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황실> 대한제국 황실
1915년 조선황실 가족들/ 좌측에서 황태자(영친왕) 19세, 순종효황제 42세,
고종태황제 64세, 순정효황후 22세,덕혜옹주 4세
== 알고 넘어갈 사항 ==
조선이 대한제국황실이 되면서 왕은 황제로 대군이나 군등 왕자는 왕으로 봉작된다.
영친왕, 의친왕등의 일본식 왕 직위 표현이 있지만 영왕, 의왕 등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이 명명한 명칭을 적었다. 이왕이란 직위는 한일합방후 조선국왕에게
형식적으로 봉하는 일본의 직위였다. 합방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으로 봉해졌고, 순종의 승하후 이왕직은
영왕 이은이 물려받았다. -
[1] 고종의 가계도 : 고종 1852 - 1919
고종
명성황후 민씨 ---- 순종
귀인 장씨 ---- 의왕[이강]
귀비 엄씨 ---- 영왕[이은]
귀인 이씨 ---- 완왕(병사함)
소의 이씨
귀인 정씨 ---- 우
귀인 양씨 ---- 덕혜옹주
고종은 완왕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잃은 자식이 많으며,
황태자인 순종. 의왕 이강, 영왕 이은, 늙은 나이에 얻은 덕혜옹주가 있다.
1. 고종 [광무황제]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황제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25대 철종이 아들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고 대원군의 섭정 정치를 겪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개항되었고, 수많은 고초와 조선왕실의 번영을 위해 수십
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참변을 겪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아관파천) 1897년 독립협회에 의해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성립시키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905년 일본과 친일관료(을사오적)
사이에 외교협정이 맺어짐으로 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당하였다.
(을사조약)
고종황제는 외교권을 되찾고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헤이그특사를 1907년 파견하게 되나 일본에 의해 발각되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퇴위 당한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후 일본에 의한 감시와
함께 덕수궁에서 유패되어 세월을 보내게 된다. 독립을 위해 망명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위한
밀사를 파견하려고 하는 중 의문사 당하였다. 일본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황제의 승하가 전국에 알려지자 전국민의 분노를 사게되었고 결국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명성황후, 고종, 대원군
2. 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우아한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강건한 여걸의 성격 또한 간직한 분으로 알려져있다.
순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정실부인으로서 시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부터 왕권을 찾아
고종에게 전해 주었으며, 일본에 대항하여 친러시아정책을 펴다가 미우라공사가 이끈
일본의 낭인에 대해 시해되었다. 이 을미사변이 전 조선에 알려지면서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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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비 엄씨 [엄황귀비]
1861년 8세 때 대궐에 입궐 , 소생 : 1남 (황태자 은), 황귀비(1품) 책봉 (1903년)
1885년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으나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 밖으로 쫓겨났다가
1896년 고종의 명으로 대궐로 다시 입궐하였다.
시호는 순헌, 궁호는 망덕, 원호는 영휘이다.
영왕 이은의 생모로 고종의 상궁으로 명성황후 시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왕을 생산했으며, 거의 왕비로써의 역할 을 수행하였으나
출신상의 문제로 왕실에서 천대받았다.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 영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애를 태우다가
결국 1911년 장티푸스로 별세하였다.
4. 덕혜옹주
고종과 상궁 양씨에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1912년 출생. 13세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뒤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에 걸림. 19세때 일본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
그러나 결혼의 충격으로 병이 악화돼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38년
만에 귀국. 귀국후에도 백치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2002년 5월 27일 별세했다.
고종의 후궁이며, 덕혜옹주의 생모 양귀인(좌)/일본에서 생활 할 때 덕혜옹주(우)
덕혜옹주와 소다케시 백작(좌)/ 고종, 의친왕, 영친왕(우)
[2] 순종의 가계도 : 순종 1874 - 1926
순종 -----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첫째 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어린나이에 돌아가셨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셨다.
1. 순종 [융희황제]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명성황후 민씨사이에 태어 났다.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미 국가의 운명은 기운 상태였고 결국 1910년
한일합방에 의해 일본에 의해 이왕이라고 불리우며 창덕궁에서 생활을 하였다. 어린시절
누군가에 의해 아편을 탄 커피를 다량 마신 후 치아를 대부분 잃고,
남성능력을 상실하였으며, 결국 승하할때 까지 슬하의 자식없이 쓸쓸히 살았다.
일본에 의한 감시에 의해 고통받았으며, 망국의 한을 품은채 1926년 승하하셨다.
