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8 설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영화 '꼬마 니콜라' 한국 개봉 이토록 행복한 아이들 세상 ‘꼬마 니콜라’ 영화로 나와 장자크 상페의 <꼬마 니콜라>가 영화가 되어 찾아왔다. 1950년대 말 스토리텔러 르네 고시니와 함께 한 신문에 연재한 꼬마 니콜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돼 전세계적으로 1800만부가 팔렸다. 1980년대 초 한국에서도 나와 100만부나 팔렸다. 그림으로 태어난 꼬마 니콜라가 실제 인간이 되기까지 50년이 걸린 셈이다. 조각으로 된 원래 이야기들을 하나의 스토리가 되도록 짰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림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 생생하다. 장래 희망이 고민인 장난꾸러기 니콜라(막심 고다르)는 물론 먹는 것이 부러워 장관이 되려는 알세스트, 전용 운전사가 있는 조프루아, 공부도 고자질도 일등인 아냥, 강도가 되고 싶은 외드, 촐싹이 요아킴, 파리에 살며 센강도 모르는 클로테르, 호루라기가 좋아 경찰이 꿈인 뤼퓌스 등 악동들은 관객들을 아이들 세상으로 빨아들인다. 그 세상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1960년대. 텔레비전이 없던 그 시절 놀이란 집 안에서는 동화책을 읽고 밖에서는 공차기, 술래잡기, 전쟁놀이, 소꿉놀이를 하는 게 전부. 무릎까지 오는 스타킹에 반바지를 입은 영화 속 악동들의 놀이에는 그림 동화, 보물섬 등의 이야기가 그대로 녹아 있다. 아빠가 갑자기 엄마에게 잘해주자 동생이 생겼다고 오해한 니콜라는 자기를 숲에 갖다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함께 대책위원회를 만든다. 집안 청소로 엄마아빠 점수를 따려던 작전이 실패하자 동생을 처치해 달라고 애꾸눈 악당한테 부탁한다. 문제는 돈. 이를 위해 한모금만 먹으면 천하장사가 된다는 마법의 약을 만들어 아이들한테 판다. 이런 골격에다 교실,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혀짜래기 대화와 어른들의 익살 연기에 버무려져 있다. 쉴새없이 웃다 보면 못 말리는 니콜라가 어느새 의젓하게 변해 있다. “나의 희망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28일 개봉. 전체 관람가. 임종업 선임기자 /한겨레 2010-01-24 오후 05:57:02 Release dates for Le petit Nicolas (2009) Country Date Belgium 30 September 2009 France 30 September 2009 Italy 16 October 2009(Rome Film Festival) Poland 4 December 2009 Czech Republic 10 December 2009 United Arab Emirates 12 December 2009 (Dubai International Film Festival) Greece 24 December 2009 South Korea 28 January 2010 Germany 6 May 2010
2002 -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Lindgren, Astrid) 사망 린드그렌 [Lindgren, Astrid, 1907.11.14~2002.1.28] [역사 속의 인물] '말괄량이 삐삐'의 작가 린드그렌 이름: 삐삐(Pippi) 롱스타킹, 나이: 9세, 가족: 부모는 없고 원숭이 '닐슨'과 함께 삶, 외모: 주근깨 가득하고 갈래로 땋은 빨간머리. 패션: 끝이 뽀족한 신발에 양쪽 색이 다른 스타킹을 신음. 특징: 기발한 상상력과 힘이 아주 셈, 재산: 금이 가득한 보물상자가 있고 마당이 넓은 큰 집. 학교: 다니지 않음.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엽기적인 이름을 가진 개구쟁이 소녀의 이야기다. 한국에도 1971년 스웨덴TV 시리즈 '말괄량이 삐삐'가 방영되면서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첫 출간 이후 전 세계 60개 언어로 번역됐다. 요즘으로 치면 '해리 포터'와 비슷하다고 할까. 동화작가 아스티리드 린드그렌(1907~2002)의 작품이다. 딸 카린이 폐렴에 걸렸을때 침대맡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옮긴 것이다. 평생 200여 작품을 남겨 국민 작가로 대접받았으며 2002년 오늘, 94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전 스웨덴이 슬픔에 잠겼다. "아니, 삐삐! 종이는 어쩌고 바닥에다 그리니?" "내 말을 그리려면 작은 종이로는 어림도 없어요. 겨우 앞다리를 그린걸요. 꼬리까지 그리려면 복도까지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박병선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1월 2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038&yy=2011
[어제의 오늘]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ㆍ사상 첫 민간인 우주여행 불발 5, 4, 3, 2, 1, 발사! 당초 1월22일 발사될 예정이었다가 다른 발사체와의 중복, 악천후 등으로 인해 거듭 연기된 챌린저호의 다급한 일정도 NASA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챌린저호 임무 중 하나가 핼리혜성의 관측이었는데 며칠 후면 핼리혜성이 태양 뒤로 사라진다는 점, 그날 밤 레이건 대통령의 연두교서 연설에서 챌린저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될 예정이었다는 점 등이 발사 일정을 더 이상 미루기 힘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1-27 21:23: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272123235&code=100100
1981 - 전두환 대통령 미국방문 (1.28~2.7) 3. 전대통령 방미 - 1981년 국내 10대 뉴스 전두환 대통령은 1월28일부터 11일 동안 [레이건]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 2월2일(미국시간) 정상회담을 통해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의 백지화를 비롯, 그동안 중단됐던 한 미간의 안보 협의회 정책 혐의회 경제 협의회를 개최키로 합의하는 등 두 나라간 현안을 일괄 타결했다. 全대통령은 이어 6월 25일부터 15일 동안 [아세안] 5개국을 순방, 이 지역 국가들과 경제 협력을 다졌다. http://home.megapass.net/~jsamen/news02.htm
