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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 오늘의 역사
2020년 미국 미시간 주 수도 랜싱 시의 무장 시민 700여명 비상사태와 자택대피령 해제 요구하며 주의회 의사당 점거
2020년 미술사학자 이구열 세상 떠남(88세)
2019년 아키히토 일왕 퇴위, 나루히토 즉위
2017년 가장 나이 많은 유대인 여성이었던 인도인 소바 네루 세상 떠남(108세)
2015년 프랑스 미쉐린, 프랑수아 미슐랭 전 회장 89세로 타계
미쉐린 창업자 에두아르 미슐랭의 손자인 그는 1941년 미쉐린에 입사한 뒤 가명을 쓰며 공장 정비공으로 일했다. 그는 1955년 회사 중역이 되기까지 공장 셔틀버스 운전기사, 마케팅 담당, 판촉원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59년 회장이 된 후 그는 기존 타이어보다 효율성과 내구성을 크게 높인 ‘레이디얼 타이어’를 업계 표준으로 정착시켰다. 세계 타이어업계 10위권이던 미쉐린은 그가 은퇴한 2002년에는 세계 최대의 타이어 제조사로 성장했다. 현재 총 170개국에 11만2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연 매출은 200억유로(약 24조원)에 이른다. 미쉐린은 세계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평가서인 ‘미슐랭 가이드’로도 유명하며, 프랑수아 미슐랭이 경영을 맡기 훨씬 전부터 제작됐다.
한국에도 미쉐린 공장이 있다
2015년 ‘스탠드 바이 미’ 가수 벤 E. 킹 별세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 팝송 ‘스탠드 바이 미(Stand by Me)’를 부른 미국의 흑인 R&B(리듬 앤드 블루스) 가수 벤 E. 킹(Ben E. King·77·사진)이 30일 별세했다. 본명이 벤저민 얼 넬슨인 그는 스무 살 때 흑인 보컬 그룹 ‘파이브 크라운스’의 멤버로 가수로 데뷔했다. 호소력 짙고 우수 어린 보컬로 주목받은 그는 이후 그룹 ‘드리프터스’의 리드 보컬로 활약하며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특히 1961년 발표한 ‘스탠드 바이 미’는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로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꾸준히 애창되는 노래다. 발표 당시 빌보드 정상에 오른 이 노래는 1986년 고(故) 리버 피닉스가 주연한 동명의 성장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25년 만에 다시 영국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진기록도 세웠다.
킹은 노년기에 접어든 뒤에도 앨범을 발표하고 또 미국과 유럽 등에서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대표곡 이름을 딴 ‘스탠드 바이 미 재단’을 설립해 자선 사업도 벌였다.
2011년 싱가포르 화물선 제미니호 아프리카 해역에서 소말리아해적에게 납치됨
25명 선원 가운데 한국선원 4명 포함되어 있었으나 납치된 선원 25명 가운데 21명은 2011.11.30. 석방, 한국인 선원 4명은 육지에서 다시 납치되었다가 2012.12.1 피랍 582일 만에 풀려남
2010년 상하이 엑스포 개막식
상하이(上海) 엑스포가 전야제를 겸한 개막식을 갖고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184일간 이어지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번 엑스포는 전 세계 189개국과 57개 국제기구가 참가해 159년 세계박람회(EXPO) 역사상 최대규모다. 개막식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시진핑(習近平) 부주석,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등 중국 최고 지도부가 대거 참석했으며 이명박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전 세계 20개국 정상을 포함한 400여명의 각국 지도급 인사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Better City Better Life)'을 주제로 한 이번 상하이엑스포에서는 아이에게 음료수를 내주는 가정부 로봇, 태양열을 이용해 자동으로 냉난방이 되는 탄소제로주택, 스스로 주차하는 자동차 등이 선보였다.
