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박완호-
당신과 나 사이 저 바닥이 없었다면
우린 무얼 밟고 구름 너머로 날아갈까
나는 지금의 당신을 안고
예전의 당신과 사랑을 나누지
삼키기도 뱉기도 어려운
비곗덩어리 같은,
저 바닥이 아니라면 우리가
꿈꿀수록 더 깊어가는 절망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매달려서는
하나뿐인 生을 기꺼이,
재빠르게 탕진할 수 있었을까
당신은 항상 바닥의 나를,
나의 바닥을 바라보려 하지
당신이 나의 바닥인 줄 모르고
나를 자꾸 바닥으로 몰아세우지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닥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어떻게 서로를 받아들였을까
나의 바닥인 당신,
당신의 바닥인 나
-바닥 예찬*/박형준-
바닥에는 시계와 제국이 있다
바닥에는 이동하는 사막이 있다
바닥에는 은하수나 성운이 있다
바닥에는 아이들 그림이 있다
바닥에는 벌레들이 기어가다가
남겨놓은 흔적이 있다
땅바닥에 반쯤 처박힌 채
녹슬어가는 부풀은 못대가리 곁에서
죽은 잠자리의 날개를 파먹는
개미들의 행렬이 있다
소년 때는 십오도 각도로 하늘을 보며 걷거나
반대로 십오도 각도로 땅을 보며 걷는다
흠씬 누군가를 두들겨 패거나
흠씬 누군가로부터 두들겨 맞거나
둘 중 하나뿐
소년 때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소년 때는 하늘도 바닥
땅도 바닥
손도 바닥
하늘바닥 땅바닥 손바닥에
세상에 없는 것들만 올려놓거나 내려놓거나
때로는 움켜쥔다
성년이 되면 하늘은 사라지고
땅바닥 같은
손바닥만 남는다
그리고 바닥은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절망한 사람에겐 더 큰 바닥으로 나타난다
바닥은 바다
수천 미터 심연이 있다
*장 뒤뷔페 화집, 『우를루프 정원』, 94쪽(장 뒤뷔페의 말).
-바닥/강일규-
그는 아파트 외벽에서
시안의 원형 문자를 펼치는 페인트 숙련공이다
줄은 늘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고
바람은 몸의 중심을 좌우로 흔든다
두 발바닥을 벽에 밀착하고
완만한 곡선의 시선은 허공을 향한다
안료의 냄새가 안구를 자극할 때
도료의 색은 흐릿한 구름이다, 그때마다
수평으로 비행하는 새들이 옆으로 지나간다
바닥은 애써 외면하는 두려운 직선
주체할 수 없는 생명줄을 붙잡고
형형색색의 붓질로 민벽수행을 하며
발밑의 세상을 기웃거릴 것이다
꿈틀꿈틀 움직이던 물체가
소리 소문 없이 블랙홀에서 사라지듯
그가 아득한 소실점으로 지워진다
온몸에 전치 8주의 골절상을 입은 그가
305호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칭칭 붕대에 휘감겨 천장에 묶인 발이
허공에서 헛발질하고 있다
똠방똠방 링거줄을 타고 흘러내리는
진통제의 기운에 구름 속을 부유할 것이다
줄 없이 땅 위에 두 발을 내디딜 때
더는 추락할 수 없는 저 견고한 바닥
-바닥에 대하여/오성인-
할당된 몫을 비우고도 밥그릇
핥는 데 여념이 없는 개, 바닥 깊숙이
스민 밥맛 하나라도 놓칠세라
잔뜩 낮춘 몸
지금 그의 중심은 바닥이다
온몸의 감각을 한군데로 끌어모으는
나차웁고 견고한
힘
모든 존재들은 낮은 데서 발원한다
생이 맨 처음 눈뜨고
마지막 숨들이 눕는
계절이 첫발을 내디뎠다가
서서히 발을 거두어들이는
최초이며 최후인 최선이거나 최악인
더는 낮아질 일도 붕괴될 일도 없는
낮은 벽, 혹은
천장
낮춘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겪어 내는 일, 혼신을 다해
희로애락애오욕을 지탱해 내는 일
그러므로, 나는
낮을 것이다
개의 혀기 밥그릇 너머의 피땀까지
닦아 내듯, 이생과 그 너머의 생까지
두루 읽어 낼 일이다
기꺼이,
바닥을 무릅쓸 일이다
-비와 바닥/안국현-
비린내가 나고 검은 철골의 나무들
거리에
며칠 째 비,
비,
비 내린다
저녁은 생각보다 일찍 당도하고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더 잘 들린다
말을 잊어버리고 주민들은 외출을 하지 않는다
움직이던 것은 느려진다 바닥이 있는 한
나는 바닥
빗방울 하나가 전속력으로 닿으면
