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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차 정기합평회
- 2024. 3. 21 -
순서 | 제목 | 작가 | 합평 담당 |
1 | 화장 | 변미순 | 이미란 |
2 | 스펑나무와 타 프롬사원 | 오수미 | 이숙희 |
3 | 엘리베이터 안에서 | 백금태 | 이시언 |
4 | 까꿍 놀이 | 이미경 | 채정순 |
5 | 백세인생을 산다는 것은 | 옥경자 | 최선화 |
6 | 대단한 사람들 | 노아영 | 공도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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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변미순
1) 매일 아침 출근 길에 화장을 잘하는 질녀가 나를 잡는다. 눈썹이 짝짝이다. 립스틱이 너무 얇게 그려졌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렸다 등등 그 이유는 다양하였다. “화장하는데 오분 밖에 안 걸리는데 이만하면 괜찮지 뭐”하며 출근하지만 약간의 스트레스가 되어 예민한 것도 사실이었다.
2) 메이크업 전문가에게 일대 일 1회, oneday class라고 하는 유료 프로그램을 받아 보기로 하였다. 오 분 만에 화장을 마친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소 20분은 투자해 주셔요” 하며 기초 단계부터 화장하는 강의를 시작하였다.
3) 수분 유지가 중요한 기초화장을 도와주기 위해 미스트를 뿌리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효과의 유불리가 있기도 하지만 유분기 있는 미스트는 분명히 피부를 촉촉하게 한다며 얼굴에 쏴악 뿌리면서 출발하였다. 세럼, 로션, 크림을 발랐고, 각각을 바른 후 일정 시간 두드리는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흡수력을 높여주어 밀가루 반죽 같은 피부는 찹쌀 반죽이 되었다. 이것만으로 놀랐다.
4) 비비크림이라는 살 색의 용품이 덧칠되었다. 자신의 피부색과 같은 톤으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나의 얼굴 피부보다 훨씬 밝은 크림이 얼굴 전체를 덮었다. 이어 컨실러는 더 밝은 톤으로 잡티를 덮어 주고, 볼과 콧등에만 바르는데 얼굴 전체를 밝은 톤으로 올려주었다. 번들거리지 않는 화장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파우더 컴팩트로 마무리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5) 눈썹은 평소에 내가 선택해왔던 갈색과 회색이 아니라 진한 올리브 색을 권했다. 그래야 피부색과 어울려 자연스러운 회갈색이 발현된다고 하였다. 선을 그을 때도 끝부분을 진하게 하고 얼굴 안쪽은 연하게 출발하라며 그동안 내 방법과 반대로 하였다. 무엇이든 시작은 미약하나 끝이 좋아야 한다는 세상 사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놀랐다.
6) 아이 쉐도우는 옷이랑 분위기에 맞는 한 가지 색상만 선택하고 약간 반짝이는 펄(pearl)로 밝은 분위기를 주었다. 눈 아래에도 펄로 약간의 선을 그어주면 아래위가 연결되면서 애교살이 된다고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7) 볼 터치는 피부를 생기있게 보이게도 하고, 조금 젊어 보이는 용품이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데 볼 터치 화장품이 마음에 쑥 들어왔다. 젊어 보인다는데 꼭 하고 싶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아래 방향으로 바르지 말고 눈 쪽으로 끌어올리듯 하라고 했다. 이미 피부가 아래로 쳐지고 있으니 선생님의 말은 비수처럼 아팠고, 한편 고맙게 들렸다.
8) 다이어트는 세계 모든 여성의 희망이다. 귀밑 턱을 진한 갈색으로 살짝 눌러주고 볼 터치한 양쪽 끝도 음영을 주어 얼굴의 크기를 작아 보이는 화장법을 알려주었다. 일명 브이라인을 만들어 주되 음영을 준 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화장술로 성형하듯 얼굴이 작아 보이게 하지만 표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9) 마지막 또 한 수가 있었다. 하이라이트(high light)라고 하는 가장 밝은 가루로 콧대와 콧등에 살짝 광택을 주어 돋보이게 하는 포인트를 주는 것이었다. 얼굴은 더 입체적으로 보이고, 상대방의 시선을 받는 곳에 밝은색을 주어 빛이 반사되면서 첫인상을 밝게, 환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10) 하루 종일 집 밖에서 근무하는 난 오후 시간대에 화장이 옅어지기도 하고 얼룩지기도 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를 막아주기 위해 모든 화장을 마치고 메이크업 픽서를 사용하였다. 화장한 모든 것을 밀착 고정시켜 주는 역할이란다. 분사형이 간편하고 심지어 미니 사이즈를 휴대하면서 활용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11) 젊은이들이 하는 더 많은 과정들에 비하면 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줄여 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도 전문가의 기술로 더 밝고, 입체적이고 광택이 나는 화장으로 기술을 익혔고, 분명히 배우기 이전보다 나아졌다. 만족도도 높았고, 남들에게도 나아진 화장 기술을 칭찬 받기도 하였다.