한국은 이번 엑스포에서 한류(韓流)문화를 실감할 수 있는 다양한 공연과 수준 높은 IT기술을 선보였다. 한국관은 외관부터 한글 자모의 기하학적 특성을 표현한 한글픽셀(pixel·TV나 컴퓨터 화면의 화상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로 구성돼 있다. 각 픽셀에는 발광다이오드(LED)가 설치돼 야간이면 한글 자모가 화려한 빛을 발한다. 내부 전시공간은 멀티 터치 스크린과 터치 모니터 등을 이용해 한국의 자연과 문화, 음식, 기술 등을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2009년 대한민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 조사.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 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세 번째로 재임 중 저지른 비리 혐의와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검사장 이인규)는 이날 오후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사업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600만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수수) 등에 대해 심야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노 전 대통령은 출두한 지 약 13시간만인 1일 새벽 2시 10분쯤 검찰 조사를 받은 소감을 묻자 미소를 띤 얼굴로 "최선을 다해서 받았습니다"라고 답한 뒤, 사저(私邸)가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앞서 노 전 대통령은 30일 오전 8시쯤 청와대 경호실이 지원한 버스 편으로 봉하 마을을 출발해서, 5시간여 만인 오후 1시 19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에 도착했다.
전직 대통령의 검찰 출두는 1995년 11월과 12월 노태우(盧泰愚)·전두환(全斗煥)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수천억원씩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은 이후 13년여 만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검으로 출발하기 직전 취재진을 향해 "국민 여러분께 면목이 없다. 실망시켜서 죄송하다"는 내용의 짤막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 미국 ABC방송 `나이트 라인`, 이라크전서 전사한 미군병사 500여명 추모 호명
미국 ABC방송은 이라크전 종전선언일(5월 1일)을 하루 앞두고 지난달 30일 밤 앵커 테드 코펠이 진행하는 ‘나이트라인(Nightline)’에서 작년 3월 이라크 전쟁 시작 후 숨진 500여명의 사진과 함께 이름을 호명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30일 ‘전사자들의 얼굴(Faces of Fallen)’이라는 제목으로 A17면에서 A19면까지 3개면을 할애, 3월 13일 이후 이라크에서 숨진 병사 151명의 사진과 이름, 소속, 사망경위 등을 크게 보도했다. USA투데이도 이날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이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에서 4월 전사한 병사 119명의 사진과 신상정보를 1~2면에 그들이 숨진 순서대로 게재했다.
반면, 미 국방부는 유가족들의 사생활 보호를 명분으로 더 이상 이 같은 사진들을 공개하지 말 것을 지시했으며, 쿠웨이트에서 비행기에 실리는 관들을 찍은 사진이 시애틀 타임스에 게재된 뒤 이 사진을 찍은 국방부 계약업체 ‘메이택’ 항공의 두 직원을 해고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백악관도 국방부의 조치를 환영했다.
2004년 출판인 한만년(韓萬年·79)씨 별세.
고인은 1953년 한국학 전문 출판사 ‘일조각’을 설립, 대표를 지내면서 이병도·이희승 박사의 회갑 기념논문집과 ‘한국사신론’(이기백) ‘조선후기농업사연구’(김용섭) ‘독립협회연구’(신용하) 등 명저를 출간했고, 대한출판협회장(1974~1978)을 역임하는 등 출판계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서울시문화상(출판부문)·대한민국문화예술상·화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2002년 20대 여성 5명을 납치·살해한 2인조 강도 검거
경기 용인경찰서는 30일 승용차를 택시처럼 위장해 몰고 다니며 사흘간 20대 여성 5명을 납치·살해한 혐의로 허모(24·골프장 직원)씨를 긴급 체포하고, 달아난 공범 김모(31)씨를 수배했다.
허씨 등은 김씨의 EF쏘나타 승용차에 택시 표시등을 훔쳐 달고 수원 시내를 돌아다니며 지난달 27일 오후 11시쯤 영통동에서 박모(29·피아노강사)씨를 태운 뒤 목졸라 숨지게 하는 등 29일 새벽까지 20대 여성 5명을 차에 태워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현금 255만원을 빼앗고 일부 피해자를 성폭행하기도 했으며, 범행 후 승용차 뒷좌석에 3구, 트렁크에 2구 등 시체 5구를 싣고 다녔다.
허씨 등은 30일 0시40분쯤 용인시 기흥읍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주차된 엘란트라 승용차 번호판을 훔치다 출동한 사설경비업체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이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의 감시 소홀을 틈타 순찰차를 몰고 150여m 가량 도망쳤으며 경찰은 이 과정에서 허씨만 붙잡고 김씨는 놓쳤다.
