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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문화재답사 스크랩 `숭례문 미스터리` 현판은 왜 가로 아닌 세로일까
청목/金永柱 추천 0 조회 198 13.01.24 08: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숭례문 미스터리', 현판은 왜 가로 아닌 세로일까

추사도 감탄한 글씨 … 양녕대군일까, 신장일까
5년 만에 돌아온 숭례문, 3가지 미스터리 상) 현판 글씨 누가 썼나

  

 불타기 전의 숭례문 현판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2월 초 돌아온다. 2008년 2월 10일 화마(火魔)에 무너져 내린 지 5년 만이다. 문루(門樓)와 성곽 공사를 끝낸 숭례문은 한 달 후 공개를 앞두고 현재 마지막 단장에 한창이다. 그런데 우리는 숭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달라진 숭례문의 모습과 함께 숭례문 615년 역사에 얽힌 미스터리를 3회에 걸쳐 풀어본다.

崇禮門(숭례문)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자택이 있던 과천에서 한양에 올라오는 날이면 꼭 숭례문 앞을 찾았다. 숭례문의 정중앙에 걸린 현판(懸板) 글씨 석 자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감탄했다고 한다. 명필도 반하게 만들 정도로, 숭례문의 현판(懸板) 글씨는 힘이 넘치면서도 자유로웠다. 조선 초 대자(大字) 글씨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설암체(雪庵體)로 쓰여진 이 글씨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상과 자부심을 상징했다.

5년 전 화재에서도 숭례문 현판은 살아남았다. 추락의 충격으로 일부 목재가 떨어져 나갔지만, 다행히 현장에서 95% 이상의 부재(部材)가 수습돼 무사히 원형을 되찾았다. 질긴 생명력으로 615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숭례문 현판. 그러나 그 안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숨어있다. 수많은 궁궐 현판과 달리 숭례문 현판은 왜 세로형으로 제작됐을까, 그리고 현판에 적힌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보기 드문 세로형


  

숭례문 현판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검은색 흑칠을 한 바닥판에 양각으로 글씨를 돋을새김하고 백분(白粉)을 칠한 것은 조선시대 궁궐 현판의 전형적인 제작방식이다. 하지만 3~4자로 이뤄진 현판이 대부분 가로글씨인 것과 달리 숭례문 현판 글씨는 세로로 쓰여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이나 도성 현판 중 세로형 현판은 창덕궁의 어수문(魚水門)을 비롯해 5건에 불과하다.



그 이유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관악산 화기설(火氣說)이다. 한양의 지세를 풍수학적으로 봤을 때 조산(朝山)인 관악산에 비해 궁궐이 있는 한강 북쪽의 지세(地勢)가 너무 약했다. 풍수가들은 예로부터 불의 산(火山)으로 불렸던 관악산의 화기가 왕이 있는 궁성을 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화기를 막아낼 목적으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불의 성격을 가진 글자인 례(禮)를 이름에 넣는 것으로 모자라,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의 글자 숭(崇)을 세로로 세워 관악산의 화기에 맞섰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기록에는 경복궁의 미약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이미 지어진 숭례문을 보다 높게 수리해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 내용이 담겨 있다.

 


 화재로 파손된 현판(왼쪽)과 새롭게 복원된 모습.

 

 

양녕대군인가, 신장인가

 

숭례문 현판 글씨는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판 자체에 글 쓴 사람의 낙관이 없고 실록 등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신장·안평대군·정난종·유진동 등이 숭례문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꾸준히 거론돼 왔다. 그 중 주요 인물로 언급되는 이가 양녕대군과 신장, 그리고 유진동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현판을 썼을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다.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까지 양녕대군이 공식적인 숭례문 현판의 서자(書者)로 인식돼왔음을 보여준다. 이수광(1563~1628)이 광해군 6년(1614)에 낸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이 글씨가 양녕대군의 작품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기 문신 신숙주의 아버지인 암헌(巖軒) 신장(1382∼1433)이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고 주장한 인물은 추사 김정희다. 그는 『완당전집』(阮堂全集) 제 7권에서 “숭례문 편액(扁額)은 곧 신장의 글씨인데 깊이 뼛속에까지 치고 들어 갔고…”라고 썼다. 지난해 그의 후손들이 펴낸 책 『암헌 신장전기』(태학사)에는 “숭례문 현판이 당시 조선시대 현판글씨의 전형인 설암체를 따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 초기 설암체의 대가였던 신장공의 글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다.

◆현판 교체 가능성도

죽당(竹堂) 유진동(1497~1561) 역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1744~1808)가 쓴 백과사전 『주영편』(晝永編)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펴낸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 그가 숭례문 현판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원은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 대감이 윤성진 대감과 함께 문루에 올라가 판각을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고 한다”며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 다시 쓴 것인가 싶다”고 했다. 다시 말해, 양녕대군이 쓴 것이 화재로 손상되면서 유진동이 고쳐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유진동의 전기 『죽당 유진동』(한들출판사)은 이 기록을 토대로 “신장이 먼저 쓴 것을 양녕대군 혹은 안평대군이 고쳐 써 달았고, 세월이 지난 뒤 정난종, 유진동이 새로 고쳐 썼을 수 있다”고 추리하고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숭례문 글씨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현존작품이 별로 없어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며 “누가 썼느냐의 문제를 떠나 숭례문 현판은 조선초기 현판 글씨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 지덕사는 조선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에 있는 사당이다

 

 

***************************************** <중앙일보/ 이영희 기자  2013.01.01> 

 

숭례문현판 왜 「세로쓰기」일까

 

 

 

우리 도성(都城)의 성문이나 궁궐의 문, 그밖의 각종 건축물엔 그 의미와 유래를 담은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보통 가로쓰기에 3자 내외. 그런데 국보1호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현판은 왜 세로로 쓰여 있을까. 보물1호인 흥인문(興仁門·동대문)은 왜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글자 수를 늘리고 두 자씩 두 줄로 써넣었을까.

