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동안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둘러 본 곳은 용아 박용철 생가 - (요기동 조산고분) - 명화동 장고분 - 월봉서원 - 신창동 유적지 - 월계동 장고분 - 국립광주박물관 - 전(傳)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 - 지산동 오층석탑 - 양림동(최승효 가옥 - 한희원미술관 - 이장우 가옥 - 조아라기념관 - 선교기념비 - 오방 최흥종기념관 - 유진벨기념관 - 윌슨 선교사사택 - 호랑가시나무 - 허철선 선교사사택 - 에비슨기념관 - 정률성 생가 - 정률성 흉상) - 환벽당 - 식영정 - 취가정 - 소쇄원 - (가사문학관) - 증심사 - 의재미술관 등 입니다.
답사후기를 소개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 나두야 간다
시인 용아 박용철은 지금의 광주 광산구 소촌동 태생이다. 소촌동은 솔머리라 부르는 박씨 집성촌 마을이다. 용아의 집안은 부유했다. 고장의 대표적인 지주였던 용아의 부친 박하준은 광주농공은행 이사로 정낙교, 현기붕과 함께 참여했다.
조선시대 학자 눌재 박상(1474~1530)이 용아 집안이다. 조선 중기 문인으로 호남 선비를 대표하는 청백리다.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송순, 정철, 임억령보다 앞선다. 충주 박씨는 기씨, 고씨와 함께 광주를 대표하는 3성으로 꼽힌다.
용아는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배재학당으로 전학했다. 1920년 자퇴하고 귀향한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관동대지진으로 중단하고 귀국,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역시 중단했다.
그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일본에서 김영랑, 정지용 등과 교유하면서부터다. 김영랑은 용아의 감수성을 알아보고 문학을 적극 권유했고 이를 계기로 용아는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 10권을 간행했다. 김영랑 · 정지용ㆍ정인보 · 이하윤 등이 참여한 동인지 《시문학》은 1934년 3월 창간되어 통권 3호만에 종간했지만 시문학파를 결성한 역할을 했다. 용아가 마음껏 잡지를 낼 수있었던 배경에는 부친의 경제력이 있었다. 영랑의 첫 시집도 용아가 내주었다.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가이기도 한 노래 <나두야 간다>는 용아의 시 <떠나가는 배>로 만든 곡이다. 《시문학》 창간호에 실렸던 시로, 생가 앞에 새겨져 있다
▲ 시인 용아 박용철 생가에 있는 詩碑 <떠나가는 배>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졌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시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1931년 결성된 극예술연구회에도 참여했던 용아는 1938년 35세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사인은 폐결핵이었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 고봉 기대승과 계산풍류(溪山風流)
계산풍류란 경치 좋은 계곡에다 누정(樓亭)을 지어놓고 사대부들이 문(文)ㆍ사(史)ㆍ철(哲)을 논하고 즐기던 조선시대의 고급문화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호남에서 서원 창건은 대체적으로 16세기 후반쯤에 이루어지지만, 누각과 정자들은 그 보다 40~50년 앞서서 세워진다. 호남의 고급문화는 서원보다는 누정에서 먼저 출발하였다는 말이다.
호남 계산풍류의 현장은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시작되어 창평, 담양 일대로 이어지는 지역에 자리잡은 수많은 누정들이었다. 면앙정(俛仰亭), 소쇄원(瀟灑園), 독수정(獨守亭), 식영정(息影亭), 송강정(松江亭), 환벽당(環碧堂), 명옥헌(鳴玉軒), 풍암정(楓岩亭) 등을 포함하여 약 70여 개의 누정들이 창평, 담양 일대에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빈번히 일어났던 사화(士禍)를 목격한 선비들이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와 자연과 벗하면서 생겨난 누정이다. 당시에는 150여 개의 누정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 일대는 한국 누정문화의 본고장이자, 한국 문예부흥기의 중심지였다.
다산 연구가인 박석무씨는 ‘무등산의 풍류와 의혼(義魂)'이라는 글에서 그러한 계산풍류의 인맥을 잘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계산풍류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30대에 연산군의 학정을 만나 고향에 내려온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년)에서 처음 시작됐다.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0~1545년),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년)이 송흠에게서 학문과 문학을 배우면서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는 면앙정의 제자로서 소쇄원에 주로 머물렀다. 대사성을 지낸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년)은 양팽손의 아들로 계산풍류의 멤버였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년),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년)과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한다.
