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가 되살아 나고 있다. 1만 달러 이하의 소액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헤지펀드가 만들어지는 가 하면 기관투자가들의 헤지펀드 투자비율도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세계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실 헤지펀드는 "헤지(hedg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확실한 침체장에서 빛을 발한다. 미국의 나스닥 시장을 비롯한 전세계 주식시장이 폭락세를 면치못했던 지난해 헤지펀드는 8%의 투자수익률을 올렸다. 주식형 뮤추얼펀드의 환매 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헤지펀드로의 신규 유입자금은 지난해 75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 최대의 증권회사인 메릴 린치는 신규 헤지펀드를 새로 개설하며 헤지펀드 투자를 늘리고 있고, 과거 100만 달러를 최저 투자자금으로 제한했던 헤지펀드의 진입장벽도 무너져가고 있다. 월가가 이런 황금시장을 놓칠 리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운 상황이다.
그러나 헤지펀드의 부활을 알리는 이런 소식들보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조지 소로스의 재등장이다. 요즘 파이낸셜 타임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신문의 1면에서 소로스의 이름을 심심치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로스가 뉴스메이커로 재등장한 것은 거의 3년 만의 일이다.
1998년 8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은 소로스에게 20억 달러에 이르는 투자손실을 입혔고, 곧 이은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 롱 텀 캐피탈 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위기는 헤지펀드 업계에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지난해 초까지 이어진 첨단기술주의 끝없는 상승행진에서도 소로스는 소외됐다. 오히려 닷컴주를 공매도(short-selling)하다 엄청난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
소로스와 함께 헤지펀드 업계의 거물로 통했던 타이거펀드의 줄리안 로버트슨이 지난해 3월 펀드폐쇄 및 은퇴를 선언했을 때 소로스 역시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여겨졌다. 더구나 소로스가 운용해왔던 퀀텀펀드와 쿼타펀드의 전설적인 펀드매니저였던 스탠리 드러켄밀러와 니콜라스 로디티, 던켄 헤네스 등이 지난해 잇달아 그의 곁을 떠났다. 1930년 생으로 이미 70줄로 접어든 소로스의 나이를 감안할 때 그가 재기하기에는 무리였다.
이런 그가 다시 나타났다. 지난 22일에는 아일랜드의 전화회사인 에이어콤 민영화 입찰에 뛰어들겠다고 발표했다. 23억~24억 달러에 이르는 에이어콤 민영화 입찰에서 그는 아일랜드의 미디어재벌인 앤소니 오라일리가 이끄는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이 컨소시엄에는 골드만삭스도 참여한 상태. 그런가 하면 올해 초에는 미국 CNN방송의 설립자인 테드 터너와 함께 러시아의 공중파 방송업체인 NTV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다.
지난해 11월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반도체 메이커 트렌스메타의 기업공개 때에도 소로스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는 5년 전 트렌스메타가 전력효율성이 높은 크루소칩의 개발을 앞세우며 설립될 때부터 대주주로 참여해 기업공개 당시 5%(280만주)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설립자인 폴 알렌과 리눅스의 개발자로 알려진 리누스 토발트 등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지분이다.(트렌스메타는 한국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손꼽히는 이재용씨가 지난해 대주주로 설립한 e삼성도 투자한 기업이다.) 트렌스메타는 상장 당일 공모예정가보다 115%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를 마쳤다. 트렌스메타의 주가는 올들어 기술주 전반의 폭락세로 크게 하락했지만 소로스의 보유지분은 여전히 시가총액 1억 달러가 넘는다.
소로스 하면 가장 먼저 소개되는 대표적인 '투기'가 1992년 파운드화를 대규모로 매도해 마침내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마저 굴복시킨 것. 파운드화 투기로 소로스는 무려 15억 달러의 투자수익을 올렸다. 소로스는 또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의 붕괴로부터 비롯된 아시아 경제위기의 '배후인물'로 지목될 정도로 "약세통화에 대한 집요한 공격"으로 유명하다.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한 나라의 통화가치가 폭락세를 보일 때면 어김없이 '소로스의 망령'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소로스의 첫 헤지펀드라고 할 수 있는 퀀텀펀드가 1969년 처음으로 설립돼 운용 초기 엄청난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던 밑거름은 다름 아닌 주식시장이었고, 그것도 기술주였다고 할 수 있다. 출범 당시 퀀텀펀드는 운용자산이 불과 400만 달러에 불과했고, 상장주식 투자 외에도 외환시장과 상품시장에서 투기적 거래를 했다. 물론 헤지펀드 답게 선물을 비롯한 파생상품에도 투자했고, 자기자본 외에도 대출한 차입금을 함께 투자해 레버리지 효과를 높였다.
