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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희망봉의 원래 이름은 `푹풍의 곶`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새로운 바다, 새로운 섬, 새로운 땅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이 시대를 `지리상의 발견` 또는 대항해 시대라 한다.
이 시대에 발견된 땅에는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거나 발견자가 명명한 이름을 붙였고 그 지명들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이다.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뮤 다아스(Bartholomeu Dias, 1450~1500)인데 이때가 1487년이었다.
포르투갈이 가장 의욕적으로 새로운 땅,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는데 이것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영국이나 프랑스도 이 지중해 무역이나 북해 무역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설 절박한 이유는 없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되어 있던 포르투갈(그리고 이와 경쟁 입장에 있는 스페인)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얻게 될 경제적 이득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대서양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앞서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것은 포르투갈의 엔리케(Henrique,1394~1460)왕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에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인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고 그가 죽은 후 탐험대는 적도를 넘어서 나아갔지만 거기서 탐험은 중단되었다.
1480년 국왕 조안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그의 선단은 아프리카의 남서부 앞바다에서 심한 폭풍에 휩쓸려 남쪽으로 한참 흘러 내려가 약 2주간 육지를 보지 못했다. 폭풍이 가랑 앉은 후에 동쪽으로 항해했지만 육지가 보이지 않아 다시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드디어 그는 곶을 발견했다. 이 앞바다에서 푹풍우를 만났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폭풍의 곶`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조안 2세는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할 것을 기약하며 이름을 `좋은 희망의 곶(즉 희망봉)` 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희망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30.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 패한 까닭
우리는 운동 경기 등에서 너무 강력해서 맞수가 없을 정도의 팀을 흔히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정복할 수 없는 함대라는 뜻이다. 어떤 나라의 왕이나 지도자든지 자기 함대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겠지만 우리가 무적 함대라 하면 보통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만든 함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무적 함대도 영원한 것은 아니어서 영국에 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중세 말 이후 지방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고 왕권을 중심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16세기경에 행정, 사법, 군사면에서 중앙집권적인 절대주의 국가가 성립했다. 그리고 최초로 이러한 절대주의 국가가 형성된 곳이 스페인이었다.
15세기 후반 통일 왕국을 형성한 스페인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유입되는 막대한 양의 귀금속으로 인해 번영하고 있었다. 특히 펠리페 2세(재위 1556~98) 때 스페인은 레반토 해전에서 투르크를 격파하여(1571)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후 포르투갈을 합병하여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당시 결혼하지 않고 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에게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여기에다 엘리자베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정책은 펠리페 2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특히 스페인과의 경쟁속에서 진행된 해외 진출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해적 드레이크(Francis Drake)로 하여금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도록 했다. 자기 나라 상선대가 큰 피해를 입자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드레이크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여왕은 이 요구를 무시하고 도리어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펠리페 2세에게 이것은 구혼 실패와 함께 엄청난 모욕이었고 양국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1588년 5월 무적 함대는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 이 무적 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2,500문의 대포를 가지고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함대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모두 합쳐 190척의 배를 모았지만 절반 정도는 소형배여서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소용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영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듯이 보였다.
태풍을 만나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겨우 7월 29일 영국 해협에 그 모습을 들어낸 무적 함대는 영국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프랑스의 찰레 항구로 도망쳤다. 거기서 한숨 돌리려고 했지만 다시 야간 공격을 받고 이리저리 쫓기다가 폭풍우까지 만나 피해는 더욱 커졌다. 9월에 겨우 살아남은 병력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 63척의 배와 익사, 전사 등으로 약 1,800명을 잃었다. 한편 영국측의 손실은 배 한 척, 전사자 약 100명이었다.
그러면 이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숙련된 선원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여기에 작지만 기동성이 있었던 배, 그리고 소구경이었지만 사정 거리가 긴 포를 가지고 있던 것 등이 그 이유이다. 영국 함대는 위세만을 믿고 덤벼든 무적 함대에 먼 거리에서 포를 쏘았으며 이에 놀라 후퇴하는 적을 쫓아 야간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기동성과 선원들의 기술이 뛰어났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스페인은 이후 해상에서의 패권도 상실하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를 네덜란드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31. 명나라 말기에 발생한 노동자 파업
일반적으로 중국은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뒤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나라 말기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공업이 성장해 있었고 이에 따라 노동자 파업, 인력 시장의 형성 등의 현상도 나타나고 있었다. 16,7세기 특히 명말청초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산업 발전이 꽤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양자강 하류 지역에는 직물 수공업이 성행해서 소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위에 무수한 중소도시들이 연계돼 있어 직물타운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면화 재배, 씨빼기, 방적, 방직 등의 공정이 분화되어 있었고 상인 자본이 전체 과정을 통괄했다.
소주의 경우 직기를 수대에서 수십 대까지 가진 직물업소가 1만여 곳이나 되었고 이들은 직공, 무늬공, 염색공 등 분야별로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렇게 고정된 일터를 마련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매일 새벽에 수십 명씩 모여 각 기능별로 정해진 다리 밑에서 직물업자가 불러 주기를 기다렸다. 일종의 일용노동 시장인 셈이다. 이 때문에 세계 학계에서는 이를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성립`,`자본주의의 맹아`로 보는 설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당시 중국의 정세는 명재상 장거정이 죽은 뒤 환관들이 득세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들은 전국의 요로마다 징세관을 파견하여 오가는 상인들에게 상세를 강제로 징수했고 도시의 직물업자에게도 직기의 수에 따라 과중한 세를 물게 하여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1601년 마침내 환관의 횡포에 저항하는 직물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동이 발생했다.
환관이 파견한 징세관 손융은 소주의 6개 성문에 각각 세관을 설치하고 기타 교통의 요충지에서도 상세를 강제 징수했다. 이 때문에 미곡상등 상인들은 소주에 발을 끊었고 모든 물가는 폭등했다. 소주 시내 상업은 마비되고 직물업소의 폐업은 속출하고 직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6월 6일 마침내 소주 시내의 직물 노동자들은 직장을 빠져 나와 거리 시위를 벌이다 손융 일파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손융과 결탁해 사리를 꾀한 그 지역 거부인 정원복의 집을 불태웠다. 이에 놀란 정부는 상세의 폐해를 시정할 것을 약속해 폭동은 가라앉게 된다. 사건 수습과정에서 직공으로 자처하는 갈성이라는 사람이 군중 속에서 나와 스스로 사태의 주모자로 자처하며 중형을 청했다. 이에 책임 추궁은 그 정도에서 그쳤으며 그의 의리에 감동한 소주 시민들은 그를 갈장군이라고 칭송했다.
정치 투쟁의 양상을 띤 이 중국 최초의 노동자 파업과 시위에서 직물 노동자들은 시종 정연한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들의 투쟁은 당시 소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지역 관리와 지식인들의 지원도 직,간접으로 받았다.
그러나 강남 지역(양자강 하류)을 중심으로 싹을 키우던 자본주의적인 경제 활동은 1644년 이민족인 청의 북경 점령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청은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지역을 불온시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이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가문이 주된 표적이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만약 청의 침입이 없었다면 17세기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상당히 진전되었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32. 유토피아의 원래 뜻
오늘날 이상향을 지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16세기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어 오던 것인데 그 동기는 실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우회적인 표출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토마스 모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어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1516년에 쓴 책에서 표현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유토피아(Utopia)>이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리스 어 ou(없다)+topos(곳)+ia(명사어미)에서 나온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유토피아>는 영국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제1부와 이상국 유토피아의 지리, 정치, 종교, 가족제도, 풍속 등을 다룬 제 2부로 나뉘어져있다. 이 책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대륙 탐험에 따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다 유토피아 섬에 도착한 선원이 그곳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2부에서 표류했던 선원이 들려 주는 이상 사회의 유토피아는 재산공유제의 사회였다. 즉 착취 없는 생산과 분배, 쾌적한 노동, 교육의 남녀평등, 행복한 가정 생활, 평화주의, 종교적 관용 등. 모어가 이렇게 재산 공유제 사회를 이상 사회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근대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재산 공유론은 인간의 악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그가 본 현실은 어떠한가? 모어가 살고 있던 영국의 현실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해외 식민지 무역이 발전했고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발전한 것이 모직물 공업이었다. 이전까지는 양모를 수입해 쓰던 모직물 공업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원료인 양모가 부족해지자 토지 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민들은 하루 아침에 대대로 살던 토지에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고까지 말했다.
모어는 또 프랑스 국왕과 대신들을 예로 들어 정치에서의 책략과 야망을 폭로하고, 나아가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결함의 원인을 사유 재산 제도에서 찾았다. 즉 돈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곳에서 국가의 올바른 번영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여러 국가의 사악함의 원인을 파헤치고 당시의 영국인들, 넓게는 유럽 인들에게 도덕적 반성을 촉구한 저서라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성적인 교화로 인간을 개조하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인문주의자의 이상이 깃들어 있다.
33. 수염에 세금을 매긴 황제
러시아에 절대주의를 확립하여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이가 17세기의 표트르대제이다.
15세기 말 이반 3세 때 러시아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이반 4세에 이르러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는 황제(챠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 국가였다. 이반 4세는 비밀 경찰을 만들고 황제에 반항하는 귀족들을 억압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실한 신흥 귀족층을 키우는 방식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갔다. 또한 농민의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이반 4세 이후에는 황제권 계승의 혼란에다 귀족들간의 갈등, 스테카라진의 반란 등 농민들의 반항으로 국가가 한때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러시아는 안정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 세기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러시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 성격이 강한 후진 국가였다. 또한 유럽 세계와도 별로 접촉이 없어서 유럽과 직접 거래하는 곳은 백해의 아르한겔리스크뿐이었다.
이 때 황제에 오른 사람이 표트르 대제이다(1682). 표트르의 전 황제 표드르(Fedor)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 황제 알렉세이(Alexei)의 두번째 왕비의 소생인 열 살의 표트르가 황제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 누이인 소피아가 친위대의 도움으로 섭정을 폈다. 그러다가 1689년 표트르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실권을 장악했다.
키가 크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표트르는 전쟁 놀이를 즐겼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궁정이나 교회의 의식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 손재주도 뛰어나서 자신의 의자나 식기를 손수 만들었고 외과와 치과의 진료 기술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표트르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자신도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여행 도중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서구화를 통한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생활과 풍습을 서구화했다. 신하들은 몰론 자신의 긴 수염도 깍고 동양식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강제로 시행해 수염을 자르지 않는 자에게는 `수염세`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시술의 도입에 힘썼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해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발트 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을 꺽어야만했다.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북방전쟁`(1700~21)이 시작된 것이다. 1700년 11월 나바르 강 전투에서 패하는 등 초기의 전세는 불리 했지만 후퇴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한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뒤집었다. 이 북방 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등 `서방으로의 창구`를 얻었다.
표트르는 북방 전쟁중에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도 재편하여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또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고 각군 사관학교도 세웠다.
그렇지만 지속되는 전쟁과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표트르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했고 새로운 세원 마련을 위해 종래의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설했다. 그는 또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여 보호 관세로 수입을 억제하고 면세 등 각종 특권을 제조업자에게 부여했다.
이러한 표트르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후진성을 벗어나 비로소 유럽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제(the Great)라고 불리게 된 표트르 1세는 북방 전쟁중 새로 건설해 수도로 삼은 페테르스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34. 수평파의 요구는 무엇이었는가?
런던 근교에 퍼트니(Putney)라는 곳이 있다. 템즈 강을 가로지르는 그곳의 퍼트니 다리 옆에 있는 교회에서 1647년 10~11월에 청교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의회군의 평의회가 열렸다.여기에서의 의회군의 지도자 크롬웰(Cromwell,1599~1658)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튼(Henry Ireton)은 사병 대표들과 격론을 벌였다. 이 사병 대표들은 정치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를 주장했다. 이들이 바로 `수평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에게 정치란 지주나 상인처럼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농민이나 직인처럼 재산도 없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혁명의 승리를 향해 왕당군에 맞서 함께 싸운 의회파 안에서의 이러한 대립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은 젠트리(Gentry)라고 불리는 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이전 세기에 모직물 공업의 발달에 따라 양목을 위한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유력한 사회층으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도시에서도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에 따라 시민 계급이 성장했다. 그런데 이들 시민층과 앞서 말한 젠트리 중에는 청교도가 많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른 찰스 1세는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로서 전제 정치를 실시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의회의 권한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또한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종교면에서도 국교회를 강화하고 청교도를 박해했다. 따라서 의회와 국왕의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1628년 대외 전쟁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한 찰스 앞에 의회가 내놓은 것은 과세의 승인이 아니라 <권리청원>이었다. 영국 헌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 된 이 권리청원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 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평화시에는 계엄령을 선포할 수 없다. 자의적인 구속이나 투옥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찰스는 의회의 요구를 부득이 승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해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하지만 1639년 스코틀랜드의 장로파가 국교회를 강요하는 데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음해인 1640년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1년 만에 소집된 의회는 왕의 과세 승인을 거부하고 오히려 왕의 실정을 실랄하게 비판했다. 국왕과 의회의 대립은 해소되지 못하고 결국 내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 내란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를 정점으로 하여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의회군은 승리 이후 평화와 질서 회복이라는 과제를 놓고 그 동안 잠재되어 있던 내부 분열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의회파 내부의 대립은 크게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타났다. 장로파는 장로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사람들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파는 의회군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고 각 교파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수평파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의회파내의 대립 속에서였다. 장로파는 의회군을 해산하는 조치를 통해 자파의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이에 맞서 의회군은 장교와 사병의 대표로 구성된 군평의회를 만들고 자신들의 불만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의회군은 밀린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제대 후에도 마땅한 대책이 없던 차에 해산당하게 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의 요구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의견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군의 불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들이 피흘려 승리로 이끈 혁명의 대의와 새로운 입헌 질서라는 문제로 사태가 발전하자 차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퍼트니에서 벌어진 크롬웰과 사병 대표 사이의 격론의 내용이다.
완전한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수평파의 요구는 당시 그들이 작성한 <인민협정>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21세 이상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하여 신앙과 종교의 자유, 법의 의한 재판, 채무로 인한 인신 구속 반대, 공무원 선거제, 징병 권한의 의회 귀속등의 주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평파의 요구는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에 의해 거부당했고 이후 아일랜드 원정을 거부하는 사병들의 집회는 폭력적으로 해산당했다. 수평파는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한 정치적 평등과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사상은 수평파를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35. 미국인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은 홍차를 마시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미국의 상점에서 홍차를 주문하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반대로 영국인은 하루 평균 여섯 잔의 홍차를 마신다고 한다. 주로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인 미국인들의 관습이 이토록 다른 것은 왜일까?
이것은 미국의 독립 혁명의 와중에서 생긴 관습이다.
17세기 이래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원하는 청교도와 사업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영국에서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으로 이주했다. 이리하여 18세기에는 13개 지역에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영국은 식민지마다 총독을 임명했으나 실제로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식민지는 각기 의회를 가지고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 영국의 정책이 바뀌었다.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식민지인의 불만은 점차 높아져 갔다. 모든 문서에 인지를 붙이도록 한 인지법(1765)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버지니아 의회가 인지법 반대 결의안을 가결했다.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영국 의회로부터의 과세는 부당하며 식민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단정한 이 결의안은 식민지를 가로질러 모든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이것이 반대 운동의 표어로 자리 잡았다.
영국 의회는 다음해 인지법을 폐지했지만 본국이 식민지에 과세할 권한이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해에 각종 수입품에 세금을 부과했지만 불매 운동이 일어나 1770년 이것마저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에 대한 세금은 남겨 두었는데 이것은 본국의 과세권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반대로 식민지의 입장에서 보면 차에 대한 세금은 억압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1773년 영국 정부는 차의 판매 독점권을 동인도 회사에 넘겨 주었다. 식민지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톤 항에 정박한 세 척의 동인도 회사 배에 인디언으로 가장한 50명의 사람들이 몰래 올라갔다. 이들은 차가 든 300개 이상의 상자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보스톤 차 사건이다. 본국에 대한 분노가 차에 대한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이 미국인들이 차를 마시지 않고 대신 커피를 즐기게 된 역사적 뿌리이다.
이후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9월 대륙 회의를 필라델피아에서 열었다. 식민지인의 자치와 권리를 지키겠다는 점에서 56명의 대표들의 생각은 일치했다. 만약 본국 정부의 정책이 완화되었다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은 강경했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최초의 무력 충돌은 이듬해 4월에 발생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보스톤 서쪽 콩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파괴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일전을 벌였다.
6월 제2회 대륙 회의는 워싱톤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듬해인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는 <독립 선언서>를 공포했다. 주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 선언은 그 앞 부분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천부의 권리를 가지며, 정부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하여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립된 것이고, 따라서 정부가 그러한 목적을 파괴하는 경우 이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이 문서는 이후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원하는 애국파와 영국을 지지하는 충성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식민지인의 다수는 애국파를 지지했다. 초기에 불리했던 식민지군은 1777년 사리토가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국제 정세도 식민지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프랑스가 식민지편에 가담했고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무장 중립을 선언했다. 고립된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1783년 파리 조약으로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신생 미합중국이 탄생했으며 <독립 선언서>를 공포한 7월 4일은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미국 독립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보스톤 차 사건은 커피를 마시는 미국인의 일상 생활에 깊게 새겨져 있다. 오늘날 보스톤 항구에는 당시의 배를 재현한 배가 정박해 있으며 관광객은 돈을 내고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차 상자 안이 비어 있으며 나중에 그물로 건져 올린다는 점이다.