허씨는 경찰에서 “유흥비로 쓴 신용카드빚 700여만원을 갚기 위해 부녀자를 납치했으며 신고할까봐 죽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승용차에서 삽과 곡괭이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체를 싣고 다니다 한꺼번에 파묻으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체코, 헝가리, 폴란드가 NATO에 가입하다.
1999년 캄보디아가 ASEAN의 1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다.
1998년 호소카와 전 일본총리 정계은퇴 선언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일본총리가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이날 국회의장에게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뒤 기자회견을 갖고 “정치가로서 30년 이상 활동해왔으나 이전부터 60살이 되면 정계를 물러나겠다고 생각해왔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 그는 또 오자와 이치로의 자유당을 제외한 야당들을 통합해 발족한 민주당이 정권교체 가능한 정당으로서 본격 궤도에 오른 만큼 사퇴를 결행키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호소카와 의원은 1993년 미야자와 내각을 끝으로 38년간 계속된 자민당 단독정권이 무너진 뒤 1993년 8월부터 1994년 4월까지 ‘비자민’ 연립정권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 그 후 오자와 이치로가 주도하는 신진당에 참여했다가 작년 말 탈당, ‘프롬파이브’를 창설했고 하타 전 총리의 태양당, 간 나오토의 민주당 등과 손을 잡고 통합야당 민주당의 창당 작업을 사실상 주도해왔다.
1996년 주한미군으로부터 AFKN채널 환수
1996년 한국물리학계의 개척자인 조순탁 박사 별세
조 박사는 서울대, 서강대, 한국과학원, 한국과학기술원, 한양대 등에서 40년 이상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물리학 분야의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온 세계수준의 물리학자이다.
지난 1947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1회로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조 박사는 지난 1952년 한국물리학회를 창설한 물리학계의 선도자이자 개척자로 인정받고 있다. 독특한 유체역학 이론발표로 노벨상 후보까지 거명되기도 했다. 그는 양자유체 분야의 보골류보프-주바레프 이론을 더욱 일반화시켜 기존 양자유체이론 전반이 수정되도록 만들었다.
특히 미시간 대학에 유학하면서 발표한 논문에 실린 `조-유렌 방정식`은 하나의 보편타당한 정리로 인정받아 국제적인 교과서에 한국인의 이름이 붙은 방정식으로 인용됨으로써 한국 물리학계의 세계화 선도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반역학` `양자역학` `고체물리학` `수리물리학` `통계물리학` `통계역학` 등의 저서와 논문 22편을 남겼다.
녹조소성 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데 이어 1996년 4월 `과학의 날`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도 받았다.
1994년 북한의 여만철 씨 가족 5명이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다.
1994년 이영덕 제27대 국무총리 취임
1992년 한국-탄자니아 국교 수립
1991년 아프리카 레소토왕국 무혈 쿠데타 군사평의회 라미에즈 대령 집권
1989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영친왕) 이은의 왕비 이방자 여사 별세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왕(영친왕) 이은의 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내 낙선재에서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여사의 죽음은 파란 많은 조선왕조 5백년 역사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왕녀로 태어나 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눈을 감은 이방자 여사의 88년 인생은 이 여사가 평소 즐겨쓰던 문구처럼 ‘대공무아(大公無我)’ 한 것이었다.
1901년 동경에서 메이지(明治) 가문의 장녀로 태어난 이 여사는 19세 되던 해 일본 왕실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융합정책에 따라 일본에 볼모로 잡혀온 고종의 셋째 일곱째 아들 이은 왕세자와 정략 결혼을 했다. 광복전에는 망국의 한을 되씹는 남편의 동반자로, 광복 후에는 패망 일본이 남긴 무국적자로 격랑의 한일 근세사를 헤쳐 나와야 했다. 광복이 되자 국적도, 왕실의 특권도 상실한 채 곤궁한 생활을 해 오던 영왕 부처는 1947년 미군정하에서 ‘재일 한국인’ 이라는 평민의 신분으로 격하돼 생활고를 겪었다.