1979 - 덩샤오핑 미국 방문 [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덩샤오핑 미국 방문 덩샤오핑(鄧小平)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미국 텍사스의 한 로데오 경기장에 나타났다. 5척 단구에 얼굴 절반 정도를 가리는 큰 모자를 덮어 쓴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덩이 모자를 벗어 흔들자 관중의 환호가 쏟아졌다. 1979년 1월 28일 시작된 덩의 미국 방문은 ‘덩 신드롬’을 낳았다. 그는 세계 최대 공산국가 지도자답지 않게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로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방미 일주일 동안 그는 워싱턴에서 정치인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본주의 문화를 체험했다. 포드자동차, 보잉항공사 등을 찾아다니며 꼬치꼬치 질문을 해대기도 했다. 덩은 여러 면에서 1959년 미국을 방문했던 소련 지도자 흐루시초프와 비교됐다. 흐루시초프의 방문은 훨씬 떠들썩했지만 미국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그에게 미국인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덩의 미국 방문은 1979년 1월 1일 양국간 정식 국교가 수립된 직후 이뤄졌다. 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중국 지도자였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고,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은 ‘경제 제일주의’로 돌아서면서 세계 최대시장 미국을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을 둘러보고 돌아온 덩은 귀국 성명에서 그 유명한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설파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돈을 잘 벌 수 있으면 좋은 체제’라는 주장이었다. 그 뒤 중국은 실용주의를 채택하며 경제대국의 길로 들어섰다. 덩은 1985년 미국 타임지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마르크스 때문”이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내가 하는 일이 미워서 그가 내 귀를 멀게 하는 벌을 내린 거죠.” 흑묘백묘론에는 철저한 정경분리 원리가 담겨 있다. 경제 분야에는 자유화를 추진하지만 정치 부문에서는 사회주의식 통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요즘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 사망 이후 중국 정부가 벌이는 강력한 사회통제는 그동안 중국의 눈부신 발전상에 가려져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다른 반쪽’의 중국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동아닷컴 2005-01-27 18:35:00 http://news.donga.com/3//20050127/8154340/1
1975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 노보트니(Novotny, Antonín) 사망 노보트니 [Novotny, Antonín, 1904.12.10~1975.1.28]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 레트냐니 출생. 1921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1930∼1935년 프라하 지구당 서기를 지냈으며, 1941년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들어갔다. 전후(戰後)에 프라하 당지도부에 복귀, 1948년 2월 쿠데타 때 활약하였다. 1951년 당중앙위원회 서기 겸 정치국원, 1953년 부총리가 되었다. 그 해 K.고트발트의 사망 후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부터 대통령직을 겸임하였다.
- Joe Frazier and Muhammad Ali 1974 -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 블랙 무슬림(주로 미국의 흑인들로 구성된 이슬람교 교리 옹호 단체)에 가입하고 이슬람교도의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1967년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 군역선발법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되어 링에서 추방되고 타이틀을 박탈당했다. 그 유죄판결은 결국 1971년에 대법원에 의해 파기되었다. 한편 알리는 1970년 복싱을 다시 시작해서 2명의 선수와 도전자 결정전을 벌여 승리했으나, 1971년 3월 8일 헤비급 챔피언인 조 프레이저에게 15회 판정패 당했다. 그후 약 3년 동안 알리는 제리 쿼리, 잠시 컴백을 시도한 플로이드 패터슨, 조 버그너, 켄 노턴 등과 싸웠다. 마침내 알리는 1974년 1월 28일 프레이저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고 새로운 챔피언인 조지 포먼과 싸우게 되었다. 1974년 10월 30일 포먼을 8회에 KO시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960 - 미국의 민속학자, 작가 허스턴(Hurston, Zora Neale) 사망 허스턴 [Hurston, Zora Neale, 1903.1.7~1960.1.28] 미국의 흑인 민속학자, 작가. 남부 시골 흑인거주지역의 목소리로 흑인 문화를 찬양한 ' 할렘 문예부흥'에 기여했다. 그녀는 16세 때 순회극단에 가입하여, 할렘 문예부흥 기간중의 뉴욕 시 공연을 끝으로 이 극단을 나왔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프란츠 보아스에게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인종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했다. 그녀는 인류학자로서 아이티를 여행하면서 부두교를 연구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혈통에 관심이 기울어진 그녀는 궁극적으로 학계의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1931년 랭스턴 휴스와 함께 〈뮬 본:니그로의 삶에 대한 3막 희극 Mule Bone:A Comedy of Negro Life in Three Acts〉을 완성했다. 그녀는 2번째로 〈그들의 눈이 신을 보고 있었다 Their Eyes Were Watching God〉(1937)를 발표해 폭넓은 찬사와 논란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는 흑인의 열등성에 관한 신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또한 흑인을 이 신화의 희생자로 그리지도 않았는데, 이때문에 그녀는 흑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교향인 이턴빌을 연상케 하는 남부 시골 흑인 거주지역에 뿌리박고 있었고, 등장인물들을 풍부한 유산과 편협하고 제한된 사회활동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그녀는 랠프 엘리슨과 토니 모리슨 같은 동시대 흑인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자서전 〈Dust Tracks on a Road〉(1942)을 출판했으며, 후에 작품선집 〈I Love Myself When I Am Laughing and Then Again When I Am Looking Mean and Impressive〉(1979) 가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956 - 엘비스 프레슬리 TV 데뷔 [책갈피 속의 오늘]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TV 데뷔 “엘비스 이전엔 아무 것도 없었다.”