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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전망대에서의 새벽 스트래칭
주연 : 민병락(광주달리기동호회 고문)
조연 : 알통가재 김승기
민병락 고문이 잠깨는 소리에 부시시한 눈으로 어렴풋 시계를 보니 2002년 9월 2일 04시가 막 지나간 듯 싶다. 어제 밤12시가 넘어 민박집에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피곤한 모습이 비춰졌는지 민고문 특유의 정감어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째 좀 더 자볼까?"
반가운 소리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볼까. 어제 팀들은 아침 8시에 출발했다는 것 같던데..."
말끝을 흐리니 묵시적 동조인지 말이 없다. 옳커니 잠을 더 청하자며 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몇분이 흘렀을까 병락형의 목소리가 거듭해서 귀를 당겼다.
"그래도 다섯시에는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 대답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그러지. 뭐..."
병락형은 하루전 9월1일 오후 광주 도착때부터 함께 했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역에서 기다렸다가 광주마라톤클럽 윤흡 전회장과 함께 저녁을 함께했다. 먼길 달릴 사람 힘쓰라고 오리고기로 특별한 저녁을 정말 맛있게 대접 받았던 것이다. 병락형은 땅끝까지 이미 차가 끊어졌다며 손수운전으로 함께 내려와 민박집에서 1박을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먼저 요기하고 달려가다 식당이 나오면 아침을 먹읍시다."
병락형은 엊저녁 인근에서 마련해 온 깻죽을 꺼내 권했다. 민 고문은 후배들 잘 챙겨주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두 살 위인 알통에게도 깍듯하다. 그는 알통을 위해 지난 밤에 벌써 땅끝마을 인근을 두루 살펴보고 새벽에 식사가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 먹거리를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조용한 새벽 깻죽을 마시기 시작하니 무엇인가 북바치는 감격이 느껴졌다. 640km, 그 첫발을 내딛기 전의 긴장, 잔잔한 전율에 겹쳐, 민고문의 우정어린 배려가 그만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제밤 잠 못이룬 몇 분간을 천장을 올려보며 곰곰히 생각해본 일이 있다.
"640km, 그래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이 먼 땅끝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와 진한 우정이 있으니 완주를 못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두 주먹에 슬며시 힘을 주어 움켜 잡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잠이 들었다.
땅끝 전망대에서 맞은 새벽은 정말 상쾌했다. 긴장감에 다소 들뜬 기분을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이 보듬어 주는 듯 편안하기도 했다. 스트래칭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병락형이 없었다면 편안하기는커녕 멀리 등대에서 외롭게 반짝이는 불빛조차 바라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 최남단 땅끝 전망대에서 맞는 새벽 결코 외롭지 않기에 병락형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더했다.
출발에 앞서 마지막으로 이것 저것 점검이 끝나고 드디어 카운트 다운에 들어 갔다. 병락형이 손전화 시계가 정확하다며 뚜껑을 열어재끼니 액정불빛이 반짝였다. 때맞춰 첫발을 내디뎠다.
"출발"
50풋살의 220km 보주합주여행, 아니 그 말은 여행후 만들어 낸 말이기 때문에 적어도 출발시점인 그 때만큼은 640km 국토종단마라톤의 첫발이 우정을 싣고 임진각을 향해 내디뎌졌던 것이다.
여명과 황혼이 똑같듯 인생의 시작과 끝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해안선을 따라 몇 개의 크고 작은 언덕을 넘으니 어느새 칠흑 같은 장막이 걷히면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먼바다 어둠속에서 빛을 발하며 궁금증을 더해주던 물체들의 모습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들어냈다.
어둠속 저멀리서 반듸불 처럼 반짝였던 것은 다름아닌 다도해 섬마을에서의 불빛이었으며 부지런한 어부들이 꼭두새벽부터 그물을 걷던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언덕 모퉁이를 돌아서니 발그스레한 태양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어릴적에 누나가 어머니 몰래 훔쳐 바르던 분첩 속의 분가루가 동그랗게 뭉처진 것 처럼 곱게 느껴지는 파스텔톤의 진한 오랜지색이다. 아랫쪽 붉은색에서 위쪽 끄트머리 노란색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그라데이션 효과는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흉내 못낼 신비감마져 느끼게 했다.
동해안에서도 일출을 보기가 힘든데 비록 안개구름으로 조금은 솟구친 모습이지만 남해에 와서 일출을 보다니 그렇지 않아도 달리기 하는 사람의 가쁜 가슴을 더욱 숨가쁘게 만들었다.
