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0장 1~12절/무모한 힘겨루기(207/365)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는 가운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만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끝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전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명분을 대면서 우리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그 뒤에는 결국 끝없는 탐욕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권력자들의 오만과 야욕과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끝없는 오만함과 야욕과 탐욕이 날마다 죽음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탐하지 말라고 하셨고, 겸손하라고 하셨고,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벗어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죽음을 부르는 탐욕과 야욕과 오만함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1.아람 왕 벤하닷이 힘이 생기자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북왕국을 침략하였다. 아람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만 해도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던 나라였다. 그런데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자 르손이 아람에서 왕이 되어 솔로몬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왕국을 세우고, 힘을 기르던 아람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이 되면서 더 크고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북왕국과 남왕국 유다가 서로 동맹을 맺고 싶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그러한 가운데 아람 왕 벤하닷이 자기의 권력아래에 있는 삼십이 명의 왕들과 함께 북왕국을 침략하였다(1~3). 벤하닷은 북왕국이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사마리아를 포위하면서 항복하도록 하였다. 많은 은금으로 조공을 받칠 뿐 아니라, 심지어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바치라고 하였다. 참으로 굴욕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다.
그러나 이렇게 굴욕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로 아합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자 하지만 아합은 힘이 약하였기 때문에 쩔쩔 매면서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 들였다(4).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하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던 아합이 벤하닷 앞에서는 쩔쩔맨다. [그러면 이때 아합과 이세벨이 그렇게 열심히 섬기던 바알은 어디로 갔는가? 바알은 자신을 열심히 섬기면서 헌신한 아합과 이세벨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바알은 기근에서도, 갈멜산에서도, 그리고 아람과 전투에서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헛된 우상들의 정체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상이다. 미래라도 약속을 해야 하지만 전혀 그런 약속을 할 줄 모른다.]
2.벤하닷의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구를 아합은 구도로 수용하겠다고 하였다(5). 벤하닷을 막아낼 수 없는 아합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그런데 벤하닷의 요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알아서 금은보화와 아내와 자녀들을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하들이 직접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대로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5,6). 벤하닷은 북왕국의 모든 곳을 삿삿이 뒤져서 자신이 찾아서 가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나라를 내 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힘이 지배하는 세상의 논리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은 결국 힘의 원리에 따라서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는 평강과 안식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강한 자의 포악과 약탈만 있을 뿐 약한 자에 대한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자비는 그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때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아량과 동정을 베풀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강한 자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 진짜 사랑과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3.아합은 벤하닷이 자신의 신하들을 보내어 눈에 좋은 대로 마음대로 가지고 가겠다고 하자 이것까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과 의논을 한 가운데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다(7~9). 아합은 벤하닷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비굴하게 계속해서 벤하닷을 주로 고백하고, 자신을 종으로 섬기는 자로 표현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벤하닷에게 잘 보이겠다는 취지였다. 그러자 벤하닷도 이제는 전면전으로 북왕국을 침략하겠다고 하였다(10). 사실 벤하닷의 본래 목적은 여기에 있었다. 북왕국을 침략하여 자기들이 예전에 당했던 수모를 그대로 갚고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다. 벤하닷도 역시 오만하고 거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북왕국과 전쟁을 하면 자신이 확실히 이길 것이라고 장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아합은 결과를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11). 값옷을 입는 자라는 것은 전쟁을 시작하는 자이고, 값옷을 벗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전쟁을 시작하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고, 또한 승리한 자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전쟁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합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전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이렇게 망하던 저렇게 망하던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자는 것이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자신의 군사력과 지략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서 전쟁을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자들이 이렇게 허사를 경영하며 자신들의 오만함을 들어낼 때 하늘에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보시고 웃으신다고 하였다(시2: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모든 나라의 전쟁을 주관하시고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자기들끼리 탐욕을 부리면서 힘을 자랑할 때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