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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아미타삼존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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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각사 극락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었다. 보존불은 놓은 방형의 須彌壇 위에 다시 하대·중 대·상대를 갖춘 상단 대좌를 놓고 그 위에 결가좌 하였다. 대죄의 상대 난간을 따라 용두를 조작해 장엄하고 있으며, 중대에도 용과 연화로 장식하고 그 틈을 채색으로 메우고 있다. |
본존불은 머리와 육계부의 경계가 확연하지 않으 며 머리의 정상에는 원통형의 頂上珠 와 머리
중심부에는 반달형의 中央 珠가 표현되었다. 귀 는 짧고 단정하며 얼굴은 평면적이어서
볼륨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즉 편평한 네모꼴의 얼굴형에 콧등을 잘라내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눈은 가로로 길고 좁게 퍼져 있으며 눈썹 역시 눈과 평행하게 처리하였다.
인중도 코에 상응하게 예리한 각을 이루고 있다. 꽉 다문 입술은 작고 앙증맞으며,
입가를 살짝 파내어 옅은 미소가 은근히 흐르도록 표현하였다.
착의는 상의 위에 대의를 걸쳐 입은 二重着衣法으로 처리하였고, 가슴은 비교적 넓게 열었으며, 오른쪽 어깨에는 반달현 대의 자락이 두·세번의 반전을 하며 살짝 걸쳐져 있다. 가슴에는 군의
표현이 있으나, 띠매듭과 자랃의 표현없이 직선적으로 처리하였다. 왼쪽 어깨를 따라 흘러
내려온 대의의 주름도 간략하게 몇 가닥의 선으로 표현하였고, 팔꿈치에는∠형으로 주름이
접혀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느려뜨려 촉지인을 취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굽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독특한 수인을 취하고 있다.
무릎에 표현된 주름은 간략한 몇 가닥의 선으로 중심에서 좌우로 퍼져나가게 표현하였다.
무릎앞에서는 부채꼴형의 의습벽을 형성하고 있고, 왼쪽팔 아래로 빠져 나온
나뭇잎형 옷자락도 형식적으로 처리하였다.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무릎이 너무 높게
조각되어 비례감을 상실하고 있다.
좌우협시보살상 역시 본존불과 형식·양식적인 면에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본존과 마찬가지로 수미단 위에 삼단대좌을 놓고 그 위에 결가부조하고 앉아 있고,
머리에는 화려한 화염보관을 쓰고 있다.
좌우협시 보살상의 보관에 각각 화불과 보병을 두고 있어 간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본존불과 마친가리로 높은 무릎에 짧은 신체, 볼륨감 없이 밋밋하게 처리된 신체의 굴곡,
큼직한 방형의 얼굴에 짧아진 턱, 콧잔등을 칼로 자르듯 처리한 점, 눈과 눈썹이 평행선을
이루며 표현된 점, 보살임에도 불구하고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불의를 입고 있는 점, 불의의
주름을 직선적인 몇 가닥의 선으로 처리한 점 등으로 이 삼존불은 동시기·동일작가에 의해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은 볼륨감 없이 처리된 신체굴곡, 직선적이고 형식화된 의습선, 블로화된 신체 구성,
각진 얼굴형에 근엄해진 상호, 변형된 수인과 보살상의 보관에서 화염보주와 화려한 화문들이
복잡하게 부착되고, 冠帶가 역 S자로 뻗치는 모습 등은 조선후기 불·보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차후 복장조사를 실시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아울러 조선후기 인각사 중창 당시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중요한 사료도 발견될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상들이 소조인 관계로 복장 조사시 파손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히
접근해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본존불의 크기는 높이 137.5cm, 두고 47cm, 견폭 53cm, 슬폭 98cm, 좌협시 보살상의
크기는 높이 137.5cm, 견폭 50.5cm, 슬폭 86.5cm, 우협시 보살상의 크기는 높이 137.5cm,
견폭 48.5cm, 슬폭88cm이다.