1963년 영왕과 함께 환국했으나 1970년 영왕마저 세상을 뜨자 별세한 이날까지 20여 년 간을 홀로 창덕궁 낙선재를 지키며 장애자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녀는 장애자의 할머니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 마지막 조선인이었다.
1986년 올림픽공원(50만평, 6개경기장ㆍ회관등) 완공
1983년 `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국회에서 동의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 국제해양법조약 채택.(영해 12해리, 경제수역 200해리)
1979년 한일의원 안보협의회 발족
1978년 12해리 영해법 공포, 발효. 대한해협은 3해리로 규정
1976년 매달 말일을 반상회날로 지정
1975년 사이공 함락, 월남 패망. 베트남 전쟁 끝남.
1975년 4월 30일 아침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군이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3개 방면으로부터 진공해 들어가자 오전 10시30분 남베트남 대통령 두옹 반 민이 무조건항복을 결정, TV를 통해 정부군 병사에게 전투 중지를 명령했다. 오후 12시30분(한국시간 1시30분) 해방전선기가 대통령 관저에 게양되므로써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의 종결을 고했다.
전년까지 일진일퇴했던 전쟁 상황은 해가 바뀌면서 상황이 돌변, 해방군의 공격 강도가 높아졌다. 3월 29일 최대의 군사거점 도시인 다낭의 함락을 비롯해 캄란 등 대도시가 속속 함락됐다. 4월에 접어들어 정부군의 영역은 사이공으로부터 반경 100km 이내로 한정되었고, 계속된 해방전선의 적극 공세로 사이공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4월 17일에는 인접국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해방군 세력에 넘어갔다.
4월 28일 사이공 시민의 기대를 받고 등장한 두옹 반 민 신임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즉각 정전, 평화교섭 즉시 재개 등을 제창했지만 해방세력은 공항과 사이공 폭격으로 대답했다. 29일 미국 대사관은 폐쇄되었고 직원들은 헬리콥터로 탈출했다. 베트남전에 종지부를 찍은 미 국방부는 이 전쟁에서 미군 사망자수는 약 6만명이고 전비는 약1390억달러라고 발표했다
1973년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 책임을 물어 보좌관과 법률고문 해임
닉슨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하려 했던 사건이 드러남에 따라 닉슨대통령은 1973년 4월 30일 홀드먼, 에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했다.
미국 최대의 정치스탠들로 이 사건 관련자 제임스 머코드 등 7명이 체포되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 미첼 재선위원장, 홀드먼 보좌관 등 닉슨의 측근도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백악관의 은폐조작 이전부터 행해진 정적에 대한 불법적 정보활동 등이 밝혀졌다.
닉슨대통령은 1973년 4월 홀드먼, 에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하고 자신을 사건을 전혀 몰랐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딘은 그 해 6월 25일 상원조사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닉슨 대통령도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닉슨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녹음테이프와 속기록을 공표했으나 손을 댄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의혹만 더하게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을 밝히기 위해 임명된 특별검사의 해임, 불성실한 납세신고 등으로 국민의 불신감이 깊어지자 하원 사법위원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했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1974년 8월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66년 한국-멕시코, 문화협정 조인
1966년 사탄교회가 설립되다.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정부는 당시 가장 격렬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 대해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해 1959년 4월 30일에 폐간명령을 내렸다. 그 표면상의 이유는 1. 1959년 1월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간의 면담사실 날조, 2. 2월4일자 단평 `여적`이 폭력을 선동했고, 3. 2월15일자 홍천 모사단장의 휘발유 부정처분 기사가 허위사실이고, 4. 4월3일자에 보도된 간첩 하모의 체포기사가 공범자의 도주를 도왔으며 5. 4월15일자 이승만 대통령 회견기사 `보안법개정도 반대`가 허위보도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폐간의 실제적인 이유는 `경향신문`이 1956년 정-부통령선거,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보안법파동 등을 보도하면서 노골적인 대정부 비판기사를 게재해온데다, 경향신문이 카톨릭재단으로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을 적극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이러한 탄압에 맞서 경향신문은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끈질긴 법정투쟁을 벌인결과, 폐간된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27일자 조간부터 복간됐다
1957년 2차대전 한인전범 동경서 전원 석방
1951년 국회, 국민방위군과 국토방위대 해체를 결의
1950년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연극 `원술랑` 공연
1950년 4월 30일, 유치진이 쓰고 허석이 연출한 연극 ‘원술랑’이 국립극장 개관기념작으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무대는 국립극장으로 새로이 단장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좌석수만도 1997석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초대형 극장이었다. 배우들은 국립극장 무대에 선다는 감격으로 목이 메었고 관객들도 1주일 동안 5만명이나 다녀가 문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6월 초의 2회공연에 이어 3회를 준비하던 중 6·25 발발로 중단됐다.