축축한 파편이 튀는 골목 귀퉁이에
널브러진 발걸음 소리를 질질 끌고 나온 적도 있다
바닥이 있는 한 습기는 환생하고
빗방울들이 그어진다 비의 칼날에
사방의 건물들이 무수히 잘리고
나는 그때 왜 비의 바닥이었을까 햇살이지 못하고
아직 정지한 빗방울을 본 적이 없고
빗방울의 심장을 만져본 적이 없고
그냥도 맞고 맞으면 축축했으니까
빗방울은 고개까지 숙이고
몸을 둥글게 말고 앉은 한 사내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유리창엔 물집들이 잡히고
낮은 조도 속에서 가위에 눌려 헤엄쳐가는 새들
뒤따라 흐린 결이 생겼다 사라진다
하루는 날씨를 어떻게 버티는 걸까
모든 격차로 며칠 째 비가 오면
마음 한 쪽이 썩지 않는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고요는
한 방울의 소리까지 붙들고 있으니까
바닥이 있는 한
-바닥/강경아-
바닥은 바닥에서 더 내려다 봐야한다
그 앞에선 누구나 무릎을 꿇게 만든다
고집 센 졸음들이 모여 사는 곳
낙오의 시간이 딱딱하게 굳어진 자리다
바짝 눌러 붙어 떨어지지 않는 저 악착들
누군가 씹다 버린 껌들도
여기저기 웅성웅성 꽃을 피웠다
마른버짐 같은 속살들이
으깨진 밥알처럼 뒹군다
더 이상 필 수 없는 꽃들로
하관(下官)을 장식하는 밤
자발머리없는 만담(漫談)꾼들도
바닥의 깊이를 안다는 듯
혀를 차며 생선뼈를 챙긴다
바닥은 바닥이 알아보는 법
바닥과 바닥이 서로 기대고 맞대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맨발의 족적이 향불이 되어 타오른다
부뚜막 같은 온기가 들불처럼 퍼져 나간다
견고한 성체(聖體)가 되어 다시,
걸어 나오는 바닥
또 한 명을 보냈다
-바닥/이문재-
땅바닥은 없다.
땅바닥은
땅의 머리
땅의 정수리다.
그러니까 땅은 언제나
꼿꼿이 서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땅바닥 땅의 바닥은
하늘의 바닥 하늘바닥이다.
사실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의 그늘/유계자-
봄볕에 눈이 찔린
광어 도다리가 수족관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다
감나무가 그늘을 밀고 들어오자
생(生)을 맞대고 차마 한 눈씩만 바라보고 있다
저만치서
밀물 들어오는 소리가 자박자박 들리자
눈이 번쩍 떠지는 도다리
지느러미를 흔들어 다른 도다리를 깨워 돌아갈 바다를 말하려는 순간
거친 손 하나가
수족관에서 광어 한 마리를 낚아챈다
바다는 없고 바닥은 있어
바다와 바닥이 동시에 파닥거린다
바닥에 있는 것들은 함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순식간 썰어버린다
사람들에겐
잘근잘근 씹는 버릇이 있다
-바닥이 바닥에게/이제니-
바닥이 바닥에게 묻는 귀를 가졌다
바닥이 바닥에게 듣는 입을 가졌다
질문의 귀를 향해 돌멩이 굴러온다
몇 겹의 날들로부터 언덕이 달려온다
가없는 말들이 바닥으로 쏟아질 때
한 잎의 소용돌이 어김없이 내려앉고
가장 낮은 표면을 묻는 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주름과 주름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누구의 얼굴인가
오늘의 돌멩이가 오늘의 돌바닥에게
오늘의 그늘이 오늘의 꽃송이에게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싶은 바닥의 귀에게
내내 붙잡을 수 없었던 마음의 입을 들려준다 들려준다
뿌리를 내린 바닥에서 더 깊은 바닥에게로
그것은 여리고 어린 연두색 흔들림이었다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흘리는 말없는 눈물이었다고
그러니까 풀잎은 입 없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풀잎은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눈으로 기약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줄 더 나아간다
너는 한 줄 더 사라진다
입김이 피어오르는 자리로 무언가 다시 도착하고 있다
-바닥들/이도훈-
바닥들은 다양하다.