순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2. 윤대비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의 황후이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장녀이다. 순종의 첫째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두번째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33세(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고,
영왕이 이왕의 자리에 오르자(1926년) 대비가 되었고, 왕실의 최고 어른으서
마지막 조선왕실을 지탱해 나갔다. 6.25전쟁 때 피난을 못가 북한을 피해 창덕궁에서
극비에 탈출 운현궁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전쟁후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인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쫓겨나 정릉 산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4.19 혁명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낙선재로 환궁는 등
곡절 많은 생을 살다가 1966년 73세로 별세 하였다. 슬하의 자식도 없이 외로운
생을 산것으로 알려지며, 팔만대장경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1966년 윤대비가 돌아가실때 당시 주변의 10여명도 안되는 궁녀들이
남은 왕실의 몰락상황과 한국정부의 무관심한 처우는 윤대비의 한 많은
삶의 단면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첫번째 사진: 순종황제 (33세) (1873 ~ 1926)
두번째 사진: 순정효황후 윤비 (13세(1893 ~ 1989)
부산 피난시절/왼쪽이 순정효황후 윤씨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흥왕비 (고종황제의 형님이신 이재면 즉, "흥친왕"의 비)입니다.
왕실 사진. 좌로부터 옹주, 방자, 윤왕비, 순종, 영친왕,
영친왕 아들 진(瑨)과 고희경(高羲敬) 사무관
[3] 영왕의 가계도 : 영왕 1897 - 1970
-> 영왕과 영왕비
영왕 ----
영왕비 방자(마사코) ---- 진(유아때 사망)과 구(현재 생존)
= 원래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영왕은 일본의 조선왕족 결혼법 제정에 의해
강제로 일본왕족과 결혼하였다. 일본이 제정한 조선왕족결혼법은 다음과 같은데 "조선왕족
은 선일융화를 위해 무조건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영왕 이은 [의민황태자 영왕]
고종과 귀비엄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은. 4세때 영왕으로 명명되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다. 11세에 일본의 통감
이토 이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에서 교육받았다.
성격이 온화하고 총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920년 일본황족의 딸 방자(方子)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정략 결혼하였으며,
1923년 관동대지진때는 일본인의 조선학살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926년 형식상 이왕(조선국왕)에 책봉되어 조선에 돌아가기를 원하였지만 일본정부에
의해 거부당하였으며, 한국독립을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벌여졌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영왕망명 사건이 실패로 돌아감에 의해 단속이 더 강화되었고, 산책이나 쇼핑등 단순한
일상생활까지 제지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왕족의 신분을 상실하였으며,
그 후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왕은 일본의 감시가 풀리자 조국이었던
한국으로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왕실복위가 벌어지는 상황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반대로 저지 당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일본에 있던 영왕 및
조선에 남아있던 왕족들의 왕실재산 뿐만 아니라 개인 물품 하나하나까지도 한국정부에
의해 강제 회수 당하였고, 왕궁에서 쫓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당시 영왕 주변의
사람들은 정부가 국보급 문화재를 회수해 갈 수는 있지만 개인 물품까지 압수해 가는
법은 없다며,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영왕은 조국인 한국을
상대로한 재판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하며, 전재산이 거의 국유화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또 이승만정권은 일본에 있는 영왕일가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이구씨의 미국여행 또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어쨌든 군인생활
및 왕족으로서의 생활 밖에 해보지 못했던 영왕으로써 일본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고, 결국 생활은 일부 아는 사람들에게 의해 도움받아서 생활하였다.
