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폐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천 원권은 퇴계 이황(1501~1570), 오천 원권은 율곡 이이(1536~1584),
만 원권은 세종대왕(1397~1450), 오만 원권은 신사임당(1504~1551)이다.
네 명중 최초 출생은 세종대왕으로 1397년이며 제일 나중에 세상을 떠난
이이는 1584년이다. 이렇게 보니 14C에서 16C까지 겨우 조선시대 200년
동안에 난 인물로 우리 지폐 4종의 주인공으로 모두 캐스팅했다는 사실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역사를 참으로 민망스럽게 만든다.
우리나라 반만년의 긴 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 위대한 문화유산, 위대한 사건들이
많이 있는데 어째, 지폐의 인물이 천편일률적으로 2백 년간의 전근대적, 조선시대
인물뿐이냐는 지적이다. 우리가 찬란한 역사 속에서 고대와 근대사에 대하여는
전혀 자긍심을 갖지 못하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 정부 출범 후 성균관대 출신들이 약진하면서 시중에 돌았던 유머다.
“애초부터 대한민국은 ‘성균관대의 나라’였단다.
우리의 지갑을 열어보면 천 원권에 나오는 인물인 퇴계는 성대 교수다.
오천 원권의 율곡은 성대 장학생, 만 원권은 세종대왕은 성대 이사장,
오만 원권의 신사임당은 성대 학부모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압도적으로 현대에 접근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세계적 열강으로 일으켜 세운 정치 사회 문화계의 거장들을 지폐 도안에 쓴다.
천엔 권의 주인공은 과학자인 노구치 히데요(1876~1928)다.
오천엔 권은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인 히구치 이치요(1872~1896)이며,
만엔 권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사상가다.
셋 중 두 사람이 20C 사람이다.
참으로 근대화에 환장한 나라답고 근대화에 성공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엔 권의 주인공인 노구치 히데요는 호적상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1900년에 미국 록펠러 연구원으로 가면서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아마 우리나라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정부 장관 청문회에서 보았듯이
이런저런 핑계를 달았지만 결국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꽤 괜찮은 장관 후보자를
미국으로 돌려보낸 우리 입장에서 곱씹어 볼 일이며,
하물며 지폐의 인물로 등장시킴은 개벽천지 이전엔 꿈도 못 꿀 일이다.
오천엔 권의 히구치 이치요도 겨우 스물네 살에 생을 마감한 작가다. 우리로 치면
김동리나 서정주 대신에 요절한 시인 이상을 캐스팅한 셈이니 참으로 파격이다.
물론 그 중에는 후꾸자와 유키치(1만엔)라든가, 지금은 교체됐지만
이토 히로부미(1000엔) 등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들도 포함됐다.
동양뿐만 아니라, 유로화 때문에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프랑스의 6종 지폐를 보면,
그 주인공이 베를리오즈, 드뷔시, 생텍쥐페리, 세잔, 에펠, 퀴리부부다.
놀랍게 근대를 넘어 거의 현대 수준의 인물이다.
영국을 살펴보면 지폐 속 인물을 주기적으로 바꾼다.
내년에는 5파운드 지폐에 ‘윈스턴 처칠’ 총리를 새긴다. 2년 뒤엔 ‘오만과 편견’의
저자인 소설가 ‘제인 오스틴’이 10파운드 지폐의 주인공이 된다. 현재 20파운드의
도안 속 인물은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지폐 뒷면의
인물이다. 어떤 인물이 뒷면을 장식하든 앞면은 모두 ‘엘리자베스 2세’여왕이다.
자국의 정치 경제 문화업적을 다양하게 반영하면서도 국가 정체성의 상징으로
국가원수인 여왕을 앞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미국 지폐를 보면, 역대 주요 대통령들이 그 역할을 한다.
1달러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2달러는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다.
링컨(5달러), 잭슨(20달러), 그랜트(50달러) 대통령도 주인공이다.
대통령이 아닌 사람은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10달러)과 피뢰침을 발명한
‘프랭크린’(100달러) 둘뿐이다.
그 나라 지폐의 인물을 보면, 그 나라의 정체성과 관심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누가 선비의 나라, 유학의 나라, 사공농상의 사회질서
아니랄까 봐, 모두다 전근대적 학자 일색이다. 일본은 사상가, 소설가, 과학자다.
프랑스는 문학, 음악, 미술, 과학의 대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 지폐엔 워싱턴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건국과 국가통합을 상징하는
이도, 히구치 이치요(5000엔)처럼 근대 지성의 함양에도 기여한 이도 없다.
일제 식민지에서 건국의 의미를 높이는 인물도, 6.25전쟁의 폐해를 딛고
반세게 만에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를 이룬 기적의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도 없다.
온통 조선시대 위인들뿐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 원흉을 처단한 안중근의사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은 당장 지폐에 올려도 누가 말 못할 손색없는 우리 현대사의 영웅이다.
서정주, 박완서, 백남준 등 문화계의 거목도 등장 못할 이유가 없다.
무엇 보담 광복 75주년, 건국 72주년을 맞는 올해까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을
지폐에 새기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더욱 올해는 우남 이승만 태통령의 탄신 145주년, 서거 55주기가 되는 해이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과(過)를 문제 삼는데 중국의 사례를 보면,
중국의 인민화폐는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앞면을 모두 마오쩌웅(毛澤 東)으로
채웠다. 그가 문화대혁명과 대 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을 죽게 한 과오를
저질렀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라는 업적이 더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문화융숭을 중요한 국정지표로 내걸었다. 좋은 말이기는 한데 무언가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액션이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폐 인물을 전근대적 조선인물에 국한시키지 말고, 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로 교체도 한번 다루어 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