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친일 경찰인 이경안과 장영팔을 체포해 검찰로 송치하고 뒤풀이로 이곳 무등산
산장에서 회포를 풀고 아침에 늦게까지 자고 일어났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라디오를 틀었다가 청천벽력 같은 백범
김구 선생 서거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안두희에게 사주한 윗선이 하우스만이나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심증이 갔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던 이순남 팀장이 타임머신 호를 불러 타게 되었다.
일반 사람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타임머신을 탑승하기는 여간 까다로웠다.
반듯하게 누워 타임머신에 관한 주문을 외우며 집중하기를 오랫동안 하며 기를 모으고
명상 속으로 빠져들어 잠자게 된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여행을 하고 나면 울릉도에서
독도에 갈 때 풍랑을 맞아 뱃멀미하는 것처럼 후유증을 앓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순남 팀장은 어지간해서는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안두희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궁금해 그냥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렵게 타임머신에 올라탄 이 팀장은 크게 실망해야 했다.
바로 1년 후 6·25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이 서울을 위협하자 이승만이 안두희를
감옥에서 빼내 자신의 전용 열차에 태우고 곧장 대전으로 도망가는 걸 보았다.
한강 다리를 폭파해 버리는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누가 지시했는지는 하우스만이
의심되고 심증이 갔으므로 타임머신 호를 타고 미래 여행하면서 알아내려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에까지 날아가야 했으므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리고 백범저격을 안두희에게 사주했던 것도 심증만 갔지,
알아내려 했으나 역시 시간이 없었다.
명채와 형기가 쳐다보고 있으니 타임머신을 오래 탈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 때문에 안두희의 앞날만 대강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고 잠을 깨고 나니 멀미만 하게 되었다.
얼마나 발버둥을 쳤던지 타임머신 멀미가 심해 생머리가 지근거렸다.
명채와 형기가 권하는 시원한 맥주를 거절하고 냉수를 몇 대접 들이켜야 했다.
애석하게도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는 1960년까지 안두희에게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여순사건 때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을 고자질해준
공과가 참작되고 만주 군관학교와 관동군에서 같이 일본에 충성했던 백선엽 일파,
친일군인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친일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18년 동안 집권하는 바람에 또다시 안두희에게는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전두환독재가 노태우까지 이어져 결국은 백범 김구 선생을 저격하게 된 배후가
안두희의 입에서 밝혀지게 하지 못하고 제명을 다 살고 죽는 장면을 타임머신 호를 타고
미래 여행하면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백범 김구 암살 배후는 밝혀내지 못하고 영영 소멸하고 말게 되었으니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웬일로 평생 독립운동한 사람헌테 맡게 가꼬 수사본부를 속 빠르게 구성하냐 싶었다니까,
그런디 수사본부장을 장흥 사령관한테 맡겼다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심복인 부사령관
전봉덕이헌테 맡겼더라니까.”
“그러니까, 경질한 이유가 독립운동했던 사람은 안 된단 말이네요.
아그들 장난도 아니고 참말로 웃기는군요.”
“장흥 헌병 사령관은 김구 선생과 한평생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만 힘썼으며
임정 출신이란 거라니까. 우리 민족의 별이신 백범께서 서거하자 땅을 치면서
애통해 허다가 안두희의 저격 사건을 수사하게 되자 아버지 묘에 참배 허로
왔더라고 하등만. 이번 사건에 관련자들을 모두 밝혀내리라고 굳은 의지를 보였는데
부친묘지에 참배 중에 안두희 사건 수사본부장이 전봉덕으로 바꿨다는 연락을 받은 거지.
아이들 장난 겉은 짓을 이승만이가 했던 것이라니까!”
“지금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 88구락부 소속이고 전봉덕이가 안두희를 훈련까지
시킨 걸 알고 있는데 이 사람에게 수사를 맡긴단 말입니까?”
타임머신 호를 올라타자 곧바로 백범저격 사건 수사본부장이 88구락부 소속인
전봉덕으로 바뀌더라는 얘기부터 이 팀장이 시작했다. 명채도 형기도 모두 어이없어했다.
밖에 볼일이 있는 사람이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굴비를 굽고 저녁밥을 맛있게 먹을 요량이었다.
