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단상
케네스강 (글무늬문학사랑회)
수화기에서 젊은 한국인 장의사 K씨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순간 가슴이 먹먹하다. 서둘러 검은 상복과 검은 넥타이로 정장하고 집을 나섰다. 마음이 쓸쓸하다. 에핑(Epping)역에서 메트로로 갈아타고 라우스힐(Rouse Hill) 역에서 내렸다. 왼쪽으로 윈저 로드를 따라 걸었다. 푸른 초원과 흰구름을 껴안은 파란 하늘이 평화롭게 펼쳐진 카슬부르크 메모리얼 팍(Castle Brook Memorial Park) 공동묘지로 들어섰다.
나의 오랜 지기 B 씨의 장례식은 그곳 가든 채플 교회에서 엄숙하고도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그가 생전에 남겼던 어록과 사진들이 대형화면에 영상으로 펼쳐졌다.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적셨고, 몇몇 여인들은 소리 내어 울었다.
고교시절 학생복 차림의 사진들, 그리고 젊은 날 한껏 멋을 부리며 찍은 모습들이 무성으로 나왔다. 생전의 그가 대단한 미남이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 마침내 그는 한줌의 재가 되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요 또 다른 시작이라 하나 현세에 머물고 있는 우리는 이별이라는 현실로 서글픔이 앞선다.
성경에서는 사람(육)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머물고 계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텔레파시로 미리 알고 있었다. 텔레파시는 두 사람이 깊이 사랑할 때 그들의 뇌에서 나오는 파장이 서로 공명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오래 하셨고 의지가 굳세고 인생관이 뚜렷한 분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마지막 편지는 이런 것 이었다. “인생칠십고래희라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어느덧 그 연세가 되셨으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라고 적어 보내드렸더니
아버지의 답장은 “이 노부는 걱정말고 너의 자식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라."
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노후에 고혈압으로 고생하셨다.
내가 미국에 체류하던 1977년4월 어느 비 오는 날 문득 아버지 생각이 간절히 나면서 곧 임종을 맞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약을 사러 빗속을 운전하여 30여분간을 달려 약국에서 고혈압 약을 달라고 하였다.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경황이 없을 때 사람은 어리석어지는 것일까.
숙소로 돌아와 아버지 생각을 하며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훗날 귀국하여 가족들과 이야기 해 보니 바로 그 시각이 바로 아버지의 임종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가족들이 모두 놀라와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소년시절 어린 4살짜리 막내 여동생이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 달빛이 어리는 새벽 시간에 어린 시신을 하얀 천으로 둘둘 말아 아버지와 형이 메고 나가는데 그 하얀 천이 너무나 길어 보여서 나는 놀랐다.
1940년대 중반 한국의 시골에서는 호열자 (콜레라의 조선 식 발음)가 유행하여 사흘이 멀다 하고 어른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골에서 어른들이 죽으면 꽃상여에 관을 싣고 뒷산에 갖다 묻었다.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소리를 내면 상여를 움직이며 뒷 상여꾼들이 입타령을 받던 구성진 합창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B씨의 장례식을 치루고 돌아서는 허허로운 발길 위에, 넓은 캐슬부륵 메모리알 팍에 내 마음에 살아있는 상여소리(만가)가 울려퍼지는 듯 하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북망산천 나는 간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어하놈차 어하놈
아…허…오…허…
*문단 나누기가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되었음을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