(原 보각국사정조탑지)
승탑지는 인각사에서 동으로 액2km 떨어진 속칭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에서 오른쪽편의 능선자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로면 화북 3리에 해당한다. 승탑지 주변의 지형은 남과 서로는 華山의 支脈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북으로는 위천을 사이에 두고 해발 296m의 산과 마주하고 있다. 승탑지는 북서쪽의 해발 200m
능선의 말단부로서 승탑지 아래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을 정도로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達成 徐氏의 문중묘역으로 변해 몇 기의 달성 서씨 문중 묘만 남아 있으며 이곳이 승탑지였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다만 思想界 1958년 6월호에 실려있는 李弘植선생의 글에 나타나 있는 당시의 상황과
현지 주민의 안내가 아니면 정확한 승탑지의 위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형질이 변경되어 있다.
그리고 승탑의 위치에 대해서는 보각국사비문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今 案行狀 於基終也 辭衆斂目 氣絶己久 今禪源頂公 失聲曰 立塔之所 未暇諮稟 梅將何及
衆辭皆同 師從寂定中 安詳而起 顧謂衆曰 比去東南 行四五許里 有林麓 起伏隱處 若古塚
是眞吉祥之地 可安 置也 復斂目如初 之己浙矣 事涉怪異 碑文略之
국존(國尊)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그가 임종(臨終)할 때 대중을 모아 놓고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기(氣)도 다 끊어지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후 선원(禪源) 정(頂)스님이 어찌할 바를 몰라 실성(失聲)하여
울부짖으면서 황망 중에 입탑(立塔)할 장소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 이미 입적하시었으니 후회막급이라면서
대중과 함께 탄식하였다.
이때 스님께서 적정(寂定) 삼매(三昧)로부터 조용히 깨어나 대중을 돌아보고 이르되 여기서 동남(東南)쪽으로
약4·5리(2km)쯤 지나서 임록(林麓)이 있는데 지형의 기복(起伏)이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등이 제대로 짜이고
안온(安穩)한 곳이 있는데, 마치 고총(古塚)과 같다. 이곳은 길상지(吉祥地)인 명당(明堂)이니 탑(塔)을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다고 하고는 다시 처음과 같이 눈을 감았다. 제자들이 곁에 가서 흔들어 보니 이미 서거(逝去)하였다고.
이러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생각되어 비문(碑文)에는 모두 생략하였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입적하였던 일연선사가 다시 깨어나 승탑을 세울 곳을 일러주고 다시 입적하여
후세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생각되어 비문에는 생략하고 음기에 기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괴이한 내용은 차치하고 이 기록에는 정확하게 현재의 승탑지 위치인 부도골을 동남쪽 4·5리 정도의 위치르 지적하고 있소 또 4·5리의 현재의 2km정도의 거리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또 구전에 의하면 효성이 지극했던 일연선사가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해 모친묘와 마주 보이는 곳에
승탑을 세웠다고 하며, 현재에도 '아침에 해가 뜨면 일연선사의 승탑에 비친 햇살이 어머니의 묘소를 비추고
어머니 묘소 또한 동쪽으로 보고 있는 스님의 탑비를 내려 보듯 감싸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이곳에는 보각국사정조탑과 함께 인각사 입구에 있는 2기의 승탑이 같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1962년에
인각사로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또한 차후 시굴조사시 조사범위에 포함시켜 조사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국사전과 보각국사 일연선사
국사전은 학계와 교계의 원로학자들이 정확한 고증을 통해 고려시대 원형 그대로 복원(復元)하여 조성한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영정을 보시고 있으며, 성사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을
기리며, 추모다례제(追慕茶禮濟) 등을 봉행하고 있다.
