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줄기는 죽고 '분신'만…왜 우암 송시열은 저곳에 은행을 심었나
늦가을의 쓸쓸함을 가슴에 담고 포항시 남구 장기면 마현리 장기초등의 은행나무를 만나러 떠났다. 학교 운동장에 자리잡고 있는 은행나무는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듯 가지에 달려 있는 노란 은행잎보다 더 많은 은행잎이 나무 주변에 떨어져 있었다. 이 은행나무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귀양 와서 심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 선생이 장기로 귀양온 것은 숙종 때인 1675년 6월로, 형산강 하류를 건너서 장기로 들어와 마산촌(현 마현리)에서 거처하다 1679년 4월 거제로 유배지를 옮기기까지 약 4년간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귀양살이를 하던 우암 선생은 백성들에게 자연의 이치와 예절, 인생의 바른길 등을 가르쳤으며,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키웠다. 이러한 우암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장기에는 효자, 충신 등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기를 충효열례(忠孝烈禮)의 고장이라 한다.
은행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면, 고사(枯死)한 원줄기와 그 옆에는 가슴높이 나무둘레가 235㎝로 우람하게 자란 줄기 하나, 그리고 가느다란 줄기 두 개가 한자리에 서 있다. 고사한 것이 우암 선생이 심은 나무이고, 나머지는 원래의 은행나무가 고사하기 전 뿌리에서 새로 돋아난 새순이 자란 것이라고 한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아니면 병충해 등 그 어떤 이유로 고사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다하고 군데군데 구멍이 뻥 뚫린 뼈대만 남은 모습에 가슴 한 켠이 아렸다.
생김새와 크기가 다른 이들 은행나무는 껍질의 색깔뿐만 아니라 촉감도 달랐다. 고사한 나무는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딱딱한 느낌이고, 그 옆에서 제법 의젓한 모습을 갖춘 줄기는 세상을 휘어잡을 듯한 담대한 기개를 가진 청년마냥 강인한 에너지가 전해졌다. 가는 줄기는 아직 덜 성숙한 듯 다른 나무에 비해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자주 모교를 찾는다는 장기초등 총동창회 정시환 회장은 "1950년대 학교 다닐때는 우암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 원줄기가 살아 있었다. 장기초등 졸업생들이 모교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 은행나무다"며 은행나무에 대한 진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승우 부회장은 "학생들이 공을 차서 은행나무를 넘기면 선생님께서 공책 등을 상으로 주었으며 나무에 올라가서 놀다가 선생님께 야단도 들었다"며 5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나무를 바라보는 눈길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장기초등 은행나무는 나무의 크기에 비해 열매 양은 많지 않고 크기도 작다고 한다. 하지만 향이 진하고 맛도 다른 은행에 비해 좋아 동네주민뿐만 아니라 외지인도 주워 간다고 한다. 장기초등 박영규 교장은 "장기초등 교목이 은행나무이고, 교표(校標, 학교를 상징하는 무늬를 새긴 휘장)도 은행잎을 사용하고 있다. 운동장에 송시열 선생과 정약용 선생의 비(碑)가 있어 학생들도 두 분의 훌륭한 인품과 행적을 배우고 본받고 있다"고 전했다.
장기초등은 2011년 개교 100년을 맞는다. 현재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지난 100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암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는 고사했지만 자신의 분신을 남겨 300여년전 우암 선생이 남긴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