12) 그런데 나의 원래 피부는 한점으로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나 자신은 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진짜인가? 화장 전이 나인가? 화장 후가 나인가? 자문하면서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13) 내 나이가 되어 화장은 분명 변장과 같다. 그러나 단점을 숨기고, 장점은 돋보이게도 하는 처세술 중 하나이고, 아직 나에겐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젊은 듯, 밝은 듯, 야윈 듯 20분간의 화장을 하고 매일 출근길에 나선다.
스펑나무와 타 프롬사원/ 오수미
1) 캄보디아 타프롬 사원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 이처럼 신비스런 폐허가 있을까. 폐허와 나무뿌리가 뒤엉켜 자아낸 신비한 분위기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루트를 연상케 하는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거방진 뿌리는 사원을 감아쥐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기거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다.
2)수십 미터의 스펑나무를 눈으로 오른다. 시선이 나무 끝에 다다르자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거대한 외계문어처럼 눈에 들어온다. 사원을 움켜쥔 나무와 그 발치에 비틀어진 사원은 사춘기가 한창인 딸아이와 갱년기를 맞닥뜨린 나의 모습을 닮았다.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사이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마음이 든다.
3)천사로 태어난 아이는 더 이상 천사가 아니다. 나도 그 때의 모습이 아니다. 6학년이 되는 아이의 키는 나보다 커졌다. 나는 아이가 자란 만큼 작아졌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는 사춘기를 겪고 있다. 나는 노화라는 이름으로 갱년기를 맞고 있다.
4)바나나보다 바나나맛 우유를 좋아하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아 논리를 가르쳐주려했을 뿐인데, 방문을 닫아버린다. 두 문장 이상 말하면 아이에게는 잔소리가 된다. 필터로 편집한 사진을 보고 원본이 더 예쁘다 하니 짜증일색이다. 칭찬도 자신에게 수긍되지 않으면 비난이 된다. 세상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5)이런 아이의 행동에 나는 정말 바보같이 상처받는다. 아이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엄마라고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아프다. 어린 날의 아이를 생각하며 웃다가 그 날의 아이가 아니라서 슬퍼진다.
6)사춘기 아이는 나무가 되어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하는 엄마를 조른다. 자연의 풍화에 시달리는 것도 힘이 들건만 나무마저 자신을 깔고 앉으니 사원은 죽을 지경이다. 아이와 나는 지금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다.
7)타 프롬 사원은 당시 지도자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라고 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시기가 있었을 거다. 통곡의 방에서 어머니가 그리워 가슴으로 울었다는 그를 상상한다.
8)나에게도 사춘기 시절이 있었다. 등교를 하면서 엄마에게 한껏 짜증을 내며 현관문을 세게 닫았는데 문 유리가 박살이 났다. 웃긴 건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거다.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갔으니까. 그때 엄마의 마음도 나와 같았으리라. 통하지 않으니 답답했으리라. 훗날 아이도 지금의 자신을 기억조차 못하겠지.
9)사원이 지어졌을 무렵 스펑나무는 작은 풀 한 포기에 불과 했을 거다. 뒤뜰에서 무럭무럭 성장했으리라. 사원의 정원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나무와 사원은 함께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10)나도 그렇다. 아이는 마음의 위안이었다.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살아온 힘이다. 아이에게 나도 그렇다. 아이를 살리는 힘은 엄마인 나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11)스펑나무는 쓰러지지 않으려 사원을 안고 있다. 사원 또한 부서지지 않으려 나무뿌리를 꼭 품고 있다.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와 사원은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다.
12)사춘기 딸과 갱년기 엄마처럼 살아내기 위해 서로를 꼭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 백금태
1) “덜컹, 덜커덕.”