가장 한국적인 정취가 서린 정원이라고 평가받는 소쇄원을 세운 인물은 양산보(梁山甫, 1483~1536년)이다. 그는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기묘사화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내려와 소쇄원을 세웠다. 양산보는 면앙정 송순과는 인척간이고,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이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년),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년),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년),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년)과 같은 당대의 일급문사들이 계산풍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모여서 자연의 풍광을 예찬하고, 시를 짓고, 고금의 학문을 논하는가 하면, 나라를 걱정하였다. 여기에서 논의되었던 내용들이 후일 사림들의 상소를 통해서 조정에 반영된다.
16세기 호남의 탁월한 문사들의 모임인 계산풍류의 중심무대가 소쇄원이었다면, 그 좌장격은 바로 송순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고위관직을 역임하면서도 그 학문과 인품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호남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면앙정을 보고 다음의 가사를 남겼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밑에서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양산보, 김성원, 기대승, 박순 등이 가르침을 받으며 풍류를 익혔다. 송순이 회갑을 맞이해서 면앙정을 증축하고 제자들에게 '면앙정기(俛仰亭記)'를 부탁할 때, 다른 사람을 제쳐두고 고봉에게 부탁한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가 1553년이니까 고봉의 나이 불과 26세 때였다. 선배 문사들을 제치고 불과 26세의 고봉이 발탁되었다는 사실에서 고봉이 계산풍류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고봉은 젊은 시절 문사들과 어울리면서 풍류가 무엇인지 알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고봉을 평가할 때 그가 참여하였던 계산풍류의 정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계산풍류의 정신은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휩쓸리지 않고 풍류를 즐기면서 문(文)ㆍ사(史)ㆍ철(哲)을 연마하는 데 있다.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산풍류의 멤버들이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난을 당해서는 의병장으로 나가 싸웠다.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이 그렇다.
출처: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2005
■ 호남 의병
광주의 중심 상권인 충장로는 한말 의병대장 김덕령의 호(號)에서 가져온 도로 이름이다. 충장로뿐만 아니라 제봉로, 죽봉로도 의병장의 호를 딴 도로명이다. 광주에 왜 이렇게 의병장의 이름으로 명명된 도로가 많을까.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한말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선 의병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 광주에는 금남로ㆍ충장로ㆍ제봉로ㆍ구성로 등 역사 인물의 이름이나 호(號)에서 비롯된 길이 모두 30개에 이른다. ⓒ 『국립광주박물관 개관 3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한말의병에서 호남 의병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크다. 1908년의 경우 교전 횟수의 25퍼센트, 교전 의병수의 24.7퍼센트가 호남 의병이었다.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9년은 각각 47.2 와 60퍼센트에 이른다. 당시 광주 지역 의병부대들은 적게는 수십 명부터 크게는 200명 내외의 규모였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의병으로는 고광순, 기삼연, 김준ㆍ김율 형제, 전해산, 조경환, 박처인 4 형제, 김원국ㆍ김원범 형제, 양진여ㆍ양상기 부자, 오성술, 이기손, 김동수, 박용식 등이 있다.
의병 김준이 무신년(1908년) 2월 19일 아우 김율에게 보낸 詩
국가의 위태로움이 시급하거늘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쏟아 충성하는 것이 義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들을 구하려는 마음일 뿐 이름을 남기려는 것은 아니라네
싸운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 웃음 짓고 지하로 가리라
기삼연 의병장은 1908년 1월 광주천 광주교 백사장에서 재판도 없이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1909년 9월까지 약 2달 동안, 일제의 '남한의병대토벌작전'으로 광주에서 의병 200여 명이 전사했고 대한제국도 막을 내렸다. 호남 의병의 종말은 곧 대한제국의 종말이었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 남종화의 마지막 거목, 허백련
ⓒ 의재미술관
광주 동구 운림동에 있는 삼애원(三愛園)은 의재 허백련이 중년부터 그림을 그리고 농사도 짓던 곳이다. 농업학교를 운영할 때는 교사로, 그림을 그릴 때는 화실로, 녹차밭을 일굴 때는 농막으로 이용했다.
