 모습이 더 보기 좋다면,
넌 늘 날 향해 지금과 같은 웃음을 지어줄까?
늘 변하지 않는 너라는 거 알면서 이런 바램 따위를 갖는 거… 조금은 과한 욕심이겠지?’
정말이지 평소의 녀석 같지 않은 모습.
때문에 여진은 낭만적인 밤바다의 멋에 매료되어 있기 보다는
녀석의 다양한 표정 변화에 더 심취되어 있었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어?”
“내 얼굴 뚫어질라? 매일 보는 면상 뭐 그리 볼 게 있다고.”
짜증스럽다는 듯 젖은 모래바닥을 향해 힘껏 발길질을 해 대는 비오.
하지만 그가 퍼 부운 발길질이 바다라는 놈에게 먹힐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젖은 옷을 더 젖히며 녀석을 약 올린다면 모를까? 결국 제 풀에 지친 듯,
짜증스럽다는 듯 뒤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백사장 위로 올라오려는 듯.
허나, 물끄러미, 하지만 비오의 표현이 적절할 만큼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여진의
눈길을 보았고, 엉뚱하게도 그 눈길을 책망한다.
“왜? 너무 멋진 놈이, 니 서방이란 게 행복하냐?”
허나, 곧 들려오는 그만의 자만감. 훗- 하고 새어나온 웃음.
“웃으라고 한 소리 아니다? 니 얼굴에 ‘행복하다.’라고 써 있기에, 그대로 읽은 것뿐이지.”
여진은 비오가 재수가 털릴법한 말을 꺼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보통 흔한 경우에 빗대어 보자면,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거늘,
아주 조금도 밉지 않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제대로 읽은 것 같은데?”
그의 자만심을 질책하기보다는 오히려 어깨를 더 으쓱하게 만든다.
“피식…. 닳는다. 그만 좀 보고, 일로와 봐.”
“쿡- 알았어.”
농담 반, 진담 반, 혹은 순수한 농담만으로도 비오의 말을
절대 부정하거나 토를 달지 않는 여진.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니,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때?”
“응?”
“내 선물.”
“선물?”
“병신. 바다 말야. 바다!”
비오는 바닷바람 때문인지 차고 큰 자신의 손 안에
작고 가녀린 여진의 손을 집어넣고 모래사장 위를 걷는다.
그러면 여진은, 그 손길이 좋아 뿌리치지 않는다.
아니, 잡고 있던 손과 손을 잠시 떼고 팔짱을 낀 후, 다시 두 손을 마주잡는다.
검은 밤하늘 보다, 그 밑의 검푸른 밤바다 보다 더 멋들어진 두 사람의 모습.
“멋지지?”
“응. 정말 멋져. (현비오 다음으로.)”
차가운 파도소리와 전혀 달리 부드러운 두 사람의 음성이 오간다. 그리고,
“그럼, 이건…”
계획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비오는 어느 정도의 뜸을 들인다.
때문에 여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허나, 선뜻 ‘뭐가?’라는 말을 꺼내기엔 너무나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
동시에 애타는 마음. 무언가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성이 찰 것 같은 심정.
“어때?”
잡고 있던 두 손이 풀리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턱 밑에서 느껴지는 하나의 체온.
점점 다가오는 그림자. 점점 감겨지는 두 눈.
이번엔 턱 밑이 아닌 그 위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체온. 코끝에서 퍼지는 체취.
스르르… 온 몸에 긴장감이 돌면서 동시에 홀연히 빠진다.
처음도 아니거늘, 언제나 설레고 매번 다른 느낌을 주는 스킨십.
여진은 자연스레 비오의 어깨위로 두 팔을 둘렀지만
점점 몸 안에서 감돌던 긴장감이 빠져나감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때문에 자연스레 비오의 몸에 자신의 몸을 기댄다.
비오는 그런 여진의 심정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한 손을 가볍게 허리위로 가져간다. 꽈악- 조여져오는 어떤 느낌.