36. 좌파, 우파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현대 정치에서 `좌파`라는 말은 급진파 또는 진보파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우파`라는 말은 보수파 등과 마찬가지로 통용되고 있다. 이 좌파, 우파라는 말이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였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도화선으로 프랑스 혁명은 불붙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있기 2개월 전쯤에 소집된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는 스스로를 제헌 의회로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여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국왕을 폐위시키지는 않았으며 1791년 제정된 헌법에서도 국왕의 지위는 인정되었다. 만약 루이 16세가 이 헌법하에서의 입헌 군주라는 지위에 만족했다면 프랑스 혁명의 진로는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절대 군주의 지위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루이 16세에게 입헌군주란 참을 수 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자리였다. 그리하여 그는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며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황실은 그러한 루이의 요청에 응하려 했다. 루이 16세는 몰래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려 했다. 그러나 1792년 변장을 한 채 가족을 파리를 빠져 나간 루이 16세는 도중에 어느 마을 사람들에게 들켜 파리로 되돌아오고 만다 (바렌느 Varennes 사건).
국왕의 배신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국왕이 문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간섭 전쟁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닥쳤다. 전쟁이 시작되자 준비가 거의 없었던 프랑스 군대는 잇달아 패배했다. 그러나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입법 의회의 선언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의용군이 속속 파리로 몰려들었다.
민중들은 반혁명군의 계속되는 승리 뒤에는 내부의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국왕을 체포하려고 마음 먹었다.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혁명적 군중과 의용군들은 왕궁으로 쳐들어가 루이 16세와 왕비를 붙잡았고, 의회는 왕권의 정지를 선언했다.
이 사이에 프로이센 군대는 국경을 넘었고 9월 파리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발미까지 육박했다. 조국을 지키려는 의용군들은 이 발미 전투(9. 20)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승리했다. 그리고 바로 이 날 입법 의회 대신 국민 공회가 소집되었다. 이 국민 공회는 왕권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당시 국민 공회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지롱드 파와 쟈코뱅 파가 그것이며 거기에 더해 중간에 유동적인 중도파들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 공회 회의에서 지롱드 파는 오른쪽에 있는 좌석에 앉았고 쟈코뱅 파는 왼쪽에 앉았다. 따라서 그들을 각각 우파, 좌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둘 다 공화주의자들이었으나 지롱드 파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대변했고 지방분권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한편 쟈코뱅 파는 부르주아 출신이기는 했지만 소시민층과 민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았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복지와 혁명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통제경제도 불사해야 한다는 철저한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정치적 목표를 달리 하는 두 정파는 국왕 처리 문제로 대결로 치달았다. 이 문제에 관해 지롱드 파는 가능하면 국왕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최소한 사형은 면하게 하려고 했다.
국민 공회는 1792년 12월 11일 국왕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모든 의원들이 국왕이 유죄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에 처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원들은 적지 않았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하는 쟈코뱅 파는 혁명의 안전을 위해 조국과 국민을 배반한 국왕을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793년 1월 16일 사형이 결정되었다. 표결 결과는 사형 찬성 387표, 반대 334표였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도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그만 섬에 도착하여 타고 온 배를 불지른` 격이었다.
37. 최초의 흑인 공화국 탄생
근대 사회에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그 과정의 격렬함과 이념의 보편성 때문에 다른 시민 혁명들, 예컨대 영국 혁명, 미국 혁명과 비교된다. 특히 대혁명이 천명한 이념의 하나인 `평등`은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모든 식민지에서 흑인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1794년 2월 4일자 법령이 나오기 전에 벌써 혁명의 영향은 대서양을 건너갔다. 1791년 8월 22일 밤 멀리 카리브 해 이이티 섬 북부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당시 아이티 섬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나누어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예제의 사슬에 신음하던 분노한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인 관리와 농장주의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봉기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프랑스와 도미니크 투생(Francois Dominique Toussaint, 1743-1803)이었다.
투생의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인에게 잡혀 온 노예였다.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던 투생은 나중에 주인의 마부로 일했다. 하지만 그가 여느 노예들과 다른 점은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혁명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특히 볼테르가 쓴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런 점이 그를 봉기의 지도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1793년 투생은 다른 봉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 편에 가담했다. 당시 동부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식민지 군대가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프랑스 식민지역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투생은 곧 스페인 군대와 그들의 동맹군인 영국군의 주둔은 노예제의 복구를 가져올 것임을 깨닫고 다시 프랑스에 합류했다. 그 때 그를 따르는 병사는 4,000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힘을 모은 투생의 군대는 영국군을 섬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프랑스 인 관리들도 쫓아냈다. 그리고 1801년 초 그의 군대는 드디어 섬의 동부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산토 도밍고를 점령했다. 이렇게 하여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흑인들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해 7월 1일 최초로 흑인들이 스스로 제정한 헌법이 세상에 나왔다. 아이티의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한 이 헌법은 또한 노예제를 영원히 폐지하며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이티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샤를 르클레르크(Charle Leclerc)가 지휘하는 2만 명의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투생과 그의 군대는 격렬히 저항했고 프랑스 군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정면 공격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르클레르크는 음모를 쓰기로 작정했다. 1802년 초 그는 투생에게 프랑스 군 진영에서 평화적 담판을 하자고 제안했다. 투생은 프랑스 군이 큰 손실을 입고 패배했으므로 진심으로 평화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투생이 프랑스 군의 진지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투생은 1803년 4월 분노 속에 옥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이티 민중을 격분시켜 프랑스 군에 대한 저항은 거세졌다. 그 해 10월 프랑스 군이 점령하고 있던 포르토 프랭스를 해방시켰고 11월 29일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흑인 공화국이 탄생했으며 아이티 민중은 투생을 루베르튀르(Louverture: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라는 뜻)라고 부르며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38. 게릴라의 원조는 스페인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프랑스 황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해 지배하는 것을 꿈꾼 그는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고 그 영토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공화국 제도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나폴레옹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국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하지만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에 크게 패한 바 있는 나폴레옹은 직접 침공을 피하고 대신 1806년 대륙 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내렸다. 이는 유럽 대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하는 것으로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줌과 동시에 프랑스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생각했던 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력은 나폴레옹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고 게다가 영국 상품이 대륙으로 밀수입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나폴레옹으로서는 바다에서 이 밀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 밀수 통로는 영국의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점령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 점령 계획을 세우고 스페인에 포르투갈을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이 점령되기는 했지만 스페인도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인 꼴이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마드리드를 점령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민중이 5월 2일 프랑스 군을 공격하여 상당수의 프랑스 군이 살해되자 프랑스 군은 보복을 감행했다. 무기를 소지한 채 체포된 스페인 인은 군사 재판후 처형되었다. 8명 이상의 집회는 모두 금지되었다. 프랑스 인이 살해된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마을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5월 3일 마드리드 곳곳에서 많은 스페인 인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고발과 분노를 화폭에 담은 것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다. 이 사건 직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에 앉혔다.
이 사실이 전국에 전해지자 민중 봉기가 확산되었다.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은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해 말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입한 나폴레옹은 거의 스페인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정복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프랑스 군은 게릴라전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은 소규모 전쟁을 의미하는데 당시 민중의 전투를 표현하기 위해 쓰였다. 프랑스 군은 처음 경험하는 전투에 당황했다. 정규전과 다르게 언제 어디서 스페인 게릴라 부대가 출몰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 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스페인 게릴라 부대들은 영국군과 함께 1811년에서 13년 사이에 프랑스 군을 내몰았다.
나폴레옹은 이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두고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힌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제1보였다.
39. 폴란드 인의 비애가 담긴 쇼팽의 <혁명>
우리에게도 친숙한 음악가 쇼팽(1810-49)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유럽 고전 음악의 전통과 폴란드 민족 고유의 색채를 종합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피아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천재였다.
그런데 쇼팽이 폴란드 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쇼팽이 살았던 시대에 독립국가로서의 폴란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찍이 폴란드는 동유럽의 대국이었지만 17세기 이후 점차 쇠락해져 `유럽의 국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쇠락한 폴란드는 1772-95년 세 차례에 걸친 분할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807년 나폴레옹의 원조로 바르샤바 대공국이라는 명칭으로 어느 정도 국가의 틀을 갖추었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쇼팽이 태어난 1810년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바르샤바 대공국이 있었는데 나폴레옹 몰락 후인 1815년의 빈 회의를 통해 폴란드 왕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왕국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제가 국왕으로 있는 러시아 영토에 불과했다.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한 쇼팽은 1829년 열아홉의 나이로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도시 빈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로 호평을 받은 쇼팽은 음악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 가을 연주 여행에 앞서 그는 바르샤바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 천재는 열정적으로 연주했지만 그에게 그 연주회는 조국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다시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난 쇼팽은 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르샤바 봉기 소식을 들었다. 1830년 파리에서 불타오른 혁명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고 드디어 11월 폴란드에도 봉기의 기치가 높이 올랐다. 그러나 봉기 세력은 대귀족 중심의 보수파와 중소 지주 중심의 진보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게다가 어느 쪽도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러시아 군대에 의해 1831년 9월 바르샤바 함락과 함께 진압되었다.
귀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태의 추이를 보고 있던 쇼팽은 독일의 슈트트가르트에서 진압 소식을 들었다. 작품 번호 10번 `12개의 연습곡`중의 하나인 <혁명>은 이 때 작곡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곡에는 `골수까지 폴란드 사람`인 쇼팽이 자기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한 고뇌와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잘 담겨 있다.
이후 폴란드 인으로서의 고뇌를 간직한 채 파리로 간 쇼팽은 죽을 때까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1849년 파리에서 서른아홉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쇼팽의 마음은 항상 조국 폴란드를 향해 있었다. 말년에 건강이 매우 나빠진 와중에도 그는 런던에서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출연할 정도였으며 사망한 해에 작곡한 두 편의 작품도 모두 마주르카(4분의 3박자의 폴란드 무용곡)였다.
40. 영국에도 부정 선거구가 있었다.
현대 정치의 기본적인 형태인 의회가 가장 먼저 벌달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7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의회는 의회 정치의 본보기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직후인 19세기 초만 하더라도 영국의 의회 정치는 현재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관건은 `얼마나 민의를 고루 대변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의회는 영국의 전 지역과 전 계급, 계층을 골고루 대변하고 있지 못했다. 18세기 시작된 산업혁명은 급속한 인구 이동과 사회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영국 의회는 명예 혁명(1688) 이후 별다른 변화없이 유지되어 왔다.
우선 19세기 초 영국 인구의 대다수는 참정권을 가지지 못했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민은 물론 새롭게 대두하고 잇던 중간계급(자본가계급)도 선거권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국민의 2-3%, 성인 남자만 따져도 10%가 조금 넘는 숫자만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산업화에 따른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과 그로 인한 도시의 비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선거법은 과거의 인구 기준에 따라 선거구를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인구 300만이 조금 넘는 남부의 10개 주가 의회에서 236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400만에 가까운 북구 6개 주에 할당된 의석수는 불과 68개였다. 그리고 멘체스터와 리버풀 같은 신흥 공업도시는 단 한 명의 대표도 선출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른바 불합리한 선거구(rotten boroughs: 부패 선거구) 문제였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 등의 이유로 유권자가 거의 없는 선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유권자가 50명 미만인 어떤 선거구는 2명의 의원을 선출했는가 하면, 단윅(Danwick)의 선거구는 그 대부분이 바다에 매몰되어 배 위에서 투표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불합리를 고치려는 움직임은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일찍부터 나타났지만 그것이 강력해진 것은 1820년대였고 드디어 1832년 6월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불합리한 선거구를 없애고 이를 인구가 증가한 신흥 공업 도시에 배정하는 한편 선거인의 재산 요건을 완화하여 토지 소유 이외에 동산 소유도 재산 요건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권자수가 약 50% 정도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법 개정으로 중간계급의 대다수는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지만 재산이 거의 없거나 적은 하층민들은 여전히 선거권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의회 개혁의 출발점에 불과했다.
선거권을 갖지 못하고 정치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주장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을 통해 참정권의 획득과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이 정치 운동은 1837년 `런던 노동자 협회` 지도자들이 작성하고 이듬해 8월 버밍엄의 군중 집회에서 채택된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그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 <인민 헌장>의 골자는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 의원의 재산 요건 폐지, 의원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당시 7년), 인구 비례에 의한 평등한 선거구 설정, 의원에 대한 봉급 지불, 비밀 투표제 등이었다.
노동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한 이 운동은 1839년, 1842년, 1848년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통하여 6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하원을 지배하고 있던 귀족과 신흥 자본가계급들로서는 만약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이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민 헌장>에 담긴 내용은 이후 의회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대부분은 이후 성취되었다.
<인민 헌장>의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인 보통 선거권은 실현되는 데 가장 오랜 시일이 걸렸다. 1867년 디즈레일리(Disraeli, 1804-81)가 이끄는 보수당은 제2차 선거법 개정을 통해 도시의 대부분인 임금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자유당의 글래드스톤(Gladstone, 1809-98)은 1884년과 1885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농민에게 투표권을 확대했다.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1918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
선거구의 평등은 1885년 글래드스톤의 선거법 개정 때 실현되었는데 대략 인구 5만 명당 의원 한 명의 비율로 되었다. 비밀 투표제는 1872년에 실현되었다.
이렇게 의회 정치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서조차 현대와 같은 의회 정치의 골격이 마련되기까지는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고 차티스트 운동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요구되었다.
41. 9표차로 발발한 아편 전쟁
1840년 3월 19일 영국 하원.
중국 정부가 아편을 선적한 영국 선박에 식량과 음료제공을 거부한 사태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각 전쟁 개시를 주장하는 쪽과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쪽이 맞서 다음달 10일 표결에 들어가기까지 토론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됐다. 자본가 집단의 모임인 인도 중국협회의 강력한 압력을 받은 정부와 상원의 웰링턴 공작등은 파병동의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하원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이때 당시 30세에 불과한 자유당의 글래드스톤이 연단에 올라 좌중을 쏘아보며 연설을 시작했다.
“중국 영토에 체제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절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광동에 나부끼는 영국기를 볼 때마다 벅찬 감격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정의의 상징이고 압제에 대한 반항, 공정한 경제 행동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귀하신 귀족 파머스턴경(당시 외상, 아편전쟁의 주동자)의 후원 아래 우리 국기가 부끄러운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연안에서 나부끼고 있습니다. 위풍당당한 영국국기를 볼 때마다 느꼈던 벅찬 감동을 앞으로 다시는 느낄수 없게 될 것을 생각하면 전율스러울 따름입니다.”
의사당 밖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평화협회 등 여러 시민단체들이 무력에 의한 해결을 반대했고 맑스도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를 통해 “아편 무역에 비하면 노예 무역은 그래도 인정이 남아 있다”며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외상 파머스턴은 “아편은 술보다 해독이 덜하다”고 강변하면서 “중국인의 도덕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워털루 전쟁의 영웅 웰링턴 공작은“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다”며 중국 응징을 열렬히 지지, 의회의 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온 세계의 주시 속에 4월 10일 실시된 표결에서 파병안은 불과 9표차로 통과되었다. 전 동양인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아편 전쟁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정부가 이 같은 강한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명분없는 전쟁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바로 당시 중,영간의 무역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1689년 영국이 중국 차를 처음으로 구입해 간 이후로는 차는 중국의 최대 수출품이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상류 계층뿐 아니라 노동자까지도 차를 즐겨 마시는 풍속이 확산되어 중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의 90%를 차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말이 되면 차의 평균 수입량은 영국이 중국에 수출하던 3대 상품(모직물, 금속, 면화)의 수출량과 맞먹었다.
영국 정부는 높은 관세로 차의 수입을 줄이려 했으나 오히려 밀무역만 초래하여 1784년 경감법을 관세를 대폭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820년대가 되면 중국 차 총생산량의 70~80%가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에 비해 영국이 크게 기대했던 상품인 모직물은 중국 시장을 휘어잡지 못하고 있었다. 모직물은 중국인에게는 아직 사치품에 속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유한 사람들도 실크와 털옷을 더 선호했다. 더욱이 중국이 외국에 개항하고 있던 광동은 중국의 남부 지역으로 날씨가 춥지 않았으므로 모직물의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영국은 인도 면화를 새 상품으로 개발하여 모직물의 부진을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도 면화도 1817~19년을 차의 수출액을 휠씬 밑돌았다.
이처럼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는데 이에 따라 결제수단이었던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고 영국의 자본가들은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인도 면화 대신 새로 개발한 `상품`이 바로 아편이었던 것이다.
인도, 중국협회를 비롯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적자를 훌륭해 해소해 주고 있는 아편이 중국 관리에 의해 소각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리 없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이 기회에 아예 중국의 개항장을 북부의 추운 지역으로 확대해 모직물을 팔아 먹을 속샘도 키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정부는 이에 앞장 섰다.
