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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어도 천사처럼 써야지"
6000억 사회환원한 삼영화학그룹 이종환 회장
이종환(李鍾煥) 삼영화학그룹 회장(84)은 지난 10년 동안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했다. 2002년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해 ‘관정(冠廷)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한 후 계속 출연금을 늘리더니 최근까지 총 6000억원을 재단에 쏟아 부었다.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의 95%에 달한다. 그는 "천사처럼 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천사처럼 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이 회장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두 번째 사건은 이른바 ‘1000억원 위자료가 걸린 황혼이혼 소송’이었다. 1999년 이 회장의 부인이 제기한 이혼소송은 당시 ‘최고령에 사상 최고액수의 위자료를 청구한 사례’라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이혼을 거부했던 이 회장은 결국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여 위자료 50억 원에 합의 이혼했다가 8년 만인 작년에 재결합했다.
최근 자서전 ‘정도(正道)’를 펴낸 이 회장을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20일 만났다. 1970년대 초 이 회장이 아흔아홉 칸 기와집이 있던 자리를 사서 지었다는 집은 검소하고 단단해 보였다. 겉이 화려하기보다는 안이 실속 있는 분위기였다. 거실로 들어서는 이 회장의 인상이 딱 그랬다. 조용하게 할 말은 다 하는데 전혀 웃지 않았다. 그는 "비록 작은 기업이지만 소신껏 했고 야당 하는 것처럼 사업을 하다 보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고 했다.
―교육재단을 만들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
"내가 장사꾼 아니요? 1965년쯤엔가 마산지역 경제가 참 어려울 때인데, 내가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마산에 있는 모교에서 1~5등 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어요. 나도 사정이 어려운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땐 2~3년밖에 못 했어요. 그렇지만 진작부터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혹시 자녀분들이 반대하지는 않았습니까? "검소하게 살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내가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데 자식들이 왜 반대를 합니까." 이 회장은 2남 4녀를 뒀다. 큰 아들이 삼영화학그룹의 이석준(李碩埈) 부회장이다.
장보고(張保皐 , ? ~841년)는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무장 출신으로 신라의 해상 호족이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며, 일본측 사서에서 기록된 이름은 장보고(張寶高)이다.그의 출생과 계통은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만 적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년(鄭年)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해적 토벌에서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김제륭도 재위 3년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민애왕)이 스스로 즉위하자,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이후,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장보고가 사망한 연대를 문성왕 8년(846년)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에서는 조와 7년(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회창(會昌) 5년(845년) 7월에 전 청해진 병마사가 국난을 당하여 중국에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현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죽은 때를 841년 11월 중으로 보고 있다.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류관순(柳寬順, 1902년 12월 16일~ 1920년 9월 28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일제 강점기에 천안에서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2013년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시켰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905년 집이 근처 탑원리로 이사했다가 1907년 무렵 다시 가족을 따라 용두리로 돌아왔다.
1916년에 개신교계 감리교회 충청남도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엘리스 샤프, Elice Shape)의 추천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하고, 1919년 이화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였다. 교비생은 학비를 면제받고 졸업 후에 교사로 일하는 학생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었던 유관순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연이어 3월 5일의 서울 만세시위에도 참가하였다. 그 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3월 8일 열차편으로 천안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 시위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천안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조인원(趙仁元)· 김구응(金球應,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3.1만세운동을 탄압한 일제에게 죽임당함) 등이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개신교교회와 유림계를 규합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並川)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군중을 모았으며, 당일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맹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당시 천안군 목천면에서는 이종성(李鍾成) 등의 주동으로 3.1 만세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구금당해 실행하지 못했다.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의 주선으로 3월 9일 밤 교회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속장 조인원(趙仁元), 지역 유지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언니와 함께 경성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의 마을 유지와 유림계를 규합하기 위한 연락원의 한 사람이 되어 다른 연락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운동 참여를 설득했다.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는 시위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속장 조인원 등도 총격으로 부상당했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후 고문을 받았으나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유관순의 선고형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 전영택 등이 징역 7년설을 거론했으나, 최근에 '병천·동면 지역 형사사건부'가 발견되어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음이 확인되었다.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결혼하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구타를 당해 형기를 3개월 남긴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2013년 11월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打殺)"로 기재되어 있다. 국가기록원이 주일대사관에서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에는 3·1운동 당시 애국 인사들의 순국 정황과 관동대학살 당시 참상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들 명부에는 3·1운동 피살자 중 630명과 관동대지진 피살자 중 290명에 관하여 인적사항과 사망 당시의 정황 등이 기재되어 있다.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순국 장소는 서대문형무소로 나온다. 순국 상황 난에는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아우네 만세 운동 당일의 희생자도 기재되어 있는데,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가장 먼저 나온다. 순국 경위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이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훈록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추격하며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고 전하고 있다.