그리고 점점 더 깊어가는…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키스.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10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일요일 오후.
시계바늘은 이제 고작 3시를 조금 넘어섰는데 울리는 한통의 전화 벨.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동이 튼 이른 아침이었다.
밤 새 밤바다를 거닐다 동이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한 후, 되돌아 온 것이다.
동해바다에 비해 길지도, 그리 멋들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만족했다.
“씹-”
단잠을 청하던 비오는 짜증스럽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가지 올려 덮는다.
허나, 제한된 시간이 지나고 끊어졌던 벨은 다시 울린다.
단잠을 방해받은 것에 대해 짜증이 밀려온다.
배터리를 빼 버릴 생각으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헌데, 무심코 들어온 액정의 번호.
생전 처음 보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번호는 ‘부재중 전화 2통’ 이라는 문구 아래로 가려진다.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 습성 때문에 별 다른 생각 없이 배터리를 뽑아 버리려는데,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 밸. 좀 전의 번호와 같은 번호.
비오는 하려던 동작을 잠시 멈춘다. 아무래도 연속 세 번. 그 번호에서 전화가 온 것 같다.
‘목록에서 지워진 번혼가?’
‘아니지. 내 번호를 아는 놈들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데?’
‘이 자식들. 혹시 또 한판 뛰고 굴러다니는 아무 전화나 들고서 전화 거는 건가?’
몇 가지의 의문을 만들어 보았다.
하지만 마지막의 경우를 생각 한다면,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비오가 말하는 이 자식들이란 놈들은, 낯선 번호는 받지 않는 비오의 버릇을 알기에,
그 방법은 택하지 않았을 거다.
정 급하다면야 귀찮은 일이지만, 직접 찾아온다거나, 하다못해 문자를 먼저 보낸 후,
비오의 연락을 기다렸을 그들이다.
허나, 세 번 연속 걸려온 같은 번호. 첫 번째 의문에 가정을 둬 본다.
목록에서 지워진 번호려니 생각하며,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가다듬어 본다.
허나, 그 기억 속에서 번호의 주인을 찾아보려하지만,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끈질긴 이 놈이 과연 누굴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인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직 잠에서 덜 깬 허스키하고 촥- 가라앉은 음성이 들린다.
[뭐야? 여태 자고 있던 거야? 시간이 몇 신데?]
비오의 가라앉은 음성에 반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 날카로운 한 여자의 음성이었다.
비오는 순간 확- 잠이 깨어 옴을 느꼈다. 전화를 받은 일이 후회된다.
날카롭고 듣기 싫은 음성.
특유의 고음의 음성이지만 틈틈이 갈라지는 그 음성이 무척 거슬린다.
[해가 중천에 뜬지가 언젠데 세상모르고 잠이나 자고 있어? 보기보다 한심하네?]
한 여름철 찌는 듯한 무더위로 인해 생기는 불쾌지수를 과히 능가하는 오만함.
두 번 다시 마주치는 일은, 상상 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거북함.
기억하고 싶지 않기에 더 생생이 기억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청담동의 그 여자.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불쾌감이 밀려온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자의 날카로움이 무색할 만큼 거북스러운 극존칭에, 상당히 딱딱한 어조로 대응한다.
여자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성도 음성이지만,
말투 하나가 굳이 비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얼마나 굳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차가운 반응에 대해 당황해 한다거나, 불쾌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말 한다.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 해?]
“그럼, 그쪽이 나라는 놈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
“최소한, 50%라도 알고 있다고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배터리를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성질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번호를 바꿔버리고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조금 냉철한 사고를 해 본다.
이 여자는 보통 비오의 주면에 널린 사람이 아니다.
일로써 맺어진 하나의 고객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고객이라는 이름 안에서 특별한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될 수가 없었다.
불쾌함만 초래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아니, 아니, 그래서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좋은 뜻이 아닌, 좋지 못한 뜻 안에서….
