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타운의 금기(禁忌) '3 척'- '있는 척, 배운 척, 잘난 척'
엄상익(변호사) <노인 왕따> 이년이란 시간이 흐르니까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은밀한 속살이 보이는 것 같다. 어제 구십대의 노인 부부가 내게 하소연을 해 왔다. 팔십대쯤인 부인이 분노가 가득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원들이 실버타운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서 파크골프를 치고 돌아오는 게 중요한 일과예요. 어제 아침 셔틀버스에 탔는데 내가 모자를 가져오지 않았지 뭐에요. 그래서 다시 방으로 올라가 모자를 가지고 내려왔어요. 그런데 파크 골프를 같이 치는 모임의 회장이 우리 부부를 놔두고 그냥 가라고 버스기사에게 명령한 거에요.
남편이 그 버스에서 내려 혼자 멀건히 서 있더라구요. 얼마나 야속한지 몰라요. 우리가 파크 골프장으로 가려고 다시 카카오 택시를 불렀어요. 그랬더니 너무 가까운 거리라고 가지 않겠다는 거에요.” 아이들에게만 ‘왕따’가 있는 게 아니라 노인 사회에서도 그런 게 있는 것 같았다. 지난해 겨울 실버타운으로 와서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였다. 동해시에 있는 이마트로 가서 장을 보고 돌아올 때였다.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이마트 입구 유리창 안에서 도로에 정차할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버스가 오지 않아 기다리다가 버스에 오르게 됐다. 버스에 탄 한 영감이 내게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어떻게 합니까? 버스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아왔잖아요?” 나는 버스 도착시간에 정차 지점에 있었다. 다만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간 탓에 유리문 안에서 기다렸다. 버스기사는 도로에 내가 없는 걸 보고 다시 한 바퀴 돈 것 같았다. 인정 사정 없이 질책하는 말투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인들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 같다. 한번은 공동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에서 몇 명의 노인이 주고 받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그중 한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말이요, 대학 때 책을 봐도 전부 원서로 봤어. 교수도 놀랄 정도로 내가 영어를 잘했거든.” 그 노인은 노골적으로 자기 자랑이 심했다. 그 말을 듣는 노인들의 표정이 묘했다. 그 후부터 매일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젊은 시절 머리자랑을 하던 노인이 ‘왕따’가 되어 식당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아무도 그 노인을 상대해 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추레한 모습으로 혼자 쓸쓸하게 밥을 먹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실버타운에서 자랑질은 금기사항인 것 같다. 내가 처음 실버타운에 왔을 때였다. 먼저 온 팔십대 말의 노의사가 내게 “실버타운에 오면 있는 척, 배운 척,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충고를 했었다. 분노하며 내게 하소연을 한 그 노부부도 실버타운의 율법을 어겼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기억속에 떠오르는 광경이 있다. 한번은 그 노부부의 초청을 받아 그 집으로 차를 마시러 갔을 때였다. 텔레비전 화면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성악가가 바리톤으로 가곡을 부르고 있었다. 노인이 내게 그 성악가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저 유명한 사람을 모를 수가 있어요?”라고 했다.
약간 마음이 안 좋았다. 옆에 있던 부인이 “저 성악가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하고 한방 더 먹였다. 차를 마시러 갔다가 좌우에서 한방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 노부부는 자신들이 뱉어낸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실버타운의 다른 노인들에게도 그런 태도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일분도 기다려주지 않고 그들을 따돌리고 단체로 가버리는 다른 노인들의 태도도 지독하게 편협해 보였다. 실버타운은 반면교사로 매력있게 늙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노인이 되면 절대 자랑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의 지위나 명예, 돈은 무의미하다.
노인이 따지거나 싸우는 모습을 보면 아주 보기 흉하다. 입을 닫고 한 발 물러서 조용히 관조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노인이 너무 돈에 벌벌 떠는 모습도 그를 초라하게 만든다. 지갑을 열고 작은 돈이라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고독과 죽음을 보라빛 노을로 볼 게 아니라 당당한 있음으로 승화시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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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心(하심)
마음을 내려 놓는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광주(光州)에서 이름 석자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말'이라면 청산유수 (靑山流水)라 누구에게도 저본 적이 없는 할머니 였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말빨이 아주 센 할머니 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 며느리 역시 서울의 명문 대학교를 졸업한 그야말로 '똑소리' 나는 규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많은 사람들이 저 며느리는 이제 죽었다 라며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어머니가 조용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벼렸다고 합니다
며느리를 처음에 꽉 잡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이 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생으로 트집을 잡고 일부러 모욕(侮辱)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뜻밖에도 의연했고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며느리는 그 때마다 시어머니의 발밑으로 내려 갔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시어머니가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배워왔느냐고 생트집을 잡았지만
며느리는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 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
다소곳하게 머리를 조아리니 시어머니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 한 번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며 공연히 며느리에게 모욕(侮辱)을 줬습니다
그렇지만 며느리는 도리어 웃으며 공손(恭遜)하게 말했 습니다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 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
매사에 이런식이니 시어머니가 아무리 찔러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한 마디 하면 그저 시어머니 발밑으로 기어 들어가니 불안(不安)하고 피곤(疲困)한 것은 오히려 시어머니 쪽이었습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저쪽에서 내려가면 이쪽에서 불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내려가면 반대로 저쪽에서 불안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내려가는 사람이 결국은 이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먼저 올라가려고 하니까 서로 피곤하게 됩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그랬답니다
너에게 졌으니 집안 모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시어머니는 권위(權威)와 힘으로 며느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며느리가 겸손으로 내려가니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겸손에는 이길 수 없었던 것이지요
내려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죽기만큼이나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겸손보다 더 큰 덕목은 없습니다
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올라간 것입니다
아니 내려가는 것이 바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시간 이 지나면 부패(腐敗)하는 음식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醱酵)되는 음식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인간(人間)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발효되는 인간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썩지 않고 맛있게 발효되는 인간은 끊임없이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겸양(謙讓)과 비우기를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명심(銘心)할 일입니다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자신의 잣대를 아는 사람
부단히 비우고 내려 놓으면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끊임없이 비우고 내려 놓으면서 영혼(靈魂)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
이렇게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삶을 통달한 현자(賢者)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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