(존 레넌)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사람들이 록을 알게 된 것은 그를 통해서였다. 그에게서 록의 열정과 도발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1954년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 “누구처럼 노래할 수 있느냐”고 묻자 엘비스는 이렇게 답했다. “내 노래는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방 두 칸의 판잣집에서 막노동꾼의 아들로 태어난 엘비스. 그의 열두 번째 생일 날 어머니가 선물한 기타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트럭을 몰던 엘비스가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취입한 노래 ‘마이 해피니스(My Happiness)’는 아메리칸 드림의 서곡(序曲)이 되었다. 전쟁을 모르고 자란 ‘베이비 붐’ 세대는 강하고 격렬한 비트에 매료됐다. 그의 독특한 스테이지 매너는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유연한 허리의 율동과 엉덩이춤은 충격이자 도발이었다. 그는 통기타를 들고 야수처럼 무대를 누볐다. 여기에 폭풍처럼 몰아치다 솜사탕처럼 녹아드는 그 감미로운 보컬이라니. 사실 그의 로맨틱한 노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당의정(糖衣錠)이기도 했다. 메릴린 먼로의 순진무구한 눈웃음이 그랬듯이, 미국의 패권주의는 지구촌의 절반을 자신의 독수리 날개 아래 두기 위해 대중문화의 상징을 필요로 했다.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한 1960년대 중반부터 그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영국의 ‘딱정벌레들’이 미 전역을 훑는 동안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판을 기웃거렸다. 대중은 그를 숭배했으나 그는 고독했다. 부(富)와 명성도 내면의 공허를 어쩌지 못했다. 그 빈자리는 육체적 비만(肥滿)과 약물로 채워졌다.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각성제를 먹었다. 그가 죽었을 때 언론은 이렇게 썼다. ‘왕은 죽었다(The King Is Dead).’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1-27 18:44:00 http://news.donga.com/3/all/20040127/8023488/1
[팝] [올드락 다이어리] 1월 28일 1956년, Elvis Presley, Dorsey Brothers의 TV 프로그램 'Stage Show'에 출연. 이것으로써 엘비스 프레슬리가 전국적인 TV망에 첫 데뷔. /박봉팔닷컴 2012-01-28 (토) 01:10 http://parkbongpal.com/sample/bbs/board.php?bo_table= B12&wr_id=37960&sca=%C6%CB&page=13
1955 - 프랑스의 정치가,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Nicolas) 출생 사르코지 [Sarkozy de Nagy-Bocsa, Nicolas Paul Stephane, 1955.1.28~ ] 프랑스의 정치가, 대통령. 1955년 1월 18일 헝가리 귀족으로 공산정권을 피해 프랑스로 이민 온 아버지와 그리스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프랑스의 엘리트 정치인들이 대부분 엘리트 양성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랑제콜을 졸업한 데 비해, 일반대학인 파리 10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하였다. 22세 때 파리 근교 뇌이 쉬르 센 시(市) 의원이 되었고, 28세 때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38세 때인 1993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 내각의 예산장관으로 기용되어 젊은 정치인으로 급성장하였다. 당시 대통령인 시라크 계파로 출발하였으나,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라크와 경쟁한 발라뒤르를 지지하면서 시라크 계파를 떠났다. 이후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시라크의 재선운동을 지원하였고, 시라크 정부에서 내무장관과 경제장관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1993년 뇌이 쉬르 센 시장으로 재직중, 관할 유아원에 침입한 인질범을 설득해 아이들을 구출하는 대담한 용기를 보였다. 2005년 내무장관 시절에는 강력한 치안 정책과 과감한 경제개혁을 주장하였고, 파리 소요사태 때 가난한 이주민과 이슬람 젊은이들을 비하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친미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강력한 추진력으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네이버
(우표가 없어 대신합니다.. *_@) 1945 - 소련의 군인, 저격수 로자 샤니나(Shanina, Roza) 전사 샤니나 [Shanina, Roza, 1924.4.3~1945.1.28] [역사 속의 인물] 특급 여성 저격수, 로자 샤니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은 여성 저격수 부대를 창설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몸이 더 유연하고 참을성 있으며 추위에 강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2천400여 명의 여성 저격수 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인물은 로자 샤니나였다. 샤니나는 1944년 4월 초부터 저격수로 나서 다음 해인 1945년 오늘, 적의 총탄에 맞아 숨질 때까지 9개월여 동안 적군 59명을 사살했다. 로자 샤니나는 1924년 소련의 아르한겔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유명한 여성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딸에게 붙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중고교 과정을 다니던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대에 입대한 오빠가 전사하자 군인이 되기로 했다. 군사 훈련에서 뛰어난 사격술을 보인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독일군을 밀어붙이자 저격수 소대의 소대장이 되어 공격 선봉에 나섰다. 그녀가 겨눈 총에 독일군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한 번에 두 명의 적을 쏴 죽이는가 하면 하루에 5명의 적을 없애기도 했다. 그녀는 ‘영웅’ 칭호를 받고 소련 신문에 나 소련군과 국민의 사기를 올렸다. 원래 밝고 수다스러웠지만, 전쟁터에서는 냉정하고 침착했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꾸었으나 2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김지석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4.01.28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225&yy=2014
