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사과의 고향이자 근대 건축물을 3개나 품은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 청라(靑蘿)언덕
▲ 3.1운동계단 윗부분 |
계산동성당에서 서성로를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손을 내민다. 속세에서는 그
를 3.1운동계단(3.1만세운동 계단)이라 부르는데 1919년 대구 지역 3.1운동의 현장으로 지역
사람들은 왜정의 감시를 피해 이 계단으로 계산동성당과 도심으로 들어가 만세운동에 참여했
다.
9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청라언덕 정상이 있다. |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노래가 담겨진 표석
'동무생각'
봄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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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인 청라언덕은 20세기 초반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를 꾸렸던 미국 선교
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은 푸른 담쟁이를 많이 심어서 푸른 담쟁이덩굴을 뜻하는 청라
언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달성(達城, 달성공원)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동산
(東山)이라 불렸다. 달성과 더불어 대구 도심의 야트막한 지붕으로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대구사과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언덕에는 선교사들이 살았던 늙은 주택 3동과 3.1운동계단, 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歌曲)인 동무생각 노래비, 동산의료원 구관 현관, 동산의료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무
덤인 은혜정원이 있다. 대구에서 꼭 가봐야 되는 근대문화유산 명소로 시간이 흐르다가
잠시
졸도하여 정지된 듯, 고풍스런 모습을 지니고 있어 촬영지로도 많이
등장한다.
청라언덕하면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의 '동무생각'이란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대구 출신
작곡가로 청라언덕 부근에 있던 신명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결국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추억하고자 직접 작곡을 했고 이은상(李殷相)이 노랫말을
붙여주
었다. 가사에 나오는 백합과 동무는 그 여학생을 뜻하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이런 명곡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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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챔니스(Chamness)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청라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근대 주택 3동 중 챔니스 주택이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마치 너른
정원의 별장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그는 1910년경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1907년 대구 도심을 품던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거기서 가져온 안산암(安山巖) 등의 성돌로
기초를 닦고 붉은 벽돌로 미국식 2층주택을 지었다.
남북으로 약간 긴 사각형 형태로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
단홀이 있고 그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서재, 부엌, 식당을 배치했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
으로 좌,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을 설치했으며,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
뚝이 있는데, 1층 동남쪽에는 넓은 베란다를 설치했다. 이런 양식의 건물은 그 시절 미대륙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집의 이름인 챔니스는 이곳에 살았던 미대륙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식 이름은 차미수(車米秀
)이다. 1925년 부인과 이 땅에 들어와 대구에서 16년을 살았으며, 1927년 딸 바바라를 얻었으
나 생후 3달 만에 잃고 만다. 1941년 왜정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93년까지 동
산의료원 의료원장을 지냈던 모페트(H.F Moffett)가 거주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의료선교박물
관으로 활용하여 개방하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이미 17시가 넘은 때라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계명대에서 세운 의료선교박물관은 조선 후기에서 20세기까지의 우리나라 의학 역사와 의학자
료, 대구 지역 기독교와 선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전자는 챔니스 주택에, 후자는 스윗즈
주택에 두었다.
* 의료선교박물관 관람문의 : ☎ 053-250-8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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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챔니스 주택의 뒷모습
앞에 하얀 피부의 공간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다. |
▲ 챔니스 주택의 앞모습 |
▲ 챔니스 주택 산책로와 장식물로 놓인 돌확 등의 석물들
▲ 선교사 블레어(Blai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6호 |
챔니스 주택 남쪽에는 비슷하게 생긴 2층짜리 블레어주택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미국
선교
사 주택으로 블레어란 선교사가 거주했다고 해서 블레어주택이라 불린다.
대구읍성 성돌로 기초를 닦은 챔니스와 스윗즈주택과 달리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닦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 집을 다진 것으로 남북으로 약간 길쭉한 네모 형태를 이
루고 있으며, 1층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가 있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다. 그 오른쪽이 집 중앙으로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있으며 그 좌
우로 침실과 부엌, 식당 등을 두었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었고 현관홀 위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
(Sun room)을 설치했다.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뚝을 지니고 있으며, 집의 전체적인 모습
에서 그 시절 미국 양이(洋夷)들의 주택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챔니스와 스윗즈주택은 사진을 여럿 담았으나 블레어주택은 저거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우선
담고 나중에 담는다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다. |
▲ 1899년을 강조하는 동산병원(동산의료원) 구관 현관(포치, Porch) |
머리에 'Since 1899'라 쓰인 이 포치는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
중원(濟衆院)은 1899년에 세워진 것으로 1931년 구관(舊館)이 세워졌으며, 2010년 대구지하철
3호선 공사로 인해 부득이 포치를 떼어와 이곳에 두면서 이렇게 허전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구관은 그대로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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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관 현관(포치)의 옆 모습 |
▲ 1970년대 고압산소 치료기 |
구관 현관 안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고압산소 치료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연탄가스에서 많
이 배출되는 일산화탄소 급성 중독환자 치료에 쓰였던 것으로 1970년대 초 미대륙 북장로교의
밴 클레브(Van Cleve) 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 한성메디칼(구 한성공업사)의
고(故) 최운한 대표가 이 땅 최초로 제작했다.
