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낙산사 보다
집을 잃은 주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10년에 걸쳐 불사 진행
사찰 원형 고증하며 불사 전념
꿈과 희망의 테마 길 조성
어린이집, 청소년 공부방
파라미타청협 활성화…
양로원까지 복지시설 건립
24일 불사 회향법회
“20만 동참자 위해 기도
불사로 생긴 과오를 참회하며
수행자의 삶으로 돌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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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회주 정념스님을 지난 14일 서울 흥천사에서 만났다. 경내에 무분별하게 들어선 가옥과 주변 상권으로 인해 어지러웠던 사찰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주민들에게 다가서는 활동으로 불과 2년만에 흥천사의 이미지를 변모시킨 스님이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
2005년 4월 4일 강원도 양양 일대에 큰 산불이 발생했다. 밤샘 작업 끝에 다음날 오전 산불이 진화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불은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라 숯덩이 속에 남아 있었다. 강풍을 타고 다시 발화된 산불은 천년고찰 낙산사를 덮쳤다. 국민들은 추억이 서린 낙산사가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화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낙산사가 10년 불사 끝에 원형을 복원하고, 오는 11월24일 오전 11시 회향법회를 갖는다.
회향법회를 앞두고 지난 14일 회주 정념스님을 서울 흥천사에서 만났다. 낙산사 주지로 부임한지 보름만에 산불 사태를 맞았던 스님은 지난 10년간 복원불사에 매진했다. 회향법회를 마치고 낙산사를 떠나는 스님은 “힘들고 어려웠던 과정은 이제 다 극복했다.
앞으로 낙산사를 안정적으로 이끌 스님께서 오셔서 국민의 가슴에 남는 사찰로 만들어주길 바란다”며 “시간이 주어지는대로 그동안 도와준 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겠다. 또 불사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생긴 과오를 참회하며 수행자의 모습대로 살겠다”고 말했다.
“총무원에서 일을 마치고 낙산사로 내려가는데 대관령을 넘는데 강풍이 부는 것을보니 예감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소방서에 잔불이 남았을지 모르니 더 점검하자고 했죠. 오전에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어 기도객과 관광객을 모두 사찰에서 대피시켰어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화마가 몰아닥쳤어요. 혹시 남은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바로 원통보전으로 뛰어갔어요. 건물은 소실되더라도 부처님은 생사를 걸고 모셔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건칠부처님을 모시고 법당을 나왔는데, 사방이 불속이라 어디로 피신할지도 모를 정도였어요. 그때 심하게 놀란 이후 생긴 속병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요.”
정념스님을 만나 10년 전 화재상황을 떠올리며 차담을 이어갔다. 사찰이 전소된 후 스님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들은 마을 주민이었다. 당시 낙산사 인근에 살던 160가구가 화재로 집을 잃었다. “사찰은 1300년간 이어졌으니, 시간의 차이일 뿐 언젠가는 복원될 것이지만, 주민들은 당장 한끼가 급하잖아요. 관공서를 찾아 사찰보다 주민을 먼저 돕자고 설득했어요. 사찰에서도 일일이 주민들을 찾아가 라면 몇 박스 살 돈을 전했어요.”
스님은 그때 국민들의 마음을 잊을수 없다고 했다. 낙산사 복원에 힘을 보태겠다고 어린 꼬마에서부터 80의 노보살까지 종교를 뛰어넘어 사찰에 찾아왔단다. 이런 가운데 사찰에서 어려운 결정을 했다. 사찰의 주 수입원이었던 문화재관람료를 면제하기로 한 것.
“무산오현스님께서 먼저 국민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말씀을 하세요. 주민과 함께 할 수 있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도량이지, 문화재만 있다고 사찰의 역할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정념스님은 더 나아가 무료 자판기 설치, 국수 공양을 시작했다. 폐허같은 절이지만, 그래도 그곳을 찾아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었단다. 화재 몇 일 뒤, 낙산사 복원을 정부에서 책임진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는 문화재 관련 건물만 복원하겠다는 내용이었지만 언론에서 마치 모든 전각을 다 정부가 복원하는 듯 보도하자 보시금이 끊겼다. 채 건물 잔해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온 보도로 난감한 상황에 처해졌다.