고려 말 국사까지 지내신 당대의 대 선지식인며, 또한 우리민족의 큰 스승이시기도 한
보각국사 일연선사께서는 민족의 대 역사서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삼국유사》
를 비롯한 1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로서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하여
각종 신화와 옛 전설들의 원형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형시가(定型詩歌)로서
최고의 형태인 향가(鄕歌) 14수는 물론 불교에 관한 방대한 자료와 민속신앙,
일화 등을 기록하여 국문학 전통을 발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90노모(老母)를 모시기 위해 국존(國尊)의 자리까지 버리시고 군위 인각사에
내려 오시어 노모의 마지막을 지키신 만세(萬歲)의 효자시다.
이와같이 일연선사는 민족자주사학(民族自主史學)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가였고, 문학가였으며, 팔만대장경을
재조(再造)하는데 중심이 되신 분이시다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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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인각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행정구역상 군위군 고로면 괴산2리에 자리하고 있는 사지에서 1963논에 인각사로 옮겨온 불상이라고 한다. 현재 신축 중인 대웅전 앞 마당에 모셔 놓았다. 사실주의 즉 실존하는 고승들을 모델링하여 조성한 일련의 불상양식과 그 계통을 같이 하고 있다. |
불상은 불신과 한 돌로 조성된 舟形擧身光背를 등지고 結跏趺坐하고 있는 불상이다.
肉 는 높고 큼직하게 처리되어 머리와 확연하게 구분되며, 머리칼은 굵고 큼직한 나발로 표현하였다.
상호는 원만하며 얼굴에는 적당하게 살이 올라 있으며, 두툼하게 처리한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흐르고
있다. 이목구비는 마멸로 인해 상세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목에는 三道의 표현이 있다. 着衣는 가슴을 U자형으로 크게 연 통견식 착의법으로,
가슴에는 승각기의 표현과 그 아래로 裙衣를 묶은 띠 매듭과 띠 자락이 표현되었다.
신체 전반에 걸쳐 9c이후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평행밀집의문이 대의 전체에 걸쳐 촘촘하게 물 흐르듯 표현되고 있다. 배꼽부근부터 흘러내린 주름은 무릎 아래로 크게 호를 그리면서 양팔뚝을 감싸고 흘러내린 대의의 주름과 겹쳐져 무릎부근에서 크게 삼단의 의습벽을 형성하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으로 觸地印을 취하고 있고, 왼손으로 禪定印을 취하였으며 손위에 조그마한 보주형 지물을 올려놓았다.
손에 든 지물을 통해서 이 불상을 일단 약사불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촉지인형 약사불은 8c이후 일대 유행을 하는
형식으로 그 전통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 불상은 9c 이후 유행하는 현실적 사실주의 불상 즉 863년과 867년에 조성된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
축서사 비로자나불좌상 등과 비교되나 이들 불상에서 나타나는 평행밀집계단 주름과는 다소 차이가 나며, 보다
형식적인 선으로 번잡하게 처리하고 있다.
따라서 불상은 9세기의 불상에서 나타나는 섬약해진 의습선에 보다 추상성과 번잡성이 강조되고 있는 점등으로 미루어 보아 10세기 경에 조성된 불상인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높이 153cm, 두고 53.5cm, 견폭 64cm, 슬폭 97.5cm이다.
미륵당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은 인각사 주요 건물이 들어 서 있는 곳에서 떨어진 동북편 아래에 마련된 미륵당 내에 모셔져 있다. 지금의 미륵당은 舊彌勒堂이 퇴락하여 2001년에 새롭게 건립된 것이다. 미륵당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면 주변 밭과 밭두렁에는 인각사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롸편들이 산재해 있다. 불상은 인각사의 유규한 역사를 말해 주 듯 불신 곳곳에 파손과 마멸의 흔적이 역력하다.
불상은 목부분이 절단되어 현재 시멘트로 보수하여 불신에 붙여 놓은 상태이며, 두부의 이마부분과 코, 귀 부분이 이미 파손되어 있다.
또한 양어깨 부분과 수인을 판단할 수 있는 양 팔과 손 부분등 각부분에 걸쳐 파손이 심각한 편이지만,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불상의 현상 및 양식을 파악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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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형의 갸름한 얼굴은 팽팽하게 살이 올라 있어 자비로운 尊顔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으며, 반개한 눈에서 선정에 잠겨 있는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코는 파손되어 원상을 파악할 수 없으나 전체 상호에 어긋나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였음은 분명하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다.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지만, 가슴 앞까지 새긴 는 확인할 수 있다.