1972년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설치되어 2012년까지 활약했으며 그를 모델로 전국에 고압산소치
료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1970~1990년대에 연탄보일러의 대중적인 공급으로 겨울 제국의 핍박
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나 대신 바람직하지 않은 대기물질인 일산화탄소 배출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여럿 있었음) 바로 이 치료기
가 그들을 저승의 문턱에서 많이 꺼내주었다. |
▲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청라언덕 대나무군락 |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식물들이 모두 누렇게 뜨거나 가지만 앙상한 가운데 유일하게 푸
른 빛을 내는 고고한 존재가 있다. 바로 스윗즈주택 부근의 작게 우거진 대나무군락이다. 대
나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의 기독교 일변도가 되버린 청라언덕에서 대나무숲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慶州)에서 조선시대 유적을 만난 기분인데 동산의료원 초창기에 여기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대나무군락지가 있었다.
허나 그들은 싹 사라지고 뿌리만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을 의료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1999년에 지금의 자리에서 푸르게 돋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기적의 나무'라 부르고
있는데,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는 구한말과 왜정 시절에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준 은혜와 사랑이 대나무 뿌리처럼 깊고 단단하게 여기에 뿌리 내린 것이라며 말하고 있다. |
▲ 선교사 스윗즈(Switze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4호 |
스윗즈 주택은 1906~1910년경에 지어진 2층 벽돌 양옥이다. 지어진 이유는 앞서 두 주택과 같
으며 대구읍성 철거로 나온 성돌을 가져와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었다.
스윗즈(스위처) 여자 선교사(1880~1929, 한국명 성마리다)는 1911년 이 땅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핸더슨 해롤드(한국명 현거선), 계명대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
사가 머물렀는데 전통 한식과 서양식이 조화를 이룬 모습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
지붕이었으나 나중에 함석으로 개조되었고 다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계단을 여러 단 설치하여 바닥을 높인 현관(포치)을 들어서면 남면 중앙에 거실, 동쪽에 응접
실과 이어지며, 남쪽 벽을 일부 밀어 창을 설치한 거실은 응접실과 서쪽의 침실, 북쪽의 계단
실과 통하게 되어있다. 계단실의 좁은 마루에서 식당과 화장실로 연결되며 뒤쪽 주방은 작은
홀을 지나 외부로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계단실 남쪽에 침실 2개를 두고 서쪽에 욕
실을 두었으며, 지붕에는 2개의 굴뚝이 멀뚱히 자리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이 인수해 챔니스 주택과 함께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
로 기독교와 선교 관련 유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관람시간에 닿지 못해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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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서 바라본 선교사 스윗즈 주택 |
▲ 선교사 스윗즈 주택의 옆 모습 |
▲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동산의료원의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 일부를
이곳으로 옮기고 동산의료원이 초창기에 세운 교회 종을 가져와
개원 100주년(1999년) 기념 종탑으로 삼았다.
▲ 대구사과의 고향, 청라언덕 사과나무 - 대구 보호수 01-01호 |
청라언덕은 대구사과의 고향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기념으로 초대병원장인 존슨 박사<
Woodbridge O. Johnson, (우리식 이름, 장인차)>는 미대륙 미조리주에서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심으니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사과나무이다. 그 나무에서 나온 사과씨앗이 대구
일대로 널리 보급되면서 대구는 사과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됨)
그때 심어진 나무는 벌써 세월이 잡아갔고 그의 아들 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지키고 있으
며, 높이 7m, 둘레 0.9m로 나이는 약 90년이다. (2000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70년) 벌써부터 몸이 부실한지 지탱할 수 있는 시설을 여럿 설치했는데, 사과나무는 대체
로 수명이 짧아서 그런듯 싶다. |
▲ 여호와 이레의 동산 표석
청라언덕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이곳을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 동산의료원 외국인묘지 (은혜정원) |
청라언덕 서쪽에는 난데없이 조그만 서양식 공동묘지가 들어앉아 있다.
엄연한 대구 도심 한
복판이고 청라언덕의 일원인 알짜배기 땅에 왜 무덤들이
있나 살펴보니 동산의료원과 계명대
에서 의료, 교육, 기독교 선교를 벌인 20세기 초/중기 미국/유럽
선교사와 그 가족들 16명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 중에 생후 1년 남짓 만에 죽은 아기가 5명이나 되는데, 그중 4명은 반년도
못 채웠다.
어쨌든 그들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무려 은혜정원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쿨하게 생략한다. (내용이 너무 많음)
청라언덕은 서양식 근대주택과 대구사과 시조의 자손나무, 대나무숲, 3.1운동계단, 거기에 서
양식 공동묘지까지 갖춘 참으로 이색적인 명소이다. 계산동성당만 생각하고 왔는데 서상돈 가
옥에 청라언덕 일대까지 싹 둘러보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외국인묘지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며 커텐을 치고 세상
은 달님의 검은 세상이 되었다. 다시 밤을 만난 겨울은 다시 기세가 드세져 코와 귀 끝이 다
시 얼얼해진다. 그날 목적한 것을 훨씬 초과하여 이룬 상태라 즐거운 기분으로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담아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대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청라언덕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달구벌대로 2029) |
첫댓글 대구 청라언덕과 태극기의 물결!
어느 해 한 여름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역사의 흔적들을 더듬어 보았더랬습니다...
선교사의 집에서 본, 일제 만행의 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진들에서, 잔인함이 아니라,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보면서,
장탄식 밖에 나오질 않던...
많이 배워야 하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소위 지도층이나, 사회 유지껍들은 제발 정신 차리시기를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는 국력, 둘은 단결, 셋은 바른 역사의식과 개념이지요. 하지만 고위 위정자 잡것들 상당수가 태조왕건에 나오는 궁예의 대사처럼 마군(마구니)들이 가득한 것이 현실이지요 ㅠㅠ 이런 마구니들은 빠른 철퇴가 답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