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새벽에 잠이 깨어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학교 근처로 방을 얻어 나가 사는 아들과 딸 생각이 자꾸 난다 자식들도 내가 젊었을 때처럼 잡히지 않는 미래와 불안을 덮고 잘 것이다 밖에는 고양이가 새벽을 울고 간다 직장에서 쫒겨나 밤이슬을 맞으며 불 꺼진 자취방을 찾아가던 내가 생각나서 안쓰럽다 갑자기 기침이 난다 평생 기침이 심해서 무를 달여 먹고 배를 삭혀 먹던 서늘한 아버지 기침 소리를 닮아서 놀란다 아버지도 이렇게 집을 나가 사는 나와 동생들을 생각하면서 새벽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모텔에서 울다
시골집을 지척에 두고 읍내 모텔에서 울었습니다
젊어서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처럼
첫사랑을 잃은 칠순의 시인처럼
이젠 고향이 여행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베게에 묻지도 않고 울었습니다
오래전 보일러가 터지고 수도가 끊긴
텅 빈 시골집 같은 몸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폭설에 지붕이 내려앉고
눅눅하고 벌레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쭈그러진 몸을 내려보다가
아,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수십 년을 가방에 구겨 넣고 온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지우고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 화면을 뒤적거리다가
체온 없는 침대 위에서 울었습니다
어지럽게 내리는 창밖 흰 눈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빠져나간 늙은 유곽 같은 몸을 후회하다가
불 땐 기억이 오래된
컴컴한 아궁이에 걸린 녹슨 솥의 몸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울었습니다
열매는 왜 둥근가
능곡 매화나무 가로수 아래를 걷는데
잘 익어 뒹구는 노란 매실들
매실을 밟으려다 열매는 왜 둥근가를 생각했다
새싹이었을 때
새잎이었을 때
꽃이었을 때 비바람에 잘 견뎠다는 점수겠다
색연필로 둥글게 채운 색깔과 향기
오래 견딘 열매에게 주는
참 잘했다는 선생님의 천지신명의 칭찬이겠다
잘 익어 뒹구는 매실을 바라보다
모욕을 잘 견뎌 둥그러진 오래전 사람 하나를
한참 생각했다
파주에게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버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 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알겠군
자유를 보여주려는 단군할아버지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고독사에 대한 보고
시골 재당숙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다
집안 역사교과서 한 권이
동네 이야기책과 지적도 한 책이
신명꾼 하나가 사라졌다
혈관부에 피가 돌던 굽은 나무 한 그루가
평생 동네를 따나본 적 없는 말뚝 하나가 뽑혔다
매일 아침 열리던 대문이 며칠째 닫혀 있자
독거노인 둘이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황토 구덩이를 파놓고
대전으로 부검 받으러 떠난 시체를 기다리는 노인들
혼자 살다 죽으면
칼로 배가 갈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며
노을이 번질 때까지 투정하는 인부들
땅을 향해 몸이 자꾸 꼬부라지는 노인들이
겨우겨우 무덤 가까이에 친 천막에 올라와
고인이 나이롱 뽕을 좋아하고
‘갈대의 순정’이 십팔번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 들어와 사는 타지 출신 중늙은이 몇과
시골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들고
비탈에 올라 청태산 낙타봉을 좌향 삼아 심었다
동네회관에 내려와 저녁 먹고 술을 나누는데
재당숙이 보이지 않던 며칠간
자식들 대신 까마귀가 집 주위를 돌며
맑게 울다 떠났다고 했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 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ㅡ그만 내려놓으시오
찻잔을 내려놓자
금세 팔이 시원해졌다
절간을 나와
화분에 담겨 꽃을 매달고 있는 화초와
하수가 고여 썩은 개천을 지나오는데
꽃은 화려함을 땅에 내려놔야 열매를 얻고
물은 도랑을 버려야 강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내 뒤를 따라온다
ㅡ 시집 『파주에게』 실천문학사, 2017
공광규 시인
1960년 서울 돈암동 출생, 충남 청양에서 성장. 1986년 월간《동서문학》으로 등단, 등단 전 투고했던 시가 1987년 《실천문학》 복간호에 약력미상으로 발표됨. 시집 『대학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 『말똥 한 덩이』 『담장을 허물다』 『파주에게』, 서사시 『금강산』, 시그림책 『구름』 『청양장』 『흰눈』, 산문집 『맑은 슬픔』, 논문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시평집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여성시 읽기의 행복』, 시창작론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이 있음.
광화문과 낙원동,정동 등에서 중장년의 대부분을 보낸 저의 자화상인듯 합니다 종각역, 시청역, 종로3가역,광화문역 그중 종각역을 가장 많이 오르락 내리락 .. 거기서 근 20년 정도 식객으로 전전하고 30대후반 새치를 시작으로 50대이후 백발 지금도 일부 잔존하는 처진 뱃살 ᆢ 싯귀가 저의 지난세월 모습과 동선을 표현하는 듯 해서 감회에 젖어봅니다 아침에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광화문과 낙원동,정동 등에서 중장년의
대부분을 보낸 저의 자화상인듯 합니다
종각역, 시청역, 종로3가역,광화문역 그중
종각역을 가장 많이 오르락 내리락 ..
거기서 근 20년 정도 식객으로 전전하고
30대후반 새치를 시작으로 50대이후 백발
지금도 일부 잔존하는 처진 뱃살 ᆢ
싯귀가 저의 지난세월 모습과 동선을 표현하는 듯 해서 감회에 젖어봅니다
아침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