'남종화의 마지막 거목'으로 불리는 허백련은 1891년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로 유배 온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858~1936년)에게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다. 자라면서 남종화의 거두 미산 허형에게 시ㆍ서ㆍ화를 익혔다. 해배된 무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학업과 서화 공부를 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의재(毅齋)라는 호(號)도 무정이 내려준 것이다. 일본에서는 공부를 접고 서화에 매진했다.
ⓒ 의재미술관
1920년 귀국하여 1922년 처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서 <추경산수>로 1등 없는 2등에 뽑혔다. 의재의 본격적인 광주 생활은 1930년대 말부터다. 광주에서 미술연구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만들었다. 허백련을 중심으로 화가 36명이 참여한 서화교육 모임이었다. 의재는 그림과 글씨뿐만아니라 사회적 교류도 활발해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의재와 오방 최흥종의 인연도 춘설헌(春雪軒)에서 무르익었다. 두 사람은 1948년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삼애학원을 설립했다. '삼애(三愛)'는 하늘과 땅과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뜻한다. 차에 관심이 많았던 의재는 해방 후 일본인이 운영하던 차공장을 인수해 춘설차라는 상표로 녹차를 생산했다. 삼애학원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고 1년 과정에 20명씩 합숙을 원칙으로 운영했다. 운영자금은 차 재배와 의재의 그림으로 충당했고 의재가 죽던 해까지 30여 년간 243명의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다.
의재는 무등산에 단군 신전을 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경향신문(1969.11.19.)을 보면 오른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은 채로 작품활동을 이어갔는데, 죽기 전에 무등산에 단군 신전을 건립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도봉산 자락에서 두문불출하고 그린 산수화 39점을 무등산단군신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은상)에 내놓았고 1974년 12월 학운동 운림부락 뒷산에 본전, 수련관, 도서관, 합숙소 등을 정부 지원을 받아 준공했지만 아쉽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종화와 함께 차, 독서, 정신수양의 공간이었던 춘설헌(春雪軒)은 오방정(五放亭)을 헐고 세운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농촌지도지를 양성하며 살았던 의재가 믿었던 것은 흙이었다. 우리의 얼을 단군신화에서 찾고자 했던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올라선 뒤에도 그림을 팔아 농사를 배우려는 학생들을 뒷바라지 했고, 한쪽 눈을 실명하고도 그림을 그려 단군 신전을 짓고자 했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 산자여 따르라(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 2주기를 앞두고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만들면서 백기완의 詩를 가사로 완성한 것이다. 들불열사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 대학가 집회에서 불리며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5월마다 망월동과 도청 앞에서 다시 불리고 있다
시인 김준태는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발표했다. 109행에 달하는 시는 신군부의 검열을 거쳐 33 행만 실렸지만 전문이 비밀리에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졌다. 그 파장은 대단했다. 시인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전남매일신문도 금남로에 있었다.
삭제된 부분에는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라는 내용이 있다. 지명들은 모두 광주항쟁 시기에 시민과 학생들이 피를 흘렸던 곳이다.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나는 죽었어요'라는 행도 검열로 삭제되었다.
이 비운의 주인공은 시인의 학교 동료 아내였다. 학생들이 걱정되어 시내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뱃속에 아이를 간직한 채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녀는 망월묘지에 묻혀 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1981년 1월 24일까지 455일 동안 비상계엄으로 모든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신문ㆍ방송ㆍ통신 등의 눈과 입을 가리고 막았으니, 27일간 광주에서 벌어진 신군부의 '충정훈련'이라는 만행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온세력의 폭동’으로 보도되었다.
국내 기자들은 두 눈으로 보고도 신문에 단 한 줄의 진실도 보도할 수 없었다.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은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며 1980년 5월 20일자로 사직서를 쓰고 붓을 놓았다.
출처: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광주』, 김준, 2022
■ 전방후원형 고분은 일본 고유의 무덤이 아니다
광주 명화동과 월계동에는 장고분(長鼓墳)이 있다. 장고분은 무덤의 모양이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전방후원형 고분(前方後圓形古墳)이라고도 한다. 앞쪽은 네모나게 생기고 뒤쪽은 둥글게 생겼다는 뜻이다.
