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Parasite)’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2021년 올해에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두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태어난 아시아 출신의 감독입니다. 아시아인의 정서와 감정이 유럽과 미국의 영화계에서도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가 주는 주된 시대정신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온 도시와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나의 능력과 업적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에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봄에 피는 꽃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낯선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웃에게서 믿음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에는 하루하루 삶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늘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가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이 사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의 ‘문명의 역습’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문명은 너무나 큰 희생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 같습니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버려지는 쓰레기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과연 우리가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컴퓨터, 인공지능, 자율 주행 자동차가 우리를 편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행복은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 우리는 경제적인 손실을 이야기합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백신과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곧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어쩌면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되면서 우리는 어쩌면 지나치게 타인에 대해서 비난과 비평을 일삼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어쩌면 우리는 말 못하는 생명을 괴롭히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들 착취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수시로 체온을 재면서 나의 사랑의 온도, 나눔의 온도, 희생의 온도는 너무나 식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안전을 위해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으면서 과연 내가 거처할 하느님 나라에 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자연을 희생하면서 세우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없는 연민과 사랑입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입니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입니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합니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조재형신부
2021년 06월 03일 목요일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입당송
지혜 3,6-7.9 참조
주님은 뽑힌 이들을 도가니 속 금처럼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받아들이셨으니, 주님이 찾아오실 때, 하느님께 뽑힌 이들은 은총과 평화를 누리리라.
본기도
하느님,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게 하시니
복된 가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의 피로
하느님의 교회를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라파엘과 함께 라구엘의 집에 간 토비야는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고, 해로를 비는 기도를 주님께 드린다(제1독서). 율법 학자가 첫째가는 계명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
6,10-11; 7,1.9-17; 8,4-9ㄱ
10 토비야가 메디아에 들어서서 이미 엑바타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11 라파엘이 “토비야 형제!” 하고 청년을 부르자
그가 “왜 그러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라파엘이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밤을 라구엘의 집에서 묵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그대의 친족이오. 그리고 그에게는 사라라는 딸이 있소.”
7,1 엑바타나에 들어서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나를 곧장 우리 친족 라구엘에게 데려다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토비야를 라구엘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마당 문 곁에 앉아 있는 라구엘을 보고 먼저 인사하였다.
라구엘은 “형제들, 기쁨이 충만하기를 비오! 건강히들 잘 오셨소.” 하고
답례한 다음, 그들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9 라구엘은 양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잡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들이 몸과 손을 씻고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을 때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0 라구엘이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청년에게 말하였다.
“오늘 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라.
형제야, 내 딸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나도 사라를 너 말고 다른 남자에게 줄 권리가 없다.
네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얘야, 너에게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다.
11 나는 벌써 사라를 우리 동포 일곱 남자에게 차례로 주었지만,
사라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그 밤으로 다 죽어 버렸다.
그러니 얘야, 지금은 그냥 먹고 마셔라.
주님께서 너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토비야는 말하였다.
“제 일을 결정지어 주시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그러자 라구엘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마. 모세의 책에 있는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사람이다.
하늘에서도 사라는 네 사람이라고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
너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이제부터 너는 사라의 오라비고 사라는 너의 누이다.
오늘부터 사라는 영원히 네 사람이다.
그리고 얘야, 오늘 밤에 하늘의 주님께서 너희를 잘 보살피시고,
너희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2 그러고 나서 라구엘은 자기 딸 사라를 불렀다.
사라가 오자 라구엘은 그 손을 잡고 토비야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율법에 따라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모세의 책에 쓰인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아내다.
그러니 네가 맡아서 네 아버지께 잘 데려가거라.
하늘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번영과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3 라구엘은 다시 사라의 어머니를 불러서 쓸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라를 토비야에게 아내로 준다는 혼인 계약서를 썼다.
14 그러고 나서 그들은 먹고 마시기 시작하였다.
15 라구엘은 자기 아내 아드나를 불러,
“여보, 다른 방을 준비해서 사라를 그리로 데려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아드나는 가서 라구엘이 말한 대로 그 방에 잠자리를 차려 놓은 다음,
사라를 그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사라 때문에 울다가 눈물을 닦고 그에게 말하였다.
17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그러고 나서 아드나는 방을 나갔다.
8,4 부모가 방에서 나가 문을 닫자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5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도하며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였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6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7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8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
9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8(127),1-2.3.4-5(◎ 1ㄱ 참조)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마카 7,1-2.9-14)와 복음(마태 5,1-12ㄴ)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님,
이 예물을 바치며 간절히 비오니
복된 순교자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죄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였듯이
저희도 오로지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주님 제대에 봉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16(114─115),15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순교자들의 승리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그들이 온갖 고초를 이겨 내게 한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가 시련을 겪을 때에도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이 포함되고, 그 밖에 우리에게 신앙인의 의무로 주어진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나요? “예.”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마음, 목숨, 정신과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몰입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