42. 대통령제를 채택할 뻔한 태평천국운동
조선의 동학농민운동, 인도의 세포이 반란과 함께 유럽 자본주의에 대항한 아시아 농민의 대표적인 투쟁 중의 하나인 태평천국운동은 과거 낙방생 홍수전의 기이한 꿈에서 비롯했다.
그 꿈은 자신이 승천하여 금빛 수염의 근엄한 노인에게 진도와 검, 권능을 부여받고 중년 남성의 도움을 받아 천상의 요마를 쫓아내고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광주 거리에서 기독교 안내문을 주워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꿈속의 노인은 여호와, 중년 남성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고 상제회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청조의 더딘 개방정책에 신물을 내고 있던 열강들은 한때 태평천국군을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기독교에 대한 상제회의 이단성과 태평천국군의 공산적 혁명성을 간파하고 청조를 무력 지원했다.
태평천국 지도부는 토지의 균등 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천조전무제도`를 시행하는 등 농민공산주의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조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이 개혁의 주창자는 천왕 홍수전인 조카 홍인간(1822~64)이었다. 그는 최초의 상제교 개종자로서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1852년 이후에는 태평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홍콩으로 피신하여 개신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활동했다. 스웨덴 사람 햄버그와 런던 선교회 회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홍인간은 자연과학, 정치학, 경제학, 외국정세 등을 광범하게 공부했다. 그는 당시 태평천국뿐 아니라 중국 사회전체를 통틀어 서구 문물에 대해 가장 체계적인 지식을 갖춘 최초의 선각자였다. 마침내 그가 광동으로부터 육로를 통해 1859년 태평천국의수도인 남경에 도착하자 홍수전은 그를 최고 행정직위인 군사로 임명했다. 이에 홍인간은 개혁 이론서라 할 <자정신편>을 저술, 본격적인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의 노선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본주의적인 개혁 방안이었고 이전의 태평천국의 평등주의적인 경제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리를 옹호하여 각 생산 부문의 경쟁적 발전, 노동력의 질적 제고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은행, 우편, 새로운 기계 기술의 발명에 대한 전매특허, 철도, 기선, 도로, 광산, 신문, 노비폐지, 고용 노동의 도입 등을 제시했다.
정치 체제에서도 홍인간은 미국식 대통령제 채택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그 밑에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실무를 맡을 것을 구상했다. 하마터면 장발적이라 불리던 농민 반란이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킬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등 외교를 기반으로 한 무역 경쟁을 통해 부국, 강국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개혁 구상은 태평천국의 진압 후에 청조에 의해 추진되는 양무운동이나 같은 시대 일본의 유신세력이 구상했던 근대화 계획과 맞먹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개혁 노선을 확보한 태평천국은 양자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와 서양의 근대적인 기선을 획득하기 위해 상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그들의 형제라고 여기고 있던 서구 열강은 태평천국군이 상해로 입성하려 하자 그 동안의 관망 자세를 버리고 상승군이라는 부대를 조직, 무력 개입에 나섰다.
근대적인 대포 앞에서 태평천국군은 무력했다. 이홍장의 중국군과 영국 장군 고든의 외인부대의 거센반격에 태평천국은 그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천경(지금의 남경)을 내주고 말았다.
43. 최초의 박람회였던 1851년 런던 박람회
1851년 5월1일 대도시 런던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쳤다. 이 날은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박람회인 런던 박람회가 하이드 파크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온갖 계층의 영국인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진보에 대한 확신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박람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철제 구조물과 유리로만 만들어져 수정궁이라고 불린 전시장에서 개최된 박람회는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영국의 탄생을 알리는 요람이었다. `모든 나라의 공업 제품`을 한 자리에 진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지만 사실 영국의 공업 제품을 전시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전시장의 절반이나 차지한 영국 전시품을 대표했던 것은 각종 원료와 미래를 엿보게 해주었던 각종의 최신기계들이었다. 특히 기관차,선박용 엔진, 수압식 인쇄기, 동력직기, 공작기계 등은 영국 공업의 이름을 빛낸 제품들이었다. 박람회의 광경이 이렇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산업 혁명을 맞이하고는 있었으나 충분히 진전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이렇게 영국을 세계 제 1의 공업국으로 올려 놓은 역사적 과정이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기계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전례없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온 산업혁명은 면직물업에서 시작되었다. 면직물 공업을 구성하는 두 개의 공정인 직포가 서로 개량과 발명을 자극하여 급속히 기계화를 진전시켰다.
1733년 존 케이가 만든 자동 베틀, 1760년대에 만들어진 다추 방적기(일명 제니 방적기),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크롬프턴의 뮬(mule) 방적기(1779), 카트라이트의 역직기(1784) 등이 당시 발명되거나 개량된 대표적인 기계들이었다. 이 면직물 공업의 기계화는 다른 산업의 기계화를 자극함과 동시에 증기 기관의 개량에 의한 동력 혁명도 초래했다. 이와 함께 제철업, 석탄기업, 기계공업이 발달하여 생산 구조도 급속하게 변화했다.
산업의 발전은 원료의 수입과 제품의 운반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철도가 부설되고 증기선도 발명되었다. 특히 철도는 낡은 봉건제에서 서로 폐쇄되어 있던 지역 사회를 통합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동맥이 되어 산업 혁명의 발걸음을 한층 빠르게 했다.
이리하여 영국 각지에 대공장이 모여 도시가 생겨났고 인구도 그에 따라 집중되었다. 공장은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내뿜었고 기계가 돌아가는 우렁찬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영국은 철과 석탄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산업혁명을 통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 즉 철과, 석탄과 증기, 기계와 엔진, 철도와 기선과 전신선의 시대의 도래는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의 무한한 능력과 진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런던 박람회의 테마가 `진보`였던 것은 정확하게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엇다. 일찍이 인간이 주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이토록 의식한 시대는 없었다.
하지만 대가 없는 이득은 없다. 산업혁명을 통해 현대 사회를 맞이했지만, 아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같이 생겨났다. 공장제도의 발전과 함께 소수의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윤추구가 초고의 목적으로 설정된 사회의 도래 속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평균수명도 매우 짧아졌다. 또한 임금을 낮출 수 있다는 이유로 여성과 아동 들이 공장으로 내몰렸으며 작업환경은 매우 위험했다. 급속하게 팽창한 도시도 새로운 문제의 원천이었다. 도시는 위생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주거 환경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은 대량 생산에 의한 공업 제품의 침투로 전통적인 산업의 파멸을 맛보았다. 영국제 면직물의 대량 유입으로 인도 면직물업이 몰락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후진 지역은 전통적인 산업의 몰락뿐만 아니라 공업국의 원료 공급지라는 현대적인 의미의 식민지로 전략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진보`를 의미했던 자연에 대한 지배는 사실상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것이었음을 드러났다. 특히 석탄 (나중에는 석유)이라는 화석 연료의 대량 사용과 공업 폐기물은 자연 환경을 파괴시킨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렇듯 런던 박람회에서 표명되었던 `진보`는 분명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켰지만 현대 사회가 있는 문제를 고스란히 배태하기도 했으며 그 진보에 대한 확신은 1차대전이라는 인류의 파멸적인 경험을 거치면서 도리어 회의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44. 링컨은 노예제 페지론자였나?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링컨일 것이다. 켄터키의 가난한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신세계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사람, `인민의, 인민을 우한, 인민에 의한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천명한 민주주의자.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그의 이미지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해방시켰다.
1848년경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토팽창과 서부 개척에 따라 이전부터 있어 왔던 남부와 북부의 지역적 차이와 대립이 더 심해져 갔다. 그리고 남북의 대립은 영토의 확대에 따라 새로운 주가 생길 때 그것이 노예주가 되느냐 자유주가 되느냐 하는 문제로 격화되었다.
땅이 넓고 기름진 남부는 식민지 시대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고 여기에 흑인 노예가 이용되었다. 남부는 이 대농장에서 면화 등을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 필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에 비해 북부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공업이 발달했다. 자본주의적 공업의 발달은 자연히 많은 수의 임금 노동자를 필요로 했으며, 이는 남부의 노예제도와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부의 자본자들은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올 경우 자신들의 상품의 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보호 무역을 요구했으며 산업 발
전을 위해 중앙집권적 체제를 주장했다.
더구나 영국의 면방직 공업의 발전은 미국 남부의 면화를 더 많이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남부 농장주들의 노예에 대한 수요도 더욱 늘어갔다. 1850년 노예수는 남부 인구의 35%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예제 확대는 당시의 세계사적 추세에는 역행하는 것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은 1833년에, 프랑스는 18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다. 또한 당시 출판된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노예의 국외나 북부로의 탈출이 늘어났고 흑인 노예의 해방을 주장하는 백인들도 많아졌다. 미국은 노예제를 중심으로 하여 서서히 분열되어 갔다.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그것을 막을 힘은 없는 듯이 보였다.
사태는 1859년 존 브라운(John Brown)의 공격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다. 존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18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연방군의 한 무기고를 습격하고 흑인들에게 봉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감리교를 비롯하여 모든 교파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정당들과 연방 의회조차도 노예제 문제를 놓고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위기속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사람이 에이브레햄 링컨이었다. 원래 노예제를 인정하는 켄터키에서 태어난 링컨은 노예제페지론자는 아니었다. 비록 노예들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의 염원은 노예제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미국`을 통일하는 문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태의 발전에 따라 노예제 문제는 전면에 나설 것이었다.
1860년 11월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링컨의 당선은 남북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남부인들은 링컨을 지지한 표의 99%가 자유주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미 남부에서는 링컨이 당선되면 연방을 탈퇴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사우스케롤라이나를 선두로 하여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여 1861년2월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링컨이 `나는 남부의 노예제도를 간섭할 의도는 없다... 합중국 정부는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무력 충돌은 있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벌써 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결국 1861년 4월 12일 섬터(Sumter) 요새에 대한 남부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몇 개 주가 더 가담하여 남부 연합은 11개 주가 되었다. 이 전쟁은 4년간 계속되었는데 초기에는 남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북부는 경제력과 인구에서 우세했고 노예제 반대라는 명분에서도 유리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어도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는 여전히 모호한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들이 점령 지역에서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때에도 그는 반대했다.
그러다가 1862년 7월이 되어서야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다. 그것은 노예제 폐지라는 명분의 실행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전쟁의 효과적인 수행이라는 측면이 컸다. 즉 남부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뉴올리언즈와 같이 북군이 미리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노예나 남부 경계주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또 반란을 일으킨 주라 할지라도 90일 안에 다시 연방에 돌아오면 노예제의 존속은 그대로 인정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링컨의 온건하고 보수적인 태도에 대해 의회의 공화당 급진파와 흑인들은 불만을 가졌다.
1865년 4월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트가 함락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승리를 거둔 링컨은 남부를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적은 연방의 단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링컨보다 더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고 따라서 흑인에게 유리한 법률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1863년 1월 1일은 미국의 흑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날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전히 약자였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들은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남부에 남은 흑인들은 다시 옛 주인들 밑에서 임금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더구나 공공시설 이용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금하는 1875년의 공민권법은 1883년의 대법원 판결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던 백인들은 KKK단 등의 테러 조직을 조직하여 흑인들을 박해했다.
이렇듯 링컨은 개인적으로 비록 노예들의 처지에 대해 동정적이었지만 철저하게 연방의 존립을 위해 행동했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북부의 이해 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들은 남북 전쟁을 통해 `해방`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은 요원한 것이었고 미국의 흑인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다.
45. 일본 농민은 존재조차도 몰랐던 천황
한때는 `살아 있는 신`으로까지 추앙받으며 전 일본인을 그 이름 하나로 전쟁터로 몰아넣은 일본 천황. 1945년 패전 후 히로히토 천황은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요구대로 그가 신이 아님을 공식 선언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천황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신으로 살아 있다.
1989년 히로히토가 위독했을 때 일본인들은 1억의 일본 국민 모두가 천황이 나을 때까지 근신하자는 `1억 총자숙`을 실행하고 신문들은 날마다 그의 혈압, 맥박 등을 전하는 고정란을 설치하여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키히토 천황의 황태자가 여성 외교관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나자 일본의 양심과 진보적 지성을 대표한다는 아사히 신문의 1면 제목은 `황태자 전하, 감축 드리옵니다`였다. 황실 대변인의 발표를 방송하는 역대황실 텔레비전 앞에 모여든 일본인들이 감격해 하는 표정이 전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그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만세일체의 천황 혈통`을 자랑하며 천황에 대한 신앙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정치에서 천황의 위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천황은 그 존재만으로도 일본 국민의 보수적 성향과 배외주의적 기질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일본 사회가 큰 혼란에 처하게 되거나 19세기 말처럼 외국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이 오거나 일부 정치 세력이 필요에 의해 이런 상황을 조작해 내는 때가 온다면 천황이 일본 사회의 불평을 잠재우고 통합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천황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일본인들에게는 유감스러운 말이겠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들은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천황은 11세기 무사들이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한 이래 한 번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정치적 실권은 고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7세기 초 정권을 잡은 뒤로 무사정권이 확고히 안정되자 천황은 그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당시 천황가의 연수입은 쌀 3만 석이었다. 당시 도쿠가와가의 장군의 연수입이 700만 석이었고 10만 석이 넘는 번(막부의 통제를 받던 지방정권)들도 꽤 있었다. 천황은 일개 번의 수입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 규모로 옹색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는 생계를 위해 황가의 보물을 교토의 시장에 내다 파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시대를 막부는 수수방관했고 행여 왕실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는 가차없는 보복을 가했다. 일부 무사들 이외에 농민을 비롯한 일본 민중의 대다수는 이런 천황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영주만 의식하면 되었다.
이렇던 천황이 민중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1840년 중국의 아편전쟁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중국이 오랑캐 영국에게 패했다는 청천벽력을 접한 일본의 조야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의 위험 앞에서 그들은 자기 고유의 것, 천황을 새삼스레 들춰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막부 전복을 꾀하던 일부 하층 사무라이들은 거사의 명분을 갖기 위해 천황을 이용했다. 훗날 명치유신의 주역이 되는 이들은 천황을 `다마`라는 암호로 부르며 천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무도 찾지 않던 교토를 연일 드나들었다. 이들에게 천황은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용물에 불과했다. 효명 천황(명치 천황 직전의 천황)이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하는데 반대하자 하층 사무라이들은 명치유신 직전에 그를 독살시켜 버린다.
이들의 공작에 의해 어느덧 천황은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농민을 비롯한 일반 일본일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관심 밖의 존재였다.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정권을 막부에게서 탈취한 젊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거의 유일한 권력 기반인 천황의 존재와 위엄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시작했다.아직 나이 어린 명치 천황에게 전국 각지를 순행하게 하고 곳곳에서 천황의 군대 사열식을 거행했다.
1873년 명치 천황은 한때 무사정권의 본거지였던 가마쿠라의 순행길에 오른다. 천황은 4월 1일 아침 도쿄 신바시역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가마가와역에서 마차로 갈아타고 오후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여기서 무사들의 무기독점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새로 구상한 `천황의 육군`의 야영 연습을 참관하고 한 어촌을 방문했다.
당시 정부가 파견한 밀정은 이 때 백성들이 천황 방문에 대해 “감복해 하기는커녕 귀찮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천황이 방문한다니까 지방관서에서는 도로, 교량 보수에 주민들을 동원했고 천황 일행의 음식 등도 주민 부담으로 마련했다. 안 그래도 생계가 빠듯한데 수백 년 동안 존재조차 모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천황에 대해 어민들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길에 난 구덩이를 메우는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제대로 메우지 않고 짚단으로만 살짝 가리기도 했다. 이 중 한 사람은 “천자님이 오신다고 이전의 길을 고치고 청소했다. 천자님의 행차는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고 밀정은 보고하고 있다.
인도에 동원된 사람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가마쿠라에 도착했을 때 마중나온 사람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몇몇 마을에서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마중 나온 자들도 뻣뻣이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고 예를 갖출 생각을 하지 않은 자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민중의 반응에 신정부의 실권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폐지되었던 황실의 각종 행사를 부활시켜 성대하게 치렀고 전국의 국민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배포, 교실마다 걸어 놓게 했다.
이어 불교를 탄압하고 신도를 크게 장려하여 천황을 신격화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던 신사를 정리해 국가의 감독하에 두는 국가 신도정책을 수많은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일본의 첫 의회가 개설되던 1890년에는 마침내 국가적인 천황 이데올로기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칙어>가 공포되고 전국의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암송하게끔 했다.
이리하여 20세기 초가 되면 농민의 자식인 젊은 군인들이 대형 중국 국기 위에서 중국에 대한 `대일본제국의 성스러운 전쟁`을 개시할 것을 촉구하면서 `천황의 이름`으로 하리카리(할복)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도쿠카와 막부 말기 젊은 무사들의 배를 갈랐던 `천황의 이름`이 20세기에 와서는 농민 아들들의 배를 가르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패전 15년이 지난 1970년에도 저명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역시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 정신의 부활을 외치며 배를 갈라 죽었다. `천황의 이름`은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종이호랑이는 아니다.
46.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 일본의 자유 정신
현재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 만 엔짜리 지폐에는 학자풍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이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일본의 명문사학 게이오 대학의 전신인 게이오 의숙을 창시한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계몽사상가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 계몽사상가인가?