▲ 전방후원형 고분 모식도. 앞쪽은 네모나게 생기고 뒤쪽은 둥글게 생겼다. ⓒ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
▲ 광주 월계동 장고분
▲ 광주 명화동 장고분
우리나라에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14기 정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 전방후원분은 일본 열도 백제ㆍ가야ㆍ신라인 통합의 상징이다
도쿄대 교수 하니하라 가즈로(埴原和郞, 1927~2004)는 인구 시뮬레이션 분석을 통해서 고대 일본 열도에서 일본 원주민과 도래인(이주민)의 비율이 1: 9 내지는 2: 8 정도로 도래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추론하였다.
하니하라 가즈로는 이 당시 일본 열도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2% 정도였다는 것을 전제로 서기 700년 일본 원주민인 죠몬인(繩文人)과 도래인(渡來人)의 비율이 1 : 8.6로 당시 총 인구는 540만 명이므로 484만 명은 도래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서기 700년 일본 열도 인구 중에 열에 아홉은 한반도계 이주민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 논문을 발표한 하니하라 가즈로는 이 내용이 충격적이라고 했지만 고려대 최재석(崔在錫, 1926~2016) 교수는 하니하라 가즈로 연구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원주민이 3.8% 그리고 도래인의 비율이 96.2%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니하라 가즈로는 인구 증가율을 0.2%로 추정했으나 그가 인용한 McEvedy와 Jones(1978)의 연구에는 서기 1년에서 1000년까지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잉글랜드 웨일즈 지방의 0.107%를 제외하면 모두 0.1% 미만이며 전 세계 이 기간의 연평균 증가율은 0.044%로 나타나고 있다.
최재석 교수는 따라서 전 세계의 인구 증가율(0.1%)을 적용하여 서기 700년 일본 원주민과 도래인의 인구구성을 1 : 25 즉 3.8% 대 96.2%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96%가 도래인의 후손이라는 결과는 다른말로 표현하면 일본에는 일본인이 없다 라고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니하라 가즈로 연구에 따르면 일본 열도에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는 시기는 대략 4~5세기 무렵이다. 이 시기는 일본 열도에서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따라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묘제가 열도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는 것은 역시 이것이 일본 열도 고유의 묘제라기 보다는 이 당시에 열도의 주체가 토착민에서 도래인들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제도권 학자들은 무리하게 일본(倭)의 고유 양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전방후원분에서 나타나는 더 중요한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들 고분에서 나타나는 백제, 신라 계열 유물의 형태라든지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 형태 등은 기존의 종교와는 다른 새로운 내세관(來世觀)을 가진 집단의 이주를 시사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규슈 중부 구마모토현(熊本縣)에 있는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이다.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는 백제인의 일본 열도 진출을 명확히 보여주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 익산 입점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좌)와 고흥 길두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중앙) 그리고 일본의 '에다후나야마'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우). 백제와 왜에서의 출토품은 같은 사람, 또는 동일집단이 만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아도 백제인의 고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점이 남는다. 이 고분에서 단지 백제계 유물만 출토되는 것이 아니라 가야 계열로 볼 수 있는 유물도 출토된다는 점이다.
에다후나야마 고분의 가야 계열로 추정되는 금동관의 삼엽문(三葉文)은 신라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冢)의 환두대도(環頭大刀)를 비롯해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의 고대 신라, 가야 지역에서 자주 발굴이 되는 문양이다.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에서 왜 백제, 신라, 가야의 유물이 출토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설명해줄 역사적 근거는 있일까?
있다. 중국의 정사正史 25사史 중의 하나인 『북사北史』가 그것이다. 당唐나라 이연수가 643년부터 659년까지 편찬한 사서로서 386년부터 수隋나라가 멸망한 618년까지 233년 동안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북사』가 기존의 다른 중국 25사史와의 차이점은 『북사』에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에 관한 기록이 많다는 것이다. 기록이 많아진 이유는 무었일까? 수隋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다가 실패한 살수대첩(612년), 당唐태종이 안시성에서 패배한 사건(642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통해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기록된 양이 많아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북사北史 』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있는 왜倭에 관한 기록을 보자.
"新羅, 百濟, 皆以倭爲大國, 多珍物, 並敬仰之, 恒通使往來"
신라, 백제인이 함께 왜를 큰 나라로 만들었다. (왜를 큰 나라로 만든 신라, 백제인들은) 진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신라, 백제인들이) 같이 이 진기한 보물들을 숭배하였고 항상 이 사신이 왕래하였다.