1939 - 아일랜드의 시인, 극작가 예이츠(Yeats, William Butler) 사망 예이츠 [Yeats, William Butler, 1865.6.13~1939.1.28] 오늘의 역사 (1월 28일)[1939년]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 사망 아일랜드가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1939년 1월 28일 남프랑스의 휴양지 리비에라에서 74세로 숨졌다. 1865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20세 때부터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전설적인 영웅들을 등장시켜 켈트족의 민족정서를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시로 표현하며 19세기 말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 20세기 들어서는 사실적 경향의 시들을 주로 쓰다가 말년에는 선(禪)불교의 공(空)사상에 깊이 빠져 이와 관련된 시들을 많이 남겼다. 아일랜드 민족운동에도 참여해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된 1922년부터는 원로원 의원으로 6년간 활동했다. 예이츠의 삶과 시에는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예이츠가 일생을 걸고 운명처럼 사랑했던 여인, 모드 곤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됐다’고 고백할 만큼 그녀는 아름다웠고 독립운동가로서도 신념에 찬 여성이었다. 사랑은 집착으로, 다시 숭배로 커져갔지만 그럴수록 예이츠의 고뇌도 쌓여갔다. 그녀가 예이츠의 청혼을 뿌리치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 남자가 1916년 부활절 봉기때 처형당하자 또 청혼을 했고, 다시 거절당하자 이듬해 다른 여자와 결혼하며 그녀를 기억속에서 접었다. 훗날 예이츠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면 자신은 그저 평범한 시인에 그쳤을 것이라며 당시의 상실감을 고백했다. 19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조선닷컴 2017-01-28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611_0010
1922 - 미국의 생화학자 홀리(Holley, Robert William) 출생 홀리 [Holley, Robert William, 1922.1.28~1993.2.11] 미국의 생화학자. 일리노이대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코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48년 동 대학 조교수, 이어서 유기화학 교수를 거쳐 1964∼1969년에는 화학 교수로 있었다. 1965년 향류분배법(向流分配法)에 의해 분리정제(分離精製)된 알라닌(아미노산의 일종)을 사용하여 tRNA의 염기배열의 1차구조를 밝힘으로써 천연핵산분자(天然核酸分子) 구조를 알아냄과 동시에 유전정보(遺傳情報)의 해독(解讀)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 업적으로 H.G.코라나, M.W.니런버그와 공동으로 196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naver
- 'Convergence'
폴록(폴락) [Pollock, (Paul) Jackson, 1912.1.28~1956.8.11] [책갈피 속의 오늘]1912년 美화가 잭슨 폴록 출생 ‘드로잉할 줄 모르는 무식한 화가.’ 젊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그러나 그 평가는 불과 20년도 안 돼 180도 달라졌다.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록. 그는 그리지 않고 유명해진 화가로 불린다.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무대에서 공연하듯 작업을 했다. 이른바 ‘액션 페인팅’이다. 물감을 물에 타서 깡통에 붓고 막대기로 저은 후 허공에 휘휘 저어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지게 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선과 입자는 가늘었다가 굵어졌고 가까웠다 멀어졌다. 손을 빠르게 휘두르면 캔버스에 비가 내렸고 천천히 물감을 흘리면 강이 흘렀다. “눈을 크게 뜨면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얽힘이 내 눈앞에 전개됐다. 나는 내 그림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은 그저 그려질 뿐이다.” 캔버스는 그의 우주였고 그는 자유로운 창조자였다. 그의 우주는 무질서와 우연성이 얽히고설킨 공간이었다. 일반인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림이 제대로 놓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성과 질서에 익숙한 눈에 그의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한 여성이 “당신은 언제 그림이 완성되는지 알 수 있나요”라고 묻자 폴록은 “당신은 언제 당신의 섹스가 완성되는지 알 수 있소”라고 되물었다. 폴록은 1912년 1월 28일 미국 와이오밍 주에서 태어났다. 예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화가로 꼽힌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은 술과 정신질환으로 얼룩졌다. 미술 공부를 위해 뉴욕에 온 10대 후반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평생 알코올의존증의 딱지를 못 뗐다. 술은 자학의 수단이자 우울증에 대한 스스로의 처방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부끄럼을 많이 타고 거의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늘 싸우려고 했다.”(폴록의 한 지인) 44세의 나이에 요절한 것도 술 때문이었다. 1956년 8월 11일 취한 채 차를 몰다가 사고로 죽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밤하늘을 보며 했다는 말은 매우 시적(詩的)이면서 의미심장하다. “인생이 아름답고, 나무들이 아름다우며, 하늘이 아름답다. 왜 나는 고작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는가.”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동아닷컴 2006-01-28 03:02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128/8270196/1