굴비를 손질해 장독대 위에 얹어놓고 집주인이 아끼던 고양이에게 부탁했다.
일하고 돌아올 때까지 굴비를 잘 지키고 있으라고 부탁한 사람을 일컬을 때 우리 말로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다는 말을 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지켜달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장흥 헌병 사령관이 안두희를 수사하는 것은 극히 당연했던 터라 정해 놓고는
갑자기 전봉덕으로 경질했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처사다.
이는 생선 훔쳐 먹기의 명수인 걸 알면서도 고양이에게 귀한 굴비를 지켜달라며
지시를 하고 외출한 어리석은 집 주인과 같은 처사다. 모든 국민이 백범을 저격하라고
최종지시한 의심 가는 사람인 전봉덕에게 수사본부장을 맡겼으니 삼천만
동포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 ‘장흥’ 그 양반의 생애와 업적을 세세히 기록해 놓은 모 박사님의
논문을 내가 머릿속에 녹음해 왔네. 한번 들어보라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인터넷에 들어가 이번에 백범 선생을 저격한 범인 안두희를
수사하기로 했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던 장흥 헌병 사령관의 생애와
업적을 소개한 모 박사가 기고한 글을 꼼꼼하게 베껴온 이 팀장이 읽기 시작했다.
“장흥 헌병 사령관은 1903년 1월 20일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성사리(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당에 훈장이었던 부친 밑에서 한문을 배웠고 15살 때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한다.
1925년 2월 의열단 단원 오세덕을 따라 한국 청년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27년 8월 여운형의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중국군에 입대했다. 또한, 동기생인 의열단장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했고,
이와 함께 난징 헌병사령부에 소속되어 단원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1931년 이후 난징사령부에 재직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 특별 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일제 밀정이 수집한 정보를 탐지하여 당 고위층에 전달해 대책을 수립하도록 했다.
1933년 난징에서 중국관 내, 각 혁명단체를 통합한 대일전선 통일 동맹 결성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조선 민족혁명당이 창당할 때 참여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5월에 중국군 난징 장정 총대기요 간부(南京壯丁總隊機要幹部)로 재직했으며,
신한 독립당계 청년 50여 명이 뤄양분교를 졸업한 뒤 난징 태산여관에 숙식할 때
지청천의 요청을 수락하고 그들을 장정 명단에 편입시켜 생활필수품을 보급받게 했으며
1년여간 매월 급여 80원 중 50원을 지원했다.
한편 장흥은 1935년 5월에 중국군 헌병사령부 상위(上尉)가 되었고
1940년 12월 헌병 제8단 소교단(少校團), 1942년 10월 동제 2연 소교영장(少校營長) 등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특히 저우에 주둔한 일본군 내 한적인 사병 정희섭, 성동준, 김수남, 등 수십 명을 집단
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후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강서, 호북, 호남 등지에서 중국 헌병 영장에
포로 관리 및 한적 사병 분리 수용과 보호 임무를 수행했으며, 한적 사병을
광복군으로 전출, 편입시킴과 동시에 징모처(徵募處)의 임무도 수행했다.
8.15 광복 후, 그는 광복군 참모 겸 선무 단장으로서 한인 교포를 조국으로
수송시키고 치안을 유지하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등의 일련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귀국 후에는 대동 청년단체에 가담해 훈련소장을 맡았고 초대
헌병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던
그는 급히 상경해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범행을 수사하려 했지만, 그가 김구와 가까운
사이인 점을 꺼린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사흘 만에 경질되었고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이 후임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참말로 장흥 사령관 그분이 이런 울분을 어찌케 참았을까요?”
“그러니까 말이네. 도무지 상식 밖의 짓을 하고 있응게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니까.”
“백범 선생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국부가 아닙니까? 쓸개 빠진 친일파들은 이승만이가
국부라고 떠들고 있으니 기가 찹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해 백범 선생까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주독립 국가를 외쳤던
국가지도자들은 이렇게 하나둘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친일파들이 두고두고 오랫동안
주름잡게 될 징조가 보인다며 이순남 팀장과 명채와 형기가 안타까워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장송 피아노곡을 듣기라도 해야 이승을 떠나는 백범 선생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 라디오 앞을 떠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