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에페3,16-17).
Ⅲ.관상 기도
2790관상 기도란 무엇인가?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답한다.“마음으로 하는 관상 기도란,제 생각에,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과 자주 단둘이 지냄으로써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관상 기도는“내 영혼이 사랑하는 이”(아가1,7)를 찾는 것이다.예수님을 찾고,또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왜냐하면,그분에 대한 소망이 언제나 사랑의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또한 우리는 순수한 신앙으로 그분을 찾으니,이 신앙은 우리를 그분에게서 태어나게 하고,그분 안에서 살게 한다.관상 기도 중에도 묵상을 할 수 있지만 우리 시선은 언제나 주님께 고정되어 있다.
2710관상 기도를 하는 때와 시간을 선택하는 일은 내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결연한 의지에 달려 있다.관상 기도는 시간여유가 있어서 하는 기도가 아니다.주님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만남에 어떠한 시련이 따르고 아무리 마음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도중에 주님에게서 그 시간을 다시 빼앗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늘 관상 기도를 할 수는 없다.그러나 건강이나 일이나 정서라는 주건들과 관계없이 언제나 관상 기도에 들어갈 수는 있다.마음은 가난과 신앙 안에서 주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가 된다.
2711관상 기도에 들어가는 일은 성찬 전례에 들어가는 것과 비숫하다.곧,마음을 ‘모으고’,성령께서 움직여 주시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집중시키며,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처인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우리가 머물고,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려,정화되고 변화되어야 할 제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2712관상 기도는 하느님 자녀의 기도이며,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하고 더욱 사랑하여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바라는 용서받은 죄인의 기도이다.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우리의 사랑 역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것임을 우리는 안다.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기 때문이다.관상 기도는,늘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더욱 깊이 일치함으로써,사랑하시는 성부의 뜻에 겸손하고 비어 있는 마음으로 승복하는 것이다.
2713이처럼 관상 기도는 기도의 신비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다.관상 기도는 선물이며 은총이다.이 은총은 겸손하고 비어 있는 마음을 가져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관상 기도를 통해서,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약의 관계가 맺어진다.관상 기도는 성삼위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을‘당
신과 닮게’하시는 친교이다.
2714관상 기도를 하는 시간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도 가장 알찬 시간이다.관상 기도 안에서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힘을 돋우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신다.이로써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무르시게 되고,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게 될 것이다.
2715관상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의 눈길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계십니다.“이것은 비안네 성인이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있을 때 감실 앞에서 기도하던 한 농부가 한 말이다.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예수님의 눈길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시선의 빛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준다.그분의 진리와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에 비추어,우리는 모든 것을 보게 된다.관상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향해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이리하여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은 ‘주님에 대한 내적 지식’을 배워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따르게 된다.
2716관상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다.경청하는 일은 결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신앙에 따라서 순명하는 것이요,종으로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며,어린이가 부모를 사랑하여 따르는 것과 같다.이런 경청은 종이 되신 성자의 “예.”(Amen)라는 응답과,겸손한 여종의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응답에 동참하는 것이다.
2717관상 기도는 침묵이다.곧“다가올 세상의 상징”,또는 “말 없는 사랑”처럼,침묵 속에서 하는 기도이다.관상 기도 중에 하는 말은 장황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와 같다.‘외적인’사람은 견딜 수 없는 이 침묵중에 성부께서는,강생하시고,고통 받으시고,돌아가시고,부활하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며,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하게 하신다.
2718관상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는 만큼,그리스도의 기도와 합쳐진다.그리스도의 신비는 교회가 성찬례에서 기념하는데,성령께서는 우리가 관상 기도 중에 그 신비를 다시 체험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나게 하신다.