Eiffel Tower History Construction Work on the foundations started on 28 January 1887. Those for the east and south legs were straightforward, each leg resting on four 2 m (6.6 ft) concrete slabs, one for each of the principal girders of each leg but the other two, being closer to the river Seine, were more complicated: each slab needed two piles installed by using compressed-air caissons 15 m (49 ft) long and 6 m (20 ft) in diameter driven to a depth of 22 m (72 ft) to support the concrete slabs, which were 6 m (20 ft) thick. Each of these slabs supported a block built of limestone each with an inclined top to bear a supporting shoe for the ironwork. Each shoe was anchored into the stonework by a pair of bolts 10 cm (4 in) in diameter and 7.5 m (25 ft) long. The foundations were complete by 30 June and the erection of the ironwork began. The very visible work on-site was complemented by the enormous amount of exacting preparatory work that was entailed: the drawing office produced 1,700 general drawings and 3,629 detailed drawings of the 18,038 different parts needed. The task of drawing the components was complicated by the complex angles involved in the design and the degree of precision required: the position of rivet holes was specified to within 0.1 mm (0.04 in) and angles worked out to one second of arc. The finished components, some already riveted together into sub-assemblies, arrived on horse-drawn carts from the factory in the nearby Parisian suburb of Levallois-Perret and were first bolted together, the bolts being replaced by rivets as construction progressed. No drilling or shaping was done on site: if any part did not fit it was sent back to the factory for alteration. In all there were 18,038 pieces joined by two and a half million rivets. ... http://en.wikipedia.org/wiki/Eiffel_Tower
루빈스타인 [Rubinstein, Arthur, 1887.1.28~1982.12.20] 폴란드 로지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고, 12세 때 베를린에서 요아힘이 지휘하는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데뷔하였다. 활발한 연주활동을 시작했던 1905년경부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억압된 표현 속에서 뉘앙스를 살리는 데 노력하였다. 자신있게 연주한 쇼팽곡뿐만 아니라 모든 곡에서 당시 유행한 안이한 템포 루바토에 따르지 않고, 균형 잡힌 구조 속에서 어택이나 음색에 의하여 선율(旋律)을 조성하였는데, 그의 연주방법은 지금도 인정받고 있다. 데뷔 후 독주자로 구미(歐美)에서 활약하고, 1937년 미국에 정주하여 1946년 시민권을 얻었다. 풍부한 음량과 변화가 많은 음색을 갖춘 20세기의 대표적 피아니스트로서, 드뷔시 ·라벨 ·프랑크 ·로보스 등의 작품에 뛰어난 해석을 보였다. /네이버
오귀스트 피카르 [Piccard, Auguste, 1884.1.28~1962.3.24] 장 피카르 [Piccard, Jean Felix, 1884.1.28~1963.1.28] [책갈피 속의 오늘]1884년 탐험가 피카르 형제 출생 오귀스트 피카르와 장 피카르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1884년 1월 28일 스위스 바젤대 화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둘은 어릴 때부터 과학과 모험에 심취했다. 가장 높은 곳을 정복한 그의 탐험욕은 지구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섰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90128/8688833/1
카리요 [Carrillo, Julian, 1875.1.28~1965.9.9] 산 루이스 포토시 출생. M.모랄레스에게 작곡을, P.만차노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뒤 1899년 라이프치히음악원에 입학 S.야다스존에게 사사하였다. 미분음음악(微分音音樂)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1895년 4분음에 의한 음악을 작곡하여 ‘Sonido 13’이라 불리는 미분음이론을 전개하고, 4분음 ·8분음 ·16분음 등을 기보하기 위하여 옥타브를 96으로 나누는 기보법을 시도하였다. 1905∼1914년에는 멕시코시티의 국립음악원 원장을 지냈다. /네이버
콜레트 [Colette, (Sidonie-Gabrielle), 1873.1.28~1954.8.3] [오늘속으로(1월28일)] 콜레트 1873년 1월28일 프랑스의 여성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부르고뉴의 생소뵈르앙퓌제에서 태어났다. 1954년 파리에서 몰(歿). 수필가 전혜린은 자신의 일기 한 대목에서 “콜레트처럼 살고 싶다”고 술회한 바 있거니와, 이 프랑스 작가는 자유와 명예와 사랑을 동시에 누리며 활달한 삶을 살았다. 콜레트가 첫 남편 윌리와 콜레트 윌리라는 공동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대지만, 그녀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은 자신의 이름만으로 출간된 40대 후반이후의 것들이다. 대표작으로는 ‘셰리’(1920), ‘청맥(靑麥)’(1923) ‘암코양이’(1933) 등이 꼽힌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2/01/27 19:35 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201/h2002012719354213510.htm