김옥균, 박영효 등 한국의 개혁파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로 당시 입헌 정부를 수립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동양의 혁명가들에게 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일찍이 미국, 영국 등을 견학한 바가 있는 그는 서양의 의회제도, 교육, 인권사상 등을 소개하는 데 정열을 불태웠다. 1870년대에 쓴 <학문을 권함>은 1872년부터 76년까지 낸 17편의 소책자를 묶은 것으로 진보적인 계몽사상가로서의 후쿠자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에 앞서 영국과 미국을 다녀와서 쓴 <서양사정>(1866-69)이 20만 부가 팔려나간 데 이어 <학문을 권함>도 소책자로 370만부나 팔렸다니 가히 일본 자유주의사상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학문을 권함>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당연한 관념이 되어 버린 인권 평등, 실학의 중요성, 국가 독립, 국법의 준수 등을 주장하고 있다. 서양의 계몽사상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논리와 충만한 기백을 담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데 비해 후쿠자와의 유일한 목표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는 것과 나아가 일본도 열강의 대열에 끼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국민 일반을 문명 개화의 문에 들여 놓아 이 일본국을 군사적으로 강하고 상업이 번창한 대국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가장 큰 소망`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후쿠자와의 계몽적 자유주의는 언제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미 후쿠자와의 자유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애국을 위한 것이었지 애국을 초월하는 상위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본래의 자유주의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치 정부는 급속히 보수화되어 갔다. 부농,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속한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을 무력으로 억누르고 정부내의 자유주의 세력을 축출해, 소수의 실권자를 중심으로 독재 정부가 성립했다. 경제적으로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이뤄져 대다수 농민의 희생 위에 소수의 정상배들(미츠비시, 미츠이 등)이 급성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각국이 제국주의적인 행태를 노골화하면서 대외 위기감이 조장되고 해외침략노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명치정부의 보수화 경향에 발맞춰 후쿠자와 유키치도 <학문을 권함>에 나타난 계몽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고에서 변질되어 갔다. 그는 천황을 문명 개화의 중심이라고 숭배하는가 하면 지도자가 되어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아시아맹주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00년 중국에서 터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서양 열강의 군대와 함께 중국에 파견되자 후쿠자와는 `그 전쟁 보도의 기사를 읽을 적마다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을 금할 길 없어 다만 감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다`고 했다.
<학문을 권함>에서 자신이 주장했던 국가간의 평등은 온데간데 없고 제국주의 군대가 되어 중국 땅을 주름 잡는 것에 대한 감격만이 말년의 후쿠자와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일본 국회는 이 일개 야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미 후쿠자와는 자유 일본의 상징이 아니라 중국와 조선 침략을 목말라 하는 일본 지배계급의 정신적 지주였다.
후쿠자와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일본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근현대사를 통해 서양의 여러 사조를 받아들였던 그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자신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사상으로 쉽게 전향해 버리곤 했다. 1930년대 수많은 일본 공산당원이 불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사람만을 남겨 놓고 모두 `천황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전향 바람을 일으켰던 것은 그 뚜렷한 예이다. 적어도 그들은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천황의 아들이었고 후
쿠자와 유키치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47.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소유가 되었던 속사정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 동북부의 아시아 접경 지대에 있으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의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고 있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함으로써 거의 전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이 운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은 너무나 간단했다. “삽시다.” 디즈레일리 수상의 이 한마디가 이후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에즈 운하는 원래 프랑스 사람인 레셉스에 의해 1869년 완공되었다. 완공된 이후에는 프랑스 투자가들과 이집트 왕의 공동 소유가 되었다. 그러자 수에즈 운하 건설에 냉담한 반응을 보냈던 영국은 다급해졌다.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도로 가는 길이 희망봉을 돌아가는 것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운하는 `인도에 이르는 생명선`으로서 영국의 상업적 이익에 매우 긴요한 것이 되었다. 개통 이래 이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도, 이 운하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도 영국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운하의 주식을 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이집트의 왕이 자기 지분을 팔려고 내놓았던 것이다.
파리에서 공부한 적이 있던 당시 이집트 왕 이스마일은 이집트를 개화시키려고 열심이었다. 그는 행정, 법률 등을 정비하고 철도, 전신, 운하 등의 건설에 열중했다. 또한 수도 카이로를 비롯한 도시를 서구풍으로 정비했고 군사적 팽창도 꾀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고 그것은 주로 유럽의 은행가로부터의 부채로 충당했다. 부채는 늘어났고 세금을 올려 걷어도 이자 갚기에도 모자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스마일은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자기 소유 주식 17만 6,602주를 시장에 내놓고 프랑스에 매입 의사를 타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로서도 이 주식을 살 형편이 못 되었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지경에 빠졌고 이러한 사정은 1875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1875년 11월 14일 일요일 저녁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유태인 재벌 로스차일드의 저택에서 집주인인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집사가 전보를 가져왔다. 이집트 왕이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팔겠다는 내용이었다. 가격은 400만 파운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수상이 로스차일드에게 말했다. “삽시다.”
다음날인 월요일 디즈레일리는 각료 회의를 열고 각료 전원의 위임을 받았다. 그런데 의회가 휴회중이었기 때문에 예산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디즈레일리는 로스차일드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다. 수상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It is yours, Madame(여왕 폐하, 그것은 폐하의 것입니다).“ 이틀 후 이집트 왕 소유의 수에즈 운하 주식이 영국 정부의 소유로 넘어갔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의 재정에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곧 이집트내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어 1882년 무력 저항이 발생했다. 영국은 재빨리 무력을 동원한 `일시적 점령`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일시적 점령은 장기화되어 2차대전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수에즈 운하는 1956년 나세르 대통령의 국유화 조치에 의해 이집트 소유로 돌아오기까지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이다.
48. 록펠러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
아마 록펠러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록펠러는 미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자 부자 나라로 발돋움하려고 했던 19세기 후반에 산업화를 이끈 산업의 지도자이자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린 재벌 중의 재벌이며,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미국 경제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성공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당연하게도 록펠러가 돈을 버는 데는 근면과 사업적 능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그가 구사한 사업 방식을 살펴보면 다른 평가도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남북 전쟁에서 북부의 승리는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넓은 영토와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한 나라였으며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의 물결은 산업화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정부의 친기업정책은 산업화의 활력소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1890년이 되면 공업생산이 농업생산을 넘어서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다.
이 산업화 시대는 철도 건설로 시작되었고 대륙횡단철도의 완성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 철도망의 급속한 팽창은 기업에 대한 정부의 특혜와 부정부패로 얼룩졌다. 철도 회사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국유지를 철도 부설부지로 받았으며 각종 보조금과 융자금까지 얻어 냈다. 이러한 특혜 제공 배후에는 정치가와 기업가의 결탁이 있었다. 만연된 부패의 대표적인 예는 크레디트 모릴리에 사건이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중역들이 크레디트 모빌리에라는 회사를 차려놓고 유니언 퍼시픽의 모든 철도공사의 하도급을 독차지하려고 했으며 의회로부터 실제 공사비보다 더 많은 액수의 금액을 받아 내었다. 그리고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영향력 있는 정계 인사들에게 이 회사의 주식을 뇌물로 뿌렸다. 이 사건은 1872년 폭로되었는데 뇌물로 주식을 받은 인사중에는 부통령까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록펠러가 대기업가로 성장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은 원래 회계원으로 출발했다가 당시 새로운 사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정유 산업에 손을 댔다. 1859년 펜실베니아의 타이터스빌에서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했고 거기서 나오는 석유가 산업용으로 다양하게 쓰일 가능성을 보이자 새로운 투자 분야를 찾고 있던 록펠러는 정유산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1862년에 처음으로 정유공장을 사서 사업을 시작했던 록펠러는 1870년 클리블랜드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정유사업을 벌였다.
그는 정유사업의 왕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독점을 적절히 사용했다. 그는 철도로 석유를 독점적으로 운송하는 대신 운임 할인혜택을 줄 것을 철도회사들에 요구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던 철도 회사들도 록펠러 회사의 수송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록펠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정유회사들이 철도 대신 정유수송을 위해 송유관을 부설하려 하자 여러 경로를 통한 압력으로 이 시도를 좌절시켰다. 여기에 더해 파격적인 가격 인하정책으로 다른 정유회사들을 몰락시켜 버리고 나중에 그 회사들을 매입했다. 그리하여 1879년에 그는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했는데 이는 개별 기업들의 소유권은 남겨 두고 그들의 경영권을 하나의 경영진이 장악하는 트러스트(trust)였다. 록펠러의 이 방식은 이 시대의 기업의 독점과 통합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회사는 미국 정유시설 능력의 90% 이상을 장악했다.
20년 후 스탠더드 석유 회사는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지배하는 `지배회사`로 개편되어 체이스 맨해튼 은행, 선박, 철강, 석탄 등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했다. 자본금 1억 1,000만 달러, 연간 이윤 4,500만 달러, 록펠러의 재산은 2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이후 사업확대에 따라 록팰러의 재산은 20억 달러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록팰러는 `금융왕` 모건이나 `강철왕` 카네기와 마찬가지로 뇌물과 매수, 다른 회사들과의 무자비한 경쟁, 독점 형성에 의한 해당 산업분야의 지배 등의 방식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급속한 산업화의 와중에서 적자생존 원리에 따른 무한 경쟁에 가장 충실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산업발전의 주역이었다는 또 다른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무자비한 기업가`라는 평가와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착취, 소비자의 희생을 대가로 재산을 모은 록팰러를 비롯한 대재벌들을 `강도 귀족들(Robber Barons)`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49. 일본 민간인들의 국제 침략사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넘보고 있다. 1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업인, 문화인 심지어는 기자에 이르기까지 민간인들이 그 앞장을 서고 있다.
1세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 특히 조선 침략에서 이른바 낭인이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1895년 민비시해(을미사변)를 자행한 깡패집단쯤으로 알려진 이 낭인들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맨 앞에 서서 일본정부와 적극적인 유대를 가지면서 정부의 외교정책과 해외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민간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서양의 침략에 선교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낭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낭인들은 명치유신을 일으켰다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사무라이 출신들로 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시아국가들이 서양의 침략과 모욕을 막기 위해 한마음으로 협력해야 함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하여 일본 이외에는 지도자가 될 능력을 소유한 국가가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낭인들은 급진적 보수나 일신의 안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하기 곤란한 일들을 도맡았고 특히 대외침략을 일삼는 군부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결성하여 조선침략의 `선교사` 노릇을 한 우치다료헤이의 활동을 중심으로 낭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료헤이는 대외 팽창주의자들의 모임은 현양사에서 활약하던 사무라이 출신의 낭인이다. 현양사는 명치정부의 대외정책이 미온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동, 노일전쟁을 도발시킨 단체이다. 현양사 활동을 통해 그는 일본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확보하는 것이 선행조건이라고 판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 계기는 1894년 조선에서 터진 동학 운동이었다.
이 때 이미 조선에는 많은 수의 낭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892년 부산에 외교관 출신인 야마자 엔지로를 중심으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조선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그 동안 모아놓은 정보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현양사의 낭인들은 1893년 일본을 지지하던 김옥균이 청나라 땅에서 암살되자 외무대신에게 청나라와의 개전을 요구하며 전쟁 여론을 부추겼다. 이 때 외무대신은 이 요구를 겉으로는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침략주의자인 육군참모총장 가외카미 소로쿠와 이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민간인과 정부의 교묘한 역할분담이 행해진 것이다.
정부와 군부의 내면적인 비호에 고무된 낭인들은 동학혁명을 기회로 행동에 들어갔다. 정부의 개진 결단을 돕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을 질러야 한다는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해 천우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천우협의 격문에서 `시주음락으로 소일하는 한국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뜨려 도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구제`하고 `민씨의 악정을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는 청국을 한반도에서 쫓아낼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천우협은 1894년 6월 하순 부산에 도착한 후 전국에서 석 달 동안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게릴라 활동과 폭력을 감행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 행동대원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내정에 큰 소요를 야기했다. 이들은 의도대로 청일전쟁을 점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전쟁중에는 일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첫 해외활동의 대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료헤이는 한국, 중국에 대한 공작을 구상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의 반환을 협박하는 이른바 삼국간섭이 일어나자 료헤이는 러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온 일본신문들이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고 있을 때 정부 관리도 군부 인사도 아닌,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료헤이는 `먼저 러시아의 내정을 연구하여 복수의 길을 얻기 위해` 단독으로 시베리아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유도 도장을 열어 거점을 마련했다. 여기에도 역시 대륙 낭인들이 이미 진출해 있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의 시가, 요새, 주요 도로들의 지도를 만들고 정보 활동을 하는 군첩보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한국, 중국,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간도에 보내 일대를 조사하게 했다.
이어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일본의 해군무관, 외교관 등의 도움을 받아 가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3년 만에 귀국한 료헤이는 이미 `정치가 부패하고 인륜이 타락한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동아시아 보전이라는 국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호히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리의 여신은 일본 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귀국한 후 그는 순회강연을 통해 러시아와의 개전 여론을 일으키는 한편 흑룡회라는 낭인들의 강력한 조직을 결성, 정부나 군부보다 더욱 호전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흑룡회의 구성원에는 사업가, 변호사, 언론인, 군인, 교사, 유도사범, 승려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중국, 시베리아, 몽고, 동남아시아 등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이 조종할 수 있는 현지의 정치세력을 포섭하는 공작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의 일원이 되어 통역관 또는 첩보원으로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들 단체의 주장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히 이들 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호전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민간인의 은밀한 대외활동, 그리고 이들과 정부와의 교묘한 결합 등 1세기 전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애용한 방법은 지금도 한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기업인, 언론인, 유학생 등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다.
50. 여론정치의 천재 강유위의 싱거운 종말
1897년 10월 20일.
독일이 산동성의 교주만을 무력 점령하자 중국 조야는 벌컥 뒤집혔다. 열강의 중국 분할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사대부층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에 12월에는 러시아 함대가 여순과 대련을 점령했다.
이에 강유위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급히 상경, 위기에 대처할 정부개혁을 촉구하는 정치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해 전 과거 시험장에서 수험생 700명을 선동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적이 있는 그의 출현은 북경 정부와 지식인들 모두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당시 궁중은 40년째 서태후 중심의 수구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황제인 광서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런 권력 기반이 없던 강유위는 이 외로운 황제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권력기반이 될 수 있다고 판단, 황제에게 집요하게 접근해 갔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주로 상소, 신문, 학회, 출판 등 여론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강유위는 스스로 수차에 걸쳐 제도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을뿐 아니라 정부 안에 친구 언관들을 시켜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정부의 대신들은 그의 상소가 황제에게 끼칠 영향을 우려하여 황제에게는 몇 달이 지난 후에 전달되도록 하는 등 집요한 방해 공작을 계속했다.
강유위는 자신의 상서 내용은 즉각 신문을 통해 발표해 이를 본 많은 지식인뿐 아니라 정부 관리까지도 그의 개혁노선에 끌어들였다.
또 <일본변정고>, <이대피득변정기> 등의 책을 출판해 일본 명치유신과 러시아 피터 대제의 개혁 실상을 선전했다. 특히 <일본변정고>는 황제 광서제가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애독해 후일 광서제 - 강유위 권력 형성의 매개 역할을 했다. 이런 공작을 통해 강유위가 목표로 한 것은 황제와 단독 회담 기회를 얻어 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여론공작이 특히 사대부를 비롯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먹혀 들고 있음을 확인한 강유위는 보국회를 만들어 그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서양식 의회가 될 것임을 주장했다. 보국회가 열렬한 호응을 받아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서태후 일파는 이를 해산시켜 버렸다.
1898년 4월 서태후의 수족으로 실권을 행사하던 공친왕이 죽자 정세는 강유위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이 틈을 이용하여 서태후로부터 권력 탈취를 노리던 광서제는 파격적으로 강유위를 궁중으로 불러 단독 회담을 했다. 강유위는 오랜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강유위는 이 자리에서 `제도국`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되 그 구성은 신분에 얽매이지 말고 개혁파 인사를 등용할 것과 영국, 일본과 연대해 러시아에 맞설 것 등을 주장했다. 광서제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그가 생각보다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황제와 강유위는 수구파 관료를 무더기로 경질시키고 개혁을 국시로 공포하는 등 주도권을 잡아 나갔다. 그러나 개혁의 핵심이라 할 제도국의 창설은 서태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동의를 구하려고 이화원으로 서태후를 찾아간 광서제는 오히려 폐위의 위협을 당했다.