불사금을 고민하던 어느날, 서울에 사는 한 노보살이 종무소로 전화를 걸어 대중교통으로 오는 길을 물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양양에 와서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 길을 설명하면서 ‘저렇게 마음을 내시는 분들도 정작 교통이 불편해 오시기 어렵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전세버스를 계약해 전국 주요도시에서 낙산사로 오는 버스를 마련했다. “버스비를 내는 대신 복원불사에 동참해 달라”는 스님의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흔쾌히 동참했다. 그렇게 20만여 명이 복원기도에 동참했다. “그 분들이 모두 불사해 주신거예요.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남은 동안 그분들을 위해 시간 나는대로 기도를 올리려고 합니다.”
낙산사 대부분 전각은 한국전쟁 이후 세워졌다. 재정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 둘 지은 건물이라 조선시대까지 유지했던 원형을 잃었다. 스님은 복원에 앞서 문화재 발굴조사를 통해 원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고 하나하나 불사를 시작했다. 낙산사에서 홍련암 가는 길도 고증을 통해 새로 조성했다.
낙산사에는 세가지 테마 길이 있다. 사찰 입구 소나무 숲에서 원통보전에 이르는 ‘꿈이 시작되는 길’이 첫 번째다.
희망의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 참배를 마치고 나면 ‘꿈이 이뤄지는 길’로 접어든다. 이 길을 따라 해수관음전에 가면 넓게 펼쳐진 동해와 맞닿는다.
이어지는 길은 ‘설레임의 길’. 보타전에서 의상대로 가는 길인데 의상대는 아름다운 일출로 유명한 관광명소다. 의상대를 지나 홍련암에서 다시 발원과 서원을 세우게 된다.
스님은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분이 좋다’, ‘또 오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싶었다. 그래서 낙산사를 문화와 바다, 불교가 함께 만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데 역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지난 10년이 세월동안 정념스님이 복원한 것은 낙산사만이 아니다. 양양 주민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켰다.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과 도서관, 사회복지관, 양로원을 차례로 건립한 것. 소위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모든 복지시설을 양양시내에 갖췄다. 또 청소년문화활동을 위해 꾸준하게 파라미타청소년협회 활동을 독려한 끝에 양양지부에만 교사 200여 명, 청소년 7000여 명의 회원이 현재 활동중에 있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마을 주민들은 스님이 지나가면 종교를 떠나 모두 합장인사를 한다. 고마운 일이다”고 전했다.
“낙산사 복원불사가 정말 힘들었어요. 화재 때 생긴 속병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이제 힘들고 어려운 과정은 극복됐으니 다른 스님이 오셔서 낙산사를 잘 이끌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수행자가 걸망 하나 메고 떠나면 끝이지, 무슨 더 미련 있나요.”
정념스님은 지난 10년간의 복원과정을 일일이 정리해 한권의 책으로 담았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는 제목의 이 책은 ‘길에서 꿈을 찾은 3000일의 복원불사’라는 부제에서 설명하듯, 2005년 4월5일 화재에서 최근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다. 스님은 이 책을 3만권 제작해 불사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보냈단다.
낙산사를 떠나 정념스님은 서울 흥천사에 머물 예정이다. 흥천사에도 많은 일거리가 산적해 있다. 백억원대에 달하는 부채와 사찰 토지 내 세워진 민가와의 문제 등등. 지난 2년간 많은 부분을 해소했지만, 아직도 해결할 점이 적지 않단다.
“흥천사 가람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어요. 불교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종교 아닙니까. 모두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같이 가야지요.”
사찰을 나서는데 스님이 생수 한병을 건넨다. 등산객들 누구나 가져가 마시도록 종무소 입구에 물을 비치한 것. 절 길을 따라 10여 명의 어린이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과 문화가 어우러진 사찰’을 꿈꾸는 정념스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정념스님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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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성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87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후 통도사 영축총림선원을 비롯해 백담사 무금선원, 신흥사 향천선원 등지서 안거 수행을 했다. 낙산사 주지를 비롯해 보광사, 제20교구본사 선암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과 사회부장, 호법부장을 두루 역임했다. 현 종책특보단장.