착으는 양어깨가 마멸되어 분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배면까지 세심하게 새긴 불의의 주름, 즉 배면 왼쪽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를 빠져 나와 정면 가슴으로 사선을 그리며 올라가 그 끝자락이 왼쪽 어깨에 길게 드리워지고 있는데서 偏袒右肩의 착의법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무릎은 前面이 파손되어 무릎에 새겨진 주름은 파악할 수 없고, 불신에 비해 무릎이 높은 편이나 비례감은 상실하지 않았다.
수인은 왼손은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 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造形上 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팽창된 얼굴에 가늘고 길게 새긴 눈, 작고 도톰한 입술 등에서 8세기 중엽경의 조상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주 장항리 사지 석불입상과 비교 될 수 있으나, 볼륨감 있는 얼굴은 弛緩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强弱없이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린 의습선은 9c기 불상들과 일련의 양식적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불상은 일연 스님께서 중창하기 이전 즉 인각사의 초창 연대를 밝히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불상이다.
불상의 현재 높이는 124cm, 견폭 54.5cm, 현 무릎 폭 70cm이다.
2. 주변지역의 유적
(추정 와요지)
인각사에서 미륵당쪽으로 100m쯤 東쪽으로 가면 화산의 지맥인 절뒷산이 급경사에서
완경사로 바뀌고, 산자락을 따라 20여m 내려오면 논과 인접하여 낮은 구릉이 있다.
그 구릉을 따라 곳곳에 瓦片이 散布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산포하고 있는 瓦片과 슬래그로 추정이 되는 瓦質의 벽체덩어리를 주민들의 전언과 함께 추정해보면, 이곳이 인각사에 기와를 공급했던 瓦窯址로 판단된다.
현재 이곳은 잡목이 많이 우거져 있어 그 지형이나 의 정확한 형태가 나오지 않으나 전체적인 지형과 주변을 검토해 볼 때 의 자락을 이용, 의 구조를 가진 로 판단된다.
수목이 우거져 전체적인 규모나 그 형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수습되는 이나 슬래그로 볼 때 에 까지 지속된 로 추정되며 일제이전까지는 조업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는 크게 훼손흔적이 없는 완전한 형태의 로 판단되지만, 구릉의 하단부는 경작지로 활용이 되고 있어 일부가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와요지는 軍威지역에서 발견 예가 거의 없으므로 그 가치는 충분히 인정이 되면 현재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차후 試掘調査시 이 지역에 대한 보다 정밀한 조사를 실시하면 瓦窯의 정확한 形態나 瓦窯의 기수 등이 밝혀질 것으로 판단된다.
(傳 다비장터)
인각사에서 인각 마을을 못 가서 절뒤산쪽의 계곡인 속칭 '얄바골'을 따라 200m쯤 올라가면 해발 180m쯤에서
오른쪽의 위치에 속칭 '화장골'이라 불리는 약 20。의 경사가 있는 구릉이 나온다.
인각마을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곳이 인각사의 다비장터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옛 조상 때부터 인각사
화장터로 알려져 주민들이 이곳을 지날 때면 알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고 전한다. 현재 이 주변은 자연
송이 채취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목이 우거져 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유구나 유물을 전혀 없으며, 전체적인 지형으로 볼 때 약 30。이상의 경사가 있고 이 일대의
해발고도가 약 170m 정도에 위치해 있어 다비장터가 있을 입지조건에 맞지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화장터라는 주민들의 전언을 토대로 인각사 다비장터로 추정할 뿐이며 또한 다비장터가 지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할 뿐이다.