소로스는 그러나 퀀텀펀드의 주력 투자대상을 주식으로 삼았고, 특히 당시 한창 인기높았던 폴라로이드와 디즈니, 트로피카나, 에이본 등을 공매도했다. 이들 주식은 1970년대 초까지 "니프티 피프티(매력적인 50개 종목)"로 불리며 기관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했던 주식들이었다. 소로스는 이런 흐름에 맞서 과감히 그 반대편에 섰고, 1973~1974년 주가폭락기에 엄청난 투자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소로스가 1994년과 1995년 잇달아 엔화 투기에 나서 실패했을 때 퀀텀펀드를 구해준 것도 실은 주식시장이었다. 소로스는 1994년 미국과 일본의 무역협상이 타결되면 엔화는 결국 하락할 것으로 내다보고, 엔화를 집중적으로 매도했지만 엔화는 1995년 초 달러당 79엔이라는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았고, 그는 6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퀀텀펀드는 1995년 39%라는 높은 투자수익률을 기록했다. 스캇 페이퍼와 같은 '턴어라운드 기업(일시적으로 전망이 불투명해 주가가 급락했으나 곧 주가가 회복하는 기업)'에 집중투자해 올린 투자수익 덕분이었다.
소로스의 주식시장에 대한 애착은 그의 첫 저서로 1987년에 출간된 '금융의 연금술(The Alchemy of Finance)'에서 잘 드러난다. 소로스는 1930년대의 대공황을 일반균형이론에 따라 설명하고, 그 처방을 제시한 존 매이나드 케인즈의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과 같이 현대금융시장을 설명해줄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금융의 연금술에서 그가 제시한 '재귀성 이론(The Theory of Reflexivity)'이 바로 그것이다.
'시장의 본성을 읽기(Reading the Mind of the Market)'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그는 1985년 8월부터 1986년 11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전 세계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채권시장, 상품시장을 대상으로 직접 투자한 경험을 소개했다. 그가 행한 투자의 핵심은 외환(통화)시장이었지만 그 출발점은 주식시장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주식시장은 재귀적 현상을 연구하는 최선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시장은 언제나 옳다"는 통설을 강하게 반박하면서 주가가 내재가치의 반영이라거나 주가가 결국 내재가치에 수렴해갈 것이라는 명제를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시장의 평가가 언제나 왜곡되어진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왜곡은 더욱이 내재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주가는 단순히 내재가치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다. 주가와 그 주식이 거래되고 있는 회사의 부(富)가 결정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주가는 능동적인 요소이다. 나는 주가의 변화를 역사적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간주하며, 참여자들의 예측과 사건의 실제적 과정 사이의 불일치를 그 과정의 원인적 요소로 보고, 그 불일치에 초점을 맞춘다."
소로스는 재귀성 이론이 현상화하는 시장은 결코 언제나 옳지 않으며, "시장은 언제나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고, 시장은 시장이 예측한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정의를 내린다. 이를 주식시장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면 "상승하는 주가는 긍정적인 편견에 의해 강화되고, 하락하는 주가는 부정적인 편견에 의해 강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역도 존재해 편견이 편견은 자기수정을 통해 주가를 수렴시키기도 한다. 한마디로 시장에는 편견이 존재하며, 이 편견은 자기강화의 과정을 거쳐 주가와 내재가치간의 괴리를 넓히기도 하고, 자기수정의 과정을 거쳐 이 괴리를 좁히기도 하는데 이 과정은 서로간에 끊임없이 새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소로스는 1998년 출간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Global Capitalism)'에 이르기까지 모두 5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러나 그의 사고체계는 재귀성 이론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그가 상정하는 기본적인 시장은 주식시장이다. 현대 주식투자이론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효율적 시장이론(Efficient Market Theory)은 이름 그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의 효율성"을 전제하고 있다. 고전경제학의 기본 역시 균형(equilibrium)을 상정한다. 시장은 결국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균형점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소로스의 재귀성 이론은 이같은 기존 학설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소로스의 재귀성 이론은 그의 탁월한 투자수익율에 비해 학계에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귀성 이론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왜곡된 시장의 일탈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설득력을 갖고 있다. 마치 소로스가 정상적인 투자자로서 보다는 시장의 일시적 왜곡을 틈타 투기차익을 챙기는 투기꾼으로 알려져 있듯이 말이다.