또, 이 자료에는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 난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로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로 추정되고 있는데,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는 자료의 내용은 1987년에 작성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와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는 기록과 같다. 일단, 국가기록원은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의 이씨를 미확인자로 분류했다
유관순이 사망한 이틀 뒤, 이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이화학당의 외국인 교직원들이 유관순의 옥중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마지못해 월터 교장서리에게 시체를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감리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에 택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처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광복 후 충청남도와 천안군의 협력으로 병천면에 유관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는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박인덕 등 이화학당 출신 인사들에 의해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 즈음,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유관순의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되었다는 소문 등이 퍼뜨려졌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후일 건국훈장 국민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시신을 잃어버려 1989년 10월 12일 그의 고향 근처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열사기념관(柳寬順烈士記念館)을 개관하여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2003년 문을 열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유관순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어 1심 형량은 설왕설래했었다. 유관순과 1년 가까이 함께 복역한 어윤희는 '유관순 열사가 6년형을 받았다'고 말한 반면, 조병옥의 동생 조병호는 '부친(조인원)이 유관순 열사와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 회고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 2007년 2월 26일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 발굴로 유관순의 1심 재판형량은 '징역 5년'임이 확인되었다.
유관순 사후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 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박인덕, 전영택, 일부 기독교인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을 근거로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하면서, 2011년에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라는 책을 통해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개신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고 유관순은 개신교계의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에 선교 전략에 활용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박인덕 등은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을 숨기기 위해 유관순을 미화, 신화화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있다. 기념사업을 주도한 박인덕이 자신의 일제말 친일행적을 유관순의 신화화를 통해 덮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 박인덕의 주도로 기념사업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유관순이 의도적으로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유관순 열사가 해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해방 후, 친일 혐의자인 박인덕과 전영택이 한국판 잔다르크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등의 이미지를 씌워 인위적 영웅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리고 이화여전 출신 친일 인사들의 친일 행적을 은폐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토막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이 소문의 진위 여부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일제에 의해 토막 살해당했다는 등의 ‘유관순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박인덕이 그를 미화하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방광 파열등 고문 후유증이었다.
1946년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은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았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고의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하였다.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을 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조선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서며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죄과와 친일경력을 가릴 방패막이로 삼으려 했는데, 이를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애국열사가 유관순이었다.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박인덕과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적인 여성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유관순을 잔다르크에 비유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00 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유독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었다는 비판도 있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주니어 (영어: Barack Hussein Obama, Jr., 문화어: 버라크 오바마, 1961년 8월 4일 ~ ,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출생)는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44대 대통령이다. 케냐 출신의 아버지와 유럽계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물라토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미국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자 하와이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09년 1월 20일부터 임기를 시작하였다. 2005년 1월 일리노이 주 출신 미국 상원 의원으로 재직하다가 2008년 11월 대통령 선거 이후에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컬럼비아 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였으며, 로스쿨 재학 시절 하버드 로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에 시카고에서 지역사회 조직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로스쿨 졸업 후 시카고로 돌아가 민권 변호사로 일하였으며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서 1992년부터 2004년까지 헌법학을 가르쳤다.
1997년에서 2004년 사이에 그는 일리노이 상원에서 3선하였다. 2000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의석을 얻지 못한 그는 2004년에 상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2004년 3월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그가 승리하였으며, 2004년 7월 민주당 전당 대회의 그가 맡은 기조 연설이 황금 시간대에 TV로 방영되는 등 일리노이 출신 상원 의원 선거 유세를 하면서 여러 사건을 통해 그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2007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유세전을 벌인 끝에 그는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을 365 대 173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9년 1월 20일에 제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안녕? 난 오바마야라는 말로 자신을 과시하였다.