둔탁한 흔들림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추었다. 내 몸도 상하좌우로 요동치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층수를 알리는 숫자도, 열고 닫히는 개폐 버튼도 불빛을 잃은 채 먹통이 되었다. 그나마 안을 밝히는 전등은 꺼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2) 아파트 관리실로 연결된 비상벨을 눌렀다. 늦은 저녁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참이라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막막했다. 가족과의 연락도, 어느 누구와의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은 관리실과 통하는 비상벨뿐이었다. 1평도 훨씬 못 미치는 공간에 홀로 갇혔다. 망망대해의 섬에 홀로 남겨진 공포가 이럴까. 폐쇄공포증이 밀려오며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터질 듯 아팠다.
3)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다급한 말에 관리인은 엘리베이터 회사로 연락한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안심시키는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락을 기다리는데 답이 없었다. 다시 벨을 눌렀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엘리베이터 회사 직원이 출발했지만 퇴근 시간과 겹쳐 30분은 넘게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대수롭잖게 던졌다. 나는 죽을 것 같은데 말이다.
4)따뜻한 아파트에서 입었던 반바지에 아무렇게나 걸친 얇은 웃옷 사이로 겨울의 찬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내가 살아보니 때가 해결해 주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큽니다.”
103세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지금 내 힘으로는,내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밖에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신세다.마음을 가다듬으며 근래 나를 가장 즐겁게 했던 일이 무엇일까 되짚어 봤다.바로 임영웅 콘서트였다.
5) 얼마 전,임영웅 서울 콘서트에 갔다. 370만 명이 접속한 콘서트 티켓 전쟁이 벌어졌었다.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콘서트 표 구하기였다. 어렵게 구한 표를 들고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은 가수의 상징인 푸른색 응원복을 차려입은 팬들로 자리는 빽빽이 차 있었다. 나도 며칠 전 급하게 응원복을 구매했다. 평상복으로 차에 오르는 것도, 콘서트장에 들어가는 것도 팬들에게 그리고 가수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6) KSPO DOME(구 체조경기장)앞 광장은 수평선마저 아른거리는 아득한 바다였다.푸른 물결이 파도에 실려 넘실거렸다. 끝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인파 속에 나도 몸을 던졌다. 기념사진을 찍는 부스마다 긴 줄이 늘어져 끝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부터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한마당이었다. 3대가 즐기는 콘서트 즉 할머니, 엄마, 이 손을 잡고 오는 콘서트 정경이 바로 임영웅 콘서트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두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그 가수의 팬이라는 자부심으로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마음 한뜻으로,한 곳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에 감탄할 뿐이었다.
7) 공연이 임박할 즈음 콘서트장 문을 열었다. 물밀듯 들어가는 관중에 섞여 나도 자리를 잡았다. 중앙에 자리 잡은 360도 무대, 천장에 매달린 대형스크린 12개, 공연장을 빙 둘러 꽉 채운 1만 5천석 자리,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연의 막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렘 그 자체였다.
8) 시작 30초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광활하고 신비한 우주가 펼쳐졌다. 우주선을 타고 나타난 가수와 팬들이 함께 우주여행을 떠났다. 콘서트장은 온통 하늘빛으로 물들었고, 가수의 화려하고 강렬한 퍼포먼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희로애락을 담은 공연 구성과 넘사벽의 비주얼, 거대한 영상으로 팬들은 우주여행에 푹 빠져 있었다.
9) 3시간 우주여행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편의 얼굴이 보이고, 황색 조끼를 입은 소방관도, 열쇠를 손에 쥔 엘리베이터 회사 직원도 보였다. 안에 갇혔던 나보다 바깥에서 애태웠을 남편의 얼굴이 더 사색이었다. 임영웅의 콘서트를 즐기며 불안감을 삭혔던 내가 도리어 멀쩡했다.
10) 3시간 콘서트 공연을 추억하며 30여 분의 기다림을 견딜 수 있었다. 안달하며 기다린 30분이었다면 3시간처럼 기나긴 고통이었을 것이다. 노력 밖이라면 때가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으리라.