1998년 8월 13일 파이낸셜타임스에는 "러시아 금융시장의 붕괴가 최후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내용의 폭탄과 같은 기고문이 실렸다. 필자는 다름아닌 조지 소로스였다. 그는 당시 개별투자자로는 러시아 시장에 가장 많은 금액을 투자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러시아 경제는 이미 한 치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미상황에 빠져든 상태였지만 소로스의 이같은 진단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보도가 나간 직후 모스크바 주식시장은 한 시간만에 12%가 폭락했고, 뉴욕 주식시장을 비롯한 전세계 주식시장이 러시아발 충격에 크게 출렁거렸다.
소로스는 그러나 이 기고에서 러시아 경제를 구제하기 위한 처방책을 제시하고자 했다. 루블화를 15~25% 평가절하하고, 서방선진 7개국(G7) 지원아래 500억달러 규모의 통화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만이 러시아 경제의 붕괴를 막기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소로스는 이미 1주일전 자신의 주도 아래 150억달러의 펀드를 조성, 러시아에 투자하기로 했지만 러시아의 상황은 이 정도 금액으로는 부족했다. 러시아 주식시장은 연일 폭락세를 보였고,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채권수익률은 100%를 넘어섰다. 러시아 정부는 결국 8월 17일 35%의 루블화 평가절하와 90일간의 대외채무상환 일시유예(모라토리엄) 조치를 발표했다. 러시아발 세계경제위기는 이렇게 본격화했다.
소로스는 그의 저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러시아 경제의 붕괴가 임박했던 1998년 8월 7일부터 사실상 모든 상황이 끝난 8월 23일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그는 러시아의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할 때 마다 데이비드 립튼 당시 미 재무부 차관과 통화했고, 로버트 루빈 재무부 장관과 세르게이 키리옌코 당시 러시아 총리가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소로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미 러시아 루블화를 팔아치웠으며, 주식과 채권도 공매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당시 러시아 주식을 사들였다. 또 러시아 시장의 붕괴로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하자 풋옵션을 매각해 주가회복에 베팅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시장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결국 러시아 시장에서만 2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러시아 경제의 붕괴 과정에서 보여준 소로스의 분주했던 움직임에서 드러나듯 그가 구축한 네트워크와 자금동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한 해 평균 30% 이상의 투자수익률을 올렸던 퀀텀펀드의 명성은 이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지만 월가에서 소로스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실 높은 투자수익률보다는 이같은 그의 영향력 때문일 지도 모른다.
헤지펀드하면 소로스를 연상한다. 하지만 소로스 이전에도 헤지펀드는 있었다. 소로스가 1969년 설립한 퀀텀펀드는 1960년대 후반 월가에 헤지펀드 붐이 불었을 때 우후죽순처럼 새로 태어난 헤지펀드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소로스가 처음으로 정립한 재귀성 이론 역시 학계에서는 '가설'로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의 모국 헝가리와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의 개방을 돕기위해 거액을 기부해 조성한 재단 역시 많은 나라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러나 소로스가 월가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고, 그의 영향력은 월가는 물론 전세계 금융시장에 미친다. 심지어 '소로스 이전'과 '소로스 이후'를 구분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석가들도 있다. 이같은 평가와 영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소로스는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정교한 투기를 하기 시작한 첫 전문투자자다.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채권시장, 상품시장을 모두 넘나들며 활동한 첫번째 투자자인 셈이다. 특히 1970년대 초 고정환율제가 붕괴된 뒤 외환시장을 매개로 한 글로벌 투자의 단초를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모건스탠리딘위터(MSDW)의 투자전략가인 바이런 위언은 이렇게 말한다.
"소로스 덕분에 우리는 거시경제이론에 눈뜨게 됐다. 그는 우리를 글로벌리스트로 만들었고, 세계 여러곳에서 벌어지는 정치 경제적 사건들이 어떻게 미국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지 가르쳐 주었다."