이에 개혁파는 원새개로 하여금 황제 직속군을 창설하게 하고 서태후를 제거할 쿠테타를 계획한다. 마침 8월 5일에는`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북경을 방문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경 정가는 개혁파 쪽으로 대세가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믿었던 원세개는 거병 계획을 서태후측에 밀고해 버린다. 이에 서태후파는 8월 4일 황제를 연금시키고 이튿날 이토 히로부미와의 회견도 서태후의 간섭하에 이뤄졌다. 이토가 돌아가자마자 서태후 일파는 역쿠테타를 감행, 강유위 체포령이 내리고 정부내 강유위에게 동정적이었던 관리들은 파면 또는 처형했다. 이 와중에서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이 처형되고 강유위와 양계초는 북경을 탈출, 일본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강한 중국을 건설하려 했던 강유위는 그 힘의 원천을 황제에게서 찾았다. 그가 신문을 만들고 사대부 조직을 만든 것도 이것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새 시대에는 대중조직과 군사력이 힘의 원천이 될 것임을 간과했다. 따라서 수구파가 광서제와 그를 격리시키고 군사력을 동원하자 강유위의 백일천하는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는 재기하지 못하고 신해혁명 후에도 황제복위 운동을 꾀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51.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미국의 음모
1915년 파나마 운하가 정식으로 개통되었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 발보아가 파나마 지협을 확인하면서부터 간직한 꿈인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시킨다는 생각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사실 파나마 국민에게는 굴욕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
양 대양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생기는 전략적, 상업적 이익이 엄청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분명했다. 남북 전쟁 후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재임, 1869~77)은 운하의 입지 조건을 살펴 보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으며, 미국 회사가 지협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먼저 운하 건설에 나선 것은 수에즈 운하 설계를 담당했던 프랑스 사람 페르디당 레셉스(Ferdinant Lesseps)였다. 그는 당시 콜롬비아 땅이었던 이곳에 운하를 만들기 위해 1880년 수천 명의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만들고 운하 건설권을 따냈다. 곧 운하 건설에 착수했지만 이 회사는 경영상의 부패, 설계상의 결함, 풍토병, 가혹한 자연 조건 등으로 인해 어려움에 부딪쳤고 1889년 마침내 공사를 포기했다.
레셉스의 운하 건설이 좌초하자 미국 정부와 독점 자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에 뛰어들었다. 1902년 테오도르 루즈벨트 행정부는 운하 건설권을 4,000만 달러에 사들였고 또 콜롬비아 정부와 운하 사용에 관한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1,000만 달러에 매년 25만 달러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파나마 운하를 99년간 조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의회는 이 조약 내용이 자국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미국은 아니었다. 미국의 정책은 이 지역에서 콜롬비아를 쫓아 버리고 미국의 말을 잘 들을 나라를 세우는 쪽으로 정해졌다. 다행히도 당시 파나마 지역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 1903년 11월 프랑스 운하 회사의 이사였던 프랑스 인이 파나마 인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그 배후에는 미육군의 지원이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전함까지 파견하여 콜롬비아를 위협하면서 신생 파나마 공화국의 탄생의 산파 노릇을 했다.
이렇게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파나마는 태어났고 따라서 파나마 운하의 운명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미국은 앞서 콜롬비아와 맺으려던 조약과 같은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의 사용권을 획득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조차 기간이 99년에서 `영구적`으로 되었고 또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해 파나마가 주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한 주권이 미국에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1904년 공사에 착수한 미국은 레셉스가 겪었던 어려움에 시달리긴 했지만 결국 윌슨 대통령 임기중인 1914년 운하를 완성했다. 이 운하의 완성으로 미국은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되었지만 동서로는 짧고 남북으로 긴 파나마 영토는 미국이 지배하는 운하 지대에 의해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하의 안전을 핑계로 한 미국의 끊임없는 간섭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국의 지배와 간섭이 계속될수록 파나마 국민의 주권 회복 운동도 시간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갔고 마침내 1977년 파나마의 민족주의적인 군부 정권은 카터 행정부와 파나마 운하 신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골자는 1999년 12월31일 정오를 기해 운하와 운하 지대에 대해 파나마가 주권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파나마 운하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미국은 신조약을 체결하긴 했지만 가능하면 파나마 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981년 정권을 잡은 노리에가 장군이 반미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표방하자 미국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노리에가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면서 파나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편 그를 마약 거래 혐의로 미국 법정에 기소했다. 게다가 1989년 5월의 파나마 대통령 선거를 무효라고까지 선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직접 행동이었다.
1989년 12월 부시 행정부는 파나마를 침공하여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잡아갔다. 명목은 미국 시민의 보호, 파나마의 민주화, 마약 범죄자 노리에가의 체포였지만 누가 그러한 침략 행위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1977년 맺은 파나마 운하 신조약이 발효되기까지 6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사실 파나마 운하가 파나마 국민에게 돌아올지는 아직 쉽게 단정할 수 없다.
52.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는 베트남
수천 년에 걸친 중국과의 투쟁, 그리고 프랑스, 미국과의 대결로 독립 자주성에 관한 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베트남 인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갖지 못하고 서양의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문자로 `꾸옥 으(국어)`라는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1600년경 프랑스 선교사 로드가 베트남 말을 로마자화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한자만이 유일한 표현 수단이었다. 그러다가 8세기경 신라의 이두와 같은 원리로, 베트남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자남이라는 문자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용하기 불편했고 지식인들이 천시하는 바람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17세기에 로드가 `꾸옥 으`를 만든 후에도 한참 동안 한자의 위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베트남을 완전히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베트남 지배의 최대 장애물인 유교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꾸옥 으`의 사용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학교를 세우고 `꾸옥 으`로 된 신문을 간행했다.
그러나 베트남 인들은 `꾸옥 으`를 사용하는 것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조력하는 행위라 하여 이를 거부했다. 특히 관료, 지식층 등 구지배계급은 한문, 자남으로 프랑스에 저항하는 논설이나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왕조와 유교 이념의 보위였다.
그러나 1905년 노일전쟁을 전후해 근대 민족주의자들은 민중의 교육을 위해서는 쉬운 `꾸옥 으`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꾸옥 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신식학교를 세우고 근대 교육을 전개해 나갔다. 즉 전통과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프랑스 인이 만들어 준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세기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꾸옥 으`는 20세기에 들어 전국으로 보급되었고 1930년대에는 지식층에서도 수용하기 시작했다. 한문으로 된 전통시는 퇴조하고 `꾸옥 으`로 된 에세이, 소설, 신문 기사 등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61년 한 조사에 따르면 `꾸옥 으`의 해독률은 85%에 이를 정도로 베트남에 파고들었다.
이래서 한때는 한자 문화가 창성하던 베트남은 현재 자기 이름도 한자로 못 쓸 정도로 `꾸옥 으`가 공용 문자로 자리 잡고 있다.
53. 신해 혁명에서 과장된 손문의 역할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895년, 손문은 중국 혁명파의 첫 봉기인 광주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실패하고 손문은 목에 현상금을 단 채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간다.
이때 런던주재 청국공사관이 그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곧 풀려나지만 이 사건은 중국 국내에 센세이션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개혁파의 기관지라 할 시무보를 비롯, 주요 신문과 잡지 등이 이를 대서특필했고 손문 자신이 납치 경위를 밝힌 <런던에서의 납치(Kidnapped in London)>는 런던에서 발간된 그 다음해에 벌써 상해에 유통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일개 봉기주의자요, 망명 정객에 불과했던 손문은 졸지에 전 중국과 온 세계에 반청 활동의 최고 지도자로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손문의 역할이 과대평가된 만큼 신해 혁명의 의의도 과장되어 왔다. 신해혁명은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전제 군주제를 타도했다는 점 이외에는 완전히 실패한 혁명이다. 정권은 1년도 안 돼 수구 세력에게 되돌려졌고 원세개의 황제부활 시도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 새로이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국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혁명은 청조보다 더 타락하고 반동적인 군벌들에 의해 유린되었다.
그럼에도 손문은 현재 중국 공산당, 국민당을 가릴 것 없이 전 중국인의 추앙의 대상이다.
일찍이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 반청 폭동을 주도하고 신해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민 혁명의 불길을 댕긴 그의 화려한 투쟁 경력을 살펴보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신해 혁명에서 손문의 역할과 비중은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며 신해 혁명의 주도권은 오히려 다른 세력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신해 혁명은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장국이었던 원세개에게 정권을 가져다 주었고 결국 군벌들의 추악한 싸움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신해 혁명을 추진한 주요 정치 세력은 손문이 이끄는 혁명파와 강유위, 양계초 등이 이끄는 향신층(지주, 관리, 지식인)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은 청조에 대항한다는 점에선 같았으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연대보다는 대립하는 때가 더 많았다.
개혁파는 주로 지방지주와 상인, 개명 관료, 광범한 예비 관료(거인, 생원)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청조 자체를 타도하는 데는 반대하고 입헌 군주제의 실시를 목표로 했다. 그들이 활동하던 1890년대 중반으로부터 불과 20년 전 일어났던 일본의 명치유신은 이들의 모델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태후의 기세에 허수아비 노릇을 면치 못하던 황제 광서제에게 접근하는 한편 지방의회라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 세력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무기는 출판물 등을 통해 여론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혀 전국적인 연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이들과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이 관직에 널리 포진하고 있었던 것도 활동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개혁파는 1898년 강유위를 중심으로 북경에서 여론 공작을 벌여 서태후를 궁중에 연금시키고 광서제를 포섭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유명한 무술정변이다. 당시 북경을 방문한 `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당시 근대화를 추진하던 동양의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의 존재가 개혁파의 집권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하자마자 서태후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했다. 100일만에 개혁파는 축출되고 강유위, 양계초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편 손문 등의 혁명파는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오랑캐(청조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한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이들은 즉각적인 무장봉기로 청조를 타도하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노선을 뒷받침할 군사력과 자금력이 없었던 혁명파는 수백 년동안 농촌에 존재해 온 회당(유랑농민 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산전 집단)을 선동하여 무모한 봉기를 반복했으나 청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희생만 내고 말았다.
무장봉기와 무술정변에서 각각 실패한 혁명파와 개혁파 세력은 일본에 모여 치열한 노선싸움을 전개했다.
혁명파는 도쿄에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손문의 홍중회, 황홍의 화흥회, 장병린의 광복회 등으로 분열돼 있던 혁명파는 1905년 동맹회를 구성하고 청조의 타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분열하고 말았다.
개혁파, 혁명파의 망명객들이 도쿄에서 혁명의 방향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전열을 가다듬은 국내 개혁파들은 외국에 뺏긴 이권회수운동, 미국상품 불매운동, 철도국유화 반대운동 등 치열한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지방에서 관할하던 철도를 국유화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 주려는 청조에 대항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은 대규모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마침내 신해 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1911. 10. 10)로 이어졌다.
손문은 동맹회의 분열로 국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무창봉기가 발발할 때까지 주로 구미 지역에서 자금조달이나 외교적 노력에만 관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창봉기가 났을 때 그가 크게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창봉기 후 개혁파는 혁명군 정부를 수립하고 청조의 장군인 여원홍을 대원수로 추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혁명 발발 한달 보름 만에야 귀국한 손문은 높은 지명도 때문에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긴 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국기로 그가 주장한 청천백일기 대신 개혁파가 내세운 오색기가 채택될 정도로 신정부의 주도권은 개혁파의 수중에 있었다.
손문은 청조 붕괴 후 그 군사력을 거느리고 북경에 응거하고 있던 원세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본래 원세개와 한뿌리인 개혁파는 협상에 의한 해결을 고집했다.
마침내 손문은 취임 두 달여 만에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물려 주고 쓸쓸히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54. 1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킨 두 암살 사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보스니아(당시 오스트리아령)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린 두 발의 총성이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소속 한 청년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암살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이다.
이 사건이 1차대전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기는 하지만 전쟁의 검은 그림자는 이전부터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9세기 말 유럽의 열강들은 독점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으며 아프리카, 발칸 반도, 중근동, 동아시아 등의 지역에서 시장과 식민지 분할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 동맹국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3국 협상국으로 나뉘어져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대립의 한 초점이었던 발칸 반도는 당시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릴 정도였다. 15세기 이래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7세기가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를 기화로 유럽 열강들은 저마다 발칸 반도에 대한 지배욕을 드러내게 된다. 여기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도 독립의 의지를 높여 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아직 힘이 미약해 이웃의 강대국인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이런 독립 의지의 고양과 열강들의 간섭은 발칸 반도를 국제적 분쟁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편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래 강대국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에야 독립을 쟁취한 세르비아의 국왕과 귀족들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1908년 이 두 지방을 병합하여 세르비아 인들의 소망을 꺾어 버렸고 세르비아 인의 반오스트리아 감정은 고양되었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18세의 청년은 이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분쇄하려는 민족주의 비밀 결사의 일원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은 복잡한 정세는 이 사건이 두 국가 사이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유럽 아니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갈 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암살 사건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 사회당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장 조레스의 죽임이다.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해 7월 31일 밤 장 조레스는 파리의 한 카페에서 다른 사회당 간부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도중 총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지고 조레스도 쓰러졌다. 주위는 그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의사가 곧 왔지만 머리에 총을 맞은 조레스는 금방 사망하고 말았다. 체포된 범인은 라울 발렝이라는 국가주의에 사로잡힌 청년이었다. 조레스는 왜 암살당했는가?
20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 운동은 이미 주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가오는 전쟁을 각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전쟁 반대를 외쳤다. 당시 사회주의 정당의 국제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이 전쟁에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국민 대다수는 피를 흘릴 뿐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수차례 반전을 결의하고 각국 정부에 평화 외교를 요구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공동 행동을 호소했다.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도 다가오는 전쟁을 막는 반전
평화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조레스의 암살 사건은 전쟁 반대를 외치는 사회주의와 평화주의자에 대한 호전적인 국가주의자의 테러였다. 그리고 조레스를 죽인 총성은 사라예보에서 울릴 총성에 덧붙여 전 유럽이 아니 전 세계가 전쟁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조레스가 암살당한 다음날 프랑스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전쟁 반대의 목소리는 조레스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고 있었다.
조레스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인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한 상태였다. 러시아를 필두로 유럽 각국이 줄줄이 전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 참이었다. 7월30일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리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바야흐로 이후 4년간이나 계속될 최초의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55. 배반당한 민족 자결주의
1919년 3월 1일 경성의 집집마다 이른 아침부터 독립 선언서, 독립 신문 등이 배포되었고 시내 곳곳에는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가 되자 파고다 공원으로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시민들도 합세했다. 집회 연단 위로는 꿈에도 그리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학생 대표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독립 선언서> 낭동이 끝나는 것을 신호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퍼져 나갔다. 일제의 무단 통치 10년의 쇠사슬을 끊어 내려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삼일운동은 5월 말까지 전국으로 퍼져 나가 천여 회의 시위 행진에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비록 이 운동이 군대와 경찰의 총칼을 동원한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지만 조선 민중이 살아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제도 이른바 문화 정치라는 좀더 유화적인 통치 방식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삼일운동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1918년 1월, 전후 처리의 원칙으로 천명된 윌슨의 `14개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 자결주의의 실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자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 못지않게 국제 질서의 변동을 가져왔다. 패전국인 독일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조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대신 그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대전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소련은 기존의 제국주의 국제 질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과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주장했다. 이러한 전쟁의 승리와 패배,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국제 질서의 변동은 자연히 약소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양시켰다.
이러한 변화의 목전에서 새로운 전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원칙으로 천명된 것이 윌슨의 `14개조`이다. 이것은 1918년 1월 8일 미국 의회에서 발표되었는데, `비밀 외교의 폐지`, `공해의 자유`, `민족 자결주의`, `무병합 무배상`등의 원칙과 함께 국제 평화를 유지할 기구로 국제 연맹의 결성을 주창하고 있다. 이 14개조는 전쟁중에 수립된 소련의 평화 공세와 민족 자결 원칙에 대항하고 연합국의 동요와 전쟁에 수립된 소련의 평화 공세와 민족 자결 원칙에 대항하고 연합국의 동요와 전쟁에 대한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급하게 발표된 것이었다.하지만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민중과 독립을 염원하는 약소 민족들은 윌슨의 주장에서 평화와 독립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을 보았고 그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이 희망은 좌절과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이 `14개조`의 시험대는 파리 강화 회의였다. 독일의 항복(1918. 11)으로 끝난 전쟁의 뒷수습과 평화를 위해 1919년 1월 18일 27개 전승국이라 하더라도 약소국은 본회의에서 제외되었으며 또 실제로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 영, 불 3국 대표인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였다. 이 파리 강화 회의의 주된 의제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신생 소련을 봉쇄하는 것이었으며 패전국 독일에 전쟁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미국이 연합국 승리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14개조 발표로 인한 윌슨의 국제적 인기로 인해 당연하게도 파리 강화 회의를 이끌었던 것은 윌슨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매한 이상주의적인 원칙은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먼저 비밀 외교의 폐지는 영국을 필두로 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연합국이 대전중에 맺은 영토나 세력 범위 분할에 관한 비밀 조약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또 무병합 무배상 원칙도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내고 영토마저 빼앗으려는 영국, 특히 프랑스의 의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 세계 약소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던 민족 자결주의도 동유럽과 발칸 반도 등 이전에 패전국의 영토였던 곳에서만 적용되었고 그것도 열강의 이해 관계에 따라 왜곡되어 적용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나뉘어졌고 연합국에 참가했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등을 합병했다. 터키 제국도 붕괴하여 이전의 광대한 영토를 잃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반면 패전국의 해외 식민지는 위임 통치제라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이 위임 통치제는 명목상으로는 식민지 주민을 교육하여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자치 정부의 수립과 독립을 달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승전국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누어 가진 것에 불과했다. 이 방식에 따라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서남아프리카는 남아연방에, 카메룬과 토고란드는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태평양에 있는 독일 식민지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에 맡겨졌으며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
인은 영국에,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더구나 강화 회의 조약에는 승전국이었던 중국의 경우, 이전에 독일이 강점했던 산동 반도 및 그곳의 철도, 지하 자원, 해전 전선 등을 일본의 소유로 한다는 결정까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중국 민중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며 민중의 분노는 5,4운동으로 불타올랐다.