중앙국립극장이 아시아 최초로 개관한 것은 공연 하루 전인 4월 29일. 유치진이 초대 극장장을 맡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단인 ‘극협’과 1950년 1월에 창설된 ‘신협’을 전속극단으로 두고 초창기 극장을 꾸려갔다. 이해랑·김동원·백성희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창단 멤버였다.
개관 2개월도 안 돼 6·25가 발발하는 바람에 부산을 거쳐 대구 문화극장에 새 둥지를 틀었다가 1957년 6월에 서울의 명동 시공관으로 옮겨 명동시대를 열었다. 1973년 10월에 서울 장충동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8년 미주기구헌장(보고타 헌장) 조인
1948년 4월 30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열린 제9회 미주회의에서 `미주기구헌장`이 조인됐다. 이에따라 미주지역의 집단안전보장, 국가들간의 경제·사회·문화 교류와 협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미주블록이 형성되어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브라질, 베네수엘라, 멕시코, 우루과이 등 20여개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게 됐다.
회의는 3월 30일에 시작되었지만 4월 9일 콜롬비아의 한 야당 지도자가 피살되어 분노한 군중이 보수당 정권의 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자 콜롬비아 정부는 범미주협의를 잠시 중단했다. 하지만 군대가 폭동을 진압해 회의가 속개됐다.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도 공산당에 의한 테러사건이 빈발하자 회의는 22일 반공결의안을 가결, 미주기구가 반공블럭인 점을 명확히 했다.
1948년 서구 5개국 군사회담
1946년 군사영어학교 폐교
1945년 히틀러 자살(56세)
나치스의 지도자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끔직한 전쟁을 유발시킨 아돌프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패전이 분명해지자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틀 전에 결혼한 그의 애인 에바 브라운도 그 옆에서 음독자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세운 독일 제3제국도 인류에 고통 만을 남겨둔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히틀러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빈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지만 이내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예술가의 길을 포기했다. 1차 대전에 병사로 참가, 독일 군인의 최고 영예인 철십자상을 받았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919년 나치스당에 입당했고 1921년 7월에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나치스당 당수로 선출됐다.
1923년 이른바 `맥주홀 폭동`이라 불리는 무장봉기를 뮌헨에서 일으켰으나 실패해 체포돼 옥중에서 자신의 궤변을 담은 `나의 투쟁` 1부를 집필했다. 1932년 독일 총선에서 나치스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자 이듬해인 1933년 독일 수상에 취임했다. 점차 권력을 강화해 나간 히틀러는 1934년 총통에 선출됐고 1938년에는 전군 통수권을 장악했다. 이 모든 과정이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 대중을 선동하는 히틀러 앞에서는 민주주의도 무기력했다.
오스트리아 합병을 시작으로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의 광적인 세계 제패의 꿈은 급기야 1941년 소련과의 전쟁을 통해 후퇴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1939년 미국 최초의 TV 방송 시작
1939년 4월 30일 미국 뉴욕 퀸스 지역에서 세계 박람회가 시작됐다. `내일의 세계 건설`이라는 주제로 열린 뉴욕 박람회는 60개국에서 1300개의 기업이 참가했다. 이날 개막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십만 명의 군중은 단상에 라디오 방송용 마이크 사이로 낯선 기계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 라디오 방송공사(RCA) 자회사인 NBC의 뉴욕 박람회 개막식 중계는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으로 기록된다.
이날 낮 12시30분 박람회장을 보여주면서 시작된 텔레비전 방송은 오후 3시 공식 개막행사 종료와 동시에 끝났다. 방송용 카메라가 담은 모습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있는 NBC의 송신기에 유선으로 전달됐다.
