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내리네
케네스강 (글무늬 문학사랑회)
1978년 겨울 나는 호텔 신라 개업 준비 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제 1차 호텔 개관식이 있던 날, 서울 장충동 호텔 신라 영빈관 뜰에서 우리 간부들은 물론, 샹송을 좋아하는 많은 호텔 직원들이 함께 모여 한 유명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서울에는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흠뻑 미소 짓는 청년 샹송가수 살바토르 아다모 (Salvatore Adamo) 가 환호와 박수 속에 마술사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눈이 내리네” (Tombe La Neige) 를 불어로, 아니 이탈리아 어로 했는지 잘 모르지만 감미로운 그의 노래는 우리 모두를 매료시켰다.
눈이 내리네/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외로워지는 내 마음
꿈에 그리던/따뜻한 미소가
흰 눈 속에 가려져/보이지 않네
하얀 눈을 맞으며/걸어가는 그 모습
애처로이 불러도/하얀 눈만 내리네
‘눈이 내리네’ 를 불어로 ‘톰버라 네져 라고 발음해서 당시 서울의 젊은 주부들이 ‘돈 벌어 나 줘’ 라며 이 노래를 좋아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그 당시 아다모는 30대 중반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으니 아직 살아있다면 그도 이제 80 고개를 넘고 있을 것이다. 아다모는 이탈리아의 시칠리 섬에서 태어나 벨지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지구는 적도를 기준으로 그 북쪽을 북반구 (Northern Hemisphere) 라 부르고 그 남쪽을 남반구 (Southern Hemisphere) 라 부른다. 호주는 남반구에 위치하며 따라서 북반구에 위치한 한국과는 계절이 정반대이다. 고산지대를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눈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눈이 더욱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사는 학교동창들은 요즘 카톡에다 눈 이야기를 자주 올린다.
젊은 날 여러 해를 북미대륙의 동북부 5대호 근방 미시간 주에서 살았었다. 캐나다와 접경하고 있는 이 지역은 겨울이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그래서 겨울철엔 자동차들이 밤 새 내린 눈을 수북이 뒤집어쓴다. 운전자들은 다음날 아침 일하러 갈 때 앞 유리에 쌓인 눈만 쓱쓱 밀어내고 차를 운전하고 달리니 마치 하얀 괴물들이 일렬로 행진하는 것 같았다.
흔히들 5대호를 다섯 개의 호수가 오손 도손 이웃한 낭만적인 곳으로만 생각하는데 그 규모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5대호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광활한 곳이다. 그 다섯개 호수의 면적이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더 넓다.
어느 겨울날 미국인 노부부와 함께 300 킬로미터 떨어진 그랜래피스 라는 도시를 향해 차로 달렸다. 그들의 아들 목사를 찾아가는 여행 길에 동행한 것이다. 중간쯤 갔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사뿐히 내리는 눈과 쏟아지는 폭설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폭설이 잠잠해지기를 기도하며 기다렸다.
어린 시절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질 때면 나는 시골집 마루에 걸터앉아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감상하기를 좋아했다. 한참동안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기하게도 눈이 내리는 대신 내가 공중으로 하염없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분명한 착시 현상이었지만 그렇게 하염없이 올라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못 듣고 마루 끝에 오래오래 앉아 있곤 했다.
함박눈이 내릴 때면 나와 둘째 형은 집밖으로 나와 뛰어다니며 놀았다. 동네 친구들과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하였다. 눈을 가급적 크게 뭉쳐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향해 힘껏 던졌다.
눈 뭉치는 얼굴에 맞아도 아프지 않아서 재미 있었다.
또 젊은 시절 겨울날 데이트하고 헤어질 때 괜히 멋지게 보이려고 눈이 오는 날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가수 진성이 부르는 ’안동역’ 이라는 가요 가사다.
그때는 안동역도 몰랐으면서.
눈이 검게도 아니고 붉게도 아니고 하얗게 내리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