2012년 11월 6일 열린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민주당의 재선 후보로 지명되어 밋 롬니 후보를 332 대 206으로 누르고 연임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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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계 원로 柳根哲(류근청)(82) 박사가 KAIST에 578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류 박사는 서울 잠실의 부인 명의 아파트 한 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과학기술발전과 인재 양성에 써 달라” 며 KAIST에 기부했습니다. 그가 기부한 액수는 대학 기부금 사상 최고액입니다. 단순히 액수만을 따진다면 그가 기부 액수는 국내 대학 중 기부금 수입이 가장 많다는 고려대와 연세대가 지난해 거둔 기부금의 총액보다 많습니다. 류 박사는 '전자침술기', '‘추간판 및 관절 교정용 운동기구' 등을 개발해 국내외 특허를 여러 개 취득하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96년 모스크바국립공대 종신교수가 되었습니다. 578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거금을 기부했다니까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류 박사는 스크루지 같은 자린고비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찌는 듯한 올해의 무더위에도 그가 숙소와 사무실로 겸하여 쓰는 아파트에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습니다. 이발소에 가서도 머리만 깎고 면도는 집에 돌아와서 합니다. 장롱과 침대를 빼고 모든 가구는 낡은 물건을 자신이 직접 재활용한 것들입니다. 못 쓰는 스키는 책꽂이로, 고물 쇠판과 나무는 책상으로, 남이 쓰고 버린 털조끼는 방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1만 원에 네 개를 주는 넥타이를 시장에서 구입하여 맵니다. 그는 평생 통장에 돈을 넣을 줄만 알았지 뺄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은 돈 578억 원을 내놓으면서 그는 "이것은 내 돈이 아니라 내가 관리한 돈" 이라고 말했습니다. 류박사가 한 말 "이것은 내 돈이 아니라 내가 관리한 돈이다" 라는 말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비로소 그 말이 진실인 것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주인의 물건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
한밤의 음악편지 :: 한의학계 원로 류근철(82) 박사
원로 한의학자, KAIST에 578억원 기부 - 아시아경제
장수 친목회 | 한의학계 원로 류근철 박사 ( 82 )가 잠시 보관햇던 578 ...
류근철 한의학 박사, KAIST에 578억원 기부 - 대한민국 IT포털의 중심 ...
류근철 박사(85세)의 명함은 화려하다. 한의학박사, 의공학박사, 카이스트(KAIST) 초빙특훈교수, 닥터류 헬스클리닉 원장…. 그러나 그를 가장 빛나게 해주는 수식어는 ‘기부왕’ 이다. 지난 2008년 카이스트에 578억원을 기부한 그는“요즘도‘어떻게 하면 더 많은 걸 사회에 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고 했다.
◆카이스트서 무료 진료 펼치며 신약 연구 몰두◆
사람들은 날 ‘기부왕’ 이라고 불러요.카이스트에 전 재산을 기부한 후부터지요. 당시 국내 개인 기부 중에선 최고 액수였어요.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기록일 거라고들 하더군요.
요즘 난 카이스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면적이 26.5㎡(8평)쯤 되는 좁은 방이죠. 식사도 학생 식당에서 해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교내에 있는 ‘닥터류 헬스클리닉’ 에서 몸이 아픈 학생과 일반인을 치료하고 신약 연구에 몰두하고 있거든요.
물론 진료비는 무료예요. 일종의 ‘재능기부’ 인 셈이죠.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역시 목표는 하나예요. 꼭 성공해 교수들에겐 연구비를,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지원하는 거지요.
◆‘사과 궤짝 책상’ 으로 공부방 꾸며 30명 지도◆‘
어린 시절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어요.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얼마 살지도 못한 채 쫓겨났지요. 3'1 만세운동에 참가하신 부모님에 대한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했거든요. 어머니는 고문을 심하게 당해 정신분열증을 앓기도 했어요. 결국 다섯 살 때 충북 충주 노은면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았어요.
부모님은 날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됐어요. 하지만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열한 살 때 무작정 가까운 초등학교에 찾아가 “공부 좀 시켜달라” 고 간청했어요.그렇게 그해‘ 늦깎이 1학년’ 이 됐어요.
어릴 땐 공부를 무척 좋아했어요. 리더십도 강한 편이었고요. 당시 주워온 사과 궤짝으로 책상을 길게 만들어 집에 공부방을 꾸몄어요. 남포등(석유를 넣은그릇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리 덮개를 씌운 등) 두 개를 천장에 매달아 불을 밝힌 후 동네 아이들 30여 명을 모아 공부를 시켰어요. 나보다 상급생도 더러 있어 공부방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기도 했지요. 하지만 절대 양보하지 않았어요.
