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 다산초당 → 나주순교자기념성당 → 곡성옥터
64.2Km 61Km 76Km
내 순례책자에는 없지만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에 있는 곳을 발견(다산초당)하여
급히 스케줄에 끼워 넣다보니 2시간이 지체되어 일정이 빡빡해졌다.
5시에 기상하고 공용주방에서 누룽지를 끓여먹고 커피 마시고
6시에 다산초당으로 출발했다.
순례가 끝나고 나주 지하터널 통과할 때 과속위반을 했다는
30,000 원의 범칙금 통보를 받았다.
빡빡한 일정에 서두르다보니 그리된 것이다.
"급할수록 천천히'라는 말이 생각난다.
2. 다산초당(茶山草堂)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순교한 셋째 약종은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 시성 대상자 중 한명으로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약종의 자식이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3. 나주 순교자 기념성당
나주 성당은 천주교 박해 시대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1807~1839, 베드로), 강영원(일명 성운, 1822~1872, 바오로),
유치성(일명 치경, 1825~1872, 안드레아),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등
네 명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그중 세 명의 순교자는 1871년 나주에 잡혀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1872년 나주 무학당(진영의 군사 훈련장) 앞에서
석침과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비망기》(461쪽)에는
1839년 공주 태생인 이춘화 베드로가
나주에서 잡혀 고문을 당하면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아
11월에 읍내 감옥에서 33세로 선종했다고 나온다.
▼ 무학당은 군사시설인 나주진영 안에 있던 훈련과 관련된
사열대의 성격을 갖춘 건축물로,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워
중앙에는 대청이고 좌우에 방을 둔 형식이다.(나주순교자의 건축학적 고찰 참조)
위치는 나주시 남외동 128번지(북위35도01분, 동경 126도 43분 08초)로서
1907년 5월 20일에 나주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무학당 순교터는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춧돌 12개가 남아 있었고,
나주의 네 분 순교자를 현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면서
2001년 11월 7일 그 중 10개를 나주성당으로 옮겨와
이 무학당 조형물의 주춧돌로 8개를 사용하고,
2개는 경당 주변에 조성한 "십자가의 길"이 시작하는 곳에 놓아 두었다.
나주초등학교 교정 화단에 주춧돌 2개가 있는 곳에는
순교터의 안내판을 세워 순교의 자취를 기리고 있다.
▼ 순교자 기념경당
기해박해(1839년)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네 순교자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무덤 형태의 경당으로 2004년 건립하였다.
경당 입구에 서 있는 60톤의 거석은
‘석침사(石針死)’를 당한 무학당 순교자들의 용맹을,
사방이 막혀 캄캄한 경당 내부는 순교자들의 고난을,
관 모양의 제대는 순교자들의 장엄한 죽음을,
경당 안쪽 천장이 없는 회랑은 순교자들의 부활과 영광을 상징한다.
▼ 현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성당은 전국에서 서울 중림동 성당과
강원도 횡성 풍수원 성당, 원주 용소막 성당 등 몇 안 된다.
이처럼 나주 본당이 초대 주임 신부 기념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수십 점의 하롤드 대주교 유품들 또한
예사롭게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될 것들이다.
나주 네 분 순교자는 옥중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고,
석형과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여 천주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소중한 신앙의 유산은 "오늘" "나"를 통하여 증거돼야 한다 (돌 비문 글에서..)
▼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이 집은 1956년 당시 제5대 광주 교구장이었던 현 하롤드 몬시뇰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한 까리따스 수녀회의 최초의 본원이자 지원원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성당의 전교활동과 구호물자 배급으로
신자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던 이곳에 파견되어
한국 까리따스 수녀회의 씨앗이 된 수녀들은
남북분단 전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들이었다.
건물은 원래 정병교씨 소유였던 것을 1956년 구입하여 개조한 것으로
안채(1934년 건립)는 수도자들이,
행랑채(1933년 건립)는 지원자들이 사용하였다.
1959년 본원이 광주 학동으로 옮겨졌으며,
초기 수도자들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2004년 5월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2010년 안채의 안방을 회원들의 피정과 휴식을 위해
현대식 주거공간으로 개,보수 하였다.
이 우물은 당시 수녀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물이 깨끗하지 않고 짭짭했지만
이 물을 마시고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4. 곡성 옥 터(곡성 성당)
곡성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국부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27년 전라남도 곡성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조그만 사건이 그만 교난으로 확대되니 이것이 정해박해이다.
곡성은 정해박해의 발상지로 그 시초는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들과의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영광으로 물들었다.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韓德運, 1752-1802년)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마를 여는 축하연이 벌어지고
거나하게 취한 그는 주막집 주인 부인에게 행패를 부린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남편 전씨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그를 포함해 몇 명을 관가에 고발했다.
곡성 현감은 관내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
닥치는 대로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곡성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피신하는 신자들을 따라 탄압의 손길이 퍼져 나가
급기야는 순창, 용담, 임실, 장성,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는데
전주 감영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했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누그러졌지만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생활을 전폐하고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해박해 당시 전라 감사 이광문(李光文)이
추위·더위와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의 많은 수를 배교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그들 대부분이 배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장계 고을 이 바오로의 누이이며 이명의의 어머니인 이 막달레나는
박해 시초에 곡성에서 체포되어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백천으로 귀양 가 4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1830년 5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고산(高山)에서 포졸에게 온 가족 13명과 함께 잡힌 이성지 세례자 요한은
무려 9년 동안 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고
8개월을 병마에 신음하다가 1835년 세상을 떠났다.
또 그의 셋째 아우인 이성삼 요한 역시 그 해 3월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반년이 채 못 돼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이들의 행적 중에 일부는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 내려와
후손들에게 박해를 뚫고 믿음을 지킨 용맹한 신앙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李景陶, 1780-1802년)와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1792-1827년)도 책과 상본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수 없는 배교의 유혹과 매질 속에서 순교하고 만다.
첫댓글
형제님~
자매 님과 마주한 찻잔이 좋아 보입니다~
자매 님과 맛난 거 사 드시면서 건강 잘 챙기시면서 다니세요.🙏🏻
맛있는 차 보내드리고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