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광란자의 웃음.
침묵이 흐른 뒤 광기 서린 웃음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흐흐흐흐...오형사님...만날 수 없습니다.
만나서는 안됩니다.”
“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 심정 이해하니까 만납시다.
일단 만나서 우리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요?”
”흐흐흐...나를 만나려 하지 마십시오.
모두 죽일 때까지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부탁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거야!
법에 호소해도 그놈들을 처벌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지?
4명이나 죽였으면 됐지 뭐가 부족해서
또 죽이겠다는 거지?
그러지 말고 만납시다.
지금이라도 자수하면 관대한
처벌을 받을 수 있어요!
충분히 정상 참작이 된다구요.
내가 약속할 테니까 만납시다!!“
”흐흐흐...그건 안됩니다.
그놈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아무한테도 그놈들을 넘길 수 없습니다.
당신도 이런 일을 당했다면...
내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알거요.
나는...죽일 겁니다.
모두....모두 죽일 겁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철컥하고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보같은 자식..“
오형사는 전율하면서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이제 최구는 공공연히 살해하겠다고
경찰에 선전포고해 왔다.
그의 어조로 봐서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인간을 뭐라고 해석해야 옳을까?
단순히 정신병자라고 단정해 버릴 수 있을까?
내가 자기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경찰 내부에서 정보가 흘러나간 것이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최구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혹시 그놈들이 나를 미행한 것이 아닐까?
오형사는 몸서리를 치면서 실내를 서성거렸다.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최구가 나를 미행했다고 해도 내 이름을
알아낸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을
그놈이 엿들은 것이 아닐까?
아니다.
현장에서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없었다.
부산을 떠날 때까지도 내 이름은 불린 적이 없다.
아니,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어디였더라.
아...그렇지...그 사람이구나!
서울에 올라오기 위해 공항 출구를 빠져 나올 때
공항경비대원이 내 이름을 부른 것 같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던가?
그 경비대원은 전에 같은 곳에서
얼마 동안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가깝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날은 유난이
반색을 하며 내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아이구...이거 오봉암씨 아니십니까?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바로 그때다!
침대에서 튕겨 일어 난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공항경비대를 불렀다.
집에도 돌아갈 수도 없는 최구는
이제 떠돌이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다리 밑에서 잠을 잔들 어떠랴.
남은 세 놈을 처리하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네 송이의 장미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조그만 책상 위에
아내의 사진과 함께 놓여 있었다.
조금 전 오형사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꽃병과 꽃을 사왔다.
꽃병은 집에 있는 것과 같은 흰색이었다.
“아내여...아내여...이제 이 장미꽃은 내 송이가 되었소.
아내여....사랑하는 아내여....
당신이 얼마나 외롭게 지내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소.
일곱 송이 장미꽃을 모두 피울 테니까...
외롭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오.
장미꽃을 모두 피우는 대로 당신에게 곧 달려가겠소!”
그는 벽에 기대앉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조그만 하숙방이었다.
신촌에 있는 Y여자대학 부근에
하숙을 정한 것은 어제 저녁 때였다.
하숙집 주인은 40대의 과부였다.
사업을 하고 있다고 이쪽을 소개하고
월 150만 원에 독방을 얻었다.
좀 비싼 편이지만 비싸게
받도록 유도한 것은 최구 쪽이었다.
비싼 손님은 여러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집에는 하숙방이 여덟 개나 되었다.
남학생도 몇 명 있는 것 같았지만
거의 여대생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하숙을 얻어 둔 것은 보다 안전을 위해서였다.
경찰이 전 숙박업소를 뒤지고 있을테니
호텔이나 여관에 투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경찰에 체포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체포되기 전에 먼저 나머지 세 놈을
처치해야 하기 때문에 경찰은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거울 앞에 다가앉아 자신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 본 다음
머리에 가발을 뒤집어 썼다.
약간 장발에 속하는 가발이었다.
거기에다 엷은 금테안경을 끼자
모습이 전혀 달라 보였다.
12시 조금 전에 준비를 완료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 곽문일이 자백한 내용대로
A라는 곳에 전화를 걸어 흥정을 해볼 생각이었다.
먼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할 필요가 있었다.
직통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조용한 곳이라면 좋을 것이다.