◆공학박사 꿈꾸며 ‘工’ 자 붙이고 다니던 소년◆‘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소질도 있어 곧잘 ‘작품’ 을 만들어냈지요. 함석을 오려 만든 자동차, 철사를 꼬아만든 스케이트…. 4학년 때부턴 ‘장인공(工)’ 자를 함석으로 오려 가슴에 붙이고 다녔어요. 선생님들은 그게 뭐냐며 당장 떼어버리라고 핀잔을 줬어요. 하지만 난 고집을 피웠지요.“ 난 공학박사가 될 거예요!” 하면서요.
내가 생각해도 좀 유별난 데가 있었어요. 초등생 때 일본에 책을 주문해 볼 정도로 조숙했죠. 주로 교과와 관련된 책, 혹은 학술 잡지였어요. 책값은 헌 양은그릇이나 깨진 솥, 다 해진 고무신 같은 걸 주워 고물장수에게 팔아 마련했어요. 친구들은 고물을 엿과 바꿨지만 난 그 돈으로 책을 사 본 거예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일본으로 가제철회사에 취직했어요.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됐거든요. 1년 반 정도 일본에서 머물며 중·고교 과정을 혼자 뗐어요. 의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 스무살 되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 후 였어요.
◆300억 재산 “좋은 데 시집 보내야겠다” 생각◆‘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할 땐 돈이 없어 하루 한 끼만 먹었어요. 그래도 젊어 그런지 물만 먹어도 기운이 펄펄 나더군요.(웃음) 엄청난 고생 끝에 한의대를 졸업한 게 서른 살 때였어요.
한번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꺼내지 않았어요. 악착같이 모으다 보니 한 푼 두 푼 쌓이더군요. 어느 날 보니 재산이 100억원으로 불어 있었어요. 이제 나도 살 만하구나, 싶었어요.
200억원을 모았을 땐 나도 이제 부자구나, 했지요. 그런데 300억원이 되자 덜컥 겁이 났어요. 내 돈이 아니란 생각이 든 거예요. ‘ 좋은 곳에 시집 보내달라고 온 돈’ 이란 생각에 그때부터‘내 재산 혼처(婚處'혼인할 자리)’ 를 찾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물어요. 한의학으로 번 돈을 왜 카이스트에 기부했느냐고요. 한의학이 있는 것도 모두 조국이 있기 때문이에요. 옛날엔 ‘군대 몇 명,무기 몇 대’ 로 국력을 가늠했어요. 하지만 오늘날 국력은 곧 그 나라의 과학 수준이지요. 과학자가 대접받는 나라가 선진국인 세상이 된 거예요. 난 내 돈이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을 높여 국력을 강하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길 바라요. 게다가 카이스트는 온 국민이 주인인 곳 이잖아요. 나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여기에 시집 보낸 돈은 영원히 내 소유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린이들, “ 꼭 인재 되겠다” 큰 뜻 품어야◆‘
돌이켜보면 셋방살이하던 시절에도 큰돈은 아니지만 고향에, 모교에 장학금을 보냈어요.‘ 나눔 정신’ 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거예요. 어머니는 여자거지를 위해 직접 움막집을 지어주셨고,하루 한 끼는 더운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여 갖다주셨어요. 나도 그 심부름을 여러 번 했죠. 갑자기 거지들이 찾아와 밥을 달라고 하면 당신 끼니를 대신 내어주곤 하셨어요.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너무 귀하게 키우는 것 같아요. 자기 아이 안 귀한 부모가 어딨겠어요. 하지만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귀여워하는 건 속으로만 해야해요. 겉으론 평범하게, 아니 엄격하게 대해야지요. 그래야 아이가 강하게 클 수 있으니까요.
어린이는 큰 뜻을 품어야 해요.‘ 지금은 비록 어리지만 언젠가 꼭 이 나라에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 는 생각을 가지세요. 목표를 크게 두고 따라가다 보면 꿈은 반드시 이뤄지기 마련이에요.
◆‘류근철 박사는◆‘
26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한의학을 공부했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침 마취를 활용, 자궁근종 수술을 성공시켜 1976년 ‘국내 제1호 한의학박사’ 가 됐다. 잦은 대기권 출입으로 인한 우주비행사의 신체 충격을 치료하는 의료기기 ‘헬스부스터’ 를 개발, 러시아 모스크바공과대학에서 의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2008년 평생 모은 재산 578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현재 카이스트 초빙특훈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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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lsung8867
2019.11.06 09:21 신고
한국에 살면서도 이런 자료는 처음입니다.
양 선생님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자료를
아시게 되셨는지?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