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88년에 부르심을 받고 패러다임 변혁(paradigm shift)에 관한 비전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을 때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일반적인 나이로 서른여덟이 되는 해이고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군사독제 정부가 자신들에게 향한 거센 반감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유치시킨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거창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해서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에서 스포츠로 돌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던 때였습니다.
교회는 대형화로 치달아가고 강북에 있던 교회들은 강남으로 다투어 자리를 옮겨가는 데 모든 정신을 쏟아 붓고 있었고, 부흥사는 그런 교회의 요구에 맞추어 성도들을 선동 고무하는 야전의 선무관(宣撫官) 같았습니다. 사회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점을 이루고 있었고, 교회는 대형화의 정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7년간의 선교회를 섬기는 사역이 끝나고 주님이 저를 직접 불러내고 주신 사역이 ‘회개사역’이었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보여주신 우리의 모습은 위선으로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리세인의 위선인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실질을 무시하고 겉치레로 치달아가는 사회나 교회 모두가 바리세인의 위선을 닮아있었습니다. 사회는 군사정권이 제시하는 화려한 미래에 도취해갔고, 교회는 교회당을 새로 짓는 일에 올인해 갔습니다. 6~70년대의 가난을 벗어난 국민들은 개국 후 처음으로 맞게 되는 풍요에 들떠서 모두들 향락을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이른바 거품 경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회나 교회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누구도 이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서 제동을 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비전을 보았는데, 그는 자신이 죄로 가득한 추악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도했던 이스라엘이 그토록 철저하게 죄악으로 가득한 줄을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아시야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이 사건이 일어난 해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웃시야 왕이란 어떤 임금이었는지를 잠시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허물과 같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사울이 길갈에서 약속한 사무엘을 칠 일 동안 기다렸지만 해가 다 져가도록 오지 않자 스스로 번제를 드렸고 번제를 마치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고 이 일로 그는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웃시야 왕도 자신이 강성해지자 교만해져서 성전에서 분향하는 죄를 지어 문둥병이 들어 죽었습니다(대하 26:16~23).
이런 웃시야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처벌을 받던 그 해에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궁전 제사장으로 웃시야 왕과 직간접적으로 간여했을 아사야가 이 문제에 있어서 도의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책임이 없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그에 관해서 자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간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선지자 스가랴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가 강대하게 된 이유를 기이한(marvellous) 도움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15절). 하나님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도움을 받았지만 그는 말년을 어리석게 마감했습니다.
웃시야의 화려한 성공은 외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그의 이면에는 교만이 싹트고 있었고 그것이 분향이라고 하는 월권으로 나타났습니다. 7~80년대의 교회 부흥은 세속적인 경제 부흥과 맞물려 이상적인 성장으로 여겨졌지만 그 이면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개신교가 500년 역사가 흐른 오늘날에 와서는 개혁초기의 가톨릭교회 못지않게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다수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이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전혀 다른 구조를 세상에 내어놓아야 하는 필요가 된 것입니다.
패러다임 변혁이라고 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구조를 하나님은 새 부대로 우리들에게 주기 시작했는데, 그 비전을 받은 당시 저는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전은 저만 받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미국의 여러 사역자들도 받았음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이를 정리했습니다. 이것이 ‘오중사역’입니다. 그 핵심은 다섯 가지 직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깨는 것입니다. 새 부대는 기존의 낡은 부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므로 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회개운동이란 곧 패러다임 변혁을 의미하는 것인데, 고정된 사고체계를 바꾸는 일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과 큐티로 유명한 온누리 교회의 하 용조 목사가 여섯 차례의 암 수술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거의 완치가 되었지만 그 대신 신장이 상해서 이틀에 한 번 씩 투석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분의 육체적인 약함이 영적인 강함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오중사역에 관해서 긍정적인 강연을 하는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서 접하게 되었는데, 고통스런 질병이 그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정관념과 신념과 가치 체계를 바꾸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사야가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환상체험이었습니다. 바울이 바리세인의 틀을 벗어던진 것도 환상이라는 놀라운 영적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환상의 경험은 그 사람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정관념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게 되면 더욱 더 어려워집니다.
