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야근하면 직급과 관계없이 야근수당이 일당 1천원(업무 종료시간부터 3시간 이상인 경우에 한 함)이 지급
되었는데 프로야구 경기에서 패한 팀의 과원이 내는 재원이 된 셈인데 삼미가 연패하자 문제가 생겼다.
거두어서 모아 둔 돈은 야근과 특근때문에 야구경기 관람보다는 과 회식에 주로 사용되었고 삼미가 연전연패하다보니 나와 돌림이 같으신 주무사원께서 더 이상 내기를 못하겠다고 해서 두달만에 판이 깨졌는데 이해할만 하다.
프로야구 원년 6개팀이 우리나라 지방국세청의 소재지와 관할지역이 공교롭게도 같았으며(조세 업무 비중이 높았는데 내가 담당자) 최하위인 삼미가 정규시즌 15승 65패로 1할 2푼 5리의 불멸의 수치스러운 대기록을 세웠다.
다음해인 1983년 1억원의 사나이 재일동포 장명부가 삼미에 입단하여 30승이라는 전대미문의 성적으로 팀을
2위를 이끌었는데 특히 야구불모지인 강원도민 및 출향민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고 열기가 폭발적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선수는 장효조며 나 보다 한살 많고 학년도 1년 빠른데 대구상고 선수때부터 팬이 였고 한양대를 거치며 한국 최고의 교타자가 되었는데 세계대회에서 항상 4할 이상을 쳐 주어 타격의 달인이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때문에 1년 늦게 입단한 장효조는 데뷔시즌 타격,출루율,장타율,최다안타 1위에 올랐고 홈런 3위에 이어 1985년부터 3년간 연속 타격왕을 포함 해 4차례 타격왕과 출루율 5연패의 금자탑을 세웠다.
1987년 MVP가 되기는 하였지만 좀 더 어린나이에 프로에 입문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2011년도 55세나이에 간암으로 타계하였는데 그는 나에게는 한명뿐인 야구선수였고 내가 죽는 날까지 현재로서 변함이 없을 것 같다.
프로야구 원년 삼성을 응원하게 된 이유는 위의 말한 이유때문이고 그 이후는 장효조가 삼성선수여서고 장효조가 김용철(나와 동갑이고 서로의 집에서 한잔하는 사이)과 맞 트레이드 돼 롯데로 갈때부터는 롯데를 응원하였다.
장효조가 은퇴한 후, 팀보다는 비열하고 기록 조작하는 감독의 팀이 패하는 쪽으로 응원하게 되었고 그런 감독이 없어진 올해부터는 삼성에 이어 키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삼성은 첫정이고 키움은 삼미의 전신이기 때문이다.
우리 둘째사위가 KIA에 근무하기 때문에 KIA를 응원하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결정적일때 마다 삼성을 따 돌리고 우승을 독차지한 팀이라서 묵은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어 날이 갈수록 덜어내고 있는 만큼 시간이 가야 한다.
코로나19로 수 많은 인기 스포츠 중계를 접하지 못하다 보니 한국 프로야구 시청이 그나마 내 볼거리로 자리를
잡았는데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스포츠가 좋은 것은 다큐고 각본없는 드라마가 나올 때는 감동으로 밀려온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홍길동'인 내가 면연력이 떨어지다 보니 긴병으로 집콕이 길어지다
보니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프로야구와 손흥민 경기가 있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첫댓글 아프면 뒤돌아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파 누워 있으면 한 아이는 가슴께에 한 아이는 발치께에 앉아서 고사리 손으로 몸을 주물러 주면서 엄마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선합니다.
자식 가진 부모는 그래서 함부러 아파도 안된다고 합니다.
이제 노년에 들어서서 자식들도 다 자기 길을 가니 더욱 아파서 그들에게 짐이 될수는 없다는 마음이 듭니다.
홍후배도 (아파서 술을 못마시겠지만) 부지런히 약먹고 보식 잘해서 건강해지기 바랍니다.
쾌유가 잘 안되네요.오늘 병원가면...좋은 소식이 있으려나...ㅎㅎ
자신이 아픈 것은 자식도 배우자도 소용없고 자신이 버텨야하는 현실예요
건강관리 잘하는 것도
주변에 있는 이들을 배려하는 행위라 생각하고 잘 챙겨야 합니다 ㅎ
맞는 말씀입니다.명심하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