어디가 좋을까?
한 시간쯤 시내를 배회하다가
그는 명동에 있는 어느 고급 살롱으로 들어 갔다.
내부 장식이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비싼 밥과 술을 시켰다.
전화는 계산대 위에 한 대가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 또 한 대의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점심 식사를 조금 들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중전화 쪽으로 걸어갔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동전 하나를
집어 넣은 다음에 다이얼을 돌렸다.
한참 동안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고개를 갸우둥하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찰칵하고 신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여보세요?”
다급하게 불렀다.
“네, 말슴하세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고 졸리운 듯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기는 사꾸라...”
“아, 네 말씀하세요?”
갑자기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침을 꿀컥 삼켰다.
“갑자기 또 물건이 필요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네, 연락처를 말씀해 주십시오.”
“네..”
살롱 전화번호를 대준 다음
“남 사장을 찾아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전화가 철컥하고 끊겼다.
계산대로 가서 이번에는
여 종업원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남 사장을 찾는 전화가 오면 바꿔 주십시오.
중요한 전화니까 꼭 부탁합니다.”
팁을 주자 여 종업원은 사양하다가 받았다.
자리로 돌아와서 아주 느린 솜씨로
천천히 식사를 했다.
조금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억지로 씹어 넘겼다.
식사를 거의 끝냈을 때 여 종업원이 급히 다가왔다.
“전화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카운터로 급히 다가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남 사장이요?”
쉬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
“여기는 그리스도...”
“사꾸라...”
여 종업원이 듣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 듯 말했다.
“가져간 지 며칠도 안됐는데 또 필요합니까?”
“네, 갑자기 수요가 급증해서요.
특별히 부탁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음...얼마나...?”
“지난 번 정도면 되겠습니다.”
“돈은 준비됐나요?”
“네. 2억 5천을 가지고 왔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또...내일 오후 2시 정각에
D극장에 특실에서 만납시다.”
“거기서 어떤 방법으로 만날건가요?”
“모자를 하나 쓰고 있으시오...빨간색의 운동 모자를...”
“아~~~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아마 두목일 것이라 생각했다.
5월 17일. 부산발 서울행 16시 10분
KAL기 탑승객은 모두 215명이었다.
215명 중애서 최구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강력과 형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탑승객 명단을 하나하나 검사해 나갔다.
그러니까 그날 최구가 같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출구를 빠져나가면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오형사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밖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놀라운 추리력을 지닌 형사임에는 틀림없다.
승객 명단에는 최구라는 이름은 없었다.
승객 215명 중에서
우선 여자 승객들을 모두 추려냈다.
여자 43명을 빼자 172명이 남았다.
172명을 일일이 찾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최구가 그날 정말로 그 비행기에 탑승했다면
분명히 주민등록을 제시했을 것이다.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면
혹시 위조 증명을 휴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할 수 밖에는 없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소지를 찾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어린애라도 확인해야 한다.
지방에 주소지가 있는 사람은 지방경찰청에 의뢰했다.
최고의 속도로 확인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강력과에 버티고 앉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오후 1시 마침내 결정적인 전화가 걸려왔다.
시내에 나가있는 부하 형사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최일욱이란 자의 주소가 최구의 주소와 일치합니다.
”바로 그자야!“
”Y아파트에 와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주소를 대조해 봤더라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댔을텐데,,,
"최일욱이 분명하지?“
”네, 분명합니다.“
오형사는 실내를 서성거리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성 매직을 집어 들고
백지 위에 ’최일욱‘이라는 글을 크게 썼다.
”놀라운 솜씨다!
이렇게 교묘하게 이름을 고치다니...“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자기의 주민등록증을 그대로 이행(고쳐서)해서
변조한 것이다.
’崔‘ 와 ’九‘ 자 사이에 ’一‘ 자를 집어 넣고
’九‘자 오른쪽에 ’日‘ 자를 붙여서
’旭‘ 자를 만들어 ’崔一旭‘으로 둔갑한다....
얼마나 멋들어진 변신인가?
서울시경 산하 전 경찰에게
’최일욱‘을 찾으라고 긴급명령이 하달 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지나서였다.
요소요소에 불심검문이 실시되고
서울 시내 전 숙박업소는 이 잡듯이 뒤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