왜(倭)를 대국으로 만든 신라, 백제인들이 함께 경앙(敬仰)한 것은 보물이 아니었다. 보물로 표현된 신체(神體)를 경앙한 것이고 이는 백제, 신라, 가야인들의 조상 숭배 사상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 계열의 칼, 거울, 방울 등의 유물이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되는 것은 아마도 고조선의 삼종신기(三種神器: 칼, 거울, 방울)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신라인과 백제인이 함께 보물을 경배했다는 문장인데 이것이 결국 백제 고분과 신라, 가야 계열 고분이 합쳐진 전방후원분의 본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전방후원형 고분은 백두산 서편이 기원이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요동 백두산 서편 통화(通化)지역에서 서기전 4000년 최초로 등장한 후 500년 후인 서기전 3500년 요서 대릉하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우하량(牛河梁) 2지점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후 문화적 잠복기를 거친 전방후원형 고분은 서기전 3세기 이후 고구려에서 다시 나타나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전파된다.
▲ 요동(遼東) 백두산 서쪽 적석단총군(積石壇塚群)의 중심지인 길림성 통화(通化). ⓒ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
고구려 적석총(積石塚)의 주요 분포 지역인 요동 백두산 서편 통화(通化) 일대에서 시기가 무려 서기전 4000년~서기전 3500년 무렵까지 소급되는 ‘3층의 원형제단(三環祭壇)ㆍ방대(方臺)’ 곧 전방후원 형태의 만발발자(萬發撥子) 적석단총이 발견된 것을 위시하여 백두산지구에서 무려 40여 기의 적석단총군이 발굴되었다.
▲ 서기전 4000년~서기전 3500년 요동 백두산 서편 통화(通化)지역 만발발자(萬發撥子) 3층의 원형제단(三環祭壇)과 방대(方臺). 전방후원형 3층 계단식 적석 무덤과 제단은 동북아 상고ㆍ고대 적석 단총의 주요 형태인 전방후원형 적석 단총의 시원적 형태이다. ⓒ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
이 적석단총제(積石壇塚制)는 서기전 3500년~서기전 3000년 무렵 요서 대릉하(大凌河)지역으로 전파되어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전방후원형 적석단총이 나타난다.
▲ 요동의 통화를 중심으로 한 백두산 서쪽 적석단총이 요서(遼西)의 대릉하(大凌河) 근처 우하량(牛河梁)의 홍산문화로 전파되었다. ⓒ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
▲ 서기전 3500년~서기전 3000년 홍산문화 우하량(牛河梁) 2지점 상층적석총 조기(早期)의 전방후원형 3층 계단식 적석 무덤과 제단. ⓒ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
적석단총제는 애초 요동 백두산 서편 지역에서 전방후원의 형태로 시작되어 요서 대릉하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원단(圓壇)ㆍ방총(方塚)으로 분기되었다.
이러한 적석단총제는 백두산 서편 및 한반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되 한반도 남부ㆍ일본열도 방면으로도 널리 전파되었다.
한반도 북부의 대표적인 사례로 1988년 발굴된 압록강변 자강도 초산군(楚山郡) 운평리(雲坪里) 4지구 M6호 무덤을 들 수 있다.
이외에 자성군(慈城郡) 송암리(松巖里) 1지구의 M33호, M88호, M106호를 비롯한 적지 않은 무덤들이 이러한 구조였다. 법동리(法洞里) 및 신풍동(新風洞) 2무덤떼 M8호와 M12호 등도 비슷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요동 백두산 서편이 기원이다. 이것이 한반도 남부ㆍ일본열도로 전파된 것이다. 따라서 전방후원형 고분은 일본 고유의 무덤이 아니다.
출처
1. 『백두산문명과 한민족의 형성』, 정경희, 2020
2. 『일본에서 찾은 가야 백제 신라 이야기』, 차태헌, 2010.
3.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914
4.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2aJsp1JFUcRn9dLHDFLCTCQZLAwu113vD4Sbqhpa8rvmhfh2XyBBiPmVvR5vab8vml&id=100006874561032&mibextid=Nif5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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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진정한 답사 후기~~ 멋져요~~
세밀하고 정확한 정보 .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자주 뵈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