까꿍 놀이/이미경
‘카톡’
누군지 몰라도 눈치라곤 일도 없는 사람이다.놀이를 하는 중이라 귀찮다는 생각부터 든다.슬쩍 알림창에 뜨는 메시지를 확인한다. ‘특별한 오늘 가장 행복….’모르긴 해도 동생일 것이다.아침 일찍 카톡을 보낸 것을 보니.그래도 매년 잊지 않고 가장 먼저 챙겨줘서 고맙다.나이를 먹을수록 핏줄이 좋다.동시대를 살아가는 죽이 잘 맞는 나의 편이다.놀이를 계속한다.얼굴에서 손을 떼며 까꿍하자 호빵 같은 볼살이 먼저 위로 올라가고 곧 입꼬리도 따라서 눈을 향한다.천사의 웃음이 저리 예쁠까. “까르륵 까르륵”날개 대신 손발을 파닥거리며 좋아한다.보이지는 않지만,분명 날개도 파닥이고 있으리라.
핏덩이로 태어나 존재의 울음을 알리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이렇게 공감하는 것을 보니 경이롭다.내 한마디 말에 온몸으로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 몇이나 될까?.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맞춤을 하며 웃는 모습이 환하게 핀 꽃송이다.행여 꽃에 그늘이라도 질세라 내 입에서는 까꿍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할머니와 손자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꽃이 되어 하늘거린다.할 수만 있다면 망막에 새겨두고 싶은 순간이다.
까꿍과 까르륵이 오가면서도 카톡의 주인공이 내심 궁금하다.다시 들리는 카톡 소리.동생이 보낸 케익 쿠폰과 생일 축하 카드가 익살스럽게 웃는다.동생이라 생각한 첫 카톡은 누가 보냈을까.뜻밖에도 프엉이었다.
프엉은 결혼 이주 여성인데 내게 한국어를 배웠다.그녀에게 한국어라는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가꾸었던 시간이 차창 밖 풍경처럼 지나간다.
첫 수업을 하러 갔던 날 프엉은 잠옷 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베트남 여성들에게서 가끔 보던 모습이라 괘념치 않았다. 한국문화 수업 계획서에 손님맞이 예절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프엉에게 웃음을 보냈다. 문법도 발음도 모두 서툴렀다. 단문으로 천천히 이야기하면서 겨우 의사소통했다. 초급 베트남 사람의 특징은 ‘있다’를 많이 사용한다. ‘감기에 걸리다’는 감기 있다, ‘임신하다’는 아기가 있다 로 표현한다. 오랜 경험으로 안 것들이다. 붓기가 있는 얼굴이 파리하다 느꼈는데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였다. 아기가 밤새 울어서 잠을 자지 못했다며 계면쩍게 웃는 프엉에게서 프루메리아의 달콤한 향이 났다.
“으음 으으악” 옹알이하는 손자의 두 눈에 물음표가 달려 있다. 놀이하다 딴생각하면 안 된다는 듯 입꼬리에 힘을 주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호통치는 것 같다.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까아아아꿍’하니 손발을 바둥거리며 ‘까륵’하고는 멀뚱히 나를 쳐다본다. 까꿍 단문은 까르륵 까르륵 장문으로 화답하더니 ‘까아아아꿍’은 단문으로 답한다. 까꿍과 까아아아꿍에서 간극을 느낀 건가?
프엉은 다른 사람과 달리 한국어를 많이 어려워했다. 한국어는 교착어이고 베트남어는 굴절어이다. 한국어는 주격 조사와 목적격 조사만 잘 붙이면 단어의 순서를 다르게 배열해도 해도 말이 되지만 베트남에는 격조사라는 개념이 없고 단어의 순서에 따라서 문장의 뜻이 결정된다. 조사는 생략하기 예사였고 단어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그녀와의 수업은 진이 빠졌다. 그럼에도수업을 종료한 일 년 전만 해도 한국어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별한 오늘 가장 행복했으면 합니다. 멋진 생일 보내세요’ 몇 번 읽어봐도 문법이나 시제, 어휘가 흠잡을 데가 없다. 심지어 광고 문구처럼 멋지기까지 하다.내가 부탁한 대로 그동안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프엉이 까꿍 하며 보여준 생일 카드에 내가 까르륵 웃는다.