따라서 가능한 차후의 시굴조사시 이곳에 대한 간단한 트렌치 조사를 실시하여 화장터인지를 확인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국내에서 사찰의 화장터가 조사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또한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으나 다비장터 근처 어느 곳에 1721년 강설루중수기에
폐기하였던 불상을 묻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1721년의 강설루중수기에 의하면 '대웅전, 극락전의 양 전각이 기울어 기둥이 똑바르지 못해 바람에 깎이고
빗물에 씻기워 지고 丈六은 물이 스며들어 보기에 흉측하여 보존하기 어려워 이들에 대한 보수를 실시하고
불상을 폐하고 다시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불상을 폐하였다는 기록 이외에는 보이지 않으나
현지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때 폐기하였던 불상이 인각사에 전해 내려오다 어는 시기에 이곳 어디엔가
묻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다비장터의 시굴조사시 이에 대한 조사도 실시하여 폐기된 불상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인각사의 맞은 편인 위천 건너편에 위치한 양지골 일대가 과거 6.25 전쟁때에 인각사 주지스님을 화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대한 조사도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일연선사 모친묘)
인각사에서 동으로 약 2km쯤 가면 속칭 '둥딩'마을에 도착하며, 이곳에서 화북교를 지나 개울가를 따라
50여m가면 갑티골이라는 골짜기가 나온다.
이골짜기를 따라 500m쯤 가면 해발 200m선상에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270m의 봉우리의 정상부에 새로이 封土를 쌓은 분묘
1기가 나온다. 마을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이 일연스님의 모친묘로 알려져 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다 무너진 封墳과 일부의 石築만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軍威郡에서 봉토를 쌓고 석축을 2단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하단은 4∼5단정도의 돌을 쌓아 석축을 쌓고 또 그 위로 2단의 상단 석축을 쌓아 놓았다.
封墳 은 높이 약 1.5m정도이며 폭 3m정도의 분묘로 상석에는 군위군에서 '樂浪郡夫人李氏之墓' 라고 새겨 놓았다.
인각사의 탑비 기록에 의하면 일연의 모친묘와 마주 보인는 능선을 택하여 승탑을 세웠다고 하며
이곳이 일명 '능등'이라 불리우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인각사와 이곳 능묘,
그리고 승탑지가 정확하게 삼각형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후대의 윤색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번의 조사에서도
정확한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곳의 모습은 전혀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서 母親墓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이 일대에는
소위 '묵은장'이라 불리우는 오래된 민묘가 많이 있어 충분히 일연스님의 모친묘라 칭하여도 무방하다 하겠다.
현재 조사자의 판단으로는 더 이상의 기록이나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일연스님의 어머니 의 묘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으므로 주민들의 전언과 함께 이곳의 전설, 그리고 탑비의 내용을 비교하여 이곳을 일연스님의
묘친묘라 하여도 무방하다 할 것이며 차후 더 이상의 조사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각사 삼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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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은 극락전 앞에 위치하며, 탑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석탑규모는 노반부까지의 높이가 3.35m이고 하대갑석(下臺甲石) 1변의 폭은 1.97m이다. 인각사 삼층석탑은 제1탑신석(第一塔身石)이 제2. 제3탑신석 보다 높이의 비례가 크다는 것, 옥축석(屋蓄石)의 옥개받침이 4단(段)인 점, 등에서 고려전기의 양식(樣式)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에서 면석의 우주 탱주의 모각이 도중에서 끝나는 것과 상단의 받침을 위한 턱을 마련해두었다는 점은 유례를 찾기가 힘든 형태라 하겠다. |