1873 - 카자흐의 지식인 아흐메트 바이투르시눌리(Baytursinuli, Akhmet) 출생 바이투르시눌리 [Baytursinuli, Akhmet, 1873.1.28~1937.12.8] Akhmet Baytursinuli (Kazakh: Ахмет Байтұрсынұлы; Russian: Ахмет Байтурсынов) (January 28, 1873 — December 8, 1937) was a Kazakh intellectual who worked in the fields of poetry, linguistics and education. Baytursinuli was born in what is today Kostanay Province, and was educated at the Orenburg Teachers' School. After graduating in 1895, Baitursynov held teaching positions in a number of cities in Kazakhstan, including Aktobe, Kostanay and Karkaralinsk. The same year as his graduation, Baytursinuli published his first article, "Kirgizskie primety i poslovitsy" ("Kazakh Omens and Proverbs") in a regional newspaper. While living in Ural city in 1905, he collaborated with other Kazakhs to form the Kazakh wing of the Constitutional Democrat Party. His involvement in politics probably led to his 1909 arrest and exile from the Steppe regions. After being exiled, he went to Orenburg. ............. http://en.wikipedia.org/wiki/Akhmet_Baytursinuli
1868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슈티프터(Stifter, Adalbert) 사망 슈티프터 [Stifter, Adalbert, 1805.10.23~1868.1.28]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오스트리아 베멘(현 체코슬로바키아)의 산간 도시 오버플란 출생. 삼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6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오스트리아의 크렘스뮌스터에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를 거쳐 빈대학 법과에 들어갔으나, 법률보다는 자연과학에 관심을 더 기울였다. 그가 작가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35세경이었는데, 그는 사실주의 시대에서 괴테의 전통을 계승한 독특한 이상주의를 전개하였으며, 20세기 초에 재평가를 받고부터 고전적 작가로서 더욱 중시되었다. 1848년 혁명 후 빈에서 린츠로 옮겨 장학관이 되었다. 그가 빈 시절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습작집 Studien》(6권, 1844∼1850)에 들어 있는 《교목의 숲》 《홀아비》 《브리기타》 등을 꼽을 수 있다. 장학관의 격무 속에서도 꾸준히 창작에 힘을 쏟았으며, 한때 3월혁명(1848)의 실패로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원인을 미숙한 인간성에서 찾았고, 교양이야말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과로하여 간장병으로 죽었는데, 일설에는 면도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도 있다. 단편집 《여러 가지 돌 Bunte Steine》(1853)과 괴테의 교양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장편 《늦여름 Der Nachsommer》(1857)은 독일 교양소설의 대표작이다. 이 밖에 역사소설 《비티코 Witiko》(1865∼1867)도 있다. /네이버
스톨베리 [Stahlberg, Kaarlo Juho, 1865.1.28~1952.9.22] 핀란드 초대 대통령(1919∼25). 수오무살미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뒤, 자유주의적인 청년핀인당(靑年 FIN人黨)에서 활동했다. 1901년 핀란드의 자치권을 빼앗으려는 러시아화정책이 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신징병제에 복종하지 않아 정부의 서기관 자리에서 해직되었다. 그러나 1904년 의회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핀란드가 독립하자, 국체문제(國體問題)에서는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1919년 C.G.E. 마네르헤임 장군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와 국민을 통일시켰고 공화정체의 정착에 진력하였다. 1920년 타르트조약을 체결하여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스웨덴이 분리·병합을 꾀하였던 아베난마섬의 보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동카렐리야의 귀속에 대해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강경한 반대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1925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정권교체에 의한 공화제촉진의 입장에서 사퇴하였다. 1930년 극우파에게 납치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중앙정계로 복귀한 후 1931년, 1937년에 재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말년에는 정계의 고문과 법률 관계의 일에 종사하였다. /야후백과
- Cuba, 1 Peso (1986, Banknote)
마르티 [Martí (Pérez), José (Julián), 1853.1.28~1895.5.19] 아바나 출생. 소년시절부터 쿠바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에스파냐로 추방당하였으나, 사라고사대학에서 법률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귀국과 추방이 반복되었고, 뉴욕으로 가서 《조국 La Patria》지(誌)를 간행, 쿠바의 독립과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우호 증진에 노력했다. 그 후에 정치에도 참여, 정당의 당수가 되었고, 1895년 4월 M.고메스 등과 무장독립군을 이끌고 쿠바에 상륙하였으나 에스파냐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문예평론 ·전기 ·설화집 등을 남겼으며, 특히 소박한 인간 감정이 넘치면서도 근대적 감각을 풍기는 시로 근대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이스마에리요 Issmaelillo》(1882) 등의 시집은 독립 후 아바나에서 발간된 《호세 마르티 전집 Obras completas de Jose Marti》(27권, 1963∼1965)에 수록되어 있다. /네이버
스탠리 [Stanley, Henry Morton, 1841.1.28~1904.5.10] 본명 John Rowland. 북웨일스의 벽촌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을 구빈원(救貧院)에서 보냈다. 1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리라는 상인의 양자가 되어 그 이름을 계승하고 시민권도 얻었다. 남북전쟁에 종군한 뒤, 1865년 신문 통신원이 되어 에티오피아 등지에 주재하였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뉴욕의 《헤럴드》지의 기자가 되었다. 1869년 《헤럴드》의 사장 J.G.베네트로부터 아프리카에서 소식이 끊긴 리빙스턴의 행방을 찾으라는 밀령을 받고 1871년 3월에 출발, 11월 탕가니카 호반에서 병에 걸린 리빙스턴과 극적으로 만났다. 1874년 리빙스턴 구출을 위해 재차 아프리카로 갔으나 리빙스턴의 죽음만을 확인한 후, 나일강의 원천 빅토리아호를 발견하고 콩고강 유역을 답사하였다. 1877∼1884년 벨기에 국왕의 후원을 얻어 콩고지방을 탐험, 콩고 자유국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1887∼1889년 중앙 아프리카 탐험 중, 현지 반란에 휘말려 있던 독일 탐험가 에민 파샤를 구출하는 등 아프리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만년에 영국 국적으로 복귀하였고, 1895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저서로는 《암흑대륙 횡단기》(2권, 1878) 《암흑의 아프리카》(1890) 등이 있다. /네이버
