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꽃
오계자
세월이 흐를수록 계절의 꼬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음은, 우리 인간이 하늘과
땅을 너무 휘정거려 놓았기 때문이니 계절을 탓 할 수는 없다.
올 봄에는 유난히 겨울꼬리가 길어, 우리 별당아씨 기다리는 내 설렘은
창문을 몸살 나게 했다. 뒤곁에는 덜 빠져나간 겨울꼬리가 남아 있는데, 과수들은 꽃
잎을 열었다. 살구꽃 앵두꽃이 울안에서 한껏 멋을 내면, 담 밖으로 쫓겨난 복사꽃은
언죽번죽 울안을 넘보고 있다.
옛날, 남학생들의 휘파람 소리에 괜스레 가슴 콩닥거리고 은근히 좋으면서도 아닌
척 언구럭을 떨던 여고시절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먼저 핀 꽃 동무들이 이울기 시작하면, 배꽃들은 마치 큰 파도 끄트머리에 피는 하
얀 물꽃처럼 오보록하게 솟아나고, 모과나무에는 연두 빛 여린 이파리들이 꽃봉오리
를 보호하며 주변을 살핀다. 귀한 아씨 해코지 할 추위도, 영등 할머니 바람도, 모든
꽃샘 무리들이 멀리 떠난 음력 삼월의 허리춤에서 하얀 배꽃비가 내리면, 서둘지 않고
안온하게 나옵시는 모과 꽃.
피부색 또한 서민과는 달리 모자라는 영양이 없는 듯 윤기 있는 발그레한 살결에 고
급 융단처럼 폭신한 느낌을 주는 온아한 모습이다. 화왕이라는 모란처럼 크지도 야하
지도 않으며, 작지만 경박하지 않고, 곱지만 화려하지 않아서 나는 조선의 사대부 집
별당아씨라고 부른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연연하지 않는 꽃일수록 열매는 값지다 했는데, 볼수록 사람의
혼을 앗아가는 미색은 열매의 몫까지 다 차지했나 싶다. 그 대가로 자신의 향기를 모
- 88 -
과에게 주었을까. 아무리 맡아도 이파리 냄새뿐 아씨는 향기를 주지 않는다. 향기가
없을 리 없다는 생각에 잎과 꽃을 분리해서 가져와 책상 위에 두고, 내 후각도 잠시
쉬게 한 후에 맡아보니 그제야 은은한 아씨의 향기가 이파리의 진한 냄새에 묻혔음을
알았다. 아마 벌 나비를 부를 수 있는 만큼은 향기가 필요했으리라. 방에 가지고 온
꽃에서 가달박처럼 생긴 오목한 꽃잎 다섯 장이 백지 위에 오소소 떨어진다. 꽃받침에
남긴 앙증맞은 알을 보면서 떨어진 꽃잎조차 곱고 귀 태 나는 아씨가 마당쇠 같은 모
과를 낳는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 모과 꽃만큼이나 예쁜 우리 며느리도 마당
쇠 같은 손자를 선물하려나? 이런 상상으로 혼자 웃었다. 하기야 모과 같은 내가, 세
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과 딸을 얻었고, 건강하고 반듯하게 성장해서 짝
을 데려와, 지금은 별당 아씨 못지않은 자식이 넷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해야 할 홍
복(洪福)인가.
행복이 따로 있나, 먹을 식량 있고 편하게 잠 잘 수 있는 집이 있고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다 있으니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떴으니 내게는 늘그막에 남다른 복을 누리고 있다.
내방 창문에서 겨우 2m정도 떨어져 있는 나무에서 해마다 모과를 따면서도 그 꽃의
아름다움을 지난해 처음 알았으니 그동안 얼마나 욕망에 짓 눌려 눈이 멀었던가. 한
때는 감히 道家에 나오는 태롯카드(tarot card 牧牛圖)처럼 자신의 본래 면목을 찾아
보고 싶어 했었다. 자신을 탐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十牛圖의 열 번째 그림처럼 자신
을 찾고 깨달음의 행복에 취하고 싶어서가 아닐까하고.
이제는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찾는 일임을 깨닫
고 믿게 되었다.
겨우 모과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지만 그나마 가슴에 새로운 사랑이 피고
있기에 세상의 욕기(慾氣)를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장의 꽃잎이 시들어 또르르 말리면서, 마치 방금 도착한 파발 두루마리 같다.
아니 내년에 또 만나자는 이별의 송사가 아닌가. 나도 그때까지 내 온 몸 구석구석 세
포마다 스며든 사랑을 위해 살겠다는 답사를 쓴다.
언젠가 원고지 위에 흡족한 사랑의 열매를 낳았을 때, 그때는 이 한 몸 너의 두루마
리 속에 말려서 땅속에 묻혀도 행복하리라.
2005/ 20집
첫댓글 겨우 모과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지만 그나마 가슴에 새로운 사랑이 피고
있기에 세상의 욕기(慾氣)를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