문자로 안부를 물었다. 국적 취득 공부 중이며 워킹맘이 꿈이란다. 복지관이나 성당에서 하는 한국어 수업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한다고 한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내내 한국 사람과 문자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노력의 씨앗이 어느새 나무가 되어가고 있음에 뿌듯하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택한 직업이 한국어 교사였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이들과 보낸 11년은 의미 있게 보낸 내 삶의 굵은 마디임이 틀림없다. 그동안 바빠서인지 기억이 무의식 속으로 빨리 가라앉아서인지 오랫동안 행복한 시간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아니 어쩌면 내 안에 많은 추억이 있는데도 바쁘다는 핑계와 이유로 얼굴을 가리고 그것들에 까궁을 호명하여 부르지 않았다. 이제 퇴직도 했으니 기억의 통로를 점검하며 나의 까꿍 놀이를 할까 한다.
“으아알” 손자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놀이를 보챈다. “까꿍”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륵 넘어간다.
백 세 인생을 산다는 것은/옥 경 자
최근TV에서100세가 넘으신 노인의 일상이 공개되었다.휴대폰이나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을 보면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백 세 인생 파이팅을 외치고 싶을 만큼 활동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80세 된 딸이 아버지를 모시며 같이 살고 있었다.그렇지만 백세시대를 살고 있는 노인들이 너무 건강해도 걱정이다.아버지보다 내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딸의 말이 내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자식들의 건강이 부모보다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팔순의 자식도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인 것이다.
인근 공원에서 지팡이 두 개에 의지해 힘들게 운동하는 노인 한 분을 보았다.허리는 기역자로 굽었고 나이가 많아 보였다.숨이 차는지 몇 발짝 만에 쉬고 숨을 고르고 또 발걸음을 옮겼다.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저렇게까지 하면서 오래 살고 싶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지인의 시어머니는 올해96세로 요양원에 가셨다.치매가 중증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평소에 육식하지 않던 분이었는데 정신이 없으니,요양원에서 주는 음식을 육식,채식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고관절을 다쳐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잊어먹고 자꾸 침대에서 내려와 걷기를 시도하다 다친 데를 또 다치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서 침대에 묶어 놓고 지낸다고 한다.지인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올해94세이다.인지력이 떨어진 건지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이 늘었다.툭하면 아파서 밥을 먹지 않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버린다.요양사의 말에 의하면 뭔가 마뜩잖은 일이 있으면 그런다고 한다.
“빨리 죽어야 하는 데 죽지도 않고 내가 나라에 좀 같은 인간이다.”
하면서 바른 소리를 할 때도 있고 내가 좀 더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몸에 좋은 식자재를 탐할 때도 있다.이랬다가 저랬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변한 것 같다.
지난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으신 아버지는 한동안 편해하셨다.아무렇지도 않게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면서 밥도 잘 드시고 표정도 밝아 보였다.아직은 건강하니 백 세까지는 끄떡없겠다고 스스로 농도 했다.경로당에도 나가고 소통하면 좋으련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보는 나도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 줄 방도가 없다.사람이 밥만 잘 먹는다고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매일TV리모컨만 친구 삼고 있으니,무력감도 생기리라.어머니가 있을 때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너희 엄마 때문에 내 명대로 못 살겠다.하더니 이제는 그때가 그립다고 털어놓는다.
물기가 없는 마른 풀잎처럼 매사에 건조하고 힘이 없다.쪼그리고 누워 있는 작고 초라해진 아버지의 어깨에서 절실한 외로움을 본다.
나도 나이가 들면 아버지와 똑같은 절차를 밟고 살지 모른다.지금도 생각의 폭이 자꾸 좁아지고 있는 나를 보면서 사람이 재수 없으면 백 살을 산다는 어떤 강사님의 말이 생각난다.이렇게 백 세를 산다고 한들 행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건강하고 밥 잘 먹어도,요양원에 있어도,공감할 친구가 없고 동반자가 없는 백 세 인생은 외로운 일인 것 같다.어떤 인생이든 정답은 없지만,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죽을 때 슬프게 울어줄 친구가 있을 때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하나 가져본다.
대단한 사람들/ 노아영
지난해 갤러리를 대관해서 소규모 아트페어를 열었다.
창의적이고 개성있는 작가들을 선정하여 최대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전시가 끝나갈 즈음 본사 임직원으로부터 백화점1층에 아트매장을 한번 열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장소도 명품관 쪽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좋은 위치에 주겠다고 했다.
입점가능한 장소를 미리 보러갔는데 유명메이커 남성복과 명품시계 매장사이에 자전거가 진열된 매장이었다. 맞은편에는 화장품매장이 있고 누가 봐도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고객들 입장에서도 그 장소에 자전거매장보다는 아트매장을 선호할 터이다.