클류체프스키 [Klyuchevskii, Vasilii Osipovich, 1841.1.28~1911.5.25] 펜자주(州) 출생. 성직자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후 1879년부터 모교에서 솔로비요프의 뒤를 이어 러시아사(史)를 강의하였고 교수가 되었다. 학위논문은 〈고대 루시의 보야르 회의〉(1882)였다.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자이어서 농노제(農奴制) ·전제정치에 반대하였고 학문에 있어서는 실증주의에 철저하여 종래의 사관(史觀)에서 보는 정치사 편중을 배격하고 사회 ·경제사를 중시하였으며 《러시아 농노제의 기원》(1885) 등의 저서도 있다. 제정기(帝政期) 최대의 역사가인 그는 문하생으로 밀류코프, 포크로프스키 등을 배출하였다. 정치적 신념으로는 입헌민주제를 이상으로 하였고, 만년은 카데트(입헌민주당)에 속했다. 대학에서의 《러시아사 강의》(5권)는 명강의로 알려졌고, 독창적 견해가 풍부한 것이었다. 또 그의 《저작집(著作集)》(8권, 1856∼1859)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여러 논문은 현재에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네이버
빌맹 [Villemin, Jean Antoine, 1827.1.28~1892.10.6] 브뤼에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군의학교에서 공부했고, 1853년 군의관 자격을 얻었다. 그후 더 많은 연구를 하기 위해 파리에 있는 군의학교인 발드그라스로 갔다. 군의관 시절 그는 시골 출신의 건강한 젊은이들이 밀폐된 막사에서 사는 동안 종종 결핵에 걸리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비슷한 질병인, 말에서 나타나는 비저(鼻疽)가 접종에 의해 전파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결핵에 걸린 사람의 결핵물질을 토끼에 접종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3개월 뒤에 토끼로부터 결핵병변(結核病變)이 발견되었다. 그는 또한 소의 결핵물질을 접종한 토끼도 같은 병에 걸리는 것을 발견했다. 1867년에 제출된 그의 연구 결과는 처음에는 무시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결핵을 유전적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이물질이 조직에 유입되어 결절(結節) 같은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빌맹은 전염병의 이론을 전파하려고 매우 애를 썼으나, 다른 과학자들의 실험에 의해 재차 증명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결핵 환자의 혈액과 객담이 동물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주사(注射)에 의해 증명했다. /브리태니커
매켄지 [Mackenzie, Alexander, 1822.1.28~1892.4.17] 스코틀랜드 태생의 정치인으로, 캐나다 최초의 자유당 총리(1873~78)가 되었다. 그는 1842년 스코틀랜드에서 캐나다 서부(지금의 온타리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석공으로 일하다가 사니아에서 건축 청부업자로 성공했다. 개혁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852년 지역 자유당 신문인 〈램턴 쉴드 Lambton Shield〉의 편집장이 되었다.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글로브 The Globe〉의 편집장이자 개혁당의 지도자인 조지 브라운과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연방제 운동을 지지했다. 1867년 캐나다가 영연방 내의 자치령이 된 뒤, 램턴에 의하여 초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하원에 들어가 야당인 자유당을 이끌었다. 1872년 이중대표제가 폐지되자 온타리오 의회의 지방 출납관직을 포기했다. 매켄지는 1873년 존 맥도널드의 보수당 정권이 무너진 뒤 캐나다의 초대 자유당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당세가 약하여 당면한 경제적 난관을 해결할 수 없었다. 유권자들은 매켄지가 추진하는 미국과의 새로운 호혜주의 정책보다는 맥도널드의 보호주의 정책을 지지했고, 그리하여 1878년 자유당 정권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는 또한 태평양 철도를 완성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는 1880년 야당 총재직을 사임했으나 죽을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브리태니커
라 콩다민 [La Condamine, Charles Marie de, 1701.1.28∼1774.2.4] 파리 출생. 군인생활을 보냈지만 1730년 이후 수학·자연과학연구에 종사하여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적도 부근의 자오선 길이측정 조사대에 참가했으며, 1736년∼1744년까지 에콰도르의 키토 일대에서 조사를 하였다. 1744년 아마존강을 탐험하여 그 유역의 학문적 조사를 처음으로 하였고, 귀국 후 1745년에 《남아메리카내륙 조사여행기》를 펴냈다. /야후 백과
헤벨리우스 [Hevelius(Hewelke), Johannes, 1611.1.28~1687.1.28] 독일명 Johann Hewel(Hewelcke). 폴란드명 Jan Heweliusz. 단치히(폴란드의 그단스크) 출생.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634년 단치히로 돌아왔다. 1639년부터 천문학에 몰두하여, 1641년에는 자신의 집에 관측소를 차리고 천체관측에 전념하였다. 달의 표면을 상세히 관측하여 세계 최초로 《월면도(月面圖) Selenographia》(1647)를 발간하였다. 또한 혜성(彗星)의 운동도 세밀히 관측하고, 《혜성지 Cometographia》를 발간하였다. 혜성이 포물선궤도를 그리며 운동하는 천체임을 최초로 지적하였다. /네이버