소로스가 글로벌투자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극적인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으로 체포돼 러시아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탈출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고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자신의 아들을 헝가리 관리의 양자로 입적해 수용소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1947년 소로스는 영국으로 떠났고, 이곳에서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입학했다. 소로스는 LSE에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철학자 칼 포퍼 교수를 만났다. 재귀성 이론으로 발전한 그의 투자철학도 이때 정립됐다. 포퍼 교수는 "개방적인 사회를 거부하는 전제적인 이데올로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인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인류사회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에만 진보하며,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이 균형을 이룬다는 기존의 정설을 거부한 소로스의 투자 철학 역시 포퍼 교수의 이같은 주장에서 비롯됐다. "수요와 공급이 주어졌다는 가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시장참여자들의 생각과 시장의 움직임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재귀적인 관계를 갖는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의 기대에 의해 좌우된다."
LSE를 졸업한 소로스는 런던의 Singer & Friedlander에 취직해 증권재정거래 맡았다. 그가 한 일은 신주인수권부사채와 같이 권리가 붙은 증권의 가격과 실제 주식가격의 차이를 이용해 신주인수권만 거래해 차익을 챙기는 것으로 일종의 파생금융상품 거래와 같은 것이었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온 소로스는 F. M. Mayer & Co.와 Wertheim & Co.에서 일했는데 여기서 맡은 일 역시 차액거래였다. 런던과 뉴욕에서 거래되는 유럽계 증권의 가격차이를 이용해 그 차익을 챙기는 것이었지만 금리균등세가 도입되면서 이 거래는 중단됐다. 3년간 철학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1963년 Arnhold and S. Bleichroeder에 애널리스트로 다시 들어갔고, 이 회사는 더블 이글(Double Eagle)이라는 역외펀드를 시작했다. 소로스는 1969년 이 펀드의 운용을 맡아 역외펀드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지만, 이 해는 소로스에게 여러모로 매우 의미있는 한 해가 됐다.
1969년 소로스는 막 태동하기 시작한 부동산투자신탁(REITs)에 대한 조사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리츠가 매우 좋은 투자상품이며 붐을 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리츠의 열기는 거품까지 일 정도로 뜨거워지겠지만 결국은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예측을 실행에 옮겨 리츠의 초기 단계에서 투자했고, 리츠붐이 피크에 달했던 1974년에는 공매도로 포지션을 전환해 큰 수익을 올렸다.
소로스는 또 이해 짐 로저스와 함께 그 자신의 펀드인 퀀텀펀드를 설립했다. 400만달러의 최초 운용자산중 25%는 소로스 자신이, 20%는 로저스가 낸 것이었다. 서인도제도의 네덜란드령인 큐라소에 근거를 둔 역외펀드인 퀀텀펀드는 헤지펀드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설립 초기 직원이라고는 트레이더 역할을 맡은 로저스와 애널리스트 역할을 맡은 소로스, 그외에 여비서 한 명이 전부였다.
퀀텀펀드는 1971년부터 일본 주식에 투자했을 정도로 글로벌 투자에 일찌감치 눈을 떴고, 외환시장과 파생금융상품 등을 가리지 않고 투자했다. 특히 기회라고 생각되면 과감히 차입금까지 쏟아붓는 투자방식으로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했다. 퀀텀펀드의 투자수익률은 일반 뮤추얼 펀드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소로스가 사실상 펀드운용의 일선에서 물러난 1989년까지 20년간 퀀텀펀드의 한 해 평균수익률은 34%에 달했고, 한해 100%가 넘는 투자수익률을 2번이나 기록했을 정도다.
퀀텀펀드의 이같은 놀라운 투자수익률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헤지펀드로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소로스에게 펀드의 급성장은 새로운 부담이 됐다. 우선 펀드의 대형화에 반대하는 로저스가 1979년 퀀텀펀드를 떠났고, 소로스는 첫번째 부인과 이혼해야 했다. 또 같은 해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컴퓨터 사이언스의 주가조작 혐의로 고발당했고, 1986년에는 거래한도초과 혐의로 고발당해야 했다. 소로스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도 1980년대초다.
특히 1981년에는 23%의 투자손실을 기록, 펀드 출범후 최악의 투자수익률과 함께 많은 투자자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퀀텀펀드는 그러나 다음해 57%의 투자수익률을 올리며 부활했고, 펀드규모는 1983년부터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1987년 10월의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직전 소로스는 일본 주식시장의 붕괴를 예측하고 일본 주식을 대규모 공매도했다. 그러나 뉴욕 증시가 먼저 폭락했고, 그는 10월 16일(금요일) 급락후 1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S&P500 지수선물을 대규모로 매입했다. 하지만 10월 19일(월요일) 뉴욕 시장은 또 다시 폭락했고, 그는 결국 보유 주식과 선물을 대규모로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주식과 선물을 처분하고 나자 시장은 다시 반등했다. 1987년 10월의 대폭락장에서 소로스는 8억40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는 당시 펀드 전체 자산의 2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1987년 투자수익률은 14%를 기록했다.