이렇듯 아시아, 아프리카의 피억압 민족들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걸었던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했다. 사실 윌슨의 이상주의적 외교 원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 관계라는 현실의 벽을 뚫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후 식민지 민중들이 새로운 질서의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56. 레닌은 왜 독일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나?
1차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하지만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낳은 이 최초의 세계 대전은 유럽의 동부 전선에서는 이미 끝나 있었다. 1918년 3월 신생 소비에트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내용은 소비에트로서는 매우 가혹하고 굴욕적인 것이었다. 강화의 조건으로 상당 부분의 영토와 배상금을 독일에 제공해야 했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왜 이런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가?
러시아의 2월 혁명(신력으로는 3개 혁명)은 “빵을 달라”라는 요구로 시작되었다.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우리 아이가 굶주린다!”라고 외치며 거리 행진을 했다. 여기에 공장에서 일손을 놓은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사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위대의 주장도 “빵을 달라”에서 “차리즘 타도”, “전쟁 중지”, “평화와 자유”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반대로 사병들은 혁명의 편으로 돌아섰다. 시위가 일어난 지 9일 만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300년이나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가 썩은 나무 쓰러지듯 일순간에 넘어져 버린 것이다.
2월 혁명은 3년이 넘게 진행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은 국민의 분노가 끝내 폭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것은 전제적인 러시아 사회 자체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었다.
1861년 알렉산더 2세에 의해 농노 해방이 실시되었지만 철저하지 못한 상태로 끝났고 도리어 정치적인 면에서는 더 후퇴하기까지 했다. 1890년대에 들어 러시아에서도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가 대두하고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장 노동자의 증가에 따른 노동 운동의 발전과 혁명적인 사조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 정치에는 변함이 없었고 자유주의와 혁명 운동에 대한 탄압만 점점 심해졌다.
그리하여 1차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국내에서 고조된 혁명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는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여 무기도 부족한 상태에서 동부 전선에 대군을 투입했다. 그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력을 빼앗겨 식량 생산이 반감되었고 식량난이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전쟁은 시작부터 패배를 거듭했으며 교착된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자 국내의 사회 불안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급속히 전국으로 파급되어 각 지역에서 노동자, 병사의 대의 기관인 소비에트가 성립되었고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에 의해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임시 정부는 평화와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외면하고 질서의 회복과 전쟁 속행을 당면 임무로 삼았다. 임시 정부는 정치범의 사면,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선언했지만 토지 개혁이나 정치 체제의 변화 등은 일정에 올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불안전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 해 10월 25일(신력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이후 소련 공산당)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레닌은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망명지 스위스에서 귀국하여 “전쟁 즉시 중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하에 볼셰비키 당을 지도했다. 그는 당시 민중의 여망이 평화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소비에트라는 민중의 조직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립된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당면 과제는 전쟁의 중단과 평화의 회복이었다. 평화는 전쟁에 지친 민중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지만 새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가 새로운 사회 체제의 기초를 닦는 데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는 레닌이 기초한 `평화에 관한 포고`를 발표하면서 영토 할양과 배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즉각 전쟁을 중단하자고 전쟁 당사국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대신 소비에트가 계속 전쟁에 참여하기를 주장했다. 그들로서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군대를 견제하는 소비에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의 전쟁에서 신생 사회주의 정권이 약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반대에 부딪친 레닌은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을 결심을 했다. 이 강화 회담 제의에 독일이 의외로 동의했다. 독일로서는 소비에트와 강화함으로써 두 개의 전선에서 벗어나 서부 전선에 전력을 총동원할 수 있고 소비에트에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이익을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개월 가량의 회담을 거쳐 독일은 1918년 2월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강화의 조건으로 러시아의 영토 15만 평방 킬로의 할양, 30억 루블의 배상금을 제시했다. 이 조약에 서명한다는 것은 정말로 굴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레닌은 서명할 것을 주장했다.
레닌은 러시아가 3년 넘게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가 심하게 피폐해졌고 또 지친 민중이 평화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게다가 사실 당시 러시아 군대로서는 더 이상 싸울 형편이 못 되었다. 식량, 장비 등이 형편없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병사들이 지쳐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독일과 전쟁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권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숨 돌릴 기회였다. 그러므로 적이 아무리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강화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당 중앙위원들은 레닌의 주장에 반대했고 회담 대표인 트로츠키는 회담을 거부하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독일 정부는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독일군은 전면적인 공격으로 소비에트 군대의 방어선을 삽시간에 돌파했다. 독일군이 진격해 들어와 수도 패트로그라드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이에 레닌은 <사회주의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민중의 투쟁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군대 이른바 적군이 대오를 갖추고 반격에 나서 수도가 방위되었다. 그제서야 독일군은 다시 소비에트에 강화를 요구했다.
여전히 당 내부에서는 강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소비에트의 장래를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조약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이 채택되어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기로 했다. 1918년 3월 15일 소비에트 대표 대회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소비에트는 정권을 공고히 하고 국민 경제를 회생시킬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57. 1920년대 중국 여대생들의 브래지어 벗기 운동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전신인 <청년>지가 창간되면서 늙은 대국 중국에서는 수천 년 동안 굳어 온 인습에 대한 힘겨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도전의 선봉은 1905년 신식학교제 설립에 따라 형성된 대도시의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마침내 1919년 5,4운동으로 분출해서 중국 반제 반봉건 역사에 또렷한 이정표를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전국을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던 군벌들은 5,4운동의 격량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전히 건재했다. 학생들에게 중국의 미래는 암담해 보였다. 5,4운동이 시들고 2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가는 좌절과 무기력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 학생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정치 투쟁 대신 중국을 병들게 하고 있는 반인간적인 전통과 관습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인간 해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당시 대학문이 여성에게도 개방되면서 남녀관계라는 새로운 문제가 이 시기 대학생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했다. 한 학생은 수업중 여학생에게 신경이 쓰여 “한 시간 수업이 마치 자유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저 여학생은 아무런 교태도 부리지 않는데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걸까”라며 상사병을 앓았다. 1년 반 동안에 200여 통의 사랑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은 여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전통 부정의 일환으로 성욕의 긍정, 자유연애 옹호를 주장했다. 학생 잡지에는 수음, 몽정, 생리 등 성지식을 제공하는 칼럼이 생기고 서점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연애와 사랑을 찬양하는 소설들이 즐비했다.
한편 1919년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는 설립된 이래 여학생의 수가 꾸준히 늘어 1922년에는 665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여학생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 때 나타난 것이 `방흉운동` 즉 브래지어벗기운동이다. 물론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브래지어가 아니라 천으로 가슴을 눌러 묶는 것이었다. 젊은 여인의 발달된 젖가슴을 천으로 묶는 것은 가슴을 압박하여 폐활량을 감소시키고 기포가 확장할 수 없게 만들어 건강을 헤치고 여성의 활동력을 약화시킨다고 여학생들은 주장했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솟아오른 젖가슴을 추하게 여겨 억지로 감추도록 강요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이 운동은 젖가슴을 묶지 않고 입을 수 있는 복장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전족으로부터 여성의 발이 해방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여자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야 하는 관습에 저항하여 단발을 주장하는 여학생도 나왔다. 1927년 무한에서는 여성들이 단발하고 옷소매를 짧게 하며 양말을 벗고 다니는 풍조가 유행했다. 그리고 주위의 눈총을 무릅쓰고 외모상의 혁명을 실현시킨 여성은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유명한 소설가 파금의 소설에는 단발한 여학생 허천여의 심정이 그려져 있다. “단발을 하기란 쉽지 않아. 오늘 나도 등교길에서 남학생과 건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 길 가는 사람들도 모두 나만 쳐다봤어.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았어. 일부러라도 내 용기를 시험하고 싶었지. 내가 왜 남을 두려워해야 하지? 나도 어엿한 한 사람의 인간이야.”
여학생들의 방흉, 단발운동은 단순히 외모 변화의 운동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부터 여성을 옥죄는 지배권력, 관습과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투쟁이었다. 전통의 보루인 가정과 고향마을에서 이런 여성들은 `요괴`로 배척당했다.
결국 양측의 대립은 `이초사건`에서 충돌한다.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 학생인 이초는 보호자인 양오빠가 결혼을 강요하자 이를 거절했다.그러자 양오빠는 경제적인 지원을 끊었다. 그녀는 생활의 곤궁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결핵에 걸려 2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동료와 지식인들은 이 죽음에 분노해 `이초여사추도회`를 열며 전통의 포학에 항의했다.
또 장사지방의 여성 조오정은 부모가 강요한 결혼에 저항, 시집가는 가마 속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1927년 무한에서 벌어진 공산당 숙청 때는 단발한 여학생은 무조건 공산당으로 간주해 살육한 뒤 발가벗겨 길거리에 전시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상해 대학의 여학생이자 유부녀인 양지화는 뒷날 공산당 지도자가 되는 상해 대학의 젊은 교수 구추백과 결혼을 하면서 전 남편과의 이혼, 새 남편과의 결혼, 그리고 이 두 남자가 계속 우의를 지켜 나간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려 전통 관습을 우롱했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통과 관습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학생들 또는 그 압박에서 갈등하고 불안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은 북경 군벌 타도를 목표로 하는 손문과 장개석의 북벌이 시작되자 고향과 부모를 떠났다. 그들은 국민당에서 또는 공산당에서 봉건세력과 외세를 쓸어 내기 위한 투쟁에 젊은 열정을 불태웠다.
58.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효과는?
침략 문명을 상징하는 기계에 반대하여 물레로 실을 잣고 신식 옷 대신 흰색 천을 몸에 두르고 둥근 안경을 쓴 간디의 모습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인도 민중의 상징이었다.그리고 이런 간디의 모습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그가 주장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다.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 자격을 얻고 돌아온 간디(20세)는 봄베이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회사가 고문 변호사를 구하고 있어 그 일을 맡기 위해 처자식을 인도에 둔 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인종차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변호사였던 간디도 인종차별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역마차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가 끌려 나온 일이나 밤늦은 시간에 백인전용 도로를 걷다가 백인 경찰에게 구타당한 일 등은 간디로 하여금 자신의 반제국주의적 신념을 더욱 굳게 하는 경험들이었다. 또한 그는 그곳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 노동자들의 무권리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은 간디가 이후 인도에서 본격적인 반영운동을 벌이는데 굳건간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18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맞선 투쟁이 최초로 폭발한 것은 1857년 세포이 반란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영국은 인도 지배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전에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지배하던 것을 1877년 영국 왕을 황제로 하는 인도제국을 만들어 직접 통치하에 두었고 인도인의 모든 정치활동에 대한 단속도 강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독립을 위한 새로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85년 말 봄베이에서 최초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국민회의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내부가 급진파와 온건파로 갈라졌고, 또 영국의 공작으로 1906년 전 인도 이슬람 연맹이 결성되어 종교의 대립이 나타났다. 독립운동은 침체한 채 1차대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대전으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영국은 인도의 협력을 얻기 위해 전쟁이 끝나면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하면서 인도를 회유했다. 국민회의는 이를 따를 태세를 취했으며 당시 남아프리카에 있던 간디도 이에 응했다. 영국에 대한 협력이 인도의 자치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대전중 인도는 영국을 위해 150만 명의 병사와 식량, 광석, 고무, 목재 등 총 1억 4,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물자를 부담했다. 이 중 전사자는 3만 6,000명이 넘었고 부상자는 그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의 희생에 대한 영국의 보상은 롤라트 법이었다.이 법에 의하면 개인이든 단체든 간에 영국의 시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두 재판없이 투옥할 수 있었다.
전쟁중이던 1915년 병 때문에 귀국하여 조국에 머물고 있던 간디는 즉시 이 법에 대한 저항을 전 인도인에게 호소했다. 이 저항은 전 도시의 파업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모든 시민의 합심에 의해 대도시의 상업이나 교통을 마비시켜 식민지 당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샤티아그라하` 투쟁이라고 한다. 사티아그라하란 `진리를 파악한다`라는 뜻이다. 이 진리란 간디에게 사회에서 악한 것을 배제하는 올바른 힘을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비폭력 수단을 사용하여 현실 정치에서 압제자의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당국은 이 비폭력 저항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간디의 저항 운동이 시작된 꼭 일 주일 만인 1919년 4월 13일 암리트살에서 열리고 있던 저항 집회를 영국군이 습격했던 것이다. 여기서 379명이 죽고 1,200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도 전역은 들끓었다. 국민회의는 12월 암리트살에 모여 학살 사건의 책임 규명과 롤라트 법의 철폐 요구를 결의했다.
이듬해 1920년 간디는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영국에 대한 철저한 불복종 운동을 추진해 간다. 식민지 당국의 지배하에 있는 입법 기관에 대한 참가 거부,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당국 관리하에 있는 학교에 가지 않고 인도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 영국인 은행에 예금하지 않기, 관직 사직 등, 동시에 인도제 면직물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는 스와데시(국산품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전개 속에서 간디의 명망은 높아졌으며 인도 민중은 그를 마하트마(위대한 혼)라고까지 불렀다.
하지만 불붙은 대중 운동은 당국의 탄압 속에서 간디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1922년 2월 인도 북부의 촐리촐자 농민들이 경찰서를 습격, 경관 22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간디는 불복종 운동을 중단했고 그도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그 후 1928년까지 투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1930년 시작된 제2차 불복종 운동 때 경찰 무기고 습격이나 시 행정권의 장악이 일부 지역에서 일어났을 때 간디는 단호히 이에 반대했다.
또한 민족 운동의 발전과 나란히 자본가나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투쟁도 많이 나타났는데 간디는 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자본이나 토지 등 기득권에 대한 침범은 간디에게 일종의 폭력으로 보였던 것이다.
간디의 독특한 철학에서 나오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두 번에 걸친 투쟁은 스와라지(독립)를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화 <간디>에 나오는 불복종 운동 참가자들의 모습, 즉 경찰봉에 맞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모습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다음 단계의 투쟁을 위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실제 이 투쟁의 최대의 공헌은 국민 회의가 인도 전역에 조직되어 모든 계급, 계층의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그들의 민족 의식, 정치 의식을 고양시킨 데 있다.
59.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독재
1차대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새로운 세계와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희망이 가득찼다. 각국에서 선거권을 비롯한 민주주의적 권리가 확대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중동부 유럽에서도 의회 정치가 수립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희망은 10년이 못 가 다분히 소박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파시스트 운동이 대두되고 몇 나라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파시스트 운동의 원초적 형태는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차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이탈리아는 승전국이 되긴 했지만 국내외 상황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국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물가가 4배나 뛰어올랐고 실업자도 증가했으며 농민들의 생활도 궁핍하여 사회 불안이 커져 갔다. 여기에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노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전후 2년간 파업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1920년에 일어난 토리노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는 자본가들의 단합된 대응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탈리아의 지배계급인 자본가와 지주들은 이러한 혼란 사태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음에도 약속받은 `미수복 이탈리아`의 영토를 얻지 못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과격한 민족주의 감정이 높아갔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높아 갔으며 불만의 분출구로 폭력을 용인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났다.
파시시트 운동의 초기 추종자들의 대다수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었다. 전쟁 참가를 영웅적인 애국심과 결부시켰던 이들에게 종전은 가치관의 혼돈으로 다가왔다.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재적응의 문제, 즉 돌아갈 곳이 없다는 상실감을 야기시켰다. 여기에 더해 이탈리아와 같이 승리하긴 했지만 그 승리를 보상받지 못했다는 감정은 사회적 긴장을 초래했다.
1919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전투 파쇼`가 결성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처음에 그 구성원이 200명에 불과했던 전투 파쇼는 1921년이 되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편의적으로 혼합한 이데올로기(한편으로는 `미수복 이탈리아`에 대한 민족적 감정을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층의 호응을 얻기 위해 대중적 반자본 구호를 선전했다)와 무솔리니 개인의 매력이 함께 어우러져 20만 정도의 회원을 확보하며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921년 선거에서 35석(총 500석)을 차지하는 등 정계 진출은 미미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1922년 10월 이른바 `로마 진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지배층을 대변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의 책임이 있다. 전후의 `혁명적 위기`에 대해 지배층은 불안해 하고 있던 차에 공산주의에 대한 보루이자 사유 재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파쇼는 커다란 위안이었다.
이렇게 성장한 파시스트들은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생활고 때문에 불만에 찬 중간층, 농민 출신의 귀환병을 지지 세력으로 하면서 사회주의자, 기독교 사회주의자 등 진보적 인사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으며 노동 조합을 습격하고 파업을 분쇄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력 행위는 당연하게도 정부당국에 의해 묵인되었다.
여기에 더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 등 급진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파시스트들을 선거를 위한 구성에 끌여들었다. 이것은 당시 보수당의 지도자 조리티의 `파시즘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제압한다`는 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 지배층에서 파시즘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사회주의였다.