다도해, 오밀조밀한 해안선, 해송 등이 연출하는 땅끝마을에서의 여명은 벅찬 감격으로 해풍에 실려 폐포 깊숙히 스며들었던터였는데 더 없는 경이로움이 또 한번 온 몸을 감싸 마치 신선이 된 듯 했다.
그러나 역시 달리기라는 운동이 힘든 운동이라 그런지 별안간 궁상맞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진 전문가들은 여명에 이은 일출의 모습과 낙조에 이은 석양, 황혼의 모습을 구분할 수가 있다고들 하는데 필부의 눈에는 모두가 똑 같기만 하다. 사실 똑 같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가령 태양을 가운데 매달아 놓고 두 사람이 마주본다고 했을 때 바라보는 나는 일출이라고 하는데 마주해서 바라보는 사람은 낙조라고 말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지구가 도는 것이나 시간이 가는 것이나 같은 이야기겠지만 둘 모두 후진 없이 앞으로만 굴러가기 때문에 수도 없이 반복될 뿐인 것이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시간을 따라 모르는 곳에서 굴러와 모르는 곳으로 굴러가는 가는 것, 바라보는 이들이 "생"과 "사"로 말할 뿐 태어남과 죽음은 똑 같은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그래서 "흙에서부터 흙으로"라는 말과 "윤회"라는 말도 생겨났다는 생각이다.
"빵 빵"
얼마동안을 상념에 젖어 달리는데 별안간 뒤에서 크지 않은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병락형이 차로 뒤쫓으면서 그 또한 다도해의 일출정경에 흠뻑 젖어 혼자보기 아깝다는 듯 함께 보자는 손짓이다. 웃음으로 답을 하고 잠시 차 옆으로 붙어 뛰면서 병락형에게 말을 건넸다.
"병락형! 출근해야잖아 얼른 광주로 가시오. 마나님한테서 쫓겨날려고..."
사실 땅끝으로 내려올 때는 소리 소문 없이 내려왔다. 그야 뻔하지 않은가? 요란스럽게 출발을 했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완주후에 큰 소리 한번 내자"가 내심에 감춰진 속내였다.
그러나 병락형의 안테나는 피해갈 수가 없었다. 윤흡 전회장과 병락형이 교대로 전화를 해 광주역에서 기다린다는데 피해갈 재간이 없었다. 병락형은 일상에서 계획에도 없던 일로 알통과 함께 1박을 하고 마나님 눈밖에 날 것만 같아 농담이라도 걱정을 해주었더니 빙긋이 웃으며 너스레로 답하기도 했다.
"내가 제일 무서워 하는 사람이 우리 마누라요."
알통 또한 지나칠 수 없어 한마디 짚고 넘어갔다.
"이쁜 마누라와 함께 살면 그 정도 세금은 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지난해 함평마라톤에서 제수씨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정말 미인이셨다. 그래서 또 한마디를 안할 수가 없었다.
"병락형은 그 나이에 왠 처녀하고 사시오?"
아무튼 병락형은 알통이 내려온다는 소문에 마나님과 상의도 않고 가출(?)을 하게 된 것이고 집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한데 형으로서 걱정을 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로의 말이랍시고 또 한마디를 건냈다.
"쫓겨나면 우리집으로 오시오. 비록 옥탑방이지만 하나는 남으니까..."
너털 웃음을 함께했다. 그러나 이내 달리는 주로에서 한바탕 말씨름을 해야 했다.
"가시오"
"못가겠다"
결국 오전 7시30분 정도까지 함께하면서 마땅한 밥집을 찾으면 식사를 하고 해남으로 향하겠다는 언질을 받아놓고 나서야 노상에서의 입씨름은 끝이 났다.
아침해가 퍼지기 시작하니 저멀리 바다는 안개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도해에 즐비한 섬들도 안개에 뭍혀 끝자락 고개만 내밀고 바라보는 형상이다.
해안선을 따라 뻗어있던 도로의 방향이 내륙쪽을 향하면서 안개속에 뭍혀진 다도해가 뒤쪽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조그만 언덕을 넘어 마을을 향하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일손을 재촉하는 모습이 여기 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예사롭지 않은 산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불이 훨훨 타오르는듯한 불산이다. 마을에 당도하니 병락형이 손뼉을 치며 맞아주었다. 땅끝에서 출발한지 두시간, 15km정도 지점이다. 시속 7.5km면 계획보다 앞선 오버페이스의 속도다. 첫발의 설래임과 가벼운 흥분이 발길을 재촉했다는 생각이다.