인각사 석조 좌상 (지방 유형문화재 3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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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石佛)은 현재 인각사 국사전 앞뜰에 있다. 이 석불은 인각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괴산동(속칭'동정마을 아랫골')의 논에 있던 것을 1963년에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석불의 재질은 사암(砂岩)으로 부조형태의 좌상(坐像)과 광배(光背)를 일매석(一枚石)에 조각(彫刻)하였다. 광배(光背)는 모서리 부분에 파괴가 심하나 보주형(寶珠形)이었다고 추정된다. 광배의 문양(文樣)은 식별이 현재로는 불가능하며, 좌대(座臺)가 결실되어 자연석에 올려두고 있다. 이 불상은 눈과 입술의 표현이 두툼하며, 의첩(衣褶)의 매듭이 두텁게 표현된 점, 의첩이 부드럽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도식적(圖式的)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
인각사 미륵당내 석조좌상 (지방 유형문화제 자료 426호)
인각사 경내(境內)에서 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밭에 위치하는 미륵당(彌勒堂)에 안치된 좌상(坐像)이다. 우측팔과 두부(頭部)가 결실되었고 앞면도 박리가 심한 상태이다. | ||||||||||
석불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두부(頭部)의 결실부와 목은 석회로 복원해 두고 있다. 두부의 원형은 알 수 없으나, 얼굴의 상(相)은 옆으로 가늘게 표현된 눈과 도톰한 입술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 귀는 목 상단까지 표현되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의 흔적이 확인된다. 의첩(衣褶)은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후면에 접힌 가사표현(袈裟表現)은 매우 정교하다. 팔이 결실되어 명확하지 않으나, 좌수는 무릎에 올리고, 우수는 항마인(降魔印)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의 형상은 전조(全彫)이다. 가늘고 길게 표현된 눈과 사실적으로 처리된 입, 의첩의 정교한 표현 등에서 불상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중에서도 우수한 것에 해당한다.
이건 아무도 못말리는 거덜이생각이지만
세월은 수천년이 흘러 당시에 이절을조성한 사람들은 성불하여 불국토에 다시태어나셔서 부처님이 되셨거나 지금도 인각사에 스님으로 환생하신 분도있지 않을까? 또는 주변에 산을지키시는 신령님이 되셨지않았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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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초의 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간직해온 성지 인각사 ..옛 선인들과 선지식이신 스님들의 의 가르침을 잊지않고 부처님의 자비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증거유물들을 소중히 보존해야할 보물이 틀림없다
첫댓글 좋은가르침 주셔서 감사한데요 첨지님 좀 줄여서 해주시면 안될까요
동감. 여기다는 코믹한 춤추는 거덜님의 사진을 좀 넣으시면 지루하지 않을텐디
잘읽고 갑니다. 글 감사드립니다.._()_
감사히 잘보고 갑니다,,, 현세에 살고 있는 분들의 법명을 함보면 옛 선사들의 법명을 쓰는분들이 많습니다,,, 혹 그분들이 환생하시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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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글입니다...우리의 얼이 베어있는 성전입니다...자랑스러워 해야되고. 아끼고 보존해야될것입니다...긴글 수고하셨습니다.
성지를 자세하게 사진과 함께 소개를 해주셨네요,,,감사 합니다...
언제한번고향가는길에 들려서 첨지님의 소상한설명을 직접눈으로확인해야겠읍니다. 오늘도좋은자료와깨침을감사히받았읍니다. 환절기에건강에유의하시길바랍니다._()_
참으로 긴시진이 아니였지만.자주들려서 호탕하게 웃는 거덜첨지 거사님이 웃음이 보고싶었지만,그놈의 업장이 얼마나 두꺼운지 잠시 칩겨하여 마음으로부터.벗어나 ,떨어지는 낙엽을보면서 ,산사에 잠시 머물었다오,항상 좋은글을 올려주신 거사님의 얼굴에는 ,얼마전에 보았든 무지개처럼 고운 미소가 아니였을까 싶네요,부디 고운 미소 늘 남겨주소서,,
많은자료 감사히 읽고 갑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항상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건강한 하루되세요()()()
인각사의 전래되어 오는자료들과 정보 잘 보았습니다 애쓰셨네요
귀한 자료 좋습니다.감사 합니다.
귀한 말씀 잘 듣고 갑니다,,,수고하셨어요...오라버니![1등](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31.gif)
..![1등](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31.gif)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번 가 보아야 겠습니다.
은해사 ...이모님 살아 생전에 ..한번씩 가보든곳이라 정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