그렇지만 점증하는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노동자들도 힘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1922년 8월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총파업을 단행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이를 핑계로 왕국을 구할 것을 선포하고 파시스트 민병대로 하여금 로마로 진군하게 했다. 1922년 사회당은 3개 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새로 탄생한 공산당도 파시스트의 진출을 막는 공동 행동을 조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월 28일 파시스트들은 로마에 접근하자 파시스트들을 이용하려던 자유주의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서둘러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으나 국왕은 이를 거부했다. 국왕은 무솔리니가 왕정의 존속을 인정하자 파시스트들에 대한 진압을 포기하고 도리어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것으로 전후 4년간의 혼란이 종식되고 `안정`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 안정은 20년이 넘게 지속될 파시스트 독재 체제를 향한 침묵 속의 안정이었다. 파시즘을 이용하여 기존 질서를 지키려던 자유주의자들의 구상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정치적 자살을 감행한 셈이었다.
60. 세계 대공황의 발발
1929년 10월 24일(목요일) 아침 뉴욕의 월 가에 있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사상 유례 없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암흑의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날 `대공황`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그 이전까지 치솟기만 하던 주가가 별안간 폭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식을 팔려고 주식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제는 주식을 살 사람이 없었다. 5일 후인 29일 주가는 다시 폭락했고 몇 시간 사이에 주식 시장에 쏟아져 나온 매물이 무려 1,650만 주나 되었다.
하지만 주식 폭락이 대공황의 불을 당긴 것은 사실이지만 주가가 떨어진 것이 공황의 원인은 물론 아니다. 대공황의 원인은 이미 `황금의 20년대`에 내재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전후에 경제면에서도 세계 제1의 대국이 되었다. 전쟁시 연합국에 빌려 준 돈으로 말미암아 최대의 채권국이 되었으며 덩달아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전쟁 물자로 공급하면서 발전한 중공업은 전후의 번영을 떠받치는 지주였다.
20년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술혁신과 산업조직의 변모였다. 1920년 웨스팅 하우스 방송국이 대통령 선거전을 중계함으로써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는 20년대 후반이 되면 전체 가정의 40%가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기술혁신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자동차의 대량 보급이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상류 계급의 `비싼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을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대전 직전부터 대량 생산모델을 개발하여 전후가 되면 자동차는 대중 소비품으로서의 위치를 점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자동차는 연관 효과가 큰 제조업이므로 강철, 기계, 유리, 고무, 전기, 석유 산업, 건설업 등의 산업 발전을 선도했다.
이러한 발전에는 산업조직의 변모가 수반되었다. 포드에 의한 대중적인 자동차 생산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규격화된 부품사용과 콘베이어 벨트에 의한 대량 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출현했다. 이와 같은 생산방식에는 거대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업의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강도 높은 작업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구매력을 증대시킴으로써 대량생산에 할당한 대량 소비를 창출하려고 했다.
이렇듯 20년대의 미국은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잠재적 모순인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었다.
20년대 중반부터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사이에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앞서 말한 포드 자동차 공장의 숙련 노동자의 경우 높은 임금을 받는 편이었지만 전체 산업에서는 소수였고 그나마 노동 생산성 향상에는 밑도는 것이었다. 반면 노동 생산성은 20년대에 걸쳐 평균 43%나 높아졌다. 하지만 독점 기업에 의한 가격통제 때문에 상품 가격은 내리지 않았다. 이러니 소비자의 구매력은 늘 수 없었다. 황금의 20년대의 수혜자는 확실이 일반 대중이 아니라 기업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농민도 이 시기에 과잉 생산 때문에 가격 저하, 부채 증가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1929년 세계에서 가장 풍요한 이 나라에서 인구의 70%가 당시로서는 최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연간 2,500달러 이하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대중의 소득 증가의 정체는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반면 소수 상류계급으로의 부의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최정상 5%가 소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게다가 과세율도 낮았으므로 상류층의 저축은 더욱 늘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쌓인 돈은 생산적인 투자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투기로 향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증권 시장으로 달려 갔다. 이러한 주식 열풍은 당시의 호경기와 맞물려 주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승용차 판매 대수는 1927년의 경우 전년의 80%에 불과했고 주택 건설도 1926년 절정에 달한 이후 1929년까지 35%나 감소했다. 특히 192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업 생산, 가격의 하락은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아직 주가는 계속 올라갔고 9월 19일 그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절정은 곧 낭떠러지였다.
수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고 은행도 예금 인출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부도를 낸 기업이 5,000개가 넘었으며 수만 개의 기업이 파산했다. 이러한 공황은 실업으로 나타났다. 심각한 단계에 들어선 1932년 봄 전체 노동력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대도시에서는 자선단체의 구호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월 가에서 시작된 공황은 대서양을 건너갔다. 1차대전을 지나면서 유럽 경제는 미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공황은 강 건너 불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부 유럽을 시작으로 영국, 가장 늦게 프랑스까지 공황에 휩쓸려 들어갔다. 바야흐로 세계 대공황이 발발한 것이다. 약 4년간 지속된 공황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수천만이 넘는 실업자가 생겨났으며 공업생산의 저하, 농산물 가격의 폭락, 무역 감소, 금본위제의 정지가 초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공황을 타개하려는 각국 정부의 노력은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초래하여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모습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61. 신무기 실험대에 오른 게르니카의 비극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의 그림 가운데 `게르니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이 마을은 쑥밭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사격 연습하듯 기관총 세례와 폭탄을 퍼부었고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약 3시간의 폭격으로 1,654명이 죽고 889명이 다쳤다. 피카소의 <케르니카>는 독일군의 폭격에 대한 분노이자 고발이었다.
1930년대 유럽은 새로운 전쟁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독일에서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고 군비 확장에 힘을 쓰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점점 커 가는 파시스트 세력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세력의 대립 상황은 스페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주제 국가였던 스페인이 공화제로 바뀐 것은 1931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주민 세명 중 한 명이 문맹이고 토지 소유자의 겨우 2%가 경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카톨릭 교회가 넓은 토지를 비롯하여 스페인 국가 재산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교회 세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했다.
공화당과 사회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공화국 정부는 교회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고 보통선거의 도입, 군대 개혁, 토지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지주, 자본가, 성직자, 장교 등 전통적인 지배 계층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그 결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극우 정당인 팔랑게 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총선거에서는 독일에서의 나치의 정권 획득에 고무된 듯 우익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내각에도 참여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대해 마드리드와 북부 공업지역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을 지키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1936년 1월 공화당 좌파, 사회당, 공산당 등으로 인민 전선이 결성되었고 이어 열린 2월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우파는 이에 반란으로 답했다. 그 해 7월 식민지 모로코에 있던 프랑코 장군(Francis Franco, 1892-1975)이 반란의 신호탄을 쏘았고 이에 본국의 반동 세력이 호응했던 것이다. 스페인은 인민 전선에 의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전의 초기에는 공화파가 불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형세를 뒤바꾼 것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군사 개입이었다. 영국은 6만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무기, 자금을 반란군에게 지원했고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직접 군사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으로 파시스트 세력의 도발을 묵인했고 오직 소련만이 벙력과 무기를 보내 공화국을 지원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지원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전 세계 지식인, 노동자의 참전이었다. 반파쇼 정열에 불타는 전 세계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스페인의 갓 피어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약 3,4만이었으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에 참가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이 반파시즘 전쟁에 참가한 체험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들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이러한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벌어졌다. 바스크는 스페인에 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는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부터 스페인에 자치를 요구했다. 1936년 10월 인민 전선 정부는 바스크의 자치를 지지하고 자치 정부를 승인하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 후 바스크에서는 프랑코의 반란군에 반대하고 인민 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프랑코는 바스크를 공격하여 북부 지방을 먼저 장악하려 했다. 여기에 신무기를 실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Hermann Goring)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괴링은 히틀러가 프랑코의 반란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스페인 내전을 독일 신무기 실험장으로 이용하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였다. 그리하여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최신형 폭격기, 신무기들이 이 고요한 마을을 폭격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폭탄,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투하되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벌어진 약 2년 후인 1939년 3월 말 끈질기게 버티던 마드리드가 프랑코 군대에 함락되었다. 마침내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2차대전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마드리드가 함락된 해 9월 독일군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새로운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62. 보살의 출현을 믿은 일본 국군주의의 시조
1936년 2월 26일 새벽 5시.
전날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도쿄시내 곳곳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로부터 24시간 동안에 일본제국의 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고 수상, 천황의 측근들이 피습되었으며 경시청, 육군성, 참모본부 등이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500여 명의 병사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른바 `2.26사건`의 반발이다.
이 쿠데타는 국가주의 사상과 중국에 대한 무력 진출을 주장하는 육군의 위관급 장교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중국 문제 등에서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며 무력 진출을 망설이고 있고 농민 경제의 파탄 등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면서 정부각료, 정당, 재벌 등 국내 지배 계층의 제거와 천황 친정을 거사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명치유신에 빗대어 `소화유신`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무력에 굴복한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들을 사태 수습을 위한 계엄군의 일부로 편성시켜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들이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숭배하고 있던 천황이 쿠데타군을 용납하지 않았다.
26일 아침 사건 보고를 받은 천황 히로히토는 “저들이 내 오른팔과도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고 이제 내 목을 조이려 드는구나”라며 즉각 진압을 명령했다. 일이 틀린 것을 깨달은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명령에 의한 `영예로운`자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자결하려거든 너희들 맘대로 하라”며 자결명령 칙사파견을 거절했다.
결국 주모자 17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이후 일본은 쿠데타에 동정적이었던 일본 국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중일 전쟁, 국가 총동원 체제, 태평양 전쟁으로 내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사형수들의 명단 중에는 검찰당국이 `수뇌`로 지목한 민간인 한 명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일본 파시즘의 교조`, `순정 파시스트`, `혁명의 실천가` 등으로 불리며 청년 장교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기타 이키였다. 당시 55세.
19세 때 오른쪽 눈을 실명한 외눈박이 청년 기타는 1906년 23세의 나이로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자비로 출판, 당시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자본론에 버금가는 저작`, `기성 학자 계급에 대한 정복` 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후일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일본 군국주의 시조치고는 역설적인 데뷔가 아닐 수 없다.
손문이 만든 중국동맹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이어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터지자 상해로 건너갔다. 거기서 중국 국민당 초대 당수였던 송교인과 깊은 친교를 맺고 8년 동안 중국 혁명의 성공에 매진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손문의 중국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영국을 동아시아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중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로써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성취할 수 있고 이 과정은 동양의 맹주인 일본의 사상적 지도로 이뤄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같은 생각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허울 아래 실제로는 조선에 이어 만주, 중국도 일본이 장악해야 한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드러낸 것이다. 기타의 이 주장은 혈기 왕성하고 호전적인 젊은 장교들을 사로잡았다. 젊은 장교들은 중국에 대한 무력 침략을 지상 과제로 여기게 되었고 1930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 전쟁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타는 원세개의 집권과 북경 군벌의 발호 등으로 퇴색한 중국 혁명에 실망하고 1919년 상해의 한 여관에서 그의 혁명사상을 정리한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을 집필했다. 이 책은 곧 이은 그의 귀국과 함께 일본의 우익 인사, 청년 장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아 우익의 바이블로 불리기 시작한다. 2,26당시 지도자였던 한 장교는 처형되기 전 남긴 옥중수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은 한 자 한 획도 수정하지 않고 완전히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대강은 절대진리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평하고 또는 훼손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그럼, 그 내용은 무엇인가?
기타는 소화유신을 이룩하기 위해서 당, 재계, 군, 관료의 제거를 주장했다. 그는 천황을 등에 업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3년간 헌법을 정지시키고 귀족원(전후 참의원), 중의원을 해산시켜 버리려고 했다. 또한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당시는 납세액이 10엔을 넘는 남자만이 선거권을 갖고 있었다) 선거에 의해 국가개조의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개인의 사유 재산과 기업 자본금의 한도를 정해 그것을 초과한 액수는 국유화하여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국영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경영과 수지결산에 관여할 수는 없으나 그 대신 중의원을 통하여 국가의 모든 생산에 발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대외적으로 기타는 일본을 아시아의 우두머리로 인식했다. 그에게 한국은 언어와 풍습의 차이만 있을 뿐 나라의 기본인 사상면에서는 일본과 완전히 같아 다른 나라라기보다 훗카이도와 같은 서간도일 뿐이었다. 또 대영토를 이뤄 일본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는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에서 맞서 호주와 극동시베리아의 점령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군비의 확장을 주장했다.
기타의 이론에서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보이지만 이것은 기성 계급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패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는 민중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헌신만을 강조하면서 전쟁터로 내몰았을 뿐 어떠한 민중을 위한 정책도 구상조차 하지 않았다.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을 완성하고 난 후 기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매일 법화경을 암송하면서 소일했다. 신비롭고 카리스마 같은 분위기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법화경에 나오는 `보살의 출현`이야말로 혁명의 성취를 예언한 것이라며 소화유신의 실행을 선동했다.
그가 죽고 난 후 그를 죽인 군 상층부에 의해 추진된 군국주의화정책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출현한 것은 보살이 아니라 원자탄이었다.
63.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흔히 장개석과 모택동의 싸움을 2000년 전에 있었던 항우-유방의 싸움과 비교하곤 한다.
유방은 일개 농민의 아들로 병사 한명 창 한자루도 없는 맨손이었다. 그는 주변의 친구, 동지 들에게는 신의로, 백성에게는 관대함으로 급속히 인심을 얻어 갔다.
이에 비해 항우는 초나라라고 하는 강대국의 최고 귀족 집안의 자제로, 유방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초패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사를 혹독하게 다루었고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있었다. 결국 항우는 유방의 군사가 사면에 불러 대는 초나라 노래를 들으며 회한에 찬 최후를 맞게 된다.
중국에서 국민 혁명이 시작된 이래 장개석과 모택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은 항우와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장개석은 북벌 전쟁을 통해 군벌을 타도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한 국민당의 당권, 군권 등을 한몸에 장악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가히 유일한 중국의 지배자였다.
장개석이 1927년 상해에서 피비린내 나는 공산당 숙청(4.12쿠데타)을 자행했음에도 그가 곧 이어 국민당 최초의 통일 정권인 남경 정권을 수립했을 때 민중의 지지는 열광적이었다. 오랜 통치에 지친 사람들은 국민당의 통일 정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실 장개석이 집권한 1927년부터 일본군이 침입한 1937년까지 남경 정부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과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1928년 최초의 국립은행이 설립되고 이금제(한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부과되는 내지 관세)가 폐지되어 국내 시장의 통일이 진전되었다.
또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세계 공황의 여파와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시달리고 있는 농촌을 구제하기 위해 농촌건설을 전개, 공산당의 소비에트에 맞대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중반에는 전국경제위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업화를 추진했다. 1935년에는 종전의 냥을 원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아편 전쟁 당시 빼앗겼던 관세 자주권을 열강으로부터 되찾음으로써 중국 민족의 숙원을 풀었다.
정치척으로도 잔여 군벌들을 아우르고 공산당을 오지인 연안으로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에 찬 장개석 정권은 손문의 국가건설 단계인 군정-훈정-헌정 중 최종단계인 헌정 실시를 약속하고 1935년 헌법을 기초했다.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민당 정부가 반제 반봉건의 노선으로 매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47년 공산군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국민당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내전을 시작한지 3년도 안되어 대륙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우선, 장개석의 독재적 성향이다. 그는 북벌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을 동원하기 위해 당내 이들을 위한 조직을 설치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북벌이 끝나고 자신이 통일 정권의 지배자가 되자 이 조직들을 폐지하고 민중운동을 폭력으로 탄압했다. 학생이나 지식인의 움직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이 손문의 유지와 장개석의 약속대로 헌정의 실시, 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장개석은 헌법 초안을 만든다는 구실로 시간을 끌었고 점차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당내 좌파가 끊임없이 독재 체제의 완화를 촉구했지만 장개석은 정치란 엘리트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수의 군부 인사와 당료들의 의견만을 들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대중의 힘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그가 버린 대중은 공산당 쪽으로 향해 갔다. 이 점에서 모택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초창기의 혁명성과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노쇠하기 시작 했다.
둘째, 남경 정부의 도약기에 엄습한 일본의 침략은 치명적이었다. 전쟁의 첫해에 국부군은 그 때까지 10년 동안 이룩한 인원과 장비의 대부분을 파괴당했다.
그 후로 국부군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권이 피난 간 서부의 오지인 중경은 당시로서는 거의 외국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낯선 곳이었고 낙후한 지역이었다. 서부 중국은 전국 전력의 4%만을 생산했고 공장수의 6%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거의 농업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낯선 국민당 사람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중경에 있을 때 국민당 정부의 수입은 63%나 감소했다. 정부의 적자 재정에서 비롯된 인플레는 7개월 동안 251%나 물가가 오를 정도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학생과 지식인 들은 장개석에 대해 전민 항전, 즉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지 말고 이들 대중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것만이 대일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서 장개석이 약속했으나 실행하지 않고 있던 의회의 개설을 촉구했다. 요컨대 정권의 민주화만이 전쟁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은 이 주장에 대해 장개석은 전쟁은 정부와 군대가 한다며 코웃음을 쳤다. 반면 공산당은 이들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을 그치면서 많은 지식인과 학생, 사회 저명인사들이 국민당의 독선에 염증을 느끼고 공산당 쪽에 가까워져 갔다. 게다가 장개석은 이들이 빨갱이라며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도와 주었다.
