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인 1976년 8월 초순경 이었다.
나는 유도체육관에 같이 다니면서 몸을 부디치며 운동도 하고 학교도 같
은 학교에 다니던 친한 친구 3명과 같이 4박 5일의 지리산과 남해의 여
행 계획을 세워 맨 먼저 지리산에 등반을 가게 되었다.
첫날은 남원에서 가장 쉬운 코스로 천왕봉에 갈 수 있는 경남 함양군 마
천면 소재의 백무동에서 하동바위 장터목 코스를 택하여 첫날은 하동바
위 야영장에서 첫날 1박을 했었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우리 친구 중 한명이 미리 준비 하여간 흰
색 페인트와 붓을들고 하동바위에 4명의 이름을 쓰고 끝에는 "다녀가
다" 라고 반듯하게 써 놓았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부끄러운 이야기
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이름을 남기는 것도 유행 이었고 야무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 옛날에 문인들이 아름다운 시 등을 바위에 새겨 놓은 것들을
어릴때 부터 보아왔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억지 춘향식으로 거대한 자연에 이름을 남기려 했던 것이
다.
몇해가 지난 후 자연보호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할 때 쯤에
는 정말 그 이름을 지우러 갈 수도 없고 양심이 많이 찔렸다. 그런데
그 후에 지리산에 다시 등반을 하면서 보니까 상당히 희미해져 있었고
1985년 여름에 천왕봉 등산을 할 때에는 보니까 이끼로 모두 변해서 안
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ㅎㅎ
장터목 산장에 이르기 전부터 몇백년 지난 아름드리 주목나무와 고산 지
대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모를 야생화 등 지리산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
름다웠다.
난생 처음 해발 1915미터의 천왕봉에 올라 "야호"를 외치고 없는 폼, 있
는 폼 다잡고 사진관에서 빌려간 흑백필름 넣은 카메라로 기념사진을 시
원하게 촬영하고 봄에 철쭉이 자생하는 평원으로 아름다운 세석평전에
서 텐트를 치고 2일째 밤을 보냈다. 나는 그때 높은 지리산에 올라서 물
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그리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소박하
고 아름다운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 말없이 지나쳐도 왜 그러냐고 물을 사람도 없지만 다정 다감하
게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수고하십니다" 등의 인사를 거의
주고 받는 인내할줄 알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산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
무나도 좋았다.
3일째에는 세석평전에서 쌍계사 계곡으로 하산하여 쌍계사를 들렀다
가 나와 비포장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를 타고 남해의 상주 해수욕장으
로 향했다.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역시 처음으로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3박
째 밤을 보내고 4일째 오후에는 여객선 배를 타고 여수로 향했다.
여수 진남관을 구경하고 나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들은 진남관에서 나와 그 부근에 사는 분들한테 텐트를 치고
야영 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를 물어보자 도로 건너 동산에를 가보라
고 하여 조그만 동산으로 올라 갔는데 비석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고
수돗물도 없었고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이미 밤이 되어 버렸고 한쪽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물은 근처에 주택에
가서 얻어와 밥을 지어먹기로 하고 텐트를 치고 있던 순간 이었다.
머리를 두갈래로 따서 묶은 여학생 2명이 우리들의 있는 곳에서 약 20
미터 되는 곳에서 동산 아래 시내 구경을 하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와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학생이 "저- 여기에다 텐트 치시려고 해요? 여기
는 우범지역이라서 위험한데 저의집에 가서 주무시겠습니까?" 하는 것
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 여학생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혹시 자기집에 어른
들이 어디 가시고 안계셔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부모님도 집에 계시는데 그 곳 보다는 자기
집 옥상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정말 객지에 나가서 생각지도
못한 고마운 일이었다. 우린 그 여학생에게 몇학년 이냐고 물었더니 우
리들 하고 같은 나이인 고 2 여학생 이었다.
그 여학생은 부모님의 승낙도 받지 않고 우리 일행에게 자기 집으로 바
로 같이 가자고 하였다.
처음에 텐트를 치려고 했던 그 곳에서 약 40-50미터 떨어진 곳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그 시절에 양옥 슬라브집에 살고 있었으니까 어느정도 부
유하게 생활 하시는 집이었던 것 같았다.
그 여학생의 집에 들어서서 우리들의 사정 이야기를 부모님께 말씀 드리
더니 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정말 놀랍도록 고마웠다.
우리 일행은 그녀의 집 옥상에서 저녁 식사를 지어서 마치고 텐트 덮개
만을 수평으로 쳐서 이슬만 맞지 않도록 하고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행복
한 잠에 빠졌었다.
한참을 자다가 새벽이 되었는데 빗방울이 약간씩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깼
으나 상에서 우리를 향하여 밀려오는 빗물을 보고 피곤에 지쳐 계속 잠
에 빠지고 싶어 일어나지도 않고 친구들끼리 깁밥처럼 밀착을 하고 있었
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폭풍우가 몰아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옥상에
여기저기 널려있던 등산 장비를 챙겨 옥상에서 철수하여 조용 조용하게
거실로 통하는 계단 중간으로 가서 그녀의 집 식구들이 잠에서 깨지않게
하기 위해 강아지처럼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참 후에 세찬 폭풍우 소리에 그러셨는지 아니면 우리 일행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셨는지 그녀와 부모님이 모두 잠에서 깨어
계단으로 올라 오셨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말을 하지 왜 계단에서 그렇게 있냐고 말씀 하시면
서 땀냄새 나고 철없고 생전 처음보는 우리 일행들에게 자기집 거실로
내려와서 잠을 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그 시간부터 아침까지 그녀의 집 거실에서 잠을 푹
잤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 일행들에게 아침 식사를 해주셨는데 진수성찬으로
너무 맛있는 식사를 하게 해주셨다. 마치 새 신랑이 처가집에 갔을때 장
모님께서 정성스럽게 준비 하여주신 밥상처럼... 더구나 우리 일행은 여
행 마지막날 이었으므로 남은 반찬이라고는 스디슨 깻잎 김치와 마른반
찬 한두가지만 남아 있을때 였는데 말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나서 그 여학생의 부모님들은 오동도에 가서 같이 구경
하고 오라고 승낙까지 해주셨다. 너무 세련된 어르신들 이셨다. 그래서
오동도 관광을 하고 방파제에서 오후까지 놀다가 우린 그 여학생과 헤어
져 용산행 완행열차에 남원을 향해 몸을 실고 즐거운 여행을 마무리 했
다.
나만 빼놓고 친구들이 미남이어서 그러셨을까? 아니면 착하게 보여서
그러셨을까? 다만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친구들은 모두 소박
한 마음을 지닌 착한 애들이었다.
나의 아들이 현재 그때 나와 같은 고 2 학생인데 지금 내가 생각해도 과
연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지만 정말 쉬운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더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 없고 언젠가는 꼭 한번 찾아뵙고 인사
를 드리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실현 가능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 그 여학생의 이름이 "정미정"이었는데 지금 45세쯤 되었을 그분
과 그분의 부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첫댓글 바위에 이름 새기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 했더니만...ㅎㅎㅎ 세월이 흘러 이끼에 덮인 4인조의 이름이 왠지 안타깝네요...세월....그러나 여수의 추억은 참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