2719신앙의 어둔 밤에 머물기를 동의할 정도에 이르면,관상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가 된다.부활의 새벽은 고뇌와 무덤의 밤을 통과한다.(‘연약한 육신’이 아닌)예수님의 성령께서,관상 기도 중에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적인 수난의 사흘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주신다.관상 기도에는“그분과 함께 한시간을 깨어 있을 것에” 동의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모두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서는 진실한 이들은 지켜주시나
거만하게 구는 자에게는
호되게 갚으신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
(시편31,24-25)
시인은 고통속에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애를 체험했다.그는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다른 이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라고 그들에게 가르친다.“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친구로서 사랑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한다.두려워하는 것은 종의 역할이고 사랑하는 것은 친구의 역할이다”(카시오도루스).“거만하게 구는 자”는 교만한 자이다.하느님은 다른 어떤 죄보다 교만을 싫어하신다.결국 경건한 이들은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도록 초대되고 교만한 자들은 하느님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된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은 주님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며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이다(시편33,18;69,4).시인은 그들에게 굳세게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이는 마치 약속의 땅에 들아가는 여호수아에게 주님이“힘과 용기를 내어라”(여호1,9)하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우리는 진실을 요구하고 교만한 이들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재판에서 위안을 얻고(소 아르노비우스),주님의 힘으로 건강하게 머문다(카시오도루스).
시편31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31편은 모욕과 업신여김과 박해를 당하는 사람의 기도다.시인은 수치를 당하는 자로 나타나며 자신이 그물에 묶여있다고 한다.그는 눈과 넋과 몸이 짓무르고,근심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며,기력과 뼈들이 쇠약해졌다고 하소연한다.또한 사회적으로도 이웃과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잊힌 존재가 되고,원수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있음을 불평한다.하지만 그는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놀라운 신앙을 보여준다.시인이 목숨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있으면서“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6절)라고 한 말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되었다.예수님은“아버지,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시고 숨을 거두셨다.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구절을 외우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주 예수님,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7,59)라고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었고,사도 베드로는“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1베드4,19)하고 말했다.또한 시인이“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시편31,16)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하나의 전례가 되어,개인이 임종을 맞이하여 자신에게 영혼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는 확신의 표현이 되었다.이 시편은 고통 속에 있을 때 더욱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 필요함을 이야기해 준다.그리고 고난 속에 있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지도록’(25절)힘을 준다.(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1-41편/전봉순 著/바오로딸)
3.인간의 자유
인간이 선을 실행하거나 윤리에 맞게 선택하는 것은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자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의지로 자신의 창조주를 찾으며 완성되도록 원하셨기 때문이다.따라서 인간은 분별없는 충동이나 순전히 외부 강박 아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이 주도하여 개인의 삶과 사회생활을 이끌어가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또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로 외부 세상을 바꾸기도 하고 참된 선에 부합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한 인격으로 성장하고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간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선과 악의 결정권자이신 하느님의 질서에 복종해야 하므로 그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인간은 자신이 진리 규범의 창시자나 절대 주인이 아님을 자각하면서 하느님께서 결정하신 운리법을 받아들일 때 완성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모든 분야에서 지켜야 할 윤리 조건들이 무시되고 불의한 상황들이 도덕 생활을 짓누르면“인간은 윤리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손상시키고,자신을 속박하며,이웃에 대한 우애를 파괴하고,하느님의 진리를 거역하게 된다”(가톨릭 교리서 1740항)
인간은 진리에 복종할 때,곧 감히 자신이 진리나 윤리규범의 창시자나 절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자유를 행사하여 개인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선한 행동을 하게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1749-1756항).“인간의 자유는 선물로 준 것이며,마치 한 알의 씨처럼 받아들여 책임감을 가지고 키워내야 하는 것이다”(진리의 광채86항).그렇지 않을 경우,자유는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면서 소멸한다.
(가톨릭 사회 교리 주제편 45-46쪽)
한밤중에
까닭없이
잠이 깨었다
우연히 방안의
화분에 눈길이 갔다
바짝 말라 있는 화분
어,너였구나
네가 목이 말라 나를
깨웠구나
(한밤중에/나태주)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