드레이크 [Drake, Francis, 1545?~1596.1.28] 데번셔 출생. 1566년 친척인 플리머스의 선주(船主) J.호킨스의 남아메리카로 가는 노예 무역선을 타고 1568년에 귀항 도중 멕시코에서 에스파냐 함대에게 습격을 받아 거액의 이익금과,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빈 선박마저 잃었다. 여왕도 즉시 에스파냐 선박을 나포하여 보복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양국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는 부당한 공격을 당한 손해배상이란 명목으로 1570년부터 서인도 방면에 사사로운 약탈 원정을 감행하여 1572년 파나마의 귀금속 저장소를 습격, 많은 전리품(戰利品)을 가지고 이듬해 플리머스로 귀환, 시민을 열광시켰다. 1577년에는 해상무역을 파괴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약탈선단을 인솔하고 태평양으로 진출, 해안의 식민시(植民市)를 공략하는 가운데, 파나마 앞바다에서 보물선을 덮쳐 15만 파운드의 전리품을 빼앗고 인도양과 희망봉을 거쳐 1580년 11월에 돌아왔다. 그것은 마젤란에 이은 제2의 세계주항(世界周航)이었다. 여왕은 에스파냐의 펠리프 2세가 해적으로 단정한 드레이크 인도(引渡)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사작위를 서임(敍任)하여 그를 영웅으로 칭찬하는 국민감정에 동조하였다. 그 후에 플리머스 시장,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1587년에는 카디스에 집결한 에스파냐 함대를 선제공격하였고, 1588년에는 하워드경(卿) 아래서 영국함대 사령관으로서 무적함대를 맞아 칼레 앞바다의 화선(火船) 공격으로 적을 혼란에 몰아 넣어 승리로 이끌었다. 전후, 플리머스의 발전에 힘썼고, 1595년에는 호킨스와 더불어 서인도 방면에 원정하였으나 열병(熱病)에 걸려, 이듬해 1월 28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넬슨과 더블어 영국 최고의 바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네이버
1547 -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 즉위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는 튜더 왕가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이다(재위 1547년 1월 28일 - 1553년 7월 6일). 헨리 8세와 그의 제2계비인 제인 시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에드워드 6세부터 메리 1세까지의 10여년간은 역사가들로부터 영국 역사상 가장 황폐했던 기간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에는 예전 통일법 제정과 영문 성공회 기도서 발표(1549년) 등에 의해, 성공회의 탈 로마 가톨릭화가 진행되었다. 훗날 마크 트웨인의 작품 《왕자의 거지》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다. 생애 /위키백과
1547 -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Henry VIII) 사망 헨리 8세 [Henry VIII, 1491.6.28~1547.1.28] 잉글랜드의 왕(재위 1509∼1547). 튜더왕조의 헨리 7세의 둘째아들. 형이 요절하자 아버지의 뒤를 계승하였으며, 청년시절은 르네상스 군주로 알려졌다. 형의 미망인인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527년경부터 궁녀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로마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가톨릭 교회와 결별할 것을 꾀하여, 1534년 수장령(首長令)으로 영국 국교회(國敎會)를 설립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 1536, 1539년에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소령(所領)을 몰수하였다. 종교정책 이외에도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지배와 방비를 강화하고,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몇 차례나 대륙에 출병하였다. 여섯 왕비 중 두 왕비와 울지, T.크롬웰, T.모어 등의 공신(功臣)을 처형하는 등 잔학한 점도 있었으나, 그 통치는 국민의 이익을 크게 배반하지 않았으며, 부왕이 쌓은 절대왕정을 더욱 강화하였다. /네이버
1457 - 잉글랜드의 왕 헨리 7세(Henry VII) 출생 헨리 7세 [Henry VII, 1457.1.28~1509.4.21] 리치먼드 백작의 아들로, 헨리 6세가 죽자 모계(母系)를 통하여 랭커스터왕가의 가장으로 인정되었다. 한때 프랑스로 피했다가,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하여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패사(敗死)시켜, 장미전쟁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튜더왕조의 개조로서 즉위하였다. 치세 중에는 오랜 내란으로 혼란한 국내질서를 바로잡는 데 힘쓰고, 요크왕가의 음모를 진압하였으며, 봉건가신단(封建家臣團)을 해산시켜 귀족세력을 약화시켰다. 요크왕가의 귀족 소유 영토를 몰수함으로써 왕령지(王領地)를 증대시켜 재정을 튼튼히 하였으며, 또한 성실청재판소(星室廳裁判所)를 강화하여 질서유지를 담당하게 하는 등 왕권을 신장시켜 영국의 절대왕정의 기초를 굳혔다. /네이버
샤를마뉴 [Charlemagne, 742.4.2~814.1.28] 오늘의 역사 (1월 28일)[814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사망 프랑크 왕국의 군주 샤를마뉴 대제가 814년 1월 28일 사망했다. 부왕 피핀이 죽자 동생 카를만과 왕국을 공동통치했으나 동생도 771년 죽자 그때부터 혼자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작센족을 정복하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도 왕국을 병탄했으며, 에스파냐 국경에 변경령을 설치해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사라센 위협을 제거했다. 또한 바이에른족을 토벌해 바이에른과 케른텐을 병합했고, 아바르족과 벤드족을을 정복하는 등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완수했다. 이같은 통일을 기초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통치했기 때문에 3국에서는 샤를마뉴를 각각 자신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라틴어로 카롤루스 대제로 불리는 샤를마뉴는 독일어로 카를 대제, 이탈리아어로 카를로 대제로 알려져 있다. 샤를마뉴는 샤를 대제(위대한 샤를)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샤를마뉴는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기반으로 로마 교황권과 결탁,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며 서유럽의 종교적 통일까지 이룩했다. 그 결과 800년에는 교황 레오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것은 서유럽이 동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한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며 서유럽을 종교적으로 통일한 샤를마뉴는 기독교와 로마문화 그리고 게르만 민족정신을 세 기둥으로 삼아 서유럽 문화를 개화시키는 토대를 놓았다. /조선닷컴 2017-01-28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403_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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