[음… 글쎄.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이 과연 몇 %의 비중을 차지할까?]
“…….”
[적어도 50% 이상은 된다고 보는데. 그렇게 단념 짓기엔 아직 이른 건가?]
조금의 망설임도, 물러섬도 없는 여자의 말. 비오는 풋- 하며 콧방귀를 꼈다.
‘장담 하는데, 어떤 수단과 방법을 이용했는지는 몰라도,
2~3일세, 얼마나 많은 돈을 쳐 들였는지는 몰라도,
네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20~30%에 지나지 않아.
아무리 많은 돈을 쳐 발랐다 해도 그것 가지곤 나를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지.’
‘훗- 아니, 그 정도라도 참 대단한거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가?
그 잘나신 재산을 나라는 놈을 위해 쳐 발라 주셨으니 말이지.’
한번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 준 탓일까?
아니,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첫 인상부터가 좋지 못했기 때문일까?
좀처럼 여자를 곱게 보지 않는 비오.
좀처럼 이 여자에 대해선 평범하게, 혹은 무관심조차 아닌,
그저 싫은 기색만 내보이는 비오였다.
속마음뿐이던, 겉 행동 까지던…. 무조건 이 여자라면
《싫다. 진절머리가 난다.》라는 생각의 사고를 먼저 하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건,]
“…….”
[니가 생각 하고 있는 것 이상은 알고 있다는 거야.]
“내가 생각 하고 있는 것?”
[그래.]
여자의 음성은 꾀나 자신 만만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비오는 여자의 그런 자신만만함이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나를 안다는 다섯 놈들(여진을 비롯한 또 다른 문제아들)중에
딱, 두 녀석을 제외하고는 내 음성만 듣고 내 기분을, 내 생각을 전부 읽지는 못하는데,
너는 할 수 있느냔 말이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한번 읽어보란 말이지.’
비오는, 여자가 자신에게 보이는 자신만만함은 오로지
자기과시적인 어떤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하고 있다.
보기 좋은 적당한 선을 넘어서 불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 여자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쿡- 내가 길거리에 흔해빠진 점쟁이나, 도사. 혹은 신이 아닌 후에야-]
비오는 침대 머리맡 선반에 놓여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 옆으로 살짝 벌어진 틈에서 짧은 비소가 흘러나온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그렇다면 말은 끝났다고 봅니다.”
[끝이라? 뭐가? 아니, 누구마음대로?]
“…….”
[흠. 그나저나, 내가 네 놈과 이따위 말이나 하려고 전화한건 아니란 말이지.]
“어련하시겠습니까?”
[이리로 좀 와 줘야겠어. 지금 당장.]
명령조에 가까운 여자의 말. 비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 사이에 물린 담배를 먹은 연기만 연신 내뿜을 뿐.
[리버호텔 708호. 시간은 10분을 주지.]
“내가 그 곳에 가지 않….”
비오가 무어라 말 하려던 참에,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씁쓸하게 비벼 끄고는 아무렇게나 내던진 핸드폰.
비오는 한동안 그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아무런 행동도 생각도 없이 그저 물끄러미.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대강 짐작만으로도 여자가 말한 10분이란 시간은 훌쩍 지난 듯싶다.
허나, 비오를 기다리고 있을 여자에게서 더 이상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여자도 어떤 오기로 독심 따위를 품고 있는 것일까?
훗- 다시 한번 짧은 비소가 새어나온다. 붉은 입술을 비집고.
‘네 년이 지금, 나를 제 손아귀에 넣고는 어떻게든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인데,’
결코 침착한 성격이 아닌, 상당히 다혈질적인 경향이 뛰어난 비오.
지금 이 순간 화가 나고 짜증이 나야 당연할 일이거늘,
이상하게도 그의 입가엔 웃음이 걸쳐 있었다. 여자를 비웃는 비소가.
그리고 그 틈에서 그는, 화가 나거나 화를 내기 보다는, 묘한- 꾀를 부려본다
‘훗- 리버호텔 708호라? 재미난 선물 하나를 보내지.’