게다가 일본에서 오랜기간 볼모생활 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조국 한국의 그러한
대접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오랜기간 동안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고, 건강
또한 매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선왕실을 싫어했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후 한국사회에서는 영왕 귀국을 위한 활동 추진되었고 결국,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호의로 볼모생활 55년 만에 부인인 이방자 여사랑 귀국하였는데 그 당시
영왕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영왕은 뇌혈전증에 의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 거의 의식불명 상태에서 병원생활을 하였다. 결국 영왕은 윤대비와
친족들을 만나지도 못한체, 또 귀국후 한국의 땅 한번 걸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1970년 5월 1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2. 이방자 여사 [영왕비]
영왕 이은의 아내. 일본황족 모리마사왕 나시모토의 장녀로 태어났다. 한때 일본
황태자비의 물망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한일융화 초석이 되어라는 일본천황의 명에
의해 영왕과 강제결혼, 조선왕자의 아내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외부적으로는 한일
융화가 목적이었으나 방자가 임신능력이 없다는 의사의 보고에 의해 조선왕실의 대를
끊으려고 결혼시킨 일본의 야심이 깔려진 정략결혼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방자가 아기를 임신하자 그 당시 방자가 임신할 수 없다고 보고했던 의사들은 사형
당했다고 한다. 어쨌든 방자도 이러한 일본의 계략에 이용당한 비운의 여인이었고,
왕실의 희생양이라는 비슷한 상황속에 만났던 두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부부사이또한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망국의 왕으로써 남편 영왕 이은이 고통받는
것에 때문에 이방자 여사도 마음적 고통이 심했으며, 진왕자의 의문의 죽음이후 정신적
고통이 더 심해졌다. 1964년 영왕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게되자 언론들과 사회에서
이방자여사에 대해 일본왕족이라는 이유로 시각이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방자여사는
스스로 낙선재 근처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고, 일본과 한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모금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며, 정박아와 신체부자유자를 위한 명휘원, 자행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사회에 심신부자유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 말 영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성심을 다하여 보살폈으며, 남편의 사망후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를 친형제처럼 돌봐주었다. 때때로 일본에 돌아가 이구씨를 다시
귀국시키려고 노력도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는 1989년 4월 급박히 건강이 나빠져
덕혜옹주가 사망한 후 몇일 후인 4월 30일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이방자 여사는 최근까지
궁궐에 기거한 마지막 왕실의 일원이었다. 1991년 까지 이방자여사의 3년상이 끝나자
결국 정부에 의해 왕실 최후의 모습이 담긴 창덕궁 낙선재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게
되었다.
3. 민갑완 [영왕의 약혼자]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표씨의 장녀로 11세때 영왕비로 간택되었으나 영왕이 방자와
강제 결혼함으로 비운의 일생을 보냈다. 원래 왕실에 의해 파혼당하면 그 가문은
역적가문으로 취급되기 일수 였고 평생 재가가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민갑완은
왕실의 체통을 위해 일본의 결혼 주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일본에 의한 강제 파혼 소식으로 아버지가 급사하고 집안이 파산했다. 결국 상해로
망명하여 고독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1945년 해방후 귀국.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967년 동래에서 곤궁 속에 생을 마쳤다.
4. 진왕자 (유아시기 사망)
영왕과 영왕비 방자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유아시기에 사망했다. 조선방문 시
사망하였으며, 검은 물체를 계속 토해낸 것으로 보아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5. 구왕자 [황세손 구]
-> 황세손 이구 (2004년 종묘대제)
영왕의 자식이자 현재 조선왕실의 최고 직계 황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는 영왕이
이왕직(조선국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일컬어졌다. 사춘기에 불행한 부모의
운명과 혼혈왕자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스스로의 길을 개척
하겠다고 17세에 미국으로 떠나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다가 미국여인
줄리아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1963년 32세때 부모를 따라 조국에 왔고 한때
서울대 공대 및 연세대 공대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계 황손으로써 의무를
강요하는 종친회와의 갈등과 '신한공항'등의 사업실패의 좌절, 단지 왕손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시각들에 의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종친회의 강요 및 이구씨의 개인사정에 의해 줄리아와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여인 아리다랑 동거하면서, 도쿄에서 살면서 사업활동을 하였다. 84년 사기혐의로
고소, 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사망등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이방자여사가 타계한
뒤 수차례에 걸친 종친회의 귀국 종용을 거부하던 이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심경 변화를
보여, 귀국을 결심했고,1996년 귀국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종친회장자리를
이구씨에게 기증하였고, 부영주택 이중근 회장이 마련해준 장충동 호텔 영빈관에서
생활하며, 왕실제사인 종묘대제등의 초헌관 참여, 종친회 사무를 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2005년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 장례식 모습
6. 줄리아
이구의 전 아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로운 동양 청년 이구와 사랑으로 결혼.
