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세 인생을 산다는 것은/ 옥 경 자
최근 TV에서 100세가 넘으신 노인의 일상이 공개되었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을 보면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백 세 인생 파이팅을 외치고 싶을 만큼 활동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80세 된 딸이 아버지를 모시며 같이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세시대를 살고 있는 노인들이 너무 건강해도 걱정이다. 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딸의 말이 내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식들의 건강이 부모보다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팔순의 자식도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인 것이다.
인근 공원에서 지팡이 두 개에 의지해 힘들게 운동하는 노인 한 분을 보았다. 허리는 기역자로 굽었고 나이가 많아 보였다. 숨이 차는지 몇 발짝 만에 쉬고 숨을 고르고 또 발걸음을 옮겼다.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오래 살고 싶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지인의 시어머니는 올해 96세로 요양원에 가셨다. 치매가 중증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 육식하지 않던 분이었는데 정신이 없으니, 요양원에서 주는 음식을 육식, 채식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고관절을 다쳐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잊어먹고 자꾸 침대에서 내려와 걷기를 시도하다 다친 데를 또 다치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서 침대에 묶어 놓고 지낸다고 한다. 지인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올해 94세이다. 인지력이 떨어진 건지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이 늘었다. 툭하면 아파서 밥을 먹지 않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버린다. 요양사의 말에 의하면 뭔가 마뜩잖은 일이 있으면 그런다고 한다.
“빨리 죽어야 하는 데 죽지도 않고 내가 나라에 좀 같은 인간이다.”
하면서 바른 소리를 할 때도 있고 내가 좀 더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몸에 좋은 식자재를 탐할 때도 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변한 것 같다.
지난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으신 아버지는 한동안 편해하셨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면서 밥도 잘 드시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 아직은 건강하니 백 세까지는 끄떡없겠다고 스스로 농도 했다. 경로당에도 나가고 소통하면 좋으련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보는 나도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 줄 방도가 없다. 사람이 밥만 잘 먹는다고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매일 TV 리모컨만 친구 삼고 있으니, 무력감도 생기리라. 어머니가 있을 때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너희 엄마 때문에 내 명대로 못 살겠다. 하더니 이제는 그때가 그립다고 털어놓는다.
물기가 없는 마른 풀잎처럼 매사에 건조하고 힘이 없다. 쪼그리고 누워 있는 작고 초라해진 아버지의 어깨에서 절실한 외로움을 본다.
나도 나이가 들면 아버지와 똑같은 절차를 밟고 살지 모른다. 지금도 생각의 폭이 자꾸 좁아지고 있는 나를 보면서 사람이 재수 없으면 백 살을 산다는 어떤 강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백 세를 산다고 한들 행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건강하고 밥 잘 먹어도, 요양원에 있어도, 공감할 친구가 없고 동반자가 없는 백 세 인생은 외로운 일인 것 같다. 어떤 인생이든 정답은 없지만, 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죽을 때 슬프게 울어줄 친구가 있을 때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하나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