1992년 영국 파운드화의 하락에 베팅해 15억달러의 이익을 올린 소로스는 1994~1995년초 엔화에 투자했다가 6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또 1997년 초에는 태국 바트화와 말레이시아 링기트화의 매도포지션을 취했다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바트화와 링기트화가 폭락한 1997년 하반기에는 오히려 이들 통화를 매수하는 입장이었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소로스는 아직도 동남아시아에서 "경제파탄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다.
어쨌든 아시아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소로스는 1997년 22%의 투자수익률을 기록했고, 1998년에는 러시아에서 20억달러의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7%의 투자수익률 올려 새삼 월가의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1999년에는 그해 1월 출범한 유로화에 거액을 베팅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화의 하락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게 화근이었다. 1999년 최고의 수익률을 가져다준 닷컴주를 외면했다가 2000년 들어 뒤늦게 뛰어든 것도 소로스에게는 몰락을 자초한 악수였다.
퀀텀펀드와 쿼타펀드, 퀘이사펀드 등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를 일군 소로스는 1989년 동구권의 개방과 미국 등 31개국에서의 자선사업을 위해 설립한 '개방사회기금(The Open Society Fund)'의 관리를 위해 사실상 일선 펀드운용에서 물러났다. 물론 퀀텀펀드 등의 지주회사라고 할 수 있는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의 회장을 맡고 있었지만 퀀텀펀드는 1988년 스카웃한 드레이퓨스 출신의 스탠리 드러켄밀러에게, 쿼타펀드는1992년 스카웃한 로스차일드
출신의 닉 로디티에게 맡겼다.
특히 쿼타 펀드를 맡은 로디티는 1995년 20%의 운용수수료 제외하고도 159%의 투자수익률을 올려 주위를 놀라게 했고, 다음해인 1996년에는 82%의 투자수익률을 올렸다. 당시 쿼타펀드의 운용자산이 15억달러였는데 로디티는 1986년 한 해에만 펀드운용 수입으로 1억2500만 달러를 벌었고, 1997년에는 쿼타펀드를 30억달러 규모로 키웠다.
로디티는 한 번에 380억달러를 베팅할 정도로 소로스만큼 과감한 베팅에 능한 인물이었다. 1997년봄에는 190억달러를 유럽과 미국 정부채권을 사들이는데 투자했고, 3개월후에는 일본 정부채권을 130억달러 어치나 매입하기도 했다. 로디티는 1998년 46%의 투자손실을 기록한 뒤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다음해 일본 주식시장에서 큰 투자수익을 올리며 화려하게 복귀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로스의 후계자로 꼽혔던 드러켄밀러와 로디티는 결국 지난해 엄청난 투자손실과 함께 소로스를 떠났다.
드러켄밀러는 잭 슈웨거가 쓴 'The New Market Wizards'에서 소로스가 가르쳐준 교훈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맞느냐 틀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았을때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냐 하는 것과 또 틀렸을 때 얼마나 많은 돈을 잃었느냐에 대한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소로스는 특히 어느 한 거래에서 확신이 있으면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하라고 가르쳤고, 어떤 거래에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때가 바로 레버리지를 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고 드러켄밀러는 말했다. 한 마디로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고,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소로스는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거액의 손실에도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의 이같은 자신감은 한 거래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개의치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거래에서 실패하면 그는 다른 거래서 성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 거래에서 포기할 수 있었다고 드러켄밀러는 말한다.
소로스는 드러켄밀러를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평했고, 드러켄밀러는 퀀텀펀드를 맡기 이전 20년동안 소로스를 우상처럼 여겼다고 말한다. 소로스에 대한 드러켄밀러의의 평가는 그래서 잘 음미해볼 만 하다. 또 소로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드러켄밀러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해요~`상당히 재미있네요..조지 소로스가 얼마전 인터뷰에서..시장수익률이 고객 희망 수익률과 괴리가 너무 크고, 까따롭게 변모해가는 글로벌 환경에 맘편히 투자하고 싶어 대량펀드를 해지한다더니...아니었나봐요~~음...짐 로저스는 아직도 쌍둥이 딸들을 중국어 공부시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