실내장식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으나 외국인에다가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라는 종친회와 큰 갈등을 가졌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실내장식품을 만들어
시어머니였던 방자여사의 사업을 돕고 왕실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시어머니였던 이방자여사는 줄리아에 대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왕실며느리
감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그러나 종친회의 갈등 및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구씨와의 관계악화에 의해 1982년 이혼했다. 줄리아숍을 운영하다 결국
생활고에 의해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가 2000년 남편의 사진 450점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한국에 방문하였는데,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줄리아가
왕세자비시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아버지 영왕의 묘소를 방문한후 왕실의
30여년간 삶을 회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특집방송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좌로부터..황태손 이구, 순정효황후 윤씨,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황태손 이구부인 줄리아 멀록 여사
황태자 이구, 부인 줄리아 멀록, 이방자여사
[4] 의왕의 가계도 : 의왕 1877 - 1955
-> 의왕
의왕 ----
정씨 ---- 이건(사망)
김씨 ---- 이우(사망)
(왕실족보에 올라온 계보만 표기하였음. 실제로 수많은 가족이 존재함)
1. 의왕 이강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강. 일찍이 생모를 잃고 외로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상황속에 아버지인 고종은 항상 미안해했고, 고종은 1900년
미국 유학을 보낸 후 같은해 8월 의왕에 봉해주었다. 1905년 적십자총재가 되었고,
1919년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게 된다. 그후 여러차레 일본으로 부터 도일을 강요 받았으나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해방후 6.25전쟁을 경험한뒤 사가인 사동궁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8월 15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망국의 한과 일제의 감시
속에서 술과 여자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이며, 울분과 욕구불만의 불행한 생을 살았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왕족 중 가장 똑똑하고 수려한
외모로 제왕의 기질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의친왕비
의친왕비(義親王妃) [1878 ~ 1964], 본관 : 연안,아버지 : 김사준,
1894년 17세 때 의친왕(당시 의화군)과 결혼 ,소생없음
의친왕과 아들들(이건, 이우)
2. 이건
이건 황손 [1909 ~ 1991]
의친왕(義親王)의 장남으로, 수관당 정씨 소생 1918년생.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왕족 딸과 강제결혼하였다. 해방후 이혼하고 일본인으로 귀화. 재혼한 일본 부인과
일본에 살다가 현재는 별세했다.
3. 이우
의왕의 차남으로 궁인 김씨의 소생이다. 1911년생. 12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군인으로
복무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똑똑하고 인물이 좋아 의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 왕족중 거의
유일하게 오랜기간 일본의 강압결혼에 저항하여 결국 한국여성인 박찬주씨와 결혼하였고
청과 종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이 종씨는 현재 사망했고 이청씨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황태자 이우, 부인 박찬주
4. 이수길
이우의 동생. 1918년생. 민주당 장면 내각때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며, 영왕을 귀국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칠궁에서 살다가 전두환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강제 축출 강요에
충격받고 1982년 65세로 별세. 부인 김신덕 여사는 칠궁에서 쫓겨나 서울 개포동의 19평
시영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인 이순씨는 인천 아들인 이한주씨는 일본에 살고 있다
5. 이석
본명은 이해석으로 홍씨 소생. 1941년 생으로 관훈동 사동궁에서 의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잠시간의 행복한 생활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왕실은 재산의 대부분
을 잃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고로 환수당한 뒤 가족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특히 1959년 아버지 의왕이 사망하자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DJ일을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미8군에서
한달에 3만원을 받으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왕실어른들과 문중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샀고 그는 경제력 무능력한 왕족의 신분에 대해 눈물로 왕실어른들께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64년 사회각층의 인사와 만나는 TV프로그램"굿이브닝
쇼"의 사회를 보게되자 결국 윤대비는 화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가수 이석은 '비둘기집'
'두 마음''외로운 조약돌'등의 노래를 부르며,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64년 여러 주변상황에 의해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제대후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홍씨를 잃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한인회장인
김병묵박사의 도움으로 7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87년 드디어 미국의 영주권을 얻었다.그러나 89년 이방자여사의 장례 직후 다시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결의가 생겼고, 결국 귀국한후 잠시간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왕실을 다시 모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그가 만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이석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 그러나 그는 다시 음반을 준비하면서,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써,
황실 문화 복원 작업 등의 활동을 하고 추진중이다.
6. 이해경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왕과 김금덕여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하는 왕가가 싫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의왕 이강의 독립운동사실을 알아냈고, 의왕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복권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때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강연을
주체한 적도 있으며, 왕실의 유품등을 기증하였다.
본자료를 편집하며 우리는 왜 마지막 황실을 복원할 수 없었나하여 가습 먹먹해짐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마지막 황실을 바라보는 일반인으로서 찾찹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사이버 상의 다양한 자료를 수합한 것이라서 혹, 사실과 다를까 심히 열려하며 자료를 편집하여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