그 바닥에 씨를 뿌리면
흔들리는 바람을 볼 수 있고
봄의 끝, 여름의 끝을 볼 수 있다.
바닥 하나를 오래 갖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낮은 곳으로
물줄기 하나가 흘러갈 것이고
무거운 것들의 쉼터가 된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라면
바닥이 타는 냄새를 맡게 될 것이고
그 바닥 위에서 물이 끓고
바닥을 먹고 바람에 눕고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이다
끝끝내 그 바닥을 지키려 한 사람들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몇 평 바닥을 장만하려는 사람들
집을 짓고 가족을 앉히려는
소박과 겸손한 처지들의 진원지인
바닥들,
흙 한 줌 움켜쥐고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새어 나오는 흙을 보면서
아빠보다 잘살 거라는 점괘
갈라진 바닥을 밤새 또
끌어앉고 잤던 바닥의 어느 날.
-바깥과 바닥/임동윤-
물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믿고 있다, 물밑에는
기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흐린 바닥과
조금도 아름답지 않은 우리가 버린 오물밖에는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둥둥 뜨는 입술과
이룰 수 없는 꿈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밑에는
가끔 우리가 버린 찌꺼기를 주워 먹는
물고기와 물고기의 유영 속에서 풀들이 흔들리듯
우리 허울뿐인 사랑도 믿음도
흔들리는 그만큼 늘 흔들린다, 물밑에는
그대가 내가 찾아 헤맨
아름다운 꽃밭은 없다, 물밑에는
시든 풀과 껍질들과 버려진 것들이 몸을 포갠다
보이지 않는 것을 꿈꾸는 게 뭐 대순가
물밑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보이지 않는 진실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바닥에서/한춘화-
철벅대며 잠에 감기는 악몽을
뿌리치며 밤이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산다는 것은 깨어난다는 명제가 붙는다
언제부터인가 신은 깨지 않아
생의 시간에서
도움의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가파른 구직에 계단을 한 발자국씩
옮길 때 고용센터 여직원의 권태로운
입술에 걸린 이름이 낯설다
남의 일인 듯 창밖 풍경인 듯 앉아있다
두세 번 호명되고 나서야
느린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다가서서
내민 서류는 허기졌다
편의점 알바도 청소 자리도
병이 핥고 간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올라가기 힘든 높은 자리다
조급하게 시간이 갈수록
사막은 끝없이 모래바람이 일었다
등에는 혹이 자라고
점점 땅을 보는 침묵의 눈빛이 늘어났다
노모는 기억에 얽힌 매듭을 푸느라
꽃에 물주는 것을 잊었고
아이들은 순대가 든 검은 비닐봉지에 얼굴을 묻었다
풍화작용은 가난과 짝을 이루고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검은 길고양이가 어둠을 배경으로
제 몸 숨기고 먹이 찾아
밤새도록 배회하는 밤
달의 자식들이 흘러들어 군데군데
곰팡이가 드러난 방
혹이 다 자란 낙타가 된 나는
무릎을 꿇고 오래오래
세상에서 가장 긴 눈썹 위에 모래를 얹고,
전장에 나가는 사람같이
연대를 이어가는 일에 몰두했다
-너와 바닥/조말선-
종이를 구기고 종이를 구겨서 파지를 던지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종이 같아
손바닥을 쓰다듬어도 느끼지 않는 종이연습을 하는 밤
뜨거운 갈증만이 차가운 피부를 증식하는 선인장이
될 수 있을까
상추는 피부가 잎이고 피부가 육체고 피부가 꽃이래,
그런 잎만 되는 상추가 될 수 있을까
엄마가 될 때까지 늙을 수 있을까
흰 종이도 검고 검은 종이도 검구나
너는 이런 말을 하는 노인은 되지 말자 했지
피부에 닿지 않으면 모르는 서로를 가질 수 있을까
피부로 느낄 수 없으면 그게 목걸이니, 토닥거리는 자
매를 가질 수 있을까