.
.
그 시간. 여진의 집에는 때 아닌 봉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꺄아아-”
별시리 TV라는 바보상자에는 관심이 없는 여진.
오늘도 변함없이 워크맨 하나로 모든 시간을 때우고 있다.
늘 그녀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워크맨.
한여진의 3대 필수품중 하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말이지만 여전히 비어있는 엄마의 자리.
좁은 방바닥에서 배를 바닥에 깔고 엎드려 패션 잡지 물을 넘겨보고 있었다.
헌데, 밖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동으로 인해 잠시 그 녀석을 덮어두어야 했다.
꽤나 익숙한 음성이 어쩐지 다급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너무 다급하고 위태롭기까지 했다.
웬만한 소음은 다 걸러주던 음악을 누르고도 생생히 들려왔으니-
“여진아!! 한여진!!”
탕- 탕- 탕-
그 장단에 맞춰 들려오는 건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음.
도대체 무슨 일로 저리도 다급한지, 까딱하단 옆에 있는 사람 숨넘어가게 생겼다.
“이지나?”
여진이 서둘러 현관을 열었을 때, 제일먼저 퍽- 하는 짧은 마찰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찰은 비록 짧았지만, 어찌나 과격하던지 여진의 몸이 반 이상 틀어졌다.
동시에 중심을 잃고 신발장을 향해 갸우뚱하고 말았다.
아-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기 전에 어떤 통증이 먼저 느껴졌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둘러 황급히 문을 닫고 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모든 시야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다음 말문을 막아 버렸다.
“하아- 하아-”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아니 온 몸을 떨면서 다급하게 문을 잠그는 지나.
수전증이라도 걸린 사람 마냥 떨림의 정도는 점점 심각해져만 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안쓰러운 건, 분명 무언가가 두려운 듯- 꽤나 불안해 보인다는 사실.
획- 여진은 사납게 지나의 어깨를 돌린다.
어떤 불안감 때문에 지그시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며 얼굴을, 눈동자를 응시했다.
“너! 너, 얼굴이 왜 이래?”
허나 그 순간, 여진은 놀람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앞선다.
“나, 나 좀 숨겨줘. 나 좀 숨겨줘. 여진아.”
어찌나 놀랐는지, 입을 떠억- 벌리고는 위, 아래로 지나를 훑어보는 여진.
차마 할 말을 잃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지금 여진이 보고 있는 사람이 도무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지나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와 싸우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영문에선지 산발이 된 머리.
어디서 맞고 왔는지 푸르딩딩한 눈두덩이.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뿌리를 뽑아 버리는 지나 답지 않게,
얼굴 가득 얼룩진 눈물. 신발은 어디다 두고 왔는지, 흙먼지가 새카맣게 자리 잡은 발.
무척이나 절실하고도 간절한 그녀의 부탁.
“왜 이래? 어? 무슨 일이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분명 충분히 웃음을 자아낼 만큼 코믹스러운 모습이었다.
속된말로는 ‘미친 년 저리가라.’ 라고 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
하지만 절대 웃음이 나지 않는 일. 웃음이 날 수 없는 심각한 상황.
“허엉- 왔어. 왔다고!”
“뭐가? 뭐가 왔는데?”
“엉엉- 또, 또- 시작됐어.”
한 발자국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굳은 채로, 힘없이 쭈그려 앉은 채로-
그저 눈물만 흘리는 지나. 시작 되었다는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여진의 두 눈이 질끈 감긴다.
“하아- 씨발.”
소설제목 : 끝없는사랑
작가명 : 신기루
E-mail : lovestay20@hanmail.net
연재장소 : 꽃잎소설②
총편수 : 총 50편 완결 (+프롤로그,에필로그)
장르 : N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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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소설닷컴 (http://cafe.daum.net/youllso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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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소설
끝없는사랑 [01 ~ 10]
지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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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0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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