여러 해 전에 타지의 한 업체가 1층에 그림매장으로 입점해 있다가 계약 잔여기간을 한 달 정도 남겨 놓고 사정이 있어 부탁한다며 매장운영을 의뢰해 온 적이 있었다. 설마 백화점이니까 기본 매출은 있겠지 생각하면서 일을 시작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출근해서 날마다 손님은 없고 지루한 시간을 때우느라 힘들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제안을 건넨 이사님께서 그때보다는 위치도 더 좋고 원하면 깔끔하게 매장수리까지 해주시겠다고 했다. 좋은 조건이지만 솔직히 내가 하자니 내키지 않고 남 주기엔 미련이 남았다.
3일정도만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며칠후에 나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 출퇴근을 조금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매장의 조명 점등은 사무실에서 해주기로 하고 점심시간 손님미팅이 있을 때는 매장을 한 두 시간 비워도 이해해주기, 무엇보다 계약기간을 3개월로 하여 더 원할 때는 그 기간만큼 연장하기로 했다. 수지가 맞지 않거나 불편하면 언제든지 빠져나올 구멍부터 마련한 것이다.
계약을 하고 약정한 날 하루 전에 자전거매장이 빠져나가고 밤새 인테리어를 바꿔 그림매장으로 변신시킨 걸 보고 신속 정확하게 일을 추진하는 곳이 백화점인가 싶었다. 내 돈 한 푼들이지 않고 훌륭한 매장을 제공 받은 셈이다.
한때는 지역백화점으로 명성이 자자하고 시내중심지에서 부자 집 사모님들의 아지터였는데 H사와 S사의 새로운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고객들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유명 상표를 선호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찾는 명품이 없으면 당장 발길을 돌린다. 매출 신경 쓰지 말고 내 화실처럼 그림도 그리고 편안한 공간으로 사용하라고 했지만 어떤 때는 말붙일 사람마저 없을 정도였다. 매장 매출이 몇 일 째 바닥을 칠 때는 담당 대리에게 전화를 걸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런 때는 아까운 시간에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어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명품매장들이 유지를 못해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앙꼬 없는 찐빵처럼 맥이 풀린 백화점 매장분위기는 때로 고객 없이 직원들만 꼭두각시처럼 서있는다. 아이러니하게 설렁한 매장을 벗어나 식품관이나 식당가에 가보면 거기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다들 어렵다하지만 먹는 것에는 선순위라는 게 느껴진다.
한 매장에서 15년~ 20년 이상 근무한 경력자들이 D사의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다. 지금은 한산하지만 한때는 매출이 꽤나 높은 황금기도 있었다면서 그들끼리 입을 모아 마지막 자존감을 추스렸다. 직원으로서 월급을 받으며 매출이 없으면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부담감이 클 것 같은데 직업전선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아트매장에는 전국 인기 작가들의 회화작품과 조각, 공예등. 그림으로 만든 아트 백이나 매트, 스카프 등을 취급하고 있다. 아트상품은 좀 팔리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매출이 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간간히 숨은 고객들이 있어 지금껏 일정 매출을 유지 해온 거 같다.
아트매장이 있어 좋은 그림도 감상하고 멀리가지 않고 쇼핑하다 아트상품도 구매할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하는 손님들을 보며 기운을 내게 된다.
오전에는 책이나 신문을 보다가 오후에는 심심하면 그림을 그린다. 매장안쪽에 비품 수납공간이 있어 그림그리기 위한 준비를 다 갖추어 놓았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매장을 보면서 수채화 작업이 용이할 것 같아 수채화를 하다가 요즘은 요령이 생겨 유화작업까지 무리 없이 한다. 아마 매장 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지도 모른다.
비싼 매장에 어떻게 입점했느냐고 묻는 작가들이 많다. 위치 좋은 내 매장 두고 왜 돈주고 쓰냐하면 능력도 좋다하며 부러워한다. 속사정을 다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날마다 출근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자유가 그리워 몇 개월 버티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부터 했는데 이제 손님이 없는 매장을 지키는 것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이렇게 눌러 앉게 된 걸 보면 나도 차츰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차츰 단골도 생기고 가끔씩 주문제작을 의뢰하는 이도 있어 붓 잡는 일이 많아졌다.
고객층이 더 확보되어 행복한 나의 놀이터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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