숭례문의 경우 불의 산(火山)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였다.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숭례문 현판은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서체가 장중하면서도 단아하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흥인문 현판이 특이한 모양을 취한 것은 어인 까닭일까. 흥인문이 위치한 곳은 땅이 낮고 지세가 약해 현판의 글자 수와 행을 늘려 땅을 높이고 지세를 보완하려는 뜻이었다.

다음은 대한문(大漢門) 이야기.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현판 이름을 고친 것은 1906년경. 안(安)자에 계집녀(女)가 들어가 있어 좋지 않다는 당시의 인습 탓이었다. 또 고종이 ‘대한문으로 고쳐야 국운이 창성한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대한문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정문이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이름에서 금방 드러난다. 모든 궁궐의 정문은 화(化)자 돌림.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러하다.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 일제시대때 그곳에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나면서 정문은 사라졌고 지금은 덕수궁 돌담길만 남아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 현판은 한글.68년 복원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쓴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바꾼 것에 관해선 찬성도 있지만 ‘원형 유지’라는 문화재 보존 원칙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본래의 한자 현판은 6·25때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현존 최고(最古)의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고 하는 충남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물론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이를 제외하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군청 청사에 걸려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의 현판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모두 고려말 공민왕의 글씨.


****************************************************〈동아일보/이광표기자  1998. 4. 7

 

숭례문 현판 왜 세로로 달았을까?

 

화재 직후의 숭례문(남대문)

 

 

천하 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과천에서 한양으로 내왕할 때면 늘 남대문 앞에 서서 '숭례문(崇禮門)' 현판 석 자를 쳐다보며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숭례문 글씨가 얼마나 명필이었기에 추사가 그렇게 탄복을 했을까.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숭례문 현판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떼어 버려 유실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남문 밖의 연못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이 내비쳐 하도 이상해 그 웅덩이를 파 보니 바로 남대문의 현판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이 바로 이 때 찾은 것이라 한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예부터 좋은 글씨가 땅 속에 묻히면 괴이한 광선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송나라 말엽에 남쪽으로 황제가 행차할 적에 순화각첩(淳化閣帖)을 천주에 버려 이미 땅 속에 묻혀 버렸는데, 거기서 가끔 괴이한 광선을 내쏘므로 파 보니 그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물 속에서 빛을 내뿜었다는 숭례문의 글씨는 명필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 액자에 쓰인 필체는 태종의 맏아들이요 세자이기도 하였던 양녕대군의 글씨라 전해온다. 또 일설에는 세조 때의 명신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도 한다. 양녕대군과 정난종 모두 명필로 알려져 있으나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국초에 걸었던 편액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양녕대군이 다시 쓰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판은 거의가 가로로 달렸다. 그런데 유독 남대문의 현판은 세로로 세워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사연인즉 이렇다. 이성계가 서울로 천도하기 위해 도성을 정하고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남향으로 안치하려다 보니, 서울의 조산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속리산에서 수백리를 거슬러온 관악산은 마치 톱날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보인다.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부터 이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보았다. 화기로부터 궁성을 보호할 비보가 필요했다. 풍수에서 기는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지만 관악산에서 뿜어내는 화기를 한강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첫번째 방도가 경복궁의 방향을 트는 일이었다. 경복궁이 관악산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을 피하고자 정남방에서 약간 남동으로 비켜 정남방의 자좌 오향이 아닌 동으로 약간 틀어 임좌병향으로 궁궐을 앉혔다. 이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다.

 

그리고 문의 현판을 종서(縱書)로 써 세로로 세우게 하였다. 현판 이름도 화기를 누르라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원래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숭례문의 예(禮) 자는 오행으로 볼 때 불(火)에 해당된다. 여기에 '높인다' '가득 차다'라는 뜻을 가진 '숭(崇)' 자와 함께 써서 수직으로 달아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 되도록 했다.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以火治火).

또한, 궁궐 축조시 지금의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에 연지(蓮池)라는 연못을 파고 지천사라는 절을 세워 밖으로부터 오는 화기를 막았다. 성종 때 정승 한명회는 세종 8년 이래 도성에서 큰불이 멎지를 않자 당시엔 메워지고 없었던 이 연지를 다시 파 화기를 잡자고 하였다.

 

광화문 앞에 물을 상징하는 해태상을 앉힌 것도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대원군은 경복궁에 화재가 빈번한 것은 불꽃 모양의 관악산 때문이라는 술사들의 말에 따라 1894년 경복궁 중건시 이세욱이라는 뛰어난 석공을 시켜 해태상을 만들어 관악산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정종수 국립춘천박물관장  2006.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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