밥집이란 간판도 없는데 식당이라고 했다. 병락형이 차를 몰아 시골밥집을 찾아나섰는데 마침 정거장 버스기사 아저씨들에게 밥을 파는 집을 용케도 찾아내서 아침을 준비시켜 놓았던 것이다.
동태찌게며 수많은 반찬가지와 "밥은 드시고 싶은대로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식당 모두를 내맡긴채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바삐 일손을 재촉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후식으로 숭늉의 누른밥까지 말끔히 해치웠다. 얼마만에 맛보는 숭늉에 누른밥인지 모른다. 아마 족히 몇 년은 됐을 것이라는 기억이다.
길 건너 수퍼앞 좌판에 엉덩이를 얹고 편하게 자리를 잡으니 월출산의 축소판 같기도 하고아까부터 눈에 들어 온 산의 이름이 궁금했다. 병락형에게 물으니 전라도에서는 그 같은 산을 "써래산"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모내기 전 논을 편편하게 고르는 써래를 뒤집어 놓은 모습의 뾰족산이다. 풍수지리에서는 그러한 모습의 산을 아마 불산이라고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써래산이라는 말에 "아하"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 산이 달마산인데 미화사라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절도 있다."
그 때 수퍼 아저씨께서 다가서더니 "어디에서 어디까지 간다는 것입니까?"고 물었다. 대충 답을 해드렸더니 "완주하십시오"라고 정중한 인사말씀에 "감사합니다"고 답했다. 병락형이 카메라 셔터를 부탁하니 몇번을 찍어 주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낯선 사람이 동네를 찾아든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는지 통학차를 기다리며옹기종기 모여있던 가방든 코흘리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 중에는 초등학교 2학년 짜리 딸아이의 손목을 꼭 잡고 차를 기다리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분명 지도에는 바로 앞이 초등학교인데 아이들이 학교간다는 말에 아주머니에게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학교인 것 같은데 이 아이들은 어느 학교로 가길래 아침부터 서두릅니까?"
아주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요즘 농촌에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폐교된 곳이 많다. 우리동네 이 학교도 마찬가지로 폐교가 됐다."
그 아주머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교로 학교가 없어진 근심이 아니라 또 다른 사적인 큰 근심이 있어 보였다. 근심어린 모습이 하도 안스러워 조용히 지켜보니 그 아주머니도 흘깃 흘깃 살피면서 시키지도 않은 말을 토해냈다.
"남편은 일하다가 독사에 물려 쓰러져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다. 아들녀석도 어지럽다고 하더니 비실비실 쓰러지고 말았다. 지금 남편과 아들이 모두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런데 엎친데 겹친 격으로 집에 도둑이 들어 모두 훔쳐갔다.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태산 같다."
말리 끝나기가 무섭게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낯선 사람과 시선을 나누기가 멋적은지 먼산을 바라보았다. 하기사 오죽 답답했으면 낯선 사람에게까지 푸념을 털어놓을까. 누가 들어도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해줄 수가 없으니 듣는 사람도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갈 길도 멀은데 괜한 걱정이라며 관심을 돌리자는 마음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인터넷중계를 맡고 있는 강설립 형에게 전화를 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말해주었더니 따듯한 위로의 말까지 건네 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제 막 출발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늘 같은 기분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를 뜨면서 병락형에게 또 다시 신신당부를 했다.
"병락형 이제 혼자갈터이니 제발 돌아가시오. 옥탑방도 좋다면 할 수 없지만 쫓겨나면 어쩔려고..."
병락형은 해남이 고향이라 마침 선산 벌초를 하기로 했다며 일찍 끝나면 점심도 같이 하자며 떠났다. 너무도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마을을 떠나려 하니 근심어린 아주머니께서 반쯤 무릅을 낮춰 앉아서 딸아이의 머리며 얼굴을 정성껏 매만져 주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아무리 아무 연고가 없는 지나가는 낯선 타지 사람이지만 그 모습에서 "희망"이라는 말을 끄집어내 억지로라도 위안을 삼고 근심어린 아주머니의 잔영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그래 앞으로의 희망이 없다면 딸자식의 머리를 저렇게 정성껏 매만져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아주머니의 잔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