새 부대를 만들어내는 일은 낡은 부대의 입장에서 보면 틀을 깨는 모반과 같은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정부에 우호적이었지만 비전을 본 후에는 정부에 적대적이 되었고, 그 때부터 고난의 시간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려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외 없이 기존 세력에 대해서 적대적 위치에 놓였고,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낡은 부대와 새 부대는 절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새 부대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낡은 부대에 새 천을 대면 터져버려 부대를 못 쓰게 만들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새 부대는 낡은 부대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낡은 부대와의 연관성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낡은 부대는 낡은 부대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고, 그대로 남아있어야 하며, 새 부대는 새 부대로서의 역할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낡은 부대가 새 부대로 바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종교개혁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역사적 사실입니다. 낡은 부대인 가톨릭의 입장에서 새 부대는 교회를 분리시키는 자들로 간주됩니다. 그 중심인 말틴 루터는 교회 분리자로 정죄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가톨릭의 사제들은 루터의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교회를 깬 일에 대해서는 용서될 수 없는 범죄행위라고 말합니다. 낡은 부대의 관점에서 새 부대는 분리주의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안고 있었던 고통의 본질이었습니다.
주님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마 23:37, 눅 13:34)라고 탄식했습니다.
새 부대에 대해서 긍정적인 안목을 갖는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손실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겸손하게 새로 시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유대인들이 희년을 거부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으며, 희년을 무시한 것은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희년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려 새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웃시야가 버림을 받은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부유해졌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그 풍요로움 때문에 버림을 받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희년의 의식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그 풍요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희년과 십일조라는 제도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나눔입니다. 그것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낡은 부대가 될 수밖에 없으며 놀라운 도움을 받아 성공했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옭죄는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 항상 새 부대가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의 낡아지는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솔로몬이 받은 ‘지혜의 축복’(wisdom blessing), 웃시야가 받은 ‘놀라운 도움’(marvellous help)이 결국 그들에게는 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패러다임 변혁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 바뀌어 저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겸손했고, 부모에게 순종적이었습니다. 솔로몬 역시 하나님에게 일천 번제를 드렸을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천이라는 숫자의 영적 의미는 ‘온전함’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웃시야 역시 겸손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신실함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슬픈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국이 스펄전과 같은 신실한 지도자들이 있어서 회개를 이끌어냈고 그 혜택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유럽의 변방이며, 야만인이었던 그들이 16세기부터 받은 엄청난 도움(marvellous help)으로 강대국이 되었지만 지금 영국이 어떠합니까? 겨우 3%의 기독교인을 가진 일본이나 다름없는 불신자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70년대부터 받기 시작한 놀라운 도움(marvellous help)으로 지금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고, 25%의 경이로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겸손하여 새 부대가 되지 않으면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축복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일 수 있습니다. 나눔이 없으면 우리도 그렇게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신실한 믿음이 있었다고 해서 이 버림을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것은 결코 보장이 될 수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과거에 아무리 짠 맛을 가졌다고 해도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신실함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새 부대가 우리들에게 필요하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땅을 사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개발이 일어나 엄청난 차익을 얻었던 어떤 분이 그 이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차례 맞은 축복을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 액수가 무려 60억이 넘는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새 부대가 있기에 오늘까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새 부대는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을 불러들이는 통로입니다. 버리는 것은 결코 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고 새롭게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버림으로써 얻는 비밀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요 1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패러다임 변혁은 기존의 안일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돌아보아 그것이 자신을 옭죄는 덫이 되지 않았는지를 살피려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고인 물은 썩는 것이 자연의 이치며, 하나님이 정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원상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년의 정신이며, 가난한 자를 위해서 내어놓아야 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건강하게 하며,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원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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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아멘.제 안의 영이 통곡으로 부르짖게 하시던 주님이 이 아침 귀한 메시지를 주님의 종을 통해 한샘물 덩어리로 선물해 주셨습니다.
첫댓글"새 부대는 기존의 낡은 부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므로 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봉운 목사님 자신도 큰 충격을 받으셨군요..낡은 부대와 새 부대는 절충이 불가능하다는 것...새 부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낡은 부대의 입장에서 보면 틀을 깨는 모반처럼 보인다는 것...등등.. 실감할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첫댓글 "새 부대는 기존의 낡은 부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므로 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봉운 목사님 자신도 큰 충격을 받으셨군요..낡은 부대와 새 부대는 절충이 불가능하다는 것...새 부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낡은 부대의 입장에서 보면 틀을 깨는 모반처럼 보인다는 것...등등.. 실감할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사울왕이나 웃시아왕이나 소로몬 왕이나 다 한 결같이 처음은 영적인 탁월함이 있었으나 끝은 육체로 떨어진 경우죠 머.
우리 역시 인생의 끝에 육체로 떨어지지 않아야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