1945년 소련의 만주 진공도 장개석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가 만주에서 군사적, 행정적인 힘을 확보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만주의 공업시설들을 떼어 갔다. 그리고 이곳에 공산군의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다. 풍부한 식량과 일본인이 남겨 놓은 공업시설을 갖고 있는 만주를 장개석이 확보했다면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당 약체화의 또 다른 원인은 중앙 정권에 대한 지방 세력의 저항을 들 수 있다. 1940년대 말까지 군벌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고 중앙정부는 마을단위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거듭되는 패전과 살인적인 인플레로 위기에 직면한 장개석 정권은 1948년 통화 개혁을 단행한다. 장개석의 아들이자 후일 자유중국의 총통이 되는 장경국이 주도한 이 개혁은 법폐라는 옛돈을 금원권이라는 새 돈으로 300만 대 1의 비율로 바꾸고 동시에 모든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화 개혁은 7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당 정부는 붕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절망한 장개석은 1948년 1월 이렇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중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오늘날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혁명 정당이란 있어 본 일이 없다. 얼이 빠져 있고 기율이 없으며 더 나아가 옳고 그른 기준도 없다. 이 따위 당은 오래 전에 부서져 쓸어 버려야 했다.”
그러나 당의 기율을 세우고 옳고 그른 기준을 바로 하라는 수많은 충고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것은 장개석 자신이었다.
64.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여긴 베트남 사람들
1940년 프랑스가 나치에게 함락되자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 눈독을 들인다. 당시 장개석은 인도차이나와 가까운 중경으로 수도를 옮겨 일본에 결사 항전하고 있었는데 물자 보급이 주로 인도차이나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에게 좋은 구실이었다.
1940년 6월 일본은 프랑스 식민총독을 협박해서 군사 사절단을 파견, 장개석에 대한 물자 보급로를 끊었다. 이어 9월에는 2만 5,000명의 군대를 진주지켜 프랑스 식민지당국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80년 동안 절대자로 군림해 오던 프랑스가 같은 동양의 일본에게 쩔쩔매는 것을 지켜 본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독립의 희망을 일본에게서 찾았다. 사실 그보다 35년 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자 베트남 지식인들은 경악한다. 동양의 소국 일본이 대러시아제국을 격파하다니...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즉시 일본을 배우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각계 각층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우수한 젊은이들을 도쿄에 유학시키는 이른바 동유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많은 민족주의 망명객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본질을 간과하고 같은 동양국으로서 서양의 침입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과 과거의 인연을 앞세웠다.
일본군이 진주한 후 베트남 보국동맹회는 일본군의 무기 지원을 받아 봉기, 프랑스 군을 공격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각지에서 무모한 봉기를 계속했다. 까오다이, 호아하오 등 전국적인 종교단체들도 일본을 환영했다. 그들은 일본헌병대의 도움으로 교단을 재조직하고 일본에 정보를 제공했으며 사이공의 일본군 조선소에 노동력을 공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젊은 교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훗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고딘디엠도 이 때 일본군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독일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하의 프랑스 식민당국을 인정하면서 간접통치를 하려 했던 일본의 구상은 연합군과 드골이 파리를 탈환하고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이 인도차이나에 상륙할 경우 프랑스군이 일본에 반기를 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3월 9일. 마침내 일본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총독을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유명무실하게 황제 자리를 지켜오던 우엔 왕조의 바오다이 황제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게 하고 저명한 역사학자 쩐쫑킴에게 내각 구성을 맡겼다.
연로한 쩐쫑킴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일본이 다루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었다. 그의 내각에는 민족적인 성향의 정치인은 거의 없고 단순한 행정관료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베트남 인의 내각이라기보다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행정 기구에 불과했다. 프랑스 총독부의 행정 기구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일본인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베트남 인은 환호와 감격의 물결에 휩싸였다. 각지에서 저명인사들이 애국강연회를 열었고 수많은 정치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일본의 행동을 찬양하고 일본에 접근하여 독립베트남 정권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일본 지도부는 이미 베트남을 중국, 소련, 영국, 미국과의 전쟁을 위한 식량 보급기지로 설정해 놓고 베트남의 독립은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국이 일본의 반불 쿠데타에 환호를 보내고 있을 때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베트민(도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많은 베트남인들과 달리 일본이 결코 베트남의 독립을 갖다 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도처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 밀리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연합군에 접근했다. 연합군도 프랑스 식민당국의 행정체계가 파괴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던 베트민이 필요했다. 호찌민은 반일노선을 굳히고 중국 운남성 곤명에서 미국의 제14공군사령관을 만났고 OSS(미국전략첩보대)와 구체적인 작전 계획도 논의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고 이틀 후 소련이 만주에 진입하자 베트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일본의 항복이 박두했음을 깨닫고 즉각적인 총봉기를 결행했다. 일본을 해방군으로 여겼던 많은 국민들과 정치단체들은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8월 19일 하노이가 베트민 장악하에 들어갔고 공산당의 세력이 비교적 약했던 사이공까지 8월 25일 베트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것이 8월 혁명이다.
8월 30일 바오다이 황제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인 황금의 보도를 베트민 대표에게 넘겨 주고 퇴위했다. 그로부터 3일 후 호찌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많은 베트남 인들은 비로소 일본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베트남 인들은 호찌민 정부 아래서 자신의 이권을 되찾겠다며 돌아온 프랑스와 그에 뒤이은 미국의 침략과 맞서 처절한 전쟁을 수행했다. 이제 아무도 환상 따위는 갖지 않았다.
65.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한 비결
전투의 성패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아군과 적군의 준비 정도, 지휘관의 적절한 작전 계획 수립과 그것의 효과적인 실행 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주요한 대규모 전투는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그에 따른 적절한 준비를 갖추기 때문에 몇 가지 우연적인 일에 의해 성패가 결정 지어지기도 한다. 2차대전의 노르망디상륙 작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2차대전 초기 패배를 거듭하던 연합군은 1942년 초여름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드웨이 전투(1942 .6), 아프리카전선에서의 롬멜의 전차 부대의 패배에 이어 1943년 2월 동부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나섰던 30만의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아프리카 전선을 석권한 연합군은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이어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했다.
이렇게 모든 전선에서 유리한 국면에 들어서게 되자 연합군은 유럽 본토에 대한 상륙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이 계획이 실현된 것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며 이 전투의 상황은 2차대전의 영웅들이 총출동하는 <가장 긴 날(the Longest Day)>이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것은 1944년 6월 6일이었다. 영국에 집결했던 연합군은 그 전해부터 상륙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쌓았고 준비도 착착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독일측도 이에 대비하여 대서양 연안의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그런데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대한 방어에서 독일군은 세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 지점을 노르망디가 아니라 그보다 동쪽인 칼레 방면이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정예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칼레 지역이 영불 해협에서 가장 거리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게다가 주력군이 노르망디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는 레지스탕스의 공격으로 이동이 지체되었다.
독일측의 두번째 실수는 상륙 날짜를 잘못 예상한 것이었다. 연합군이 상륙하기에 알맞은 때는 해가 늦게 뜨고 새벽에 썰물이 날 때였다. 그 조건에 맞는 것은 6월 5일에서 7일 사이였다. 그런데 6월이 되고 보니 날씨가 매우 나빠졌다. 잘못하면 작전을 한 달이나 연기해야 할 판이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은 예상을 뒤엎고 6월 6일 아침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 주정을 발진시켰다. 때마침 날씨가 약간 좋아졌던 것이다.
여기서 세번째 실수가 겹쳤다. 독일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속임수이고 이후 적의 주력 부대가 다른 곳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때문에 독일군은 연합군을 해안에서 격퇴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 셈이었다.
이렇게 교두보를 확보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빠른 속도로 진격했고 8월 말에는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봉기로 파리가 해방되어 연합군은 유유히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66. 채플린은 공산주의자였나?
큰 구두에 중산 모자, 지팡이를 든 콧수염의 신사 찰리 채플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보이는 웃음 속에 비수처럼 감추어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자유를 향한 절규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191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30년이 넘게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활동하던 채플린은 1952년 고향인 영국 여행을 떠나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출세시켜 준 미국을 버렸는가? 아니면 미국이 이 천재 예술가를 버렸는가?
20년대 `빨갱이 소동(Red Scare)`을 한차례 치른 미국은 2차대전 후 소련과 냉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다시 한번 그러한 소동을 겪게 된다. 이때의 빨갱이 소동을 매카시 선풍이라고 한다. 이는 극단적인 우인 반공주의자인 공화당의 상원 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y, 1909~57)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워싱턴 정가에서 `가장 형편 없는` 상원 의원이란 평판이 자자했던 인물로 1950년 선거가 다가오자 돌파구를 반공 선전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 동기에서 출발한 반공 선동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사회적인 현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1950년 2월 매카시는 미국 국무성 안에 수많은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이후 1954년경까지 상원의 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진보적인 지식인과 뉴딜 파의 정부 인사들을 차례로 `빨갱이`라고 몰아 그 직위에서 추방했다. 그런데 이러한 매카시 선풍은 사회 각 분야로 퍼져 교육 기관, 노동 조합 나아가 헐리우드까지 확대되었다. 채플린이 미국을 떠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였다.
사실 채플린이 공산주의 활동가라는 혐의로 감시의 대상이 된 것은 1921년 부터였다. FBI의 채플린에 관한 파일은 1,900페이지가 넘으며 거기에는 독일의 유명한 망명 시인 브레히트 등 좌파 인사들과의 친교가 기록되어 있다. 채플린은 어느 정치 조직에도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진보적 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을 주었으며 이따금 정치적인 발언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감시의 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영화 속에 담겨 있다. `빨갱이`라는 비난은 <모던 타임즈>를 만들 때쯤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 후 <위대한 독재자>, <무슈 베르두> 같은 작품과 함께 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서도 매스컴 특히 우익계 잡지는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비난의 초점은 주로 사생활에 관한 흥미거리이거나 또는 탈세 혐의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채플린은 당시 `빨갱이 사냥`의 도구를 활용된 반미행위 조사위원회의 출두 요구를 여러 차례 받지만 모두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회답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정당이나 정치 단체에 가입한 일도 없다. 나는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평화주의자이다.”
하지만 굳은 신념의 소유자인 채플린도 `빨갱이`라는 사회의 비난을 감내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라임 라이트>를 촬영할 무렵 그는 막다른 골목으로 쫓긴 상태였다. 1952년 이 영화를 완성한 후 시사회를 위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떠날 때 그는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법무성은 채플린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는 미국에 오래 살기는 했지만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스위스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하지만 채플린은 1972년 그러니까 그가 죽기 5년 전 `빨갱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2년 4월 2일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영화 산업을 예술로 바꾸어 놓았다는 찬사와 박수 갈채 속에서 오스카 상을 받은 채플린은 감격의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모던 타임즈>마지막에 나오는 `스마일`을 합창했다. 쫓기듯 미국을 떠났던 채플린으로서는 감격에 겨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67. 오키나와는 독립 왕국이었다.
일본은 근대 국가로 변신한 이래 영토 팽창에 대한 욕구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욕구는 지금도 북방 4개 섬으로 러시아와, 독도로 한국과 분쟁을 낳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으로 남한지역을 그들의 옛땅으로 여기는 생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이 같은 일본인의 영토 욕심에 최초로 희생된 것은 지금은 누구나 일본의 영토임을 의심하지 않는 일본 남부 해상의 군도 오키나와이다. 극동 최대의 미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오키나와는 사실 불과 100여 년 전인 명치유신 무렵까지는 류큐라는 독립 왕국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의 역사는 미국이 군정을 실시했던 기간 27년을 빼고 나면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기간이다.
류큐 왕국이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1372년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의 요청에 응해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류큐 왕국은 3개의 정권으로 분열되어 존재하다가 1429년에는 통일 정권이 수립되고 16세기에는 동지나해 일대에 광범한 무역 영역을 갖는 류큐 왕국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 왕국의 주요 무역대상국은 조공 무역을 하는 중국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조공 횟수는 171회를 넘어 2위인 베트남(89회), 10위 조선(30회), 13위 일본(19회)을 훨씬 웃돌고 있다. 당시 명나라는 중국 상인의 해외진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류큐 상인은 유리한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조선과 일본에까지 진출했다. 우리 나라의 부산은 이들의 중요한 무역대상지였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인은 태국에서 동포의 시체를 버리지 않고 소금에 절여 고국으로 데리고 가려는 류큐 인을 보고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고 노예매매를 하지 않는다. 전 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동포를 파는 짓은 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번성하던 류큐 왕국은 1609년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의 침략을 받는다. 당시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와의 무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류큐를 중개지로 하여 명과의 무역을 재개하려는 속셈으로 사쓰마번의 군사 행동을 방관했다. 1615년 사쓰마의 류큐 침략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진족인 후금에 압박당하고 있던 명나라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후 이를 묵인하게 된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가 등장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청나라는 류큐에 표류민의 송환을 명령한다. 이는 `표류민은 반드시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귀국시킨다`는 막부의 법령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큐 왕은 청의 명령을 따르고 “만약 나가사키에 표류민을 보내면 류큐가 일본에 복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게 된다”며 일본측을 달랬다. 이 같은 이중 조공외교로 류큐는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1872년 일본의 명치 신정부는 류큐 왕국을 일개 번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어 1879년에는 류큐 왕 상소를 강제로 도쿄로 끌어오고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만들어 버렸다. 왕국에서 번으로, 이제는 중앙 정부의 지방 행정구역에 불과한 현으로 전락하여 한때는 동아시아를 주름 잡던 무역왕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일본에 편입된 류큐, 즉 오키나와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2차대전이 종국으로 치달을 무렵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해 오키나와에 상륙을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남녀노소 17만 명의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이어 1945년 4월부터 니미츠(C.W. Nimitz)포고에 의하여 미군정이 시작되고 거대한 미공군기지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일본 패망 후 1952년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도 오키나와는 계속 미국의 영토로 되어 있어 그 후 미일 양국의 현안 문제로 존재해 왔다.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 귀속된 것은 1972년 일이다. 당시 닉슨 미국대통령은 미국의 국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맹국들의 책임 분담을 요구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오키나와 반환 교섭이 급진전됐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과 일부 야당은 반환과 함께 미군기지 철폐 또는 축소, 특히 핵기지의 완전 철폐를 요구하여 미국과 일본 양쪽 정부와 충돌했다. 이 때 오키나와내에는 일본과 단절하려는 오키나와독립론이 일어나 신문에는 `류큐 민족의 독립을 절규한다`는 기사가 살리기도 했고 류큐 독립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일본 자민당과 사토 내각은 이들의 주장을 묵살한 채 국회에서 비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1972년 5월 비운의 땅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의 영토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 읽을 만한 책들
1. 그리스.로마 신화
2. 민석홍 지음, <서양사 개론> (삼영사)
3. 배영수 엮음, <서양사 강의>
4. 대월서점 편집위원회 엮음, 이윤희 옮김, <에세이 세계사> 1~5(백산서당)
5. 진필상 외 지음, 김세익 외 옮김, <세계 역사 오천년 이야기> 1~6(중원문화)
6. 동양사학회 엮음, <개관 동양사> (지식산업사)
7. 궁기시정 지음, 조병한 옮김, <중국사> (역민사)
8. 앤더슨, P., 유재건. 한정숙 옮김,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창작과비평사)
9. 앤드류, A., 김경현 옮김, <고대 그리스사> (이론과 실천)
10. 허승일 지음, <로마사 입문> (서울대 출판부)
11. 블로흐, M., 한정숙 옮김, <봉건 사회> 1~2(한길사)
12. 앤더슨, P., 김현일 외 옮김, <절대주의 국가의 역사>(소나무)
13. 소불, A., 최갑수 옮김, <프랑스 대혁명사> (두레)
14. 홉스봄, 박현채 외 옮김, <혁명의 시대> (한길사)
15. 보, M., 김윤자 옮김, <자본부의의 역사> (창작과비평사)
16. 리드, J., 장영덕 옮김, <세계를 뒤흔든 열흘> (두레)
17. 페로, M., 황인평 옮김, <1917년 10월 혁명>(거름)
18. 라쟈노프스키, 니콜라이 V., 김택현 옮김, <러시아의 역사2> (까치)
19. 호스킹, J., 김영석 옮김, <소련사> (홍성사)
20. 리히트하임, G., 유재건 옮김, <유럽 현대사> (백산서당)
21. 이주형 지음, <미국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2. 이병수. 우기동 지음, <철학의 철학적 이해> (돌베개)
23. 프리샤우어, P., 이윤기 옮김, <세계 성풍속사> 상.하(까치)
24. 버날, J., 박정호 옮김, <사회 과학의 역사> (한울)
25. 민두기 엮음, <일본의 역사> (지식산업사)
26. P. 두스, 김용덕 옮김, <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27. 서울대 동양학연구실 엮음, <강좌 중국사> Ⅰ~Ⅶ (지식산업사)
28. 후외로, 양재혁 옮김, <중국철학사> 상. 중. 하, (일월서각)
29. 민두기 엮음, <중국현대사의 구조> (청람)
30. 강동진 지음, <일본근대사>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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