너는 매우 많은 바닥을 가진 것 같아
그 중의 하나에서 당근이 자라는 들판이 될 수 있을까
바닥을 구기고 바닥을 구기며 더 얼굴을 숙이면 원하
는 것이 바닥 같아
그런 바닥이 될 때까지 바닥을 구길 수 있을까
-바닥이 없는 강/전순영-
여름날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가던 뇌우가 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는 그물망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하늘아래 하나뿐인 강바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가득 매운 빨간 꽃씨를 심으려고
실낱같은 길이 끊어졌다 이어지고 궤도를 돌며 흘러갔다
생의 매듭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가는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그녀에게 혼을 바쳤다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고 날아가
내 생이 끝나는 날 까지 당신을 바라볼 겁니다
그는 그녀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내 유일한 나라고
그가 생의 진창을 떠돌아다니는 것도 그녀를 바라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어요
그녀가 거처를 옮겨가면 그도 뒤를 따라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나의 숨이라고 전 유물을 넘겨주었다
참사랑은 혁명이 아닐까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 앞에는 찬란한 깃발이 하늘 높이 펄럭였다
그가 품었던 꽃씨는 피우지 못한 피멍울로 맺혀
신의 입맞춤이 차가운 대리석 이마에서 불타고 있다
그대 침향을 나에게도 물들여 주오 그대 영혼의 빛을 내 영혼에도
비춰주기를...
다 바치고 눈을 감으며 묻는다
그대는 강바닥에 닿아 보았는가?
-바닥/신미균-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넘어졌다
맨 바닥이
눈앞에 쫘악 펼쳐진다
채송화도 민들레도
자전거도 유모차도
돌담도 우물도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쳤으니
튕겨 올라갈 수 있을지
일어날 일이 아득하기만 한데
바닥은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알고 보니
이 바닥이 끝이 아니고
바닥 밑에 바닥 밑에
지하로 끝도 없는 바닥들이 있었다
이 정도 넘어진 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빨리 툭툭 털고
일어나야겠다
-바닥들/정지윤-
지하 계단
걸레를 든 손
바닥이 가만히
발걸음을 새겨듣는다
엎드린 채
바닥이 바닥을 끌어안는다
무릎을 구부릴 때마다
서로 숨을 받아낸다
정이 드는지
한 몸이 되어버린 바닥
바닥을 닦는 손등 위로
전동차가 덜컹거리며 스쳐 간다
바닥은 쉽사리 바닥을 놓아주지 않고
바닥엔 올라가는 계단은 없다
-나는 바닥부터 먼저 시작했다/김지율-
여전히 한쪽에서는 돌이 날아오고
한쪽에서는 긴 싸움이 이어졌다
사거리에는 높은 십자가가 있고
우리의 규칙이 누군가의 목적으로 바뀔 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밤들을 시행착오라 해도
불길 뒤에서 헌옷 수거함까지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과
벽제 화장터로 가는 길에서
어떤 시간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이미 지나온 곳에서
문득 그 바다가 다시 보고 싶었다
벽이 시작되는 어딘가에서
모두가 끝났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다만 부족한 명분과 바깥의 기분
누군가를 마중 나가던 밤하늘의 별은 아름다웠고
더 크고 둥근 사과를 기적이라 했지만
나에게 던져진 필살의 쾌도는 소리 없이 명중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또 누군가의 등에 꽂히겠지만
나는 문득 그 바다가 다시 보고 싶었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