그러나 미국이 텔레비전 방송을 처음으로 시작한 나라는 아니었다.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는 1936년 8월 BBC가 하루 두시간씩 정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본격적으로 현대 문명의 최대 주역 중 하나로 만든 것은 역시 20세기의 주역 미국이었다. `지구촌`이라는 말을 처음 탄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텔레비전의 힘이었다.
193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완공
1931년 4월 30일, 뉴욕 맨해튼 34번가에 102층ㆍ381m 높이의 엠파이어 스테이트(이하 엠파이어) 빌딩이 준공됐다. 이 건물은 1년 전에 지어진 319m의 크라이슬러 빌딩을 제치고 세계 최고(最高) 빌딩 자리에 올라 1973년 뉴욕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세워질 때까지 40여년간 세계 최고 마천루(摩天樓)의 영예를 이어갔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건물을 의미하는 마천루(Skyscraper)의 시대가 처음 열린 곳은 시카고. 1871년에 발생한 시카고대화재가 계기였다. 그러나 꽃을 피운 곳은 땅이 좁은 뉴욕이었다. 1913년에 완성된 240m 높이의 울워스 빌딩은 뉴욕 마천루의 선구적인 건축으로 "고딕양식과 근대적인 건축기술의 결합"이라는 대호평을 받았다. 1930년에 완공된 크라이슬러 빌딩은 아예 설계 때부터 세계 최고를 지향했다. 엠파이어 빌딩 역시 당초에는 크라이슬러 빌딩보다 1.2m 더 높은 86층ㆍ320m로 설계했으나 크라이슬러 빌딩에 최고 지위를 빼앗길 것을 우려해 61m에 달하는 비행기 계류탑을 올려 추격을 원천봉쇄했다.
엠파이어 준공식은 후버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전원스위치를 눌러 빌딩 전체에 불이 들어오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라디오는 그 순간을 미 전역에 생중계했다. 대공황의 실업을 타개하기 위해 하루 3000여명을 동원, 1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급조했지만 전문가들은 이 빌딩을 20세기의 대표적인 빌딩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17년 만주 군벌 장작림(장쭤린) 독립 선언
1883 프랑스화가 마네 사망
1863년 ‘낙선전(落選展)’에 전시된 한 화가의 그림이 파리 화단을 뒤흔들놓았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풀밭위의 식사’였다. 검은 정장의 두 신사와 나부(裸婦)가 등장하는 가운데 밝음과 어두움을 대담하게 대비한 이 작품은 훗날 미술사가들의 격찬과 달리 당시의 비평가들로부터는 호된 비난을 받았다. 파리 시민들도 부도덕하다며 손가락질했다. 격론에 휘말린 덕에 마네의 이름은 곧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등 훗날 인상파그룹을 형성하는 청년화가들은 낡은 예술관에 반기를 든 그에게 몰려들었다. 때문에 마네는 인상파 전시회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은 없었지만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활동하게 됐다.
청년화가들은 1874년에 제1회 인상파 전시회를 열었다. 마네 또한 이들처럼 빛의 효과와 순간적인 인상에 충실했지만, 정작 마네는 전시회 참가를 거부하고 이들과 동일시되는 것도 꺼렸다. 마네가 좇은 길은 프랑스의 국전(國展)인 살롱전이었다. 끊임없이 살롱전의 문을 두드렸고 그때마다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마네는 살롱전에 정식으로 출품해 기존 화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살롱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네를 '명예욕에 불타는 더러운 부르주아'라고 비아냥 댔다.
“그림은 화폭 위에 색채를 재배치하는 것”이라며 실제 보이는 것을 자신의 색감으로 재해석하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겠다”며 인위적인 그림을 거부한 마네는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숨진 파리지앵이었다. 파리는 그의 예술의 모태였다. 1832년 1월 23일에 태어나 1883년 4월 30일에 숨졌다.
1863년 미국 남북 전쟁의 챈슬러즈빌 전투 개시 (~ 5월 4일)
1812년 루이지애나 주가 미국의 18번째 주가 되었다.
1789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취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 피란
1286년 캔터베리 대주교 요하네스 